만물의 흐름에 드는 자 있으리니 — 남한강 폐사지에서

산등성이에 가파르게 선 나무들이 잔설을 떠나보내고 갯버들 순이 땅바닥의 찬물을 먹고 움트는 때, 남한강의 시원을 향하여 간다. 이즈음의 나무들은 허름한 빛깔이지만 강물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퍼런 경계선을 그으며 흐르고 있다. 이 흐름은 심중을 긋고 흐르는 차가운 물결과도 같아 강물을 따라 굴러가는 차안에도 청신한 기운이 감돈다. 그러다가 또 허름한 산과 마을, 그 누추하고 아늑한 동네. 산하가 깨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산하를 보는 내 눈이 깨어나는 것인가. 원주 거돈사지를 향해 가는 길은 잠들었던 눈들을 깨워 누추한 인간의 산야에 마음을 주라 한다.

인간의 산야! 나의 것도 아니고 너의 것도 아닌, 너와 내가 잘 모르는 추상화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산야, 어느새 그렇게 되어버렸다. 자작고개에 다다르면 이 몹쓸 병이 치유되려나. 언제나 산하는 말이 없고 병든 나는 언제나 질문을 던진다.

흡사 폐사지처럼 느껴지는 마을을 관통하여 거돈사지에 다다르니 저 멀리 저 높이 천 년 묵은 느티나무가 거대한 석축 위에서 작은 사람들의 방문을 굽어보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다 개울 건너 산과 마을을 우두둑 훑어본다. 그리고 검은 느티나무를 다시 쳐다본다. 마을과 산천에서 들어오는 시선들을 모두 틀어잡는 느티나무는 절집과 산천의 경계를 천 년간 무너뜨리며 서 있다. 저 나무에는 산하의 표정이 서렸을 것인가, 절집의 내력이 서렸을 것인가.

거돈사지 삼층석탑
거돈사지 삼층석탑. 폐사지에 선 마음은 허전하고 인간의 생사가 슬프다.

이곳은 자작고개 아래의 거돈사지. 삼층석탑과 배례석, 부도비, 불대좌, 장대석, 주초석, 맷돌, 석축이 넓은 산기슭에 설피게 자리잡은 곳. 간단히 보면 이곳은 돌덩이들과 비문의 글자들만이 남은 곳, 이름하여 폐사지. 난 것은 죽기 마련이니 생겨난 절집도 언젠가는 사라지기 마련인지라 마음 아파할 것 없으려나. 아마도 사람의 나고 죽음을 아파하지 않을 수 있다면 폐사의 아픔도 없으리라. 하지만 폐사지에 선 내 마음은 쓸쓸하고, 사람의 죽음도 슬프고, 사랑하는 대상을 잃음도 아프다. 그래서 글을 읽거나 써 보고, 예술작품을 감상하거나 창작하고, 밥을 먹어보긴 하지만, 생사와 존폐의 일대사에 비하면 그것들이 무엇이랴.

원공국사부도비 비문
원공국사부도비 비문. 이 비문은 원공국사의 가르침을 받은 여러 제자들이 함께 새긴 것이다.

거돈사지 동편에 있는 원공국사부도비는 특이하게도 원공국사의 가르침을 받은 여러 스님들이 각刻에 참여했다고 한다. 세속의 인연을 끊고 출가하여 맺은 인연이라고는 스승과 도반이 전부였을 터인데, 부모형제보다 더 귀하게 받들었을 스승의 죽음 이후 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제자들은 스승의 음덕을 기리는 글자들을 돌에 새기며 심장에 어떤 감각을 느꼈을까. 그러나 스승의 인생을 축약하는 몇 글자를 새기기 위하여 돌을 쪼았던 그 마음들과 그 감각들은 잊혀진 채 드러나지 않고, 이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만 비문이 서 있다. 비문을 독해하고 그 예술성을 논한다한들, 비문을 새겼던 제자들의 마음과 감각을 아지 못한다면 그 무슨 소용 있으리오.

그 제자들마저 사라진 현대에는, 생사의 일대사를 해결하려는 수행자들이 육체적 투영을 통해 달성했던 영역들마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단청, 석물, 건축, 조각, 그림 등등, 수행자나 수행자에 근접한 이들이 달성했던 영역들을 이제 수행을 모르는 주체, 자본이 대체하고 있다. 이 시대는 얼마나 불행하고 이 시대의 석물들은 얼마나 흉물인가. 이 시대의 예술은 인간의 심층, 불교의 용어로 말하자면 법法과 얼마나 먼 거리에 있을 것인가. 폐사지는 절집의 존폐를 확인하는 자리라기보다는 혹 인간 마음의 존폐을 확인하는 자리는 아닐까. 갯버들이 움트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봄이 넘어오는 자작고개 너머 우묵한 산모퉁이를 바라보는 이 때, 앞산의 비쩍 마른 나무들이 춘면을 느짖 깨듯 아지랑이처럼 부르르 떨고 있다. 느즉이 깨어나는 산야, 산야의 폐사지를 서성이는 사람들, 그리하여 깨어나는 폐사지. 더러는 갯버들나무 뒤로 숨어들고 더러는 보이지 않는 대웅전 뜨락을 거닐고 더러는 시든 잔디빛 풀밭을 뒹굴고 더러는 동편 언덕에 올라 폐사지 전역을 눈에 담는다. 저 멀리 삼층석탑과 느티나무가 마음속에 꼬옥 감춰둔 비밀처럼 풍경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비밀 속에서 수행자들이 찬 겨울의 가부좌를 풀고 해제 일미를 맞보고 있다. 바위 위에서, 나무 아래에서, 풀밭에서, 개울가에서, 앞산의 숨은 오솔길에서.

 

자작고개 너머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가면 법천사지에 닿을 것이지만, 현대인은 그 길, 그 시간, 그 풍경, 그 비밀을 잊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마을로 다시 내려와 강가의 길을 타고 에돌아 부론면 법천리 골짜기로 들어간다. 느티나무 서 있는 마을 어귀에서 차를 멈추고 당간지주가 있는 마을 한복판으로 걸어서 간다. 왼편에는 들녘이요 오른편에는 마을인 길. 법천사가 폐사되기 전에는 이 들녘, 이 마을 대부분이 사역에 포함되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이 들녘, 이 마을 안에 절집의 유물들이 듬성듬성 숨어 있다. 법천사가 폐사되고 나서 이 절집 터에 처음 자리잡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절집의 석물들을 집안에 끌어다 쓰며 무슨 마음을 가졌을까. 폐사지 한 귀퉁이에 집을 마련하고 조그만 마당을 처음 쓸 때, 그들은 어떤 마음가짐이었까. 나는 그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마당을 쓸었기를 삼가 빈다. 비록 무너졌을지언정 절집의 풍경을 사랑했기를 빈다. 금당이 불타고 탑이 무너지고 전각들이 전소되었을지언정 끝내 집안의 충실한 머슴처럼 서 있는 당간지주를 마음속에서 받들었기를 빈다. 나같은 미천한 자의 소망이 아니어도 그들은 그렇게 조심스러웠을 것이고, 그래서 당간지주가 지금까지 마을 한복판에 살아남았을 것이다. 마을 어귀 길모퉁이에서 지팡이를 의지해 걷던 마을 할머니, 부디 그분에게, 부디 이 법천리 마을에 청안함 있으라.

법천사, 법이 샘물처럼 솟아나던 곳. 어린 시절, 맑은 모래 밑에서 아롱아롱 물결을 밀어내며 솟아나던 샘물! 냇가의 물에 비해 겨울에는 따스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 샘물로 아침마다 낯바닥을 씻던 어린 시절! 그 시절은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샘물은 다 어디로 숨어버렸을까. 이제 우리들은 법천이라는 그 빼어난 비유를 감각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비유들이 사라지고, 상징들이 사라지고, 옛 신화가 사라지는 시대에, 역으로 현대인들은 그 상실된 분량만큼 현대의 흥분, 현대의 유희, 현대의 영웅을 만드느라 부산하다. 그러나 법천사, 법이 샘물처럼 솟아나던 곳.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이 얼마나 갓맑고 깨끗하고 시원하다고 느꼈으면 사명寺名을 법천사로 하였을까. 수행자들의 깨달음을 감각적으로, 유비적으로 이해하고 싶거든 모름지기 산중에 계곡에 솟아나는 샘물로 손과 얼굴을 씻어볼 일이다. 그리고 그 감각을 곱게 곱게 간직하시라.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가르침을 듣고서 어느 순간 샘 솟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이라면, 현대의 자극과 흥분과 유희와 가상을 따라가지 않고 청정함에 이를 수 있지 않을런지. 법도 청정하고 샘도 청정하고 청정함을 느낄 수 있는 자도 청정하더라.

 

법천사지 화불
법천사지 솔숲의 광배 화불

당간지주가 서 있는 곳에서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제59호)가 있는 마을 둔덕의 솔숲을 향해 가는 법천리 마을길은 샘물이 흘러넘쳐 들녘으로 잦아드는 물길과도 같아, 혹은 마을 할머니가 한걸음 한걸음 내딛던 발길과도 같아. 솔숲의 부도각 주변에는 지금까지 살아 남은 석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를 기대고 있다. 그중에는 석불 뒤를 장식하는 광배가 남아 있어, 신광과 두광의 빛 속에 화르르 현신하는 화불들을 친견할 수 있다. 지나칠 만큼 정묘한 지광국사현묘탑비보다 이 자그마한 화불들이 내 마음속에 훨씬 깊숙히 들어온다. 얼굴 표정이 포착되지 않을 정도로 간략한 조형이지만, 둥글 둥글 휘도는 간결한 선과 토실한 양감으로 위없는 수행자의 일면모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반개한 눈과 수인과 가부좌, 이 화불들 혹은 수행자들은 고뇌가 없고 가볍고 원만하다. 이 솔숲으로 숨어든 수행자들이여, 이 솔숲을 찾는 나그네들이여, 부디 원만하시라. 생사를 초탈한 당신들의 깨달음, 인간 머릿속의 원인과 인간 머릿속의 결과를 넘어선 당신들의 가르침, 부디 이 세상에 가득하고 가득하시라.

지광국사는 임종을 눈 앞에 두고 바깥 날씨가 어떠냐고 제자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제자들이 “이슬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편안히 오른쪽으로 누워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이슬비 내리는 저녁나절에 죽음을 맞은 것은 새삼스럽지 않아도, 제자들이 사제간의 이슬비 문답을 행장에 기록한 것은 놀랍다. 이 행장이 있어 우리는 지광국사가 열반한 1067년 시월 어느 날 법천리 산야와 절집과 마을을 적시며 내렸던 차가운 이슬비를 눈 앞에 되살릴 수 있다. 그날의 이슬비는 산모퉁이 넘어가는 거돈사의 자작고개에도, 거돈사의 검은 느티나무에도, 법천리의 숲과 숲속 오솔길에도, 오늘의 마을 한복판에 서 있는 당간지주에도, 치악산의 자작나무와 은사시나무와 낙엽송에도, 치악산 어드메에서 흘러나와 흐르는 강물에도, 부슬부슬 내렸다. 그 천년 전의 부슬비는 지광국사의 마음에도 내렸을 것이고 그 제자들의 마음에도 내렸을 것이고, 지금 내 마음에도 내리고 있다. 이제 내 마음 속에서 이곳 법천리 마을과 너른 들녘에도, 마을 어귀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에도, 곧 방문할 흥법사지 삼층석탑에도, 고달사지 부도에도, 아무도 모르게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법천리 마을을 빠져나오니 천년 전의 부슬비로 몸을 적셨던 남한강이 다시 흐른다. 자작고개를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자리잡았던 거돈사와 법천사가 폐사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한강은 여여히 흐르고 있다. 흐르시라, 생사의 문제에 난마처럼 얽혀든 사람들은 놔두고 그냥 그대로 차갑게 흐르시라. 언젠가 어디선가 생사를 넘어 만물의 흐름에 드는 자 있으리니. 부슬비 되어 그 흐름을 적시는 자 있으리니.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