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와 까마귀
강요배의 1996년 작 <팽나무와 까마귀>에는 낮게 깔린 암갈색 황무지 위로 시린 바람을 견뎌낸 암청색 팽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곁에 까마귀 한 마리가 바람과의 희학질을 마치고 쉬고 있다. 그리고 낮게 내려온 잿빛 하늘 아래로는 한라산이 눈보라처럼 형상을 드러내고 있다. 바람, 팽나무, 까마귀, 한라산, 이들은 강요배가 제주의 자연 언저리를 십여 년간 배회하면서 마주친 운명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팽나무와 까마귀가 그 배회의 전반기에 자리잡고 있다면, 한라산은 후반기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팽나무와 까마귀>는 그 배회의 전후를 가르는 한 폭의 증언으로서, 매우 드물게도, 바람이 잠시 자고 있다.
그러나 이 화폭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바람의 거센 흔적을 담고 있다. 팽나무는 바람을 견디며 바람의 수형이 되어버렸고, 황무지는 웃자란 초목 하나 없이 뭇 생명들을 비칠비칠 누였다. 잿빛 창공과 구름장은 눈보라를 휘날리는 듯 아니 휘날리는 듯, 아니면 한편은 휘날리고 한편은 아니 휘날리는 듯. 그러는 가운데 백산의 한라산은 뭉툭한 산정의 선형을 묵묵히 흘리고 있고 까마귀는 날개를 접어 몸의 온기를 보호하고 있다.
팽나무와 까마귀. 97.0×162.2cm, 캔버스· 아크릴릭, 1996
그의 그림에는 바람이 불고 있거나 불었다. 도시민의 일상이나 지적인 권태를 깨뜨려주는 신선한 바람이 아니다. 현무암의 날카로운 형상처럼 뭔가를 긁어버리고 후려치는 바람이다. 후려치는 바람은 때로는 백파로 때로는 팽나무의 쏠린 가지로 조형된다. 때로는 바다를 건너온 마파람이 현무암의 밭담을 넘어 콩과 보리와 수숫잎을 후비고 파득인다. 쑥대와 억새, 오름의 낮자란 산꽃들도 팽나무 가지처럼 바람에 우우 쓸린다. 맵싼 바람, 백파, 갯것 바다, 검은 현무암, 쓸리는 풀과 꽃들, 꽃향유, 물매화, 억새, 잿빛 창공, 잿빛 노을, 구름장, 폭풍, 검은 밭담, 암녹색의 수풀과 곡초, 고목들, 새까만 팽나무, 한라산, 제주의 자연. “온갖 사물에 붙은 바람소리, 끊임없이 귓전을 스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귓바람소리”가 만들어낸 제주의 풍광, 제주의 강요배.
30대 시절 내내 출판미술방식에 역점을 두었던 그는, 창작활동 10여년 만에 비로소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90년에 그린 <골리앗 크레인에서 내려오다>, <동심>, <흙가슴>. 전시주체의 기획주문으로 그려진 이 기회성의 작품들에서, 그는 “며칠 간의 공부와 고민만으로 거대한 노동투쟁을 그려낼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 “주제에 대한 깊고 폭넓은 천착 그리고 체험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그는 이 작품들을 그리면서 이후 4·3 역사화 연작에서 실현시킬 원리를 하나 깨닫는다: “미술활동은 결국 천작하는 주제에 대한 철저한 종사를 중심축으로 두어야 하리라는 것.”
그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약 삼년 동안 4·3 역사화 연작에 매달린다. 그는 스무 살에 고향 제주를 떠나 20년을 표류하면서 “[제주]땅의 시련보다 더욱 가혹한 것이 역사의 시련이었음”을 알았다. 그 표류의 막바지에 이르러, 역사 속 제주에 불어닥쳤던 가혹한 바람과, 그 바람을 갈라치며 저항한 4·3에 철저히 종사하기 시작했다. 이 철저한 종사는 “내 가슴속 응어리”, “울분과 공포가 뒤섞인 알 수 없는 응어리”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과정이었으며,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드리운 검은 장막을 파헤치는 작업이었다. 그 가혹한 바람 한가운데로 치고 들어가 호흡한 삼년 간의 세월, 그 혹독한 체험을 두고 그는 괴로움을 토로하는 대신 오히려 “역사의 맑은 바람”을 쐬는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의 맑은 바람? 그는 왜 그런 이율배반적인 표현을 썼을까?
«동백꽃 지다»
<시원始原>, 이것은 4·3 역사화 연작, «동백꽃 지다»를 여는 첫 그림이다. 수백 년은 묵어 뵈는 팽나무 아래에 할머니와 어린아이가 앉아 있다. 제주민중항쟁사의 서두에 자리잡은 삼별초 항쟁, 왜구 퇴치, 이재수난, 잠녀 반일 항쟁 등 4·3 이전 역사의 제주보다, <시원>의 할머니와 팽나무와 소년이 앞서 있는 것이다. 그 독한 바람들을 갈라치다 쓰러진 사람들을 목격해서인지 수형이 마디마디 옹이지고 패이고 꺾인 팽나무, 세월이며 내력이 응축된 주름·머리칼·손가락의 할머니, 그리고 갈옷 입은 소년의 다부지고 컴컴한 얼굴. 이것은 화가의 가슴속 응어리가 맺히기 시작한 시초의 형상화처럼 보인다. 살아갈수록 이 형상은 마음속에서 더욱 커져 “안팎으로 상처나고 옹이지고 거칠어”진 응어리로 자리잡을 것이지만, 이를 역순으로 바라보면, 이 응어리로 인하여 그는 4·3에 종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원>은 4·3 역사화의 시원에 값할 만하고, 그러므로 4·3 역사화를 내면화하겠다는 화가의 의지에 비길 만하다. 자신의 생애 속의 팽나무와 할머니, 혹은 “시련을 딛고 시련과 일체가 되면서 살아온” 팽나무와 늙은 어머니, 이 두 존재가 결국 컴컴한 소년 강요배를 낳았고 4·3 역사화 연작을 낳은 셈이다.
시원(始原). 38.7×53.2cm, 종이·펜·붓·먹, 1989
부안의 백산과 황토현, 광주의 금남리와 망월동 등지를 순례하는 것은 감성이 섬세한 인간으로서는 몹시 힘겨운 일이다. 4·3이라는 맥락에서 제주의 오름과 중산간 마을, 해안을 순례하는 것 역시 괴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강요배는 그림의 주제에 철저히 종사하기 위하여 제주의 산천을 순례한다. 공개된 그의 <4·3 순례기>에 의하면, 그는 4·3 현장의 순례길에 우선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들, “한라산 자락에 펼쳐져 있는 오름들과 평원”, “한라산으로부터 오름과 마을 갯것 바다까지를 잇는 흐름, 돌담, 고목”, “파도 부서지는 가파도로부터 모슬봉과 산방산으로 매듭을 만들고 한라산으로 오르는 세勢”를 눈여겨 보았으며, 어쩐지 곱고 애잔한 느낌을 주는 오름들의 선을 보았다. 그리고 그 완만하고 부드러운 상승과 하강의 선형에서 오목하게 패이고 터진 지점들, 40년전의 대참사 지역들, 골목골목, 돌담, 성벽, 다랑쉬 오름, 해안가, 그리고 그 참사에서 살아남은 팽나무와 증인들, 흔적에서 피어난 수수대와 산수국을 만났다. 공개된 자료상으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아마 그는 수많은 것들을 목격하고 대면하고 듣고 수없이 자료조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응어리, 제주의 역사를 향하여 한발짝 한발짝 다가갔다.
그의 4·3 연작화의 도록 «동백꽃 지다»에 실린 그림 중 서사구조에 편입된 작품들 쉰 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연필, 펜, 묵, 목탄 등으로 종이에 그린 흑백 소묘이고, 다른 하나는 캔버스에 그린 아크릴릭, 유채다. 그는 예술가이자 전략가로서 ‘나/세계’ 혹은 ‘나/제주’라는 이항의 만남이 아니라, ‘나/제주/감상자’라는 삼항의 만남을 겨냥한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나/제주/감상자’의 만남의 형식이 화랑 전시가 아니라 출판도록이기를 의도한다. 그래서 애초부터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전시의 요청이 있게 됨에 따라, 연작화 제작 도중에 전시에 걸맞게 캔버스로 바꾸고 크기를 키우고 색을 입힌다. 그는 주변의 요청에 따라 그림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것은 작가가 4·3 역사화를 통하여 자신의 응어리를 파헤치면서도 4·3을 신원하는 목소리를 따라 움직였다는 말이다. 그는 예술가의 감각이나 감정, 혹은 이성보다 4·3을 신원하는 움직임에 우선권을 주었다. 그러므로 «동백꽃 지다»는 이러한 예술가의 의도를 충분히 고려하고 보아야 한다.
하산민. 54.4×79.3cm, 종이·펜·먹, 1989 | 산속 피난민들이 ‘투항’의 깃발을 들다
가뭄. 34.4×51.2cm, 종이·콘테, 1991 | 인축(人畜)이 모두 목말랐던 세월. 연 2년 가뭄이 제주를 강타하다
피살. 56.0×76.0cm, 종이·콘테, 1991
4·3 역사화 연작을 그리는 약 삼년 간 강요배는 필선의 변모를 겪는다. 1989년 처음 그리기 시작한 그림들은 필선이 가늘고 짧고 정제되어 있다. <시원>을 비롯하여 <제주섬>, <삼별초 항쟁> 등 제주민중항쟁사의 서두에 자리잡은 그림들과 서사구조상 뒤에 자리잡은 <유격대원>, <하산민>이 그렇다. 그는 역사적 실체에 직접적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사전 정지작업을 하듯, 마치 수만 페이지의 자료를 앞에 쌓아두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읽어나가듯 꼼꼼하게 선을 그었다. 이 정제되고 치밀한 자세는 결코 허술하게 접근하지는 않겠다는 치열한 의지로 읽힐 만하다. 때마침 그는 4·3 유적지 순례에 동참하고 관련자료들을 꼼꼼히 섭렵해 나가던 시기였을 것이다.
이 치열한 자세를 벗어나기 시작한 이정표는 <가뭄>, <자식을 묻는 아버지>이다. 이 두 작품은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우선 시기적으로는 1991년에 제작되었으며, 매재는 콘테이고, 주제는 좀더 일상에 가까운 것이다. 시기는 다르지만 1989년에 그린 <기아> 역시 이 맥락에 속한다. 이 작품들 이후로는 4·3 발발의 서사적 단계로 진입하게 되므로, 작가로서는 강렬히 반응할 수밖에 없는 주제이기도 하였다. 먼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역사에서 내면으로, 탐구자의 시선에서 격렬한 반응으로 옮겨지는 과정에 위치한 이 작품들의 필선은 조심스럽지 않다. 이전의 꿋꿋한 필선과 비교하자면 이 필선은 흡사 맥이 풀린 듯 헛헛하고 괴로움이 풀풀 묻어난다. 그리고 음영이 짙다. 비틀거리는 작가의 심정이 엿보인다.
이제 강요배는 더 이상 세필을 사용하지 못한다. 탄압과 항쟁의 국면에 접어들면서 콘테와 목탄으로 밀고나간다. 괴로움을 더욱 밀고나가던 그는 <피살>에 이르러 이제까지의 필선을 다시 거둔다. 총탄을 맞아 쓰러져서도 아기를 안고 숨을 거두는 한 어머니의 생을 그리며 그는 멈칫한다. 이 작품은 거의 유일하게 필선의 흐름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작가의 숨이 멎어버린 듯하다. 주변을 대부분 여백으로 만들고 어머니의 희미한 몸뚱어리만 길게 누운 화면은 눈물 어린 눈에 비친 장면과도 같다. 이 작품 이후에 비로소 화면 전체를 흐르는 선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총파업의 관덕정 광장>, <서청 입도>, <넘치는 유치장>, <고문>, <겁간> 등에서 작가는 화면을 장악하는 선의 흐름들을 보여준다. <총파업의 관덕정 광장>의 검은 구름장은 내면을 스멀스멀 장악하는 움직임 같으며, <넘치는 유치장>, <고문>의 선들은 눈물의 흘러내림처럼 주르륵 흐른다. <겁간>은 어쩔 줄 모르고 파행하는 선들의 흐름을 보여준다. 자료상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나는 이 작품들이 <피살> 직후에 그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그림들은 한 명의 진정한 예술가가 뭔가에 강렬히 반응하고 난 뒤의 내면적 흐름들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간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흐름의 <겁간>은 제주의 바람을 담고 있다. 가장 극악하고 가장 비극적인 장면에서 작가의 이후 일생을 지배할 제주의 바람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그림은 예술가의 내면에 대하여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기도 하다.
총파업의 관덕정 광장. 43.5×77.8cm, 종이·목탄, 1991 | 야만적 발포에 항의하여 제주도민들은—심지어 일부 경찰들까지—전도에 걸쳐 즉각 총파업에 들어가다
겁간. 55.3×76.0cm, 종이·목탄, 1991
1991년에 강요배는 작품을 원없이 쏟아낸다. 4·3 역사화 연작의 무려 절반을 넘는 스물 여섯 작품이다. 역사적 절정에 위치한 <횃불 시위>, <죽창을 깎다>, <봉화>, <공격> 역시 1991년에 그려졌다. 이 그림들은 종이에 그린 목탄화이지만 좀 뒤에 언급할 유채와 아크릴릭의 <천명>, <붉은 바다>, <광풍>, <이승과 저승 사이> 등, 걸작들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이 모든 그림들, 그러니까 <가뭄>, <자식을 묻는 아버지> 등에서 <광풍>, <이승과 저승 사이> 등까지의 스물여섯 작품이 1991년 한해에 쏟아졌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그토록 짧은 기간에 그토록 거대한 악의 신비를 질풍과 노도처럼 관통할 수 있는 예술가는 결코 흔하지 않다. 게다가 그는 그림을 그리는 도구, 필선, 화폭, 화면의 흐름, 색상 등, 그림의 거의 모든 요소를 국면마다 지속적으로 변모시키면서 4·3의 시작과 끝을 관통했다.
이 관통의 경로에서 그래도 변하지 않았던 원칙이 있다면, 자신의 감각이나 의도보다 공적인 목소리에 우선권을 두면서도, 공적인 이념이나 관념을 가지고 인물의 형상을 포착하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실패를 경험했던 터이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체험”을 통하여 인물을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생존을 위해 저항하고, 생존을 위해 피신하고, 생존을 위해 투항했던 민중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편을 택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4·3의 자취를 더듬으면서 보았던 바다에서부터 해안가, 중산간, 오름, 한라에까지 이르는 유선형의 선형들을 그만 잊어버린 듯하다.
«동백꽃 지다»에는 대부분 자연의 배경이 드물고 거의 인물들만 등장한다. 그 인물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음영이 짙고 뼈가 굵고 광대뼈가 불거졌다. 작가는 다면적인 얼굴을 포착하지 못한 것을 두고 자신의 한계라고 언급했지만, 그것은 한계라기보다는 필연적이다. 냉혹한 사실들을 전해주는 4·3의 역사적 기록을 한줄 한줄 읽어내려가는 것은 곧 자신의 혈육들이 한명 한명 죽어나가는 광경을 목도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 고통 한가운데에 머물렀거나 머무르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삼촌, 이웃, 증인들, 그리고 제주 도민 전체, 그들의 얼굴은 결코 다양화될 수 없다. 그 고통에 투신한 강요배의 깊이에 비례하여 그의 인물들은 다채롭게 피어나지 못하고 일면적인 얼굴로 응결된다. 이 일면적인 얼굴들은 4·3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며 작가의 응어리의 구체이다. 아니, 그 얼굴들은 작가가 주제에 천착하는 동안 제주의 맵찬 바람처럼 작가에게 우우우 달려든 원귀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또 그런 체험을 원했을 것이다. 4·3을 신원하는 길, 팽나무를 세우는 길, 자신의 응어리를 파헤치는 길을 선택한 결과로 대상을 자유로이 다룰 수 없었고, 오히려 원귀들의 거울이 되어버린 예술가 강요배—1991년이라는 한해와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굵은 음형의 얼굴들은 바로 이점을 증거하는 것이리라.
<봉화>와 <공격>, 그리고 그 직후
봉화. 50.0×130.6cm, 종이·목탄, 1991 |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가운데 세로선은 도록이 접히는 지점이다. 두 페이지에 걸쳐 인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봉화>, 오름마다 타오르는 불, 불. 그것은 저항과 참혹한 죽음들의 시작이었다. 이 작품에 이르러 비로소 오름과 한라산의 등성이가 보인다. 깜깜한 새벽, 중산간 마을과 한라산 사이에 위치한 오름에서 오름으로, 저편 오름들에서 이편 오름들로, 어쩐지 애잔한 선을 타고 불이 전달되고 있다. 화면의 좌우로는 한라산의 검은 등성이가 우두둑 오르는 세勢가 확연하다. 오르는 세의 선형은 첩첩으로 물결진다. 마치 거대한 파도와도 같다. 그리하여 거세게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봉화가 빠르게 사행한다.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저편에서 이편으로, 저 파도 끝에서 이 파도 끝으로, 울분과 울분이 전달되고, 확신과 확신이 전달된다. “오름마다 일제히 봉화가 오르고 반격이 시작되다”, 그리고 다음 작품, <공격>, “탄압이면 항쟁이다.” 앞 작품들에서 폭발하지 못하고 고점에서 눌려 있던 작가의 응어리가 마침내 <봉화>, <공격>에서 터진다. 작품 <공격>의 화면 중앙은 뭔가가 폭발하여 눈부시게 빛난다. 그 빛 한가운데로 죽창을 들고 달려가는 저항자의 얼굴이 검은 형상으로 딱 포착된다. 그것은 누구의 형상일까. 그것은 누구의 눈두덩, 누구의 코, 누구의 입일까. 그것은 누구의 원귀일까.
아마도 작가는 4·3 역사화 연작을 그리면서 <봉화>와 <공격>에서 심적인 절정을 맞았을 것이다. 화폭도 이전의 그림들보다 가로로 두배 가량 커졌다. <횃불 시위>, <죽창을 깎다>에서 강요배는 응집된 화면, 손아귀로 뭔가를 틀어잡은 듯한 강한 응집력을 선보이고 있다. 이 응집력이 <봉화>, <공격>으로 이어지면서 본격적인 강요배의 그림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두 그림 이후의 그림들을 보는 것은 괴롭다. 그것을 말하기도 괴롭다. 죽임과 죽음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더 괴로운 것은, 강요배의 감각이 이후의 그림들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봉화>, <공격>보다 두세 배 큰 캔버스에 그린 채색이고, 화랑 전시를 의도한 것이다. 작가가 심적인 절정에 오른 직후에 때마침 화폭과 매재가 바뀌었다는 것은 예술감상자의 입장에서는 천행이라고 할 수 있다. 4·3 역사화 연작에서 걸작으로 꼽고 싶은 <천명>, <붉은 바다>, <광풍>, <이승과 저승 사이> 등은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다. 이 그림들의 가장 커다란 공통점은 색상이 다채롭지 못하고 거의 모노톤에 가깝다는 점이다. 특히 <천명>, <붉은 바다>, <광풍>, <이승과 저승 사이>는 흡사 카메라 렌즈에 색상 필터를 끼고 찍은 사진처럼 느껴질 정도다. 내면의 “어떤 대규모의 움직임, 큰 격정, 격동 이런 것”이 그리하여 포착된다.
붉은 바다. 97.0×250.0cm, 캔버스·아크릴릭, 1991
광풍(狂風). 145.0×227.0cm, 캔버스·유채, 1991
이승과 저승 사이, 145.0×227.0cm, 캔버스·유채, 1991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방식은 여러가지다. 조형이나 선을 변화시킬 수도 있고, 다채로운 색상을 단색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원되지 못한 희생자들의 얼굴과 그들의 자리를 추상화하는 것은 자칫 탈역사화될 수 있다. 정확히 역사의 자리를 목표점으로 삼으면서도 그 자리에서 희생당했던 인물들의 생—한 사람의 생은 그 얼마나 심연이던가—을 온전히 포착하고자 했던 강요배는 구상의 조형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고, 오직 색상의 다채로움을 무너뜨려 심상에 맺힌 단일한 색상으로 장면을 구축했다. 그래서, 모노톤에 가까운 그림들을 보노라면 심상에 맺혀 있던 그 뭔가가 현무암에 거칠게 부딪힌 백파처럼 파열되는 듯하며, 그 파열음, 까마귀떼 울음, 비명, 귓바람소리가 캔버스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색상이 추상화된 이런 그림들에서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붓칼놀림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눈 속의 연락병>, <붉은 바다>, <광풍>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듯, 바람이 구름과 갯가 갈대와 산을 질주하고 있다. 강요배는 이 그림들에서 제주의 바람, 혹독한 바람을 마침내 화폭에 잡은 것이다. 갯가와 밭담과 집담을 횡행하던 제주땅의 바람, 그 바람보다 더 가혹했던 역사의 바람. 강요배는 바로 이 후려치는 바람 앞에 섰다. 이 바람은 응어리를 할퀴는 맵싼 바람이지만, 햇볕이 햇볕 아래 드러난 상처를 말리듯 화가의 응어리를 발라내는 바람이기도 하다. 역사의 상흔이자 자신의 상흔인 그 응어리를 그렇게 바람 앞에 내놓음으로써 강요배는 비로소 재생하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응어리를 할퀴는 바람을 발견한 그는 그래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이 힘겹고 괴로운 연작과정을 두고 오히려 “역사의 맑은 바람을 쏘여 내 가슴속 응어리의 정체를 밝혀보고자 시도한 것”이라고 총평하지 않았겠는가.
<봉화>, <공격> 직후의 작품들, 즉 강요배가 예술가로서 강렬하게 조응한 작품들을 내놓으면서 1991년 한해가 마무리된다. 그런데, 1992년의 그림들은 1991년의 내적 조응과 궤를 달리한다. <한라산 자락 백성>, <망보는 소년들>, <한 유격대원의 죽음>이 특히 궤를 달리한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작품의 내용들이 모두 일상 속에서 체험할 수 없는 서사에 속한다는 점이다. 즉 작가가 내면적 구조보다는 서사적 구조에 좀더 의존하여 그린 그림들로 보아야 한다.
한라산 자락 백성. 112.0×193.7cm, 캔버스·아크릴릭, 1992 | 조국분단의 5·10 단독선거를 거부하여 제주민중은 당일 또는 며칠 전부터 무리 지어 한라산 자락으로 피신하다
눈 속의 연락병. 72.0×161.7cm, 캔버스·아크릴릭, 1992 | 민중과 유격대원의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토벌대의 위치를 연락하는 산군
<한라산 자락 백성>을 예로 들어보자. 이 작품에서는 다른 그림들과는 판이하게 하단으로는 신록의 산야가 펼쳐지고, 상단으로는 한라산의 품이 정면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어느 한순간의 평화로움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었겠지만, 이 그림은 상단과 하단이 충분히 통합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이 그림에서 한라산의 품으로 시선이 안겨들 때 잡히는 느낌을 상단에 크게 포착한 다음, 그 느낌을 하단의 산자락과 백성들에게까지 연장시키고자 한 듯하다. 하지만 4·3 역사화 연작을 그리는 동안에 작가는 형상화될 인물들의 평화로운 마음상태를 절실하게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그림은 그것을 노렸다는 점에서 작가에게 대단히 생소한 사태의 형상화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어떤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서도 한순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인간의 근원적인 면모를 간파한 작가의 혜안에는 존경을 표하고 싶지만, 4·3 역사화 연작을 그릴 당시 작가는 그러한 기쁨에 심취하기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림의 상단과 하단을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닐까. 물론 이 감상평은 도록에 기반한 것이다. 캔버스 그림을 직접 보았더라면, 한라산의 품에 압도 당하여 상하단이 강하게 통합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긴 하더라도 색채 면에서도 어쩐지 절실하지 못하고 덤덤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역시, 작가의 심경을 위반하는 사태를 형상화한 탓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평화로움의 언어를 성공적으로 포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작가가 “역사의 심연 저 깊이로 잠수해 들어”갔다고 나는 확신한다. 정직한 인간은 두 갈래 길을 동시에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92년에 나온 또 다른 작품들, 즉 <토벌대의 ‘포로’>, <부모들>, <눈 속의 연락병>, <동백꽃 지다>, <장두>는 작가가 1991년 후반기에 도달한 강렬한 예술가적 흥분상태를 가라앉힌 뒤에 그렸음을 입증해 준다. <부모들>, <장두>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화폭에 담으면서도 화면이 거칠거나 급하지 않다. <토벌대의 ‘포로’>, <눈 속의 연락병>에는 바람이 등장하면서도 파괴적이지는 않다. 다시 차분하게 사태를 직시하고자 하는 화가의 의지가 엿보인다. 그리고 이 의지와 함께 4·3 역사화 연작 작업이 마침내 마무리된다.
제주의 자연으로
강요배는 4·3 역사화 연작을 마무리한 직후 모든 것을 털고 제주로 귀향한다. 이후 십여 년간 제주도 자연 언저리를 배회한다. 4·3 역사화가 그를 바꿔버린 것이다. 애초부터 관념이나 이념으로부터 생을 해석하기보다는 생의 자리와 증언으로부터 생을 응시하고 감응하고자 했던 그는, 무슨 이념의 좌절을 겪고서 귀향한 것은 아니다. 그는 1991년이라는 폭발적인 한해를 기억에서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4·3 항쟁과 학살의 서사적 국면에 접어들면서 그가 내적으로 감응했던 강도는 그전까지 겪어본 적이 없었던 충격적 감응이었을 테고, 그리하여 예술가로서의 생명을 느꼈을 일이다. 상처를 후비고 응어리를 할퀴는 바람, 그의 표현대로라면 “맑은 바람”, 그 바람을 발견하고 그 바람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가 제주로 귀향한 이후 그린 그림들에서 1991년의 강렬한 체험을 좀더 구체화되고 일상화된 형태로 목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북쪽 먼 바다로부터 하늬바람이 불어오면 바다는 크게 뒤채이며 일렁이기 시작한다.
세찬 바람에 휘몰린 바다는 물빛 바위들에 속이 긁혀 허옇게 뒤집힌다.
가파른 갯바위는 거센 물살을 가르고 베며 앞으로 나아간다.
맵찬 칼바람에 살점 깎이운 팽나무는 검은 뼈가지로 버틴다.
바람은 구름을 휩쓸어 황무지를 후려친다.
돌팍에 얼키고 설킨 덩굴들은 가싯발로 바람의 가슴팍을 긁고 찢으며 저항한다.아직도 차가운 날, 인동초의 남은 잎사귀 녹빛이 최후로 짙어지고 나면 샛바람은
돌담밑의 수선향을 흐트리고 청보리싹을 떨게 한다. 바다밭에 갈빛 고운 톤이 돋아나고
들판에는 유채꽃이 일제히 피어난다. 송홧가루 날리는 언덕 넘어
저 멀리 푸르러진 황무지에도 실거리 노란 꽃등불이 여기 저기 걸리운다.새벽공기속 호박꽃 싱싱한 여름,
한낮엔 속으로 붉게 타는 황금빛 보리밭 들판 가득 흐드러지고,
땡볕에 무르익은 노랑참외 단내가 들길에 썩어 넘실거릴 때 먼 바다는 쪽빛이다.
지난 겨울 남국으로 휘몰려갔던 찬바람이
이제 물 실은 마파람되어 수숫잎을 파득이며 되돌아온다.
버려진 밭에 쑥대가 휘청거리고 구름장이 몰려와 흩어지며 대지는 한여름 갈증을 푼다.갈바람이 앞바다에 켜켜히 물비늘을 일으키고
들녘이 서늘해지면 콩밭이 한쪽부터 노랗게 익어가고
조이삭이 수굿거리고 밭담엔 산국이 핀다.
돌 벵듸(月平)에 달이 맑고 솔숲사이 파도가 희다.
능선이 고운 오름 잔디가 금빛으로 옷갈이하고 맑은 바람속에 작은 산꽃들이 하늘댄다.
빈밭에 마른 짚이 다 타고 날 즈음,
갈 하늬바람 맞은 저녁하늘이 서천 꽃구름을 피워올리면
저 황야에 지천으로 솟아나 어둠을 휘젓은 하얀 억새꽃 무리‥‥
고난의 땅을 온 육신으로 일구어 흙과 하나된 저 제주의 할머니, 저분이 스러지면
누가 이 대지를 어루만질 것인가?— 강요배, <바람부는 대지에서>, 1994년, «제주의 자연»에 실림
제주 귀향 이후 첫 공개된 강요배의 글은 어느 문학가의 글보다도 빼어나고 아름답다. 그는 애초부터 어줍잖은 관념적 어휘나 추상적 고통에 눌린 예술가가 아니었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도 추상적 어휘는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추상적 이념이나 관념으로 고통을 해부하는 길보다는 고통의 심연으로 직각적으로 빠져드는 길, 그의 표현대로라면, “역사의 심연 저 깊이로 잠수”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후에 획득된 면모의 일부가 바로 위에 인용된 글이고 «제주의 자연»에 실린 그림들이다. 이 작품들은 그 뭔가에 강렬히 반응했던 예술가가 제주의 자연 언저리를 수년 간 배회하면서 성취되었다. 그런 면에서 역설적이게도 1991년의 강요배는 «제주의 자연»의 강요배에게나 우리에게나 축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2편으로 계속될 예정]
“미술활동은 결국 천작하는 주제에 대한 철저한 종사를 중심축으로 두어야 하리라는 것.”–
마음 깊이 공감합니다.
요즘 그림을 보다보면 도대체 왜 그렸는지 모르는 그림이 많아서요.
또..스스로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고..-.-;
쥔장님이 미술 비평까지 손을 대시니 저는 아주 반갑고 기대가 됩니다.
미술 비평까지 손 대는 건 아니고요^^ 강요배 선생님의 그림이 좋아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있고, 그 관심의 내력을 이야기해 본 것뿐입니다. 서구의 비평이론이나 미학이론을 끌어와 그림을 해부하는 비평가들의 평을 읽다보면, 과연 그들이 그림을 알고 있기는 한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서구의 비평이론을 제대로 소화한 것도 아니고요. 깊이가 없으니 현학으로 위장하는 경우이겠지요.
그런 현학적인 요소, 근본적인 의미에서 ‘비예술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난 뒤에, 그럼 어떻게 예술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제게는 큽니다. 그 궁금증과 강요배 선생님의 그림에 대한 관심의 결과일 뿐입니다. 한 마디로, 淺學非才가 공부하는 중이지요.
강요배의 그림을 화랑에서 보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예술은 ‘체험’이라는 말 맞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간접체험까지 포함해서. 2편을 기다립니다.
이렇게 명쾌하고 서정적인 미술평.. 높은 안목을 예찬하며, 한 가지 셋째 단락의 ‘백파’ 같은 말은 ‘부서지는 파도’ 쯤으로 바꾸면 뒷말과도 어울리고, 서구 평들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강요배에 걸맞는 평이 될 듯… 우리 말이 있으면 되도록 살려주는 것이 어떨런지요…
‘팽나무와 까마귀’ 해설은 읽고 또 읽었습니다.
제가 한자어를 선호하는 편이긴 하지만 일부러 한글을 배제시키는 쪽은 또 아닙니다. 특히 ‘백파’ 같은 낱말은 저에게도 익숙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이 낱말을 굳이 사용한 것은 강요배 선생 그림들 중에서 ‘백파’, ‘황파’, ‘풍설해’ 등의 제목을 단 그림이 있어요, 그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랍니다.
아마도 강요배 선생은 ‘백파’라는 낱말이 주는 음성학적 측면, 음악적 측면을 고려해서 그것을 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 역시 낱말의 청각적 울림, 음성학적 간결성 등을 선호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강물 선생님의 고견은 언제나 저의 무의식적인 습성을 되돌아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봉화” 와 “붉은 바다”, 감동적입니다. 아픔과 불안을 넘어서 열린 마음/세계로 나가는 문입니다. 그 그림들과 마주하고 싶습니다.
토론토에서 유길영
봉화와 붉은 바다를 감동적으로 보셨군요. 저 역시 그 그림들을 원화로 보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 늘 아쉽습니다.
아름답고 정겹기만했던 제주도.
알고보니 무수한 아픔을 지닌 섬이었습니다.
4.3을 알아가는 속에 ‘강요배’님을 알게 되었고 붉은 벚꽃처럼 떨어져나간 사람들의 생명과 그 고통에 아파해야 했습니다.
또한 그 아픔을 강요배님의 그림을 통해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는 점에, 감사하게 생각하며 위로의 마음을 보냅니다.
고통이 너무 크면 침묵하게 되지요. 그런 침묵이 우리 주위엔 많이 있고, 또 그 침묵을 알아도 딱히 뭔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아픕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응어리는 신원을 통하여 그나마 조금 위로 받을 수 있을 뿐이고, 그 이상의 치유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아픕니다. 그런데도 그 신원의 과정마저 순탄치 않았던 현대사를 생각하면, 가슴만 먹먹할 뿐입니다.
강요배의 제주의 풍경은 그런 면에서 원혼들에게 보내는 위로와도 같아 보입니다.
학고재에서 강요배 소묘전이 있다길래 올라가는 기차안에서 글을 읽었습니다. 마침 동백꽃지다 도록집을 보던 참인데… 생생하게 읽었습니다.어줍잡은 관념적 어휘나 추상적 고통에 눌린 예술가가 아니라는 점. 깊이 공감합니다. 화가와 동시대를 겪어내는 우중의 입장에서 저 역시 어줍잡고 추상적인 고통에 질질거리지 않아야한다는 생각에 머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동백꽃 지다 를 직접 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허나 블로그 글로도 전시회에 다녀온듯합니다.
강요배 소묘전이 있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학고재에 가봐야겠어요.
기차를 타고 전시회를 관람하러 가시는 여정이 그림을 더욱 깊게 보도록 만들겠군요. 문득 여정 자체가 사람을 깊게 만든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