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분노를 버려야 하리라, 만慢[1]“慢”에 대해서는 상세한 주석이 필요하여 원문 하단에 별도의 설명을 두었다.을 완연히 버려야 하리라,
일체 결박을 넘어서야 하리라![2]“결박”의 관점에서 보자면, “분노”는 욕계 차원의 (유신견有身見에서 비롯한 가장 거친 형태의) 결박, “慢”은 색계・무색계 차원의 (미세한) 결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221송은 감정적인 결박(“분노”)과 사유적・존재적 결박(“慢”)을 대표적으로 예시하여 일체 결박을 언급하고 있는 셈이다.
명색名色에 집착하지 않는
그 무소유자는 괴로움이 엄습하지 않나니.[3]제221송은 세존의 게송으로서, 「상응부」 제1.34경에 결집되어 있다. 「법구경」 결집자는 세존의 게송을 이 품의 첫 송으로 배치함으로써, 가장 거친 형태의 결박인 “분노”라는 핵심어를 가지고 일체 결박을 넘어선 “무소유자”, “잠부강 금으로 만든 금화와도 같은 자”를 송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품에서 “분노”라는 핵심어는 “해침”, “비난”, “身・口・意의 흥분”, “身・口・意로 짓는 악업”과 동일시된다.222 솟아나는 분노[4]여기에서는 “솟아나는 분노”를 “탈주하는 전차”에 비유했다면, 「숫타니파타」 제1송에서는 “퍼지는 뱀독”에 비유했다: “솟아나는 분노를 다스리는 비구는/ 마치 퍼진 뱀독을 약으로 다스림 같아라.”를,
마치 탈주하는 전차를 거느려 잡듯 하는 자 ―
나는 그를 전차부戰車夫라 부르노라,
그 밖의 인생은 고삐를 쥔 자일 뿐.223 분노하지 않음으로 분노를 이기고
훌륭함으로 못남을 이겨야 하리라!
보시로 인색함을 이기고
진실로 거짓말하는 자를 이겨야 하리라!224 진실을 말해야 하리라, 분노하지 않아야 하리라,
가진 것이 적어도 청하면 주어야 하리라! ―
이 세 경우와 함께하면
천신들 가까이로 가리라.225 모니牟尼들은 해치지 않는 자,
늘 몸(身)으로 삼가는 자 ―
그들은 불멸하는 곳으로 나아가나니,
그곳에 이르러 더 이상 슬퍼하지 않으리라.226 항상 깨어 있어
밤낮으로 배우는 자들,
열반을 향하는 자들은
누漏들이 다한다.227 아툴라여, 이것은 오래된 일이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말없이 좌정한 자도 비난하며
많은 말을 하는 자도 비난하며
적절히 말하는 자도 비난하나니,
세간에 비난 받지 않는 자 없어라.228 이전에도 없었으며 이후에도 없을 것이며
지금도 없나니,
온전히 비난만 받는 사람,
온전히 칭송만 받는 사람!229 지혜로운 자들이
날마다 살피고서 칭송하는 자,
습관이 흠 없는 명철한 자,
慧와 戒를 갖춘 자! ―230 잠부강 금으로 만든 금화와도 같은 그를,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느냐?
천신들도 그를 칭송하며
바라문들도 그를 칭송한다.231 몸(身)의 흥분을 막으라,
몸으로 삼갈지라!
몸으로 지은 악행을 버리고
몸으로 선행을 할지라!232 말(口)의 흥분을 막으라,
말로 삼갈지라!
말로 지은 악행을 버리고
말로 선행을 할지라!233 意의 흥분을 막으라,
意로 삼갈지라!
意로 지은 악행을 버리고
意로 선행을 할지라!234 현묵玄默한 자들은 몸으로 삼가고
말로 삼가고
意로 삼가는 자들,
참으로 밀밀히 삼가는 자들이어라.221 kodhaṃ jahe vippajaheyya mānaṃ saññojanaṃ sabbam atikkameyya
taṃ nāmarūpasmim asajjamānaṃ akiñcanaṃ nānupatanti dukkhā.222 yo ve uppatitaṃ kodhaṃ rathaṃ bhantaṃ va dhāraye
tam ahaṃ sārathiṃ brūmi, rasmiggāho itaro jano.223 akkodhena jine kodhaṃ asādhuṃ sādhunā jine,
jine kadariyaṃ dānena saccenālikavādinaṃ.224 saccam bhaṇe na kujjheyya dajjā appasmi yācito
etehi tīhi ṭhānehi gacche devāna santike.225 ahiṃsakā ye munayo niccaṃ kāyena saṃvutā
te yanti accutaṃ ṭhānaṃ yattha gantvā na socare.226 sadā jāgaramānānaṃ ahorattānusikkhinaṃ
nibbānaṃ adhimuttānaṃ atthaṃ gacchanti āsavā.227 porāṇam etaṃ Atula n’ etaṃ ajjatanām iva:
nindanti tuṇhiṃ āsīnaṃ nindanti bahubhāṇinaṃ
mitabhāṇinam pi nindanti, n’ atthi loke anindito.228 na cāhu na ca bhavissati na c’ etarahi vijjati
ekantaṃ nindito poso ekantaṃ vā pasaṃsito.229 yañ ce viññū pasaṃsanti anuvicca suve suve
acchiddaṃ medhāviṃ paññāsīlasamāhitaṃ.230 nekkhaṃ jambonadasseva ko taṃ ninditum arahati,
devā pi naṃ pasaṃsanti, Brahmunā pi pasaṃsito.231 kāyappakopaṃ rakkheyya kāyena saṃvuto siyā,
kāyaduccaritaṃ hitvā kāyena sucaritaṃ care.232 vacīpakopaṃ rakkheyya vācāya saṃvuto siyā,
vacīduccaritaṃ hitvā vācāya sucaritaṃ care.233 manopakopaṃ rakkheyya manasā saṃvuto siyā,
manoduccaritaṃ hitvā manasā sucaritaṃ care.234 kāyena saṃvutā dhīrā atho vācāya saṃvutā
manasā saṃvutā dhīrā te ve suparisaṃvutā.
* * *
“만慢(māna)”에 대하여
“만慢”은 일반적으로 ‘자만, 오만’ 등의 뜻으로 통용되고 있으나, 이러한 일상적인 뜻보다 깊게 들어가 필요가 있다. “慢”이 오상분결 중 하나로서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 남아 있는 결박임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가령 「증일부」 제4.159경에서는, “나”라는 명칭의 출발점으로 “慢”이 언급된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누이여, 이 몸(身)은 慢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니, 慢을 의지하여 慢을 버려야 합니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두고 말한 것입니까? 누이여, 한 비구가 있어, ‘어느 아무개 비구가 漏가 다하여, 漏가 다한 심해탈과 혜해탈을 이 현법에서 확연한 앎으로 직접 실현하여 그것을 갖추고서 지낸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그 존자는 漏가 다하여, 漏가 다한 심해탈과 혜해탈을 이 현법에서 확연한 앎으로 직접 실현하여 그것을 갖추고서 지낼텐데, 나는 어찌한단 말인가?’ 그는 얼마 있어 慢을 의지하여 慢을 버립니다. ‘누이여, 이 몸(身)은 慢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니, 慢을 의지하여 慢을 버려야 합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상응부」 제1.25경을 보면, “慢”은 “나는 말한다”, “그들이 나에게 말한다”는 표현과 관련 있으며, “속박”과 “생각(mata)”의 근원이다. 사정이 이러하지만, 漏가 다한 비구는 “慢”의 속박을 부셔버리고 생각의 본질을 꿰뚫는 가운데 세간의 명칭, 세간의 어법에 맞춰 ‘나는 말한다’는 등의 표현을 활용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범부는 “慢”에 속박되고 생각에 함락된 가운데 “나는 말한다”는 등의 표현을 쓰기 마련이다.
[천신의 질문]
할 일을 마친 비구,
누漏가 다하고 마지막 육신 가진 비구 ―
그 비구는 慢에 이르러
‘나는 말한다’라고 말하거나
‘그들이 나에게 말한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지요?[세존의 답송]
慢을 버린 자에게 속박들은 없나니
慢에 의한 속박은 모두 부서졌습니다.
그는 생각(mata)을 명철히 알아 그것을 넘어선 자로서
‘나는 말한다’라고 말할 것이며,
‘그들이 나에게 말한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는 세간의 명칭을 익히 알고서
그 용례에 맞춰 표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慢”은 ‘나’라는 좌표를 출현시키는 심원한 근원인 동시에 표층적으로는 ‘자만’이나 ‘오만’ 등의 투박한 결과물에 의하여 포착되는 것이다. “慢(māna)”은 ‘측정하다, 측량하다, 재다(mān)’는 어근에서 유래했으며, 같은 어원인 “측량(vi-māna)”이라는 낱말은 ‘측량을 통해 낱낱을 정함’이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이를 미루어 보아도, “慢”은 일상적인 표층의 뜻보다 훨씬 심원한 차원을 가리키는 낱말임을 알 수 있다. (이점에서 “慢”이라는 한역어는 아쉬운 점이 있다.) 과연, 「상응부」 제1.34경은 “慢(māna)”과 “측량(vi-māna)”은 “사유”, “欲”, “헤아림(saṅkhā)”, “명색”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말해준다.
세간에 있는 다채로운 것들이 욕락들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saṅkappa)에 대한 貪’이 바로 욕락이어라.
세간에 있는 다채로운 것들은 그저 그대로 두고
다만 그것들에 대한 欲을 거둘 뿐이어라, 명철한 자들은!분노를 버려야 하리라, 慢(māna)을 완연히 버려야 하리라,
일체 결박을 넘어서야 하리라!
명색에 집착하지 않는
그 무소유자는 괴로움이 엄습하지 않나니!그는 헤아림을 쳐버렸으며, 측량(vi-māna)에 이르지 않았으며,
여기 명색에 대한 갈증을 끊어버렸노라.
그는 속박도 끊어지고 미동도 없고 바람(願)도 없는 자이니,
천신들이 찾아본들 인간들이 찾아본들
여기서도 저기서도 천상에서도 그 어느 거처에서도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였노라.
요컨대, “慢”은 “‘나’라는 좌표를 정하는 측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측정의 결과물과 함께 속박이 시작되는 것이다. 돌아보면, 우리는 ‘나의 괴로움’, ‘나의 불행’, ‘나의 생각’, ‘나의 감정’을 해결하기 위한 방도만을 찾을 뿐, 정작 이 ‘나’라는 좌표의 설정, ‘나’라는 존재의 규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는 탐구하지 않는다. 그래서는 ‘慢의 속박’을 벗어날 길 없으며, 생사의 바다를 건널 수 없으며, 슬픔과 비통과 괴로움을 종식시킬 수 없다.
괴로움을 궁극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한 불교의 가르침은 반드시 ‘나’라는 좌표의 속박, “慢의 속박”을 문제 삼는다. 경에 따르면, ‘나’라는 존재는 ‘사유에 의한 측정’과 함께 존립하는 것, “이 몸(身)은 慢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慢을 버린 자”는 “헤아림을 쳐버린 자”이며, “측량에 이르지 않는 자”, “명색에 대한 갈증을 끊어버린 자”, 따라서 “속박도 끊어지고 (명색에 대한 갈증으로 인한 그 어떤) 미동도 없는 자”이다. 그가 바로 “명색에 집착하지 않는 무소유자”, “慧와 戒를 갖춘 자”, “잠부강 금으로 만든 금화와도 같은 자”이다.
그에게는 ‘나’라는 절대좌표가 없으며, 그 절대좌표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중첩되는 다중多重의 성좌, 名色과 識의 호연互緣이 없다. 그에게 그것들의 우주는 세속제世俗諦, 세간에서 통용되는 명칭들의 그물, 달빛 아래 거미줄이다. 그는 ‘소유’가 없는, 즉 속박된 언어적・존재적 규정이 없는 “무소유자”, 천근만근의 짐을 내려놓은 해탈자이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일체 언어, 일체 존재가 창공을 스치는 빠른 구름 같은 것, 흐르는 물결에 비치는 꽃잎 같은 것, 빈 마당을 쓰는 나무 그림자 같은 것, 잡화엄식雜華嚴飾이다.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을쏘냐! 천신들이 찾아본들 인간들이 찾아본들 그 어느 곳에서도 그를 찾아내지 못하고, 다만 “법을 요지了知하고 의혹을 버려, 집착을 넘어선 자들”(「상응부」 제1.34경)만이 그를 칭송할 수 있을 뿐이니!
* 각주
1. | ↑ | “慢”에 대해서는 상세한 주석이 필요하여 원문 하단에 별도의 설명을 두었다. |
2. | ↑ | “결박”의 관점에서 보자면, “분노”는 욕계 차원의 (유신견有身見에서 비롯한 가장 거친 형태의) 결박, “慢”은 색계・무색계 차원의 (미세한) 결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221송은 감정적인 결박(“분노”)과 사유적・존재적 결박(“慢”)을 대표적으로 예시하여 일체 결박을 언급하고 있는 셈이다. |
3. | ↑ | 제221송은 세존의 게송으로서, 「상응부」 제1.34경에 결집되어 있다. 「법구경」 결집자는 세존의 게송을 이 품의 첫 송으로 배치함으로써, 가장 거친 형태의 결박인 “분노”라는 핵심어를 가지고 일체 결박을 넘어선 “무소유자”, “잠부강 금으로 만든 금화와도 같은 자”를 송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품에서 “분노”라는 핵심어는 “해침”, “비난”, “身・口・意의 흥분”, “身・口・意로 짓는 악업”과 동일시된다. |
4. | ↑ | 여기에서는 “솟아나는 분노”를 “탈주하는 전차”에 비유했다면, 「숫타니파타」 제1송에서는 “퍼지는 뱀독”에 비유했다: “솟아나는 분노를 다스리는 비구는/ 마치 퍼진 뱀독을 약으로 다스림 같아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