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 제14품, “붓다”

179 그분의 승리는 빼앗기지 않으며
그분의 승리는 그 어느 세간으로도 향하지 않아라!
그 붓다, 행처가 무한하신 분, 자취 없으신 분 ―
그분을 무슨 자취 있어 끌고 가겠느냐!

180 그분에겐 유혹과 집착과 갈애 없어
그 어느 곳으로도 끌리지 않아라!
그 붓다, 행처가 무한하신 분, 자취 없으신 분 ―
그분을 무슨 자취 있어 끌고 가겠느냐!

181 입선入禪하신 분들, 현묵玄默하신 분들,[1]“현묵하다(dhīra)”는 많은 경우 “현자(paṇḍita)”와 같은 맥락에서 쓰이며, 일반적으로 아라한을 수식하는 낱말이기도 하다. “현자”는 ‘현명하다’는 의미가 강한 반면, “현묵한 자”는 ‘(흔들림 없이) 적묵하고 현명하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욕離欲[2]“nekkamma”는 전통적으로는 “출리出離”로 번역되었다. 경의 정의에 따르면 ‘욕락의 위험을 보고 욕락을 떠나는 것’이므로 “이욕離欲”으로 번역하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증지부」 제9.41경에서 타풋사 장자는 “욕락을 누리고 욕락을 즐기고 욕락을 좋아하고 욕락을 기뻐하는 재가자들에게는, 이욕離欲이란 추락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과 적정寂靜[3]“적정(upasama)”이 언급되는 정형구를 보면 그 뜻을 가늠할 수 있다: “이것은 이익을 갖춘 것이요, 이것은 법을 갖춘 것이요, 이것은 범행의 근본이요, 이것은 염리厭離・이탐離貪・멸滅・적정寂靜・증지證知・깨달음・열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정형구에서 언급되는 낱말들이 수습차제를 언급한 것으로 보면, 염리에서 적정까지는 오욕락 내지 오개 등으로부터 정화되는 공부여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에야 비로소 증지・깨달음・열반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적정”은 오염원이나 번뇌가 잦아들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을 즐기시는 분들,
깨달으신 분들, 유념하시는 분들 ―
그분들을 천신들조차 부러워하노라.

182 다시 사람 되기 어려우며
명멸자들의 생명 얻기도 어려우며
정법 듣기도 어려우며
붓다들의 출현도 어려워라!

183 일체 악을 짓지 않음,
선덕을 갖춤,
스스로의 心을 청정케 함 ―
이것이 붓다들의 가르침이어라.[4]「법구경」 한역에서 “諸惡莫作 諸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진 경구이며, 조과선사와 백거이의 선화禪話로도 잘 알려져 있다.

184 인욕과 인내가 궁극의 고행이며
열반이 궁극이라고 붓다들은 말씀하시나니,
남을 해치는 자는 출가자가 아니요,
남을 상처낸 자는 사문이 아니다.

185 비난하지 않음, 해치지 않음,
계율[5]「잡아함경」 등에서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로 음역되었다. 승단의 대중이 의식주 등과 관련하여 지켜야 할 상세한 계율집을 말한다.을 지킴,
음식의 적정량을 앎,
외딴 좌와처,
선정심禪定心[6]“adhicitta”를 시험적으로 선정심禪定心으로 옮겨 보았다. 「중부」 제20경에 의하면, “선정심에 몰입(adhicittam-anuyutta)”하여 “안으로 心이 안정되고 가라앉고 一境이 되고 入定”되므로, “adhicitta”는 心一境 내지 入定(삼매)과 직접 관계된 것이다. 전통적으로는 “증상심增上心”으로 번역되었으며, 근래에는 “높은 마음”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아울러, 유사한 어원의 “abhicetasika”를 살펴보면, 경전의 정형구인 “사선四禪, 선정심에 속하는 현법낙주見法樂住(catunnaṃ jhānānaṃ abhicetasikānaṃ diṭṭhadhamma-sukhavihārānaṃ)”로 많이 등장한다. 이 때의 “abhicetasika”는 사선四禪과 동일하다. 수습차제상으로는 “adhicitta”가 먼저이고 “abhicetasika”가 나중으로 보이지만, 이 둘을 구분하여 번역하기가 여간 곤란하지 않다. 의미상 굳이 구분하자면, “adhicitta”는 定心에 가까우며 “abhicetasika”는 禪心에 가깝다. 엄밀하게는 이 둘을 통틀어서 “禪定心”이라고 할 수 있다.에 몰입함 ―
이것이 붓다들의 가르침이어라.[7]제183송~제185송은 「장부」 제14경, “대전기경”에 보인다. 이 경에서 ‘비파시 세존・아라한・정등각’의 가르침으로 소개된다. 그리고 제185송은 「자설경」 제46경, “핀돌라 경”에서는 부처님의 자설로 나온다.

186 돈의 비를 맞아도
욕락들에 대한 만족 없나니,
‘욕락들은 맛(味)이 적고 괴로운 것’임을
현자들은 식별하고서,

187 천상의 욕락들에 대한 즐김마저
가까이 하지 않노라.
갈애가 다함을 즐기는 자야말로
정등각자의 제자여라!

188 두려움에 떠는 이들이 귀의처 삼아
산으로, 숲으로,
원림으로, 나무로, 무덤으로
많이들 가지만,

189 이런 것들은 안온한 귀의처가 아니요,
이런 것들은 위없는 귀의처가 아니니,
이런 귀의처에 이른들
일체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못한다.

190 붓다와 법과 승가를
귀의처 삼아 [그곳으로] 가는 자 ―
그는 올바른 반야로
사성제四聖諦를 본다.

191 괴로움, 괴로움의 일어남,
괴로움의 극복,
그리고 괴로움의 그침에 이르는
성스러운 팔정도 ―

192 이것이 바로 안온한 귀의처요,
이것이 바로 위없는 귀의처이니,
이 귀의처에 이르면
일체 괴로움에서 해탈한다.

193 좋은 혈통의 사람은 얻기 어렵나니,
그는 아무곳에나 태어나지 않는다.
그가 현묵한 자로서 태어나는 곳,
그 집안은 안락하게 번영한다.

194 붓다들의 출현은 안락하여라,
정법의 가르침도 안락하여라,
승가의 화합도 안락하여라,
화합한 자들의 고행[8]앞서 제184송에서 “인욕과 인내가 궁극의 고행”이라고 정의했던 것처럼, 불교에서 가르치는 “고행”이란 육체적 난행고행을 넘어서는 의미이다. 이 의미에서의 고행은 남을 해치거나 상처내지 않는 것까지 포괄한다.도 안락하여라!

195 공경받아 마땅하신 분들,
붓다들이나 제자들,
희론戱論[9]“희론戱論”은 ‘觸→受→想→尋’에서 ‘명칭(언어)’으로 확산되는 심리적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중부」 제18경에서는 ‘명칭’을 두고 아예 ‘희론・想에 의한 명칭(papañcasaññāsaṅkhā)’이라고 정의한다: “도반들이여, 眼과 色을 인연으로 眼識이 일어나며, 셋의 화합이 觸이며, 觸의 인연으로부터 受가 있으며, 受한 것을 상정(想)하며, 상정(想)한 것을 갈피(尋)로 잡으며, 갈피로 잡은 것을 희론하며, 희론한 것을 원인으로 ‘희론・想에 의한 명칭들’이 사람에게 유통되나니, 다름아닌 眼識될 과거・미래・현재의 色들에 대한 ‘희론・想에 의한 명칭들’입니다.”
 
앞서 「숫타니파타」 첫 경을 번역하면서 주석에서 언급한 바대로, 언어를 그물로 비유하자면, 희론은 “그물을 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학적으로 말하자면, 의미분절이다. 하나의 언어(=하나의 그물코)를 출현시키기 위해서는 그 언어를 둘러싼 여타 언어들의 연결과 배열이 필요하다. 하나의 언어를 출현시킬 때마다 실시간으로 늘 새로운 그물이 짜여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희론이다. 희론의 어원이 “퍼지다, 펼쳐지다, 확산하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觸→受→想→尋→희론→명칭’이라는 언어화 과정은 언어와 사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보는 것이다.
 
희론에 대해서는 냐나난다 스님의 「Concept and reality in early Buddhist thought」에서 상세하게 논구되었으므로 일독을 권한다. 우리말로는 「위빠사나 명상의 열쇠 빠빤차」(한언출판사 2006)로 번역되었다.
을 넘어서신 분들,
슬픔과 비탄[10]“슬픔과 비탄”은 생노병사 우비고뇌의 “우비憂悲”를 말한다. 요컨대, 연기의 괴로움(苦蘊)인 것이다.을 건너신 분들 ―

196 바로 그렇게 열반에 이르시고
어디서든 두려움 없으신 분들 ―
그분들을 공경하는 자의 공덕은
그 누구도 헤아릴 수조차 없으리!

179 yassa jitaṃ nāvajīyati jitaṃ assa no yāti koci loke,
tam buddham anantagocaraṃ apadaṃ kena padena nessatha.

180 yassa jālinī visattikā taṇhā n’ atthi kuhiñci netave
tam buddham anantagocaraṃ apadaṃ kena padena nessatha.

181 ye jhānapasutā dhīrā nekkhammūpasame ratā
devāpi tesaṃ pihayanti sambuddhānaṃ satīmataṃ.

182 kiccho manussapaṭilābho kicchaṃ maccāna jīvitaṃ,
kicchaṃ saddhammasavanaṃ kiccho Buddhānam uppādo.

183 sabbapāpassa akaraṇaṃ kusalassa upasampadā
sacittapariyodapanaṃ etaṃ Buddhāna sāsanaṃ.

184 khantī paramaṃ tapo titikkhā, nibbānaṃ paramaṃ vadanti Buddhā,
na hi pabbajito parūpaghātī samaṇo hoti paraṃ viheṭhayanto.

185 anupavādo anupaghāto pātimokkhe ca saṃvaro
mattaññutā ca bhattasmiṃ pantañ ca sayanāsanaṃ
adhicitte ca āyogo etaṃ Buddhāna sāsanaṃ.

186 na kahāpaṇavassena titti kāmesu vijjati,
“appassādā dukhā kāmā” iti viññāya paṇḍito,

187 api dibbesu kāmesu ratiṃ so nādhigacchati,
taṇhakkhayarato hoti sammāsambuddhasāvako.

188 bahuṃ ve saraṇaṃ yanti pabbatāni vanāni ca
ārāmarukkhacetyāni manussā bhayatajjitā,

189 n’ etaṃ kho saraṇaṃ khemaṃ, n’ etaṃ saraṇam uttamaṃ,
n’ etaṃ saraṇaṃ āgamma, sabbadukkhā pamuccati.

190 yo ca Buddhañ ca Dhammañ ca Saṃghañ ca saraṇaṃ gato
cattāri ariyasaccāni sammapaññāya passati:

191 dukkhaṃ dukkhasamuppādaṃ dukkhassa ca atikkamaṃ
ariyañ c’ aṭṭhaṅgikaṃ maggaṃ dukkhūpasamagāminaṃ.

192 etaṃ kho saraṇaṃ khemaṃ etaṃ saraṇam uttamaṃ
etaṃ saraṇaṃ āgamma sabbadukkhā pamuccati.

193 dullabho purisājañño na so sabbattha jāyati,
yattha so jāyatī dhīro taṃ kulaṃ sukham edhati.

194 sukho Buddhānaṃ uppādo sukhā saddhammadesanā
sukhā saṃghassa sāmaggī samaggānaṃ tapo sukho.

195 pūjārahe pūjayato Buddhe yadi va sāvake
papañcasamatikkante tiṇṇasokapariddave,

196 te tādise pūjayato nibbute akutobhaye
na sakkā puññaṃ saṃkhātuṃ im’ ettam api kenaci.

* 각주   [ + ]

1. “현묵하다(dhīra)”는 많은 경우 “현자(paṇḍita)”와 같은 맥락에서 쓰이며, 일반적으로 아라한을 수식하는 낱말이기도 하다. “현자”는 ‘현명하다’는 의미가 강한 반면, “현묵한 자”는 ‘(흔들림 없이) 적묵하고 현명하다’는 의미가 강하다.
2. “nekkamma”는 전통적으로는 “출리出離”로 번역되었다. 경의 정의에 따르면 ‘욕락의 위험을 보고 욕락을 떠나는 것’이므로 “이욕離欲”으로 번역하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증지부」 제9.41경에서 타풋사 장자는 “욕락을 누리고 욕락을 즐기고 욕락을 좋아하고 욕락을 기뻐하는 재가자들에게는, 이욕離欲이란 추락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3. “적정(upasama)”이 언급되는 정형구를 보면 그 뜻을 가늠할 수 있다: “이것은 이익을 갖춘 것이요, 이것은 법을 갖춘 것이요, 이것은 범행의 근본이요, 이것은 염리厭離・이탐離貪・멸滅・적정寂靜・증지證知・깨달음・열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정형구에서 언급되는 낱말들이 수습차제를 언급한 것으로 보면, 염리에서 적정까지는 오욕락 내지 오개 등으로부터 정화되는 공부여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에야 비로소 증지・깨달음・열반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적정”은 오염원이나 번뇌가 잦아들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4. 「법구경」 한역에서 “諸惡莫作 諸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진 경구이며, 조과선사와 백거이의 선화禪話로도 잘 알려져 있다.
5. 「잡아함경」 등에서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로 음역되었다. 승단의 대중이 의식주 등과 관련하여 지켜야 할 상세한 계율집을 말한다.
6. “adhicitta”를 시험적으로 선정심禪定心으로 옮겨 보았다. 「중부」 제20경에 의하면, “선정심에 몰입(adhicittam-anuyutta)”하여 “안으로 心이 안정되고 가라앉고 一境이 되고 入定”되므로, “adhicitta”는 心一境 내지 入定(삼매)과 직접 관계된 것이다. 전통적으로는 “증상심增上心”으로 번역되었으며, 근래에는 “높은 마음”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아울러, 유사한 어원의 “abhicetasika”를 살펴보면, 경전의 정형구인 “사선四禪, 선정심에 속하는 현법낙주見法樂住(catunnaṃ jhānānaṃ abhicetasikānaṃ diṭṭhadhamma-sukhavihārānaṃ)”로 많이 등장한다. 이 때의 “abhicetasika”는 사선四禪과 동일하다. 수습차제상으로는 “adhicitta”가 먼저이고 “abhicetasika”가 나중으로 보이지만, 이 둘을 구분하여 번역하기가 여간 곤란하지 않다. 의미상 굳이 구분하자면, “adhicitta”는 定心에 가까우며 “abhicetasika”는 禪心에 가깝다. 엄밀하게는 이 둘을 통틀어서 “禪定心”이라고 할 수 있다.
7. 제183송~제185송은 「장부」 제14경, “대전기경”에 보인다. 이 경에서 ‘비파시 세존・아라한・정등각’의 가르침으로 소개된다. 그리고 제185송은 「자설경」 제46경, “핀돌라 경”에서는 부처님의 자설로 나온다.
8. 앞서 제184송에서 “인욕과 인내가 궁극의 고행”이라고 정의했던 것처럼, 불교에서 가르치는 “고행”이란 육체적 난행고행을 넘어서는 의미이다. 이 의미에서의 고행은 남을 해치거나 상처내지 않는 것까지 포괄한다.
9. “희론戱論”은 ‘觸→受→想→尋’에서 ‘명칭(언어)’으로 확산되는 심리적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중부」 제18경에서는 ‘명칭’을 두고 아예 ‘희론・想에 의한 명칭(papañcasaññāsaṅkhā)’이라고 정의한다: “도반들이여, 眼과 色을 인연으로 眼識이 일어나며, 셋의 화합이 觸이며, 觸의 인연으로부터 受가 있으며, 受한 것을 상정(想)하며, 상정(想)한 것을 갈피(尋)로 잡으며, 갈피로 잡은 것을 희론하며, 희론한 것을 원인으로 ‘희론・想에 의한 명칭들’이 사람에게 유통되나니, 다름아닌 眼識될 과거・미래・현재의 色들에 대한 ‘희론・想에 의한 명칭들’입니다.”
 
앞서 「숫타니파타」 첫 경을 번역하면서 주석에서 언급한 바대로, 언어를 그물로 비유하자면, 희론은 “그물을 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학적으로 말하자면, 의미분절이다. 하나의 언어(=하나의 그물코)를 출현시키기 위해서는 그 언어를 둘러싼 여타 언어들의 연결과 배열이 필요하다. 하나의 언어를 출현시킬 때마다 실시간으로 늘 새로운 그물이 짜여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희론이다. 희론의 어원이 “퍼지다, 펼쳐지다, 확산하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觸→受→想→尋→희론→명칭’이라는 언어화 과정은 언어와 사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보는 것이다.
 
희론에 대해서는 냐나난다 스님의 「Concept and reality in early Buddhist thought」에서 상세하게 논구되었으므로 일독을 권한다. 우리말로는 「위빠사나 명상의 열쇠 빠빤차」(한언출판사 2006)로 번역되었다.
10. “슬픔과 비탄”은 생노병사 우비고뇌의 “우비憂悲”를 말한다. 요컨대, 연기의 괴로움(苦蘊)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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