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처럼 차갑고 불처럼 뜨거워라 — 통도사와 관룡사의 반야용선

통도사 진입로
통도사 진입로의 겨울 오후. 이 깊은 길을 걷는다는 것이 어느새 축복이 되었다. 생활이 너무 멀리 나간 것인가.

나무들이 욱여싸고서 마련해 놓은 공간은 깊고도 높다. 지금 여기에 어울리는 것 이외의 것이 틈입해 오면 안될 것같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 간간히 산새 우는 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빛. 이런 존재들만이 이 공간에 기품을 더할 수 있으리라. 내 발길로 기품을 더하지는 못할망정 해치지는 않으리, 사무사(思無邪)의 마음으로 걸으리. 어느새 이런 공간에 들어서는 것 자체가 축복이 되고 때로는 사치가 될 정도이니, 생활과 생명이 너무 멀리 나간 것은 아닐까.

이번 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날, 오후 4시의 통도사 진입로는 깊고 청랭하다. 한참을 걸어 진입로의 기품이 몸에 젖어들 무렵 일주문이 보이고, 오른편으로는 널찍하게 펼쳐진 부도밭. 세간 사람들이 쌓아놓은 아기자기하고 야트막한 돌탑들, 현대의 멋없는 부도비들, 그리고 저 윗쪽으로 부도들. 통도사의 일주문은 그 셋의 현존과 함께 등장한다. 세간 사람들의 돌탑들은 사뭇 정겹다. 하나같이 낮아서일까. 인간의 욕망이 그토록 크다고 하더라만, 어찌 이리도 소박하게 탑을 쌓았을까. 빈 공간을 찾아 펑퍼짐하게 얼기설기 어깨 겯고 자리잡은 그네들의 소망은 한결같이 자잘하다. 나의 소망도 저 엄지손톱만한 돌멩이의 크기를 넘어서는 안되겠지. 아니,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가려면 저 소망조차도 무거운 짐에 불과하리. 바람아 불어다오, 저 소박한 돌탑들마저 어루만져다오.

부도밭을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이미 해는 산 능선 위에 바짝 다가가 나그네의 발길이 늦었다고 알린다. 사찰 경내에 뿌려진 빛살이 거두어질까 걱정이 앞선다. 일주문을 통과하자마자 나무장승과 돌장승. 그네들에게 눈을 맞추는 사이 어느새 산문 안에 한 줄기 한 줄기 나리던 빛들마저 사위어간다. 이제 사찰 등 뒤 동녘의 산등성이만 빛이 들고, 경내는 추운 겨울날 저녁을 채비한다. 만물로부터 각광을 받더니 이제 사물의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빛. 어찌 하늘은 우리에게 이런 변화를 날마다 보여주며 시시각각 사위어가는 만물의 존재양식을 고지하는가. 그러나 고마워라. 그 소멸의 고지와 함께 인간 생의 근원적인 출발점을 알리는 것이리니, 부디 모든 날들은 그 사윔을 잠시라도 숨기지 마시라. 그곳은 위험한 장소, 쓸쓸함을 거두고 새롭게 생동할 수 있는 곳, 예기치 못했던 어느날 한 시각의 접점이리니.

 

통도사. 불보사찰. 그러한 유명한 언어만을 간직한 채 들른 절집. 전각들 하나하나에 세월의 두께가 가볍지 않게 얹혀 있고, 그 색감은 나그네의 몸에 척 감긴다. 고적하고 추운 뜨락 셋, 하로전, 중로전, 상로전. 이런 것이구나, 대찰의 면모는 감히 거부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표정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구나. 활처럼 휜 중심축, 즉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축선의 매듭을 통과할 때마다 측면으로 홀연히 퍼지는 불법의 영역들. 꽃 한 봉오리 터졌다 오므렸다 하는 듯. 나그네는 정결한 마음을 확 펼쳤다 급히 움츠렸다 하며 활로를 모색한다. 각 뜨락에 들어설 때마다 존재의 전이를 맛보며 세간의 삶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되풀이 반추하게 된다. 문을 통과함과 동시에 뜨락에 부복하지 않을 수 없고, 뱃살로 쓸며 지나가는 나그네의 적신(赤身)은 어느새 한겨울 추위를 잊는다. 열림과 닫힘, 풀림과 맺힘, 엎드림과 일어섬 이라는 설레는 곡절 속에서 어느 한 시각을 점하며 한 날의 해가 저문다. 하루의 해가 만물의 등어리를 쓸며 사위어가고, 하루의 삶이 역동적인 리듬을 타고 멀어져간다.

통도사 금강계단
금강계단, 계를 깨뜨리지 않음을 금강의 단단함과 같이 하라. 청정한 기운이 가득한 이 뜨락은 한겨울 바다에 안개자락이 풀풀 흩날리는 듯. 그리하여 금강의 강인함이 선명히 감지되고

땅거미는 어느새 통도사에 나리고, 스님들과 보살들은 한 끼의 공양을 위해서인지 이쪽에서 저쪽으로 뜨락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곳은 나그네가 들어갈 수 없고 나그네가 아지 못하는 곳. 생소한 나그네의 발길은 이질의 공기를 내뿜으며 그 흐름을 막고 있는 듯. 산란한 공기 하나 없는 적멸보궁 앞에서, 또 금강계단 앞에서, 또 대웅전 앞에서, 그 공간에서 나그네 홀로 이질인 듯하니, 그 미안함을 어찌하랴. 혹 누가 말을 걸까 두렵고, 혹 누가 시선을 보낼까 두렵고, 혹 누가 한 호흡간에 몰아낼까 두렵다. 냉한 바람이 뜨락을 쓸다가 뺨을 타고 오르면, 비로소 고맙고 비로소 자적한다.

금강계단을 멀찍이서 목도하고 있노라니, 스님은 나그네 앞의 넓은 공간을 가로지르지 못하고 비좁은 나그네 등 뒤의 길로 행로를 바꾼다. 그래 이런 것인지도 모르지, 깨달은 이는 늘 깨닫지 못한 자의 시중을 드는 것인지도 모르지. 내리사랑처럼, 어느 한편은 영원히 사랑하고 다른 한편은 영원히 오해만 하는지도 모르지.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상로전의 뜨락에서 설렁 부는 청량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쉬며 나그네는 배회를 계속하고 수행자들은 흐름의 방해를 극소화하며 목적지를 향하여 간다. 청정한 기운이 가득한 뜨락은 마치 한겨울 바다와 같아 새하얀 해무(海霧)가 풀풀 날리는 듯하다. 대웅전은 안개의 흩날림을 방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반야용선만 같고.

 

하늘이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분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쏟아주는 빛 같은 것, 반야.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더없는 폭력처럼 보이는 무관심 같은 것, 반야. 만원짜리 폭력에 십원짜리 폭력으로 대들지라도, 두 폭력을 동일하게 보라고 가르치는 반야. 과연 누가 이 험악한 갈등의 세계에서 그 무정한 반야를 강요할 수 있으리오. 다만 나에게만 요구할 수 있을 뿐, 어찌 남에게 권할 수 있으리오. 생의 비밀 중의 하나는, 가장 진실한 것이 가장 패퇴적이라는 것, 가장 연약하다는 것.

그러면서도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는 것, 제아무리 험악한 기세의 바닷물결이라도 마치 한 자락 안개처럼 보는 것, 그 시선의 이동은 금강처럼 가장 강인한 자에게만 허락되리. 차갑고 말끔한 겨울 저녁, 과연 통도사의 대웅전(금강계단)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가고, 그 주변을 서성이는 발길은 마냥 연약하게 나풀거린다.

춥다. 손가락이 꽁꽁 얼 정도로 춥다. 어둠이 본격적으로 깔리기 시작하고 나그네는 이 한파 속에서 마냥 기다려 범종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다. 통도사를 빠져나온다. 부산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해운대에 있는 형네에 당도하여 책자를 들척이다 보니, 하로전 영역의 극락보전 뒷벽에 그려진 반야용선 그림을 놓쳤다. 하기야 그 유장하고 그 큰 통도사를 한번 들러서 놓치지 않은 게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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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앞바다의 일출. 하늘은 어찌 이런 장관을 허락하여 나그네의 발길을 바꾸는가.

설날 아침, 해운대 앞바다의 새해 일출을 보다. 진흙벌같이 검고 질퍽한 바다, 수평선 바로 위로 두텁게 한 겹을 이루어 죽 펼쳐진 무거운 구름. 어두운 아침이더니, 구름 뒷편 한곳에서 바알갛게 빛이 터지고, 세계의 일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등대 하나 유실물처럼 떠 있고, 웅혼하고 하얀 빛덩어리가 까만 구름 뒤에 제몸을 온전히 감추질 못하고 붉은 빛살을 무한대로 뿌리며 바다 이끝에서 저끝으로 단숨에 누벼버린다. 빛살을 맞아 벌겋게 물들어 나풀거리는 해무는 지나간 날들의 설움과 감격을 심연의 밑바닥에서부터 꾹 끌어올린다.

아직도 남은 설움이 있었나 보구나. 그러나 이제 차올라 드디어 붉게 터지는 날들아, 가거라, 언젠가는 붉은 꽃으로 피었다가 떨구어질 줄 알았거니, 수면 위를 나풀거리다 무게도 잃고 빛깔도 잃고 마침내 무산하거라.

붉음이 엷어지고 설움의 흐느낌이 잦아들 무렵 천천히 천천히 배 한 척, 응어리진 데 하나 없이 나풀거리는 해무에 파묻히다시피 하며 나아간다. 해무의 나풀거림은 동일한 일의 영원한 되풀이같다. 노를 앞으로 젓는 듯, 또 뒤로 젓는 듯, 매듭 하나 없이 마냥마냥 넘실거리기만 할 뿐, 과연 저것이 어딘가로 유장하게 움직이는 것인지 아니면 영원히 허무한 짓을 되풀이하는 것인지 분간할 길이 없다. 해무는 진척 없이 나풀거림을 되풀이하고 한 척의 배는 일체의 미동도 하지 않고 나아간다.

 

다시 통도사를 가야겠구나. 명절 하루를 온전히 집에서 보낸 후 다음날 아침에 통도사로 향한다. 연일 강추위가 계속되고, 연일 반야용선이 어른거린다. 꼭 이렇게 과거의 유산으로 회귀하여야만 하는 것일까. 사람이 칠십 평생 아무리 애쓴다고 한들, 천년의 세월을 버틴 돌, 수백년의 세월을 견뎌낸 벽화에 비하면, 아아 볼품 없으리. 통도사를 다시 방문하여 천왕문을 통과하니 바로 오른편에 극락보전. 뒷벽에 반야용선도가 그려져 있다. 흙벽에 그려진 그림이어니, 흙 한 톨 떨어지면 그림의 한 톨 부위도 사라졌으리. 통도사의 반야용선도는 수백년이 경과한 그림, 하여 수백년 동안 한톨 한톨 떨어지기를 그치지 않았으리니, 마침내 또 수백년 흐른 뒤에는 그림을 그렸던 수행자의 소망마저 거두어지리.

통도사 반야용선도
통도사 극락보전 뒷벽 어칸에 그려진 반야용선 벽화

옛 벽화를 대할 때면 달라지는 시간의 척도. 옛 그림이 말을 거는 듯할 때, 지금 현재뿐 아니라 전생의 세월까지도 뛰어넘는가. 또 미래의 세월까지 뚫고 가는가. 시간 감각이 달라지니 지금 현재 그림을 마주하고 있는 순간이 언뜻 부유한다. 그리하여 흙이 수천 수만 톨 떨어졌겠으나 반야용선의 면목을 보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고.

안내 책자는 저 바다를 두고 험한 바다라고 하나, 결코 험난하거나 격정적인 바다가 아니다. 오히려 물결은 꽃잎처럼 선이 곱다. 또 물결 한 켠의 백련은 새하얀 해무가 나풀거리다가 어느 찰나 가볍게 뭉개어올린 꽃과 같다. 광배를 두른 부처와 중생들. 반야용선에 오른 중생들은 한결같이 두 손을 합장하고 있으며, 얼굴은 감회가 어린 표정을 띠고 용선이 나아가는 방향을 향해 있다. 그렇다, 환희라기보다는 감회가 어린 표정들이다. 반야용선이 향하는 곳인 극락은 다름아닌 살아오는 동안 온갖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기어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곳의 외적 표출에 불과할 것이므로, 환희보다는 감회가 먼저이리.

그런데 무수한 사람들 중 유일한 한 사람, 아마도 젊은이인 듯, 그만이 홀로 지나온 궤적을 되돌아보고 있다. 혹시 화가의 자화상은 아닐까. 이제까지의 자신의 이력을 회고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이 반야용선을 그리는 시절에 화가는 변화를 겪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하였다면 돌아보소서, 당신은 이미 지나간 날들과 인연들과 당신 자신을 용서했으리니, 돌아보소서, 그곳은 설움이 풀어져 꽃이 되어 버린 아름다운 땅이므로.

 

미동도 하지 않고 나아가는 금강같은 반야용선, 너울거리는 물결의 고운 선, 안개로 피워올린 백련의 무구함. 아무래도 창녕의 용선대로 가야만 할 것같다. 또 반야용선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부산으로 다시 내려와 창녕행 버스에 오른다. 창녕 술정리의 서삼층석탑을 조용히 바라보고 석양이 거두어진 뒤 관룡사로 향한다. 이미 어두어졌다. 관룡사 아래 계곡에 당도하니 벌써 캄캄한 저녁 6시. 불빛 하나 없는 길을 따라 더 이상 오를 수는 없다. 그때 범종 소리 계곡을 타고 내려온다.

두웅, 범종 소리 귀에 닿질 않고 명치 끝을 때려 나그네의 몸을 울린다. 두웅, 명치 끝의 도화선을 탄 아픔이 전신으로 사르르 번진다. 두웅, 저 높은 곳 어드메에서 어둠의 계곡을 타고 내려와 인간의 심장부를 조용히 강타한다. 두웅, 심장이 조여든다. 두우웅, 아뿔싸, 범종을 울리는 이의 호흡이 너무 깊구나. 이 밤에는 물러나야 하리.

관룡사 주변에는 설날 연휴인지라 민박을 구할 수 없어 다시 창녕 읍내로 돌아와 하룻밤을 묵는다. 호흡을 가다듬고 아침 7시 첫차를 타고 다시 관룡사로 향한다. 버스에서 내려 30분 쯤 걸으니 관룡사의 산문이다. 관룡사에 잠시 머뭇거리다 화왕산 산악에 아침 햇살이 화르륵 어리는 것을 보고 곧장 용선대로 오른다.

관룡사 용선대
창녕 화왕산의 용선대. 용선대의 석불은 붓다가 득도한 순간의 항마촉지인을 하고 동트는 곳을 향해 정좌하고 있다.

부동의 자세로 나아가려는 암벽을 향하여 빛이 딱 어린다. 그 사이 빈 공간에는 티끌 하나 얼씬거리지 못한다. 빛은 동트는 곳에서는 백색으로 눈부시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운 암벽과 부딪히는 곳에서는 유독 붉은 빛깔을 태우고 있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선인가. 석불의 머리로부터 암벽 아래까지 척척 떨어지는 대범하고 굵은 선은 과연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이 암질의 강인함을 부각시킨다. 얼음처럼 차갑고 불처럼 뜨거운 반야용선, 그 아래에서 깨어나는 인간사의 아침은 한 송이 꽃잎처럼 무념무상으로 나풀거린다.

관룡사 용선대
용선대 동틀녘의 석불, “생은 다했다”

무한대의 빛살로 하여 수묵화의 농담처럼 처리되고 있는 산의 능선들은 또 제각기 무게를 잃고 엷기만 하다. 그 빛 아래에서 인간사 아침밥 한 그릇의 무게와 산의 무게가 다를 바 없다. 그 위력적인 빛살을 온몸으로 남김없이 다 받아내며 석불은 그 어떤 산보다 깊은 조형을 완성한다. 동틀녘의 석불은 태산같은 긍지를 모를 리 없으리. 그리하여 한 톨의 쌀도 귀히 여기고 한 능선의 산도 귀히 여기리. 또 그것들 모두를 가볍게 여기리.

새벽, 통틀녘 샛별이 반짝일 때, 붓다는 애욕과 무명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지혜(반야)를 낳았다고 한다: “생은 다했다, 청정한 행은 성취되었다, 해야 할 일은 성취했다. 이것이 최후의 생으로서 이후 다시는 망집의 생을 받는 일은 없다.”

 

반야용선, 동틀녘의 청청한 시선, 얼음처럼 차갑고 불처럼 뜨거운 금강, 물결의 고운 선, 무게도 부피도 없이 나풀거리는 안개, 안개꽃, 그리고 “생은 다했다”.[2004년 글]

얼음처럼 차갑고 불처럼 뜨거워라 — 통도사와 관룡사의 반야용선”에 대한 4개의 댓글

  • 새로 선 보인 주인장 얼굴이 블로그 제목에 잘 어울립니다.^^ 답사기 중에서 최고의 글입니다. 제 생각에. 왜 그럴까요… 좋은 글은 예사로움과 천연스러움의 글이라 누가 썼던데, 일상과 접목이 되면서 깊은 생각들이 풍광에 녹아 있습니다. 문체의 간결함도 한 몫을 하고요. 술술 읽히면서 마음이 글 속에 스미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통도사와 불교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고요.

    강물
  • 감사합니다. 불교에 대하여 아는 바가 거의 없는데, 이렇게 함부로 글을 써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지금도 그런데 이 글을 쓸 때에는 더욱 몰랐을 때였지요.

    제 얼굴은 올리지 않으려 했는데, 아내가 한사코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Gosinga
  • 너무 감사히 글 잘 읽었어요. 저는 현아라는 법명을 지닌 불자에요. 글에 너무 감명받아서 몇일 전에 저도 부산 해광사 절에 다녀온 것을 님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저는 어릴적 외할머니때문에 인연이 있는 금종 스님을 친견코저 부산에 갔어요. 4년만에 스님을 뵈러온 부산 불자님2분과 스님 그리고 대길심보살님과 함께 공기 놀이를 했어요. 천진 난만하게 어릴적 사진을 보여주시면서 우리들에게 차를 손수 끓여주신 스님.늘 웃으시며 점심 저녁 이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쑥국을 끓여주신 공양주 보살님 . 해탈이와 바둑이(절에 스스로 찾아들어와 한 식구가된 개 이름) 스님께서 쓰신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책과 부모은중경이 새겨진 달력을 보시 받았어요. 아직도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는 스님의 검소하고 넉넉함이 있는방,짖접꾸민 작은화단, 일주문조차도 없는 초라한 암자지만 산새우는 소리가 들리고 포교와 불사 원력을 세우신 큰 스님. 스님은 13세에 스스로 절로 들어가서 참선을 하신 분이시지요. 아직도 귀여운 아기인형처럼 깜찍(?)하고 천진난만하셔요. “요즘 내가 뜨고 있다” 라면서 신문 기사난것을 보여주시면서 웃으시는 모습은 동자승보다도 더 귀하지요. 님과 같이 훌륭한 혜안을 가지신 분이 스님을 만나뵙고 인연이 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닐까요?

    ohakorea
  • ohakorea 님, 반갑습니다. 좋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던가요. 많은 정진 있으시기를 빕니다.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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