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음악, 그 은밀한 고백

“내 나이에 맞는 음악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정경화
 

십년 전 쯤엔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어느 신문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월의 두께를 몸과 마음에 쌓으면서, 자신이 다가갈 수 있는 음악, 혹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음악이 다르더라는 의미에서 말한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저는 그분의 이 아름다운 말에 대하여 조금 바꾸어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의 깊이에 어울리는 음악이 있노라고. 과연, 내가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을 때에야 그 귀에 어울리는 음악이 들리는 듯합니다. 음악은 내 깊이만큼 들린다고나 할까요.

음악을 들으려는 분들이 음반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이 종종 있습니다만, 사실 음반 소개 부탁만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 부탁을 받을 때면 먼저 겸허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마다 제 마음에는, 음악 혹은 음반이 동일한 것이라해서 어느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의 풍경에 따라 다르게 변모되어 들린다는, 음악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음미가 상기되곤 합니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모차르트 음악, 그 음표는 동일하지만 음반은 다르며, 음반은 동일하지만 감상은 다릅니다. 동일한 음표로부터 피라미드를 이루며 분산되어 마침내 우리 각자의 귀에, 마음에 닿아 우리 존재와 접촉하는 모차르트 음악은, 그래서 우리 존재에 접촉하는 순간의 흐름 속에서 아름답게 산화하며 흩어집니다. 음악이 산화하기 이전의 자리, 그리고 산화하고 난 자리에는 우리의 일상, 밥먹고 일하고 놀고 잠자는 공간이, 저마다 다른 공간이 여전히 머물러 있습니다. 그 원체험의 공간은 저마다 다르기에, 그 다름이 동일한 음반, 동일한 소리를 섬세하고 미묘하게 변주합니다.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서 누군가는 격정을 바라고, 누군가는 슬픔을 기다리고, 누군가는 가벼움과 날렵함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동일한 모차르트 음악이 상이하게 울려퍼집니다.

그러므로, 모차르트 음악의 어느 음반을 좋아한다는 고백은 곧 자신의 마음의 풍경을 드러내는 일이며, 인간 마음의 풍경은 상처의 풍경이기에 그 고백은 부부의 성관계처럼 은밀하고 부끄러운 일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음반을 낯선 타인에게 고백하며, 이 고백에 대한 화음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우리 모두가 외로운 존재여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그처럼 음악을 이야기하고 또 들을 때에 우리는 은밀하게 우리의 삶을 교감하는 셈입니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는 모차르트 음악, 그 은밀한 고백은 나도 모르게 겪는 환상적인 세계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환상적인 지도 모릅니다.

나 자신은 브루노 발터가 지휘한 모차르트의 후기교향곡, 슈나벨이 연주한 피아노 곡을 좋아한답니다 — 아으, 이 부끄러운 고백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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