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5쥔 몽둥이에서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이니
보십시오, 싸우는 인생들을!
이제 내가 화답하겠습니다,
내가 받은 충격이 어떤 것이었던가를!936물이 메말라가는 곳의 물고기들처럼
파들거리는 인간들을 보고서,
서로 반목하는 이들을 보고서,
두려움이 내게 밀려왔습니다.937그 어디에도 세간은 피난처 없었으며,
사방으로 요동치고 있었는 바,
나 스스로의 거처를 구하였으나
장악되지 않은 곳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938끝내 보이는 것은 반목하는 자들 뿐,
나에게 만족할 만한 곳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화살!
심장에 박힌, 발견하기 어려운 화살이었습니다.939화살에 찔려
사방으로 질주하는 자는,
바로 그 화살을 뽑아버려야
질주하지도 않고 주저앉지도 않습니다.940이를 위한 배움[1]초기불전에서 “배움(sikkhā)”이란 오늘날 방식의 공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들은 바”를 익히는 것, 들은 바를 스스로에게서 확인하는 것으로 “증험證驗”을 말한다. 아마도 일상어 중에서는 「논어」 “學而時習之”의 “학습學習”이 가장 가까운 의미일 텐데, 이 낱말이 학교식의 공부로만 의미가 활용되는 것은 아깝다.의 송頌이 있습니다:[2]“화살을 뽑아버리기”(제939송) 위해 배우는 학습과정이 제940송 이하의 게송으로 인용된다. 다만 문법적 도구로는 이 인용의 범위가 구분되지 않으므로, 독자 스스로 「몽둥이 경」을 연찬하여 인용문을 확정해야 한다. “화답하다”(제935송, kitteti)와 “당신”(제949송), “나”(제935송~제938송, 제945송) 등의 낱말이 사용된 것으로 볼 때 이 경은 누군가의 질문에 답한 것으로 추정되고 또 “배움의 頌”이 액자 형식으로 인용되다는 점에서, “배움의 頌”은 길어도 제944송을 넘어 확장될 수는 없다. (“나는 말합니다”가 제945송에서 언급되므로.)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번역서들은 “배움의 頌”을 제940송 하나로 국한하고 있으나 이는 경을 소홀히 해석한 것으로 보이며, 내용상 제940송에서 제944송까지 다섯 게송이 “배움의 頌”인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세간에 속박된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에 묶이지 않으리라!
욕락을 전부 꿰뚫고서
스스로의 열반을 배우리라!941진실한 자, 오만하지 않는 자,
허위 없는 자, 비방하지 않는 자,
분노 없는 자 되리라,
탐욕과 악함을 여의고서 건너리라, 모니牟尼라면!942잠과 나태와 둔함(惛沈)을 이기고
방일하게 지내지 않고
거만함에 이르지 않으리라,
意가 적멸寂滅한 사람이라면!943망언妄言에 이끌리지 않으며
색色에 애착하지 않으리라!
만慢을 완전히 알고
폭력을 그친 자 되리라!944옛 것을 기뻐하지 않으며
새 것을 기다리지 않으리라!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지 않으며
매혹적인 것에 빠지지 않으리라!945나는 말합니다, 갈망은 대폭류이며
분류奔流는 분절分節이라고,
사유해낸 대상(攀緣)은
헤어나기 어려운 욕락의 진창이라고![3]제945송은 초기불교 기본 존재론을 송한 것으로 보고 싶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인식’과 ‘존재’를 구분하지 않으며, 나아가 ‘인식’과 ‘욕망’도 구분하지 않는다. “폭류→분류奔流→진창”은 “갈망→사유・분절→대상→욕락”에 대한 비유로, 욕망・인식・존재의 “흐름”(제948송)을 보여준다. 무정형으로서의 갈망이 분류奔流하고 분절하면서 정형의 대상이 탄생하므로, “사유해낸 대상”은 분류奔流한 갈망이 흐벅지게 묻어 있는 “진창”이다. “사유해낸 대상”은 “實이 없는 것”이요 “진실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그것을 추구하는 한 갈망만 거세질 뿐 메마름과 허덕임과 집착을 벗어날 길 없다. “대상”과 “욕락”은 그 갈급한 운동을 보건대 “메마른 땅”이요, 그 기원을 보건대 “헤어날 길 없는 진창”이다.946모니는 진실을 벗어나지 않아
메마른 땅에 서지 않나니, 그는 바라문!
그는 일체를 집착하지 않으니
참으로 그를 일러 ‘평온한 자’라 합니다.947그는 밝히 아는 자, 명明에 이른 자,
법을 알고서 의지하지 않는 자,
그는 세간에서 올바르게 운신하는 자,
여기에서 그 어떤 것에도 허덕이지 않습니다.948여기에서 욕락들을 넘어선 자,
넘어서기 어려운 세간의 집착을 넘어선 자,
그는 슬퍼함이 없으며 걱정함이 없나니,
흐름이 끊어진 자, 속박이 없는 자입니다.949당신 앞에 있는 것이 시들게 하십시오,
당신 뒤로는 아무것도 없도록 하십시오.
만약 당신이 중中에서 붙잡는 바 없다면,[4]경 자체에서는 “앞”, “뒤”, “中”이 각각 무엇이냐에 대한 별도의 설명이나 해석의 실마리가 없다. 거의 모든 번역서들이 “앞”은 ‘과거’로, “뒤”는 ‘미래’로 “中”은 ‘현재’로 번역하는데, 이는 안이한 해석으로 보인다. “후전상後前想이 있는 자(pacchāpuresaññī)”라는 니까야 용어에 주목하자면, 심계발의 “뒤”와 “앞”으로 해석될 여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이때의 “뒤”는 “혼침・수면”처럼 내면이 둔해지는 것, “앞”은 “도거・악작”처럼 바깥 대상을 향해 산만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이 심계발을 가장 수승한 수준으로 전개하면, “識이 있는 이 身”(뒤)과 “밖으로 一切相”(앞)에 대해 ‘나’・‘나의 것’・‘나 자신’으로 삼는 경향성을 보게 되고, 마침내 이 경향성을 뛰어넘는 길을 걷게 된다(상응부 18.11경~22경 참조). 과연 이 게송 이후에 “명색”(제950송)과 “나의 것”(제951송)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최종적으로는 “뒤”는 “識이 있는 이 身”을, “앞”은 “밖으로 一切相”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요컨대 “밖으로 一切相”을 시들게 하고, “識이 있는 이 身”에 아무것도 없을 때, 마침내 “中에서” 붙드는 바가 없이 평온한 자로 노닐게 된다. 결국 “中”이란 무엇일까? “안・밖”, “뒤・앞”이 결박되거나 해체되는 곳이 아닐까? “識・相”, “名色”이 구르거나 그치는 곳이 아닐까? “심장에 박힌, 발견하기 어려운 화살”(제939송)에서 말하는 “심장”이 바로 “中”이 아닐까? (이 주석내용은 초기불교 고급 공부인을 위한 것으로 초학자들은 애써 이해할 필요가 없으며 훗날을 기약하기를 바란다.)
평온한 자로 노닐 것입니다.950명색들 중에서 나의 것으로 삼은 것이
일체 없는 자,
그는 ‘실實이 없는 것들’을 두고 슬퍼하지 않으며,
세간에서 쇠퇴하지 않을 것입니다.951‘이것은 나의 것’이 없는 자,
‘남들의 것’도 전혀 없는 자,
그에게는 ‘나의 것임’이 없으며,
‘나의 것이 없다’며 슬퍼하지도 않습니다.952거친 것이 없는 자, 더는 갈망 없는 자,
어디서든 부동不動한 자, 한결같은 자!
그 공덕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흔들리지 않는 공덕’이라고 말합니다.953부동자不動者, 식별자에게는
그 어떤 집적集積도 없나니,
그는 더 이상 힘들이지 않는 자!
어디서든 안온安穩을 봅니다.954동일한 것들이나 낮은 것들이나
높은 것들을 두고 모니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평온한 자, 아쉬움이 없는 자,
쥠도 없으며 버림도 없습니다.935“Attadaṇḍā bhayaṃ jātaṃ, janaṃ passatha medhakaṃ,
saṃvegaṃ kittayissāmi yathā saṃvijitaṃ mayā.936Phandamānaṃ pajaṃ disvā macche appodake yathā
aññamaññehi vyāruddhe disvā maṃ bhayam āvisi.937Samantaṃ asaro loko, disā sabbā sameritā,
icchaṃ bhavanam attano nāddasāsiṃ anositaṃ,938osāne tv-eva vyāruddhe disvā me aratī ahu, —
ath’ ettha sallaṃ addakkhiṃ duddasaṃ hadayanissitaṃ.939Yena sallena otiṇṇo disā sabbā vidhāvati,
tam eva sallaṃ abbuyha na dhāvati, nisīdati.940Tattha sikkhānugīyanti:
Yāni loke gathitāni, na tesu pasuto siyā,
nibbijjha sabbaso kāme sikkhe nibbānam attano.941Sacco siyā appagabbho amāyo rittapesuṇo
akkodhano, lobhapāpaṃ vevicchaṃ vitare muni.942Niddaṃ tandiṃ sahe thīnaṃ, pamādena na saṃvase,
atimāne na tiṭṭheyya nibbānamanaso naro.943Mosavajje na niyyetha, rūpe snehaṃ na kubbaye,
mānañ ca parijāneyya, sāhasā virato care.944Purāṇaṃ nābhinandeyya, nave khantiṃ na kubbaye,
hīyamāne na soceyya, ākāsaṃ na sito siyā.945Gedhaṃ brūmi “mahogho” ti, ājavaṃ brūmi jappanaṃ,
ārammaṇaṃ pakappanaṃ, kāmapaṃko duraccayo.946Saccā avokkamma muni thale tiṭṭhati brāhmaṇo,
sabbaṃ so paṭinissajja sa ve santo ti vuccati,947sa ve vidvā, sa vedagū, ñatvā dhammaṃ anissito
sammā so loke iriyāno na pihetīdha kassaci.948Yo ‘dha kāme accatari saṃgaṃ loke duraccayaṃ,
na so socati nājjheti chinnasoto abandhano.949Yaṃ pubbe, taṃ visosehi, pacchā te māhu kiñcanaṃ,
majjhe ce no gahessasi, upasanto carissasi.950Sabbaso nāmarūpasmiṃ yassa n’ atthi mamāyitaṃ,
asatā ca na socati, sa ve loke na jiyyati.951Yassa n’ atthi ‘idam me’ ti ‘paresaṃ’ vā pi kiñcanaṃ,
mamattaṃ so asaṃvindaṃ ‘n’ atthi me’ ti na socati.952Aniṭṭhuri ananugiddho anejo sabbadhī samo —
tam ānisaṃsaṃ pabrūmi pucchito avikampinaṃ.953Anejassa vijānato n’ atthi kāci nisaṃkhiti,
virato so viyārambhā khemaṃ passati sabbadhi.954Na samesu na omesu na ussesu vadate muni,
santo so vītamaccharo nādeti na nirassatī”
ti Bhagavā ti
* 각주
1. | ↑ | 초기불전에서 “배움(sikkhā)”이란 오늘날 방식의 공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들은 바”를 익히는 것, 들은 바를 스스로에게서 확인하는 것으로 “증험證驗”을 말한다. 아마도 일상어 중에서는 「논어」 “學而時習之”의 “학습學習”이 가장 가까운 의미일 텐데, 이 낱말이 학교식의 공부로만 의미가 활용되는 것은 아깝다. |
2. | ↑ | “화살을 뽑아버리기”(제939송) 위해 배우는 학습과정이 제940송 이하의 게송으로 인용된다. 다만 문법적 도구로는 이 인용의 범위가 구분되지 않으므로, 독자 스스로 「몽둥이 경」을 연찬하여 인용문을 확정해야 한다. “화답하다”(제935송, kitteti)와 “당신”(제949송), “나”(제935송~제938송, 제945송) 등의 낱말이 사용된 것으로 볼 때 이 경은 누군가의 질문에 답한 것으로 추정되고 또 “배움의 頌”이 액자 형식으로 인용되다는 점에서, “배움의 頌”은 길어도 제944송을 넘어 확장될 수는 없다. (“나는 말합니다”가 제945송에서 언급되므로.)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번역서들은 “배움의 頌”을 제940송 하나로 국한하고 있으나 이는 경을 소홀히 해석한 것으로 보이며, 내용상 제940송에서 제944송까지 다섯 게송이 “배움의 頌”인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
3. | ↑ | 제945송은 초기불교 기본 존재론을 송한 것으로 보고 싶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인식’과 ‘존재’를 구분하지 않으며, 나아가 ‘인식’과 ‘욕망’도 구분하지 않는다. “폭류→분류奔流→진창”은 “갈망→사유・분절→대상→욕락”에 대한 비유로, 욕망・인식・존재의 “흐름”(제948송)을 보여준다. 무정형으로서의 갈망이 분류奔流하고 분절하면서 정형의 대상이 탄생하므로, “사유해낸 대상”은 분류奔流한 갈망이 흐벅지게 묻어 있는 “진창”이다. “사유해낸 대상”은 “實이 없는 것”이요 “진실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그것을 추구하는 한 갈망만 거세질 뿐 메마름과 허덕임과 집착을 벗어날 길 없다. “대상”과 “욕락”은 그 갈급한 운동을 보건대 “메마른 땅”이요, 그 기원을 보건대 “헤어날 길 없는 진창”이다. |
4. | ↑ | 경 자체에서는 “앞”, “뒤”, “中”이 각각 무엇이냐에 대한 별도의 설명이나 해석의 실마리가 없다. 거의 모든 번역서들이 “앞”은 ‘과거’로, “뒤”는 ‘미래’로 “中”은 ‘현재’로 번역하는데, 이는 안이한 해석으로 보인다. “후전상後前想이 있는 자(pacchāpuresaññī)”라는 니까야 용어에 주목하자면, 심계발의 “뒤”와 “앞”으로 해석될 여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이때의 “뒤”는 “혼침・수면”처럼 내면이 둔해지는 것, “앞”은 “도거・악작”처럼 바깥 대상을 향해 산만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이 심계발을 가장 수승한 수준으로 전개하면, “識이 있는 이 身”(뒤)과 “밖으로 一切相”(앞)에 대해 ‘나’・‘나의 것’・‘나 자신’으로 삼는 경향성을 보게 되고, 마침내 이 경향성을 뛰어넘는 길을 걷게 된다(상응부 18.11경~22경 참조). 과연 이 게송 이후에 “명색”(제950송)과 “나의 것”(제951송)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최종적으로는 “뒤”는 “識이 있는 이 身”을, “앞”은 “밖으로 一切相”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요컨대 “밖으로 一切相”을 시들게 하고, “識이 있는 이 身”에 아무것도 없을 때, 마침내 “中에서” 붙드는 바가 없이 평온한 자로 노닐게 된다. 결국 “中”이란 무엇일까? “안・밖”, “뒤・앞”이 결박되거나 해체되는 곳이 아닐까? “識・相”, “名色”이 구르거나 그치는 곳이 아닐까? “심장에 박힌, 발견하기 어려운 화살”(제939송)에서 말하는 “심장”이 바로 “中”이 아닐까? (이 주석내용은 초기불교 고급 공부인을 위한 것으로 초학자들은 애써 이해할 필요가 없으며 훗날을 기약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