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인간의 심연을 드러내고자 하다

한 인간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는 그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아지 못하므로

quoandoquidem nemo scit hominum, quid agatur in homine, nisi spiritus hominis, qui in ipso est (10.3.3)

영혼의 오뒷세우스처럼 젊은날 지적인 탐색과 방황을 지속한 이후에,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로 회심을 한다. 386년 서른 두 살의 극적인 회심 이후에, 그는 수사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가을날 밀라노를 떠나 카시키아쿰으로 은거한다. 당시 밀라노는 황제가 머물던 곳이었고,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는 신년행사 때 황제 앞에서 황제를 기리는 연설을 해야 하는 막중한 직책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곳을 떠난 것이다. 북부 이탈리아의 은거처에서 그는 어머니 모니카, 아들 아데오다투스, 친구들과 함께 노동과 토론을 하며 수개월 동안 공동체적 삶을 체험한다. 그리고 이듬해 봄날(387년) 밀라노로 돌아와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손길에 의하여 전격적으로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는다.

그는 세례 이후 수도원 형태의 삶을 꿈꾸며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고향 타가스테로 귀향하기 위하여 로마 인근의 항구 오스티아에 당도한다. 그러나 정세의 불안으로 배는 출항하지 못하였고, 어머니는 쇠락하여 가는 로마의 항구 오스티아에서 귀향길을 앞두고 숨을 거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귀향길을 잠시 미루고 로마에서 일년 가량 머물며 수도원 생활의 견문을 넓힌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고향, 북아프리카의 고원지대 누미디아 지방의 타가스테에 도착하여,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상속지에 벗들과 함께 평신도 수사의 공동체를 세운다(388년). 그곳에서 보낸 삼년 가량의 기간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가장 평온하고 고요한 시절이었으며, 이 시절 그의 경건함과 명민함의 명성은 타가스테를 넘어 퍼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올리브 나무
타가스테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올리브 나무. 오늘날 알제리아의 수크-아라스로 불리는 과거의 타가스테 지역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적어도 현재까지 발굴된 바는 없다. 그러나 거의 모든 흔적이 사라진 오늘날, 수크-아라스 주민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열매를 먹고 그 그늘에서 쉬었다고 전하는 올리브 나무를 각별히 보호하고 있다.

391년(37세) 봄날, 그는 한적한 누미디아의 고원지대를 떠나 지중해를 면한 북아프리카의 항구도시 히포를 찾는다. 그곳에서 수도원을 삼을 만한 곳을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히포의 주교 발레리우스는 당대 제일의 수사학 교수직을 역임하였던 아우구스티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창졸간에 그를 사제로 서품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학교육이나 사제서품 등 뭐 하나 제대로 제도화되지 않았던 시대에 세례를 받고 사제가 되었으며, 별도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교육 받은 적도 없었으므로, 순전히 자신의 체험과 자신의 성서읽기로부터 길어올려 그리스도인의 신앙, 아니 자신의 신앙을 이야기하여야 했다. 그는 전해 들은 이야기나 교육 받은 교리에 근거하여 신앙을 이야기하고 싶어도 원천적으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고백의 언어 앞에는 제도의 벽이 없었고, 오직 하느님과의 대면, 오직 인간의 정직한 내면만이 있었다. 그의 영혼, 그의 고백, 그의 신앙은 심해로부터 힘차게 솟구쳐오르는 물고기와도 같았다.

파닥거리는 영혼으로서의 그는 히포의 보좌주교가 되고, 수년 뒤에는 발레리우스를 계승하여 주교가 된다(395년). 그는 사제가 되고 주교가 되었지만, 교회 곁에 수도원을 세우고 공동체 생활을 계속 유지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히포를 거주지로 삼는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다름아닌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이다. 히포의 사제가 됨으로써 그는 위험지대에 놓이게 된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마니교가 가장 널리 전파된 지역이었으며, 동시에 도나투스 파의 세거지였기 때문이다. 히포 교구는 그 세력들이 물결처럼 밀려드는 곳이었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외부의 적(마니교)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도나투스 파)까지 상대하게 되었다. 사원과 교회를 ‘접수’하기 위한 폭력적인 사태가 공공연히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 십년 이상을 마니교에 빠져 있었던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그랬던 그가 그리스도교 세례 이후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사제로 서품되었던 비정상적인 과정은 히포의 가톨릭 교인들에게까지 논란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는 로마사회의 엘리트층에 속했었다는 명망 때문에 사제로 서품된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이 당연히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발레리우스의 사망(396년) 이후,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암브로시우스의 사망(397년) 이후,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야말로 혼자가 된다. 정신적으로 의지할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이교도들과 분파주의자들, 자신을 미심쩍어하는 가톨릭 교인들 . . . 그런 처지에서 그는 하느님을 앞에 두고 자기 의식의 심연, “인간 의식의 심연”(abyssus humanae conscientiae, 10.2.2)을 사람들에게 드러낼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그의 «고백»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 의식의 심연을 드러낸다한들 누가 그것을 믿어줄 수 있겠는가! “한 인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는 그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10.3.3)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고백의 진실성을 타인에게 증명해 보일 수 없다는 절대적 불가능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자신의 진실된 고백을 독자의 선택, 독자의 사랑에 온전히 맡긴다. 따라서, 그의 고백을 들을 사람은 따로 있다:

그러하오나 당신의 자비로우심 아래 말하게 하소서, 나의 하느님, 나는 흙이요 티끌에 불과하오나 말하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를 바라며 말함이요, 나를 비웃는 자, [비웃는] 사람에게 말함은 아니오니.

sed tamen sine me apud misericordiam tuam loqui, deus meus, me terram et cinerem, sine tamen loqui, quoniam ecce misericordia tua est, non homo, inrisor meus, qui loquor.(1.6.7)

제가 누구에게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물론 당신에게는 아닙니다, 나의 하느님. 그게 아니라 당신을 앞에 두고, 제아무리 이 글을 접하게 될 수 있는 이들이 적을지라도 그들 중 일부의 사람들, 나의 동포에게 이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하러 이리 한답니까? 당연히, 나나 이 글을 읽는 사람 누구나, 얼마나 깊은 곳에서부터 당신을 향하여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가를 우리가 생각해 보았으면 해서 하는 것입니다.

cui narro haec? neque enim tibi, deus meus: sed apud te narro haec generi meo, generi humano, quantulacumque ex particula incidere potest in istas meas litteras. et ut quid hoc? ut videlicet ego et quisquis haec legit cogitemus de quam profundo clamandum sit ad te.(2.3.5)

그는 자기 의식의 심연, 혹은 자기 내면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자로서, 그것의 선명한 움직임을 언어로 드러내고자 한다. 그는 “영혼”, “의식의 심연”, , “인간의 내면”, “깊은 곳” 등등을 언급함으로써 가장 불투명한 영역을 건드린 셈이지만, 그러나 그가 보기에는 그 영역이 오히려 가장 선명하고 투명한 장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이나 전달 가능성에 있어서 가장 불투명할 뿐이다. «고백»은 이렇게 자기 내면을 향했을 때의 투명함과 타인을 향했을 때의 불투명함을 칼의 양날처럼 품고 있다. 그는 그의 고백을 투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본다. 그들은 «고백»을 접하게 될 이들 중에서도 일부 사람들이다. 그는 그 일부를 위해서만 고백을 한다. 그는 자신이 고백하는 상대를 뚜렷하게 한정을 시키고 그 상대를 “나의 동포”(genus meum)라고 부른다. 그는 고백의 상대를 애초부터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를 비웃는 자, 혹은 그를 비웃을 자를 향하여 고백하지는 않는다.
 

고백의 상대가 분명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총 1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1권에서 8권까지는 유아시절부터 회심하기까지의 자신의 지난 시절을 회고적으로 서술한 대목이다. 9권은 어머니의 죽음을 회고하는 대목으로서 특히나 감동적이다. 그리고, 10권은 고백과 관련한 결어와 함께 인간의 기억을 다루고 있다. 11권에서 13권까지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주제로서, 시간과 영원, 창세기 1장의 창조를 다룬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1권-10권과 11권-13권이 별도였는데 나중에 합본이 되었다는 분석론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깊이를 잘 알지 못하는 학자들의 단견에 불과하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397년 쓰기 시작하여 401년에 완결한 «고백»에서 유아시절부터 회심(386)하기까지, 그리고 회심 직후 어머니의 죽음(387)까지만 자전적인 글을 쓴 셈이고, 타가스테로 귀향한 이후 수도원 생활, 사제 생활, 주교 생활 등 십여 년의 세월에 대해서는 일체 서술하지 않고 있다. 타가스테 귀향 이후의 삶은 히포 교구의 교인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므로, 그 이전에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던가를 벌거벗기는 일이 긴요했던 것이다.

내연녀와 십여 년을 동거했다는 사실, 아들도 있었다는 사실, 마니교에 십여 년간 빠졌었다는 사실, 출세를 위하여 내연녀를 떠나보내고 젊은 상속녀와 약혼했다는 사실 등등, 그는 주교로서 치명적일 만한 사실들을 숨김 없이 고백한다. 그는 단순히 그 사실들만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치명적일 만한 어두운 이력 속에서 인간 내면이 어떻게 꿈틀거리며 어디로 흘러갔던가를 격정적으로 관찰하고 섬세하게 서술한다. 밤 안개에 휩싸여 흐르는 검은 강줄기와 같은 그 흐름의 절정은 그리스도교로의 회심이었고, 그 절정을 전후하여 «고백»의 자전적인 서술은 끝난다.

그 자전적이고 내면적인 글에서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던가? 다름아닌 영혼의 움직임, 인간 심연의 운동 방향이었다. 다 알다시피, 그는 인간 심연의 움직임이 지향하는 곳, 회향처가 “당신”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깊은 곳에서부터 당신을 향하여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가”(2.3.5),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우리의 마음은 안식하지 못하나이다.”(1.1.1) 아우구스티누스의 그 “당신”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지만, 독자 입장에서 그 이름이 탐탁치 않다면, 그저 “당신”, 혹은 “그 무엇”이나 “그것”으로 불러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심연 혹은 마음이 끊임없이 줄기차게 어딘가로 회향한다는 사실이고, 다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회향처가 “주 하느님”이라고 고백했을 뿐이라는 점이다. 그가 그 고백을 함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도움을 받은 것은 다름아닌 시편의 시인들의 언어, 하느님을 향한 고백과 탄원의 시였다. 그는 «고백» 곳곳에서 시편의 구절들을 자신의 숨결처럼 인용한다. 그리고 자기 영혼의 관찰상과 그 관찰에 따른 고백을 공동체적으로 승화시킬 때 바울로 사도의 편지들을 즐겨 인용한다. 그가 가장 사랑한 성서는 다름아닌 시편의 시와 성 바울로의 편지였다.

이제 그는 어떻게 고백을 시작할 것인가? 하느님 찬미로부터 시작하지 않겠는가? 과연, «고백»의 첫 구절 “당신은 위대하시나이다”에서 엿볼 수 있듯, 그는 극도의 긍정 속에서 고백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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