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타니파타 4.14, “빠름 경”

[질문자]
915 “묻겠습니다, 태양의 후예, 대선인大仙人께,
여읨(遠離)에 대하여, 평온처[1]“평온”이라 함은, 혼침・수면, 도거・악작 등 침체되거나 들뜨는 등의 장애(五蓋)가 완연히 걷혀 “환히 빛나는 心”이 온전히 드러난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心이 동요하지 않는 “不動心”에서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에 대하여!
어떻게 철견하여야 비구는 세간의 그 어떤 것도
취하지 않고[2]이 때의 “취함”은 연기의 “取” 지분을 말한다. 적멸[3]“적멸寂滅(nibbuti)”과 “열반(nibbāna)”은 같은 어근에서 의미가 분화된 것이다.에 이르는 것입니까?”

916 [세존께서 이르시되]
희론・헤아림의 뿌리,
‘나는 생각하는 자다’[4]“생각하는 자”로 옮긴 “mantā”는 어형상 다른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명사 ‘mantar’의 단수, 주격으로 읽었다.라는 것을 일체 부숴 버려야 합니다.
안으로 그 어떤 갈증(愛)이든 물리치고
늘 유념하는 자가 되어 배워야 합니다.

917 그 어떤 법이든
안으로든 밖으로든 확연히 알고서
그것을 가지고 강고함에 이르지 않아야 합니다,[5]“그것을 가지고 강고함에 이른다”는 말은, ‘법을 가지고’, ‘법을 붙들고’ 마침내 “강고함”(견고함・굳셈)에 이른다는 의미로 읽힌다. 법을 확연히 알지 못할 경우, 식과 명색의 互緣에 의해 세간이 구르기 시작하고 존재가 탄생한다. 세간의 모든 존재는 결국 존재성을 획득・유지하려고 강고하게 버틴다. 강고한 존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존재는 강고하다.
그것을 평온한 자들의 적멸이라고 하지 않나니!

918 이것을 가지고[6]“이것을 가지고”에서의 “이것”은 다음 행에서 언급될 “따로 사유된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낫다’거나 ‘더 못하다’거나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하나니―
갖가지 것들을 섭취하여
‘따로 사유된 자신’[7]“자신(ātuman)”은 일반적으로 “我(attan, Sk.ātman)”와 같은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따로 사유된 자신(ātumā vikappaya)을 세운다”라는 표현은, 개별화하는 사유에 의해 “자신” 내지 “我”가 존립함을 말해 준다.을 세우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919 비구라면 안으로 고요할 것이며,
다른 것으로 평온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으로 고요한 자에게는 쥔 것 없으니,
어디에 버릴 것이 있겠습니까!

920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서는
파도가 일지 않고 멎어 있듯이,
비구라면 멎은 자, 움직임 없는 자 되어
그 어디에서도 들고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질문자]
921 “눈이 열리신 분께서는 [제 질문에] 화답하여[8]“화답하다(kitteti)”라는 낱말은 그 용례로 볼 때 질문자가 흡족한 답변을 얻었을 경우에 쓰인다. 질문자는 앞서 “여읨”과 “평온처”에 대해 물었는 바, 제916송~제918송은 “여읨”을, 제920송~제921송은 “평온처”를 답한 내용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경우, “여읨”은 “희론”, “법”, “我”와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셨나이다.
[나아가] 대덕이시여 말씀해 주소서,
자내증自內證의 법을, 위험을 삼가는 律을,
딛을 걸음을, 율의律儀를, 그리고 삼매를!”

[세존]
922 눈으로 이리저리 좇지 말 것이며,
마을 이야기에서 귀를 멀리할 것이며,
맛을 좇아 탐하지 말 것이며,
세간의 그 어떤 것도 나의 것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923 촉觸에 의해 접촉될지라도[9]“觸에 의한 접촉”에서 “觸”은 식・명색・육입의 삼사화합三事和合을 말한다. 이 게송의 다음 행에서 언급되는 “비탄”, “有”는 다름아닌 이른바 십이연기에서의 “有”와 “(우비고뇌의) 悲”를 말한다. “두려움”은 유・생・노・사・우비고뇌에서 비롯하는 근본적인 두려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이 게송은 연기의 압축적 서술이다.
비구라면 전혀 비탄하지 않을 것이며,
有를 갈망하지 않을 것이며,
두려움에 빠져 떠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10]질문자의 두번째 질문 내용은 “위험을 삼가는 律”, “딛을 걸음”, “율의”, “삼매”, 그리고 “자내증의 法”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제922송은 “위험을 삼가는 律”, 즉 육근수호를, 제923송은 “딛을 걸음”, 즉 중도를, 제924송~제932송은 “율의”, 즉 구체적인 계율을, 제933송은 “삼매”를, 마지막 제934송은 “自內證의 法”을 화답한 것으로 보인다.

924 나아가 음식, 음료,
단단한 음식, 옷가지를
얻어도 쌓아두지 않을 것이며,
그것들을 얻지 못해도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925 선인禪人이라면 여기저기 다니지 않을 것이며,
산만함[11]“산만함”으로 옮긴 “kukkucca”는 고대 한역으로는 “惡作”으로 번역되었으며, 근래에는 일반적으로 “후회”로 번역되고 있다. 그간 심계발心啓發과 관련한 경문들을 살펴본 바에 따르면, “도거・악작”은 心에 미세한 장애로 작용하는 ‘산란함’과 ‘산만함’으로 해석하고 싶다. “후회”라는 번역어는 “kukkucca”를 잘못 이해한 결과물로 보인다. 이 게송에서도, 차분히 가라앉지 못하고 산만한 맥락에서 “kukkucca”가 언급되고 있다.을 그칠 것이며, 방일放逸하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비구라면 조용한
좌와처坐臥處에 머무를 것입니다.

926 잠을 많이 취하지 않을 것이며,
깨어 있는 자와 부단히 어울릴 것이며,
나태, 환술, 농담, 오락,
음행, 장식을 버릴 것입니다.

927 무술巫術, 해몽, 관상觀相이나
점성占星을 베풀지 않을 것이며,
점성占聲[12]“점성占聲”은 새나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고 점치는 것을 말한다.이나 점지,[13]“점지”는 점지하여 아이를 수태시키는 것을 말한다. 의술에
종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제자라면!

928 비구라면 비난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칭찬을 받았다고 양양하지 않을 것이며,
탐욕과 아쉬움,[14]“macchariya”는 흔히 “인색함”으로 번역되고 있지만, 여러 경문에서 이 번역어가 잘 들어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어원을 고려할 때, 뭔가가 없어서 “아쉬워하는 것”, “부러워하는 것”, 즉 탐욕의 이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아쉬움”으로 옮겼다.
분노와 비방을 떨쳐버릴 것입니다.

929 비구라면 거래를 하지 않을 것이며,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며,
마을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얻을 것을 바라며 사람과 얘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930 비구라면 자랑하지 않을 것이며,
얽혀드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며,
오만함을 배우지 않을 것이며,
다툼을 일으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931 알아차리는 자라면 망언忘言에 이끌리지 않을 것이며,
속이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삶이나 지혜(般若)나
계금戒禁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을 경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932 사문들이나 범부들로부터
숱한 말로 공격 받을지라도
거친 말로 응수하지 않을 것이며,
대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평온한 자라면![15]제924송부터 여기 제932송까지는 출가비구가 지켜야 할 “율의(波羅提木叉)”의 구체적인 내용을 열거한 것으로, 숫타니파타 “팔송품”의 고층성古層性에 비춰볼 때,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계율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933 그리고 이 법을 요지了知하고서
분별하는 비구[16]“분별하는 비구(vicinaṃ bhikkhu)”의 “분별하다(vi-cinati)”는 “쌓다, 모으다(cinati)”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쌓고 모으고 붙드는 것’이 아니라 ‘구분하고 나누고 분산하는 것’을 말한다. 앞서 숫타니파타 4.13경의 “분간하다(nic-cinati)”와 어근이 같다. “법을 요지하고서 분별한다” 함은, 더는 법에 사로잡히거나 법을 붙들지 않을 만큼 법을 분별하고 분간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 공부여정을 거쳐 마침내 법이 현현하는 것을 직접 증험하여 보게 된다. “법”은 파악하거나 정의할 수 있는 명색이나 대상이나 개념이 아니며, ‘(오염원이 걷힌) 心이라는 거울’에 비치면서 현현할 뿐이다. 장부 「대반열반경」과 상응부 55.8경에서 언급되는 “법경法鏡(dhammādāsa)”은 ‘법을 비추는 거울’, 즉 “(법이 비칠 만큼 오염원이 완연히 걷힌) 환히 빛나는 맑은 心”을 비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오염원이 침범하여 心을 매몰시킬 경우, 법은 더 이상 현현하지 않으며, 다만 삼사화합의 觸에 의해 연기되어 수・애・취・유・생・노・사・우비고뇌로 윤회할 뿐이다. 경전에서 말하는 “心”은 ‘청정심’을 가리키는 것이지 우리가 흔히 알고 쓰는 ‘마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라면 늘 유념하며 배울 것이며,
‘평온’이라는 적멸을 알고서
고타마의 가르침에 불방일不放逸할 것입니다.

934 진실로 그는 승리자요 패배하지 않는 자!
전해 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증험하여(自內證) 법을 보았나니,
그는 자신에게 세존인 분의 가르침에 불방일한 자,
늘 귀의하여 따라 배워 나아갈 것입니다.[17]경명이 “빠름 경(Tuvaṭakasutta)”인 이유는 “평온(santi)”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중부 제152경의 용례를 보면, 감각기관을 수호할 경우 손가락 튕기는 순간처럼 “빠르게” 쾌・불쾌가 사라지고 무심(捨)이 확립된다고 설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희론의 뿌리”를 부숴 버리고 안팎으로 그 어떤 법이든 붙잡지 않을 경우, 안으로 고요하여 “빠르게” 평온에 이른다. 이와 같은 “평온처”에 이르기 위해 지켜야 할 율의, 삼갈 律, 자내증의 法이 있다는 게 이 경의 요지로 판단된다.

915 “Pucchāmi taṃ Adiccabandhaṃ
vivekaṃ santipadañ ca mahesiṃ:
kathaṃ disvā nibbāti bhikkhu
anupādiyāno lokasmiṃ kiñci”.

916 “Mūlaṃ papañcasaṃkhāyā (ti Bhagavā)
‘mantā asmī’ ti sabbam uparundhe,
yā kāci taṇhā ajjhattaṃ,
tāsaṃ vinayā sadā sato sikkhe.

917 Yaṃ kiñci dhammam abhijaññā
ajjhattam atha vā pi bahiddhā,
na tena thāmaṃ kubbetha,
na hi sā nibbuti sataṃ vuttā:

918 seyyo na tena maññeyya
nīceyyo atha vā pi sarikkho ―
puṭṭho anekarūpehi
nātumānaṃ vikappayan tiṭṭhe.

919 Ajjhattam eva upasame,
nāññato bhikkhu santim eseyya:
ajjhattaṃ upasantassa
n’ atthi attā, kuto nirattaṃ vā.

920 Majjhe yathā samuddassa
ūmi no jāyatī, ṭhito hoti,
evaṃ ṭhito anej’ assa:
ussadaṃ bhikkhu na kareyya kuhiñci”.

921 “Akittayi vivaṭacakkhu
sakkhi dhammaṃ parissayavinayaṃ,
paṭipadaṃ vadehi, bhadante,
pātimokkhaṃ atha vā pi samādhiṃ”.

922 “Cakkhūhi n’ eva lol’ assa,
gāmakathāya āvaraye sotaṃ,
rase ca nānugijjheyya,
na ca mamāyetha kiñci lokasmiṃ.

923 Phassena yadā phuṭṭh’ assa,
paridevaṃ bhikkhu na kareyya kuhiñci,
bhavañ ca nābhijappeyya
bheravesu ca na sampavedheyya.

924 Annānam atho pānānaṃ
khādaniyānaṃ atho pi vatthānaṃ
laddhā na sannidhiṃ kayirā,
na ca parittase tāni alabhamāno.

925 Jhāyī na pādalol’ assa,
virame kukkuccaṃ, na-ppamajjeyya,
atha āsanesu sayanesu
appasaddesu bhikkhu vihareyya.

926 Niddaṃ na bahulīkareyya,
jāgariyaṃ bhajeyya ātāpī,
tandiṃ māyaṃ hassaṃ khiḍḍaṃ
methunaṃ vippajahe savibhūsaṃ.

927 Āthabbaṇaṃ supinaṃ lakkhaṇaṃ
no vidahe atho pi nakkhattaṃ,
virutañ ca gabbhakaraṇaṃ
tikicchaṃ māmako na seveyya.

928 Nindāya na-ppavedheyya,
na uṇṇameyya pasaṃsito bhikkhu,
lobhaṃ saha macchariyena
kodhaṃ pesuṇiyañ ca panudeyya.

929 Kayavikkaye na tiṭṭheyya,
upavādaṃ bhikkhu na kareyya kuhiñci,
gāme ca nābhisajjeyya,
lābhakamyā janaṃ na lāpayeyya.

930 Na ca katthitā siyā bhikkhu,
na ca vācaṃ payuttaṃ bhāseyya,
pāgabbhiyaṃ na sikkheyya,
kathaṃ viggāhikaṃ na kathayeyya.

931 Mosavajje na niyyetha,
sampajāno saṭhāni na kayirā,
atha jīvitena paññāya
sīlavatena nāññam atimaññe.

932 Sutvā rusito bahuṃ vācaṃ
samaṇānaṃ puthuvacanānaṃ
pharusena ne na paṭivajjā,
na hi santo paṭisenikaronti.

933 Etañ ca dhammam aññāya
vicinaṃ bhikkhu sadā sato sikkhe,
‘santī’ ti nibbutiṃ ñatvā
sāsane Gotamassa na-ppamajjeyya.

934 Abhibhū hi so anabhibhūto
sakkhi dhammaṃ anītiham adassī
tasmā hi tassa Bhagavato sāsane
appamatto sadā namassam anusikkhe”
ti Bhagavā ti

* 각주   [ + ]

1. “평온”이라 함은, 혼침・수면, 도거・악작 등 침체되거나 들뜨는 등의 장애(五蓋)가 완연히 걷혀 “환히 빛나는 心”이 온전히 드러난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心이 동요하지 않는 “不動心”에서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2. 이 때의 “취함”은 연기의 “取” 지분을 말한다.
3. “적멸寂滅(nibbuti)”과 “열반(nibbāna)”은 같은 어근에서 의미가 분화된 것이다.
4. “생각하는 자”로 옮긴 “mantā”는 어형상 다른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명사 ‘mantar’의 단수, 주격으로 읽었다.
5. “그것을 가지고 강고함에 이른다”는 말은, ‘법을 가지고’, ‘법을 붙들고’ 마침내 “강고함”(견고함・굳셈)에 이른다는 의미로 읽힌다. 법을 확연히 알지 못할 경우, 식과 명색의 互緣에 의해 세간이 구르기 시작하고 존재가 탄생한다. 세간의 모든 존재는 결국 존재성을 획득・유지하려고 강고하게 버틴다. 강고한 존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존재는 강고하다.
6. “이것을 가지고”에서의 “이것”은 다음 행에서 언급될 “따로 사유된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7. “자신(ātuman)”은 일반적으로 “我(attan, Sk.ātman)”와 같은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따로 사유된 자신(ātumā vikappaya)을 세운다”라는 표현은, 개별화하는 사유에 의해 “자신” 내지 “我”가 존립함을 말해 준다.
8. “화답하다(kitteti)”라는 낱말은 그 용례로 볼 때 질문자가 흡족한 답변을 얻었을 경우에 쓰인다. 질문자는 앞서 “여읨”과 “평온처”에 대해 물었는 바, 제916송~제918송은 “여읨”을, 제920송~제921송은 “평온처”를 답한 내용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경우, “여읨”은 “희론”, “법”, “我”와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 “觸에 의한 접촉”에서 “觸”은 식・명색・육입의 삼사화합三事和合을 말한다. 이 게송의 다음 행에서 언급되는 “비탄”, “有”는 다름아닌 이른바 십이연기에서의 “有”와 “(우비고뇌의) 悲”를 말한다. “두려움”은 유・생・노・사・우비고뇌에서 비롯하는 근본적인 두려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이 게송은 연기의 압축적 서술이다.
10. 질문자의 두번째 질문 내용은 “위험을 삼가는 律”, “딛을 걸음”, “율의”, “삼매”, 그리고 “자내증의 法”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제922송은 “위험을 삼가는 律”, 즉 육근수호를, 제923송은 “딛을 걸음”, 즉 중도를, 제924송~제932송은 “율의”, 즉 구체적인 계율을, 제933송은 “삼매”를, 마지막 제934송은 “自內證의 法”을 화답한 것으로 보인다.
11. “산만함”으로 옮긴 “kukkucca”는 고대 한역으로는 “惡作”으로 번역되었으며, 근래에는 일반적으로 “후회”로 번역되고 있다. 그간 심계발心啓發과 관련한 경문들을 살펴본 바에 따르면, “도거・악작”은 心에 미세한 장애로 작용하는 ‘산란함’과 ‘산만함’으로 해석하고 싶다. “후회”라는 번역어는 “kukkucca”를 잘못 이해한 결과물로 보인다. 이 게송에서도, 차분히 가라앉지 못하고 산만한 맥락에서 “kukkucca”가 언급되고 있다.
12. “점성占聲”은 새나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고 점치는 것을 말한다.
13. “점지”는 점지하여 아이를 수태시키는 것을 말한다.
14. “macchariya”는 흔히 “인색함”으로 번역되고 있지만, 여러 경문에서 이 번역어가 잘 들어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어원을 고려할 때, 뭔가가 없어서 “아쉬워하는 것”, “부러워하는 것”, 즉 탐욕의 이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아쉬움”으로 옮겼다.
15. 제924송부터 여기 제932송까지는 출가비구가 지켜야 할 “율의(波羅提木叉)”의 구체적인 내용을 열거한 것으로, 숫타니파타 “팔송품”의 고층성古層性에 비춰볼 때,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계율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16. “분별하는 비구(vicinaṃ bhikkhu)”의 “분별하다(vi-cinati)”는 “쌓다, 모으다(cinati)”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쌓고 모으고 붙드는 것’이 아니라 ‘구분하고 나누고 분산하는 것’을 말한다. 앞서 숫타니파타 4.13경의 “분간하다(nic-cinati)”와 어근이 같다. “법을 요지하고서 분별한다” 함은, 더는 법에 사로잡히거나 법을 붙들지 않을 만큼 법을 분별하고 분간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 공부여정을 거쳐 마침내 법이 현현하는 것을 직접 증험하여 보게 된다. “법”은 파악하거나 정의할 수 있는 명색이나 대상이나 개념이 아니며, ‘(오염원이 걷힌) 心이라는 거울’에 비치면서 현현할 뿐이다. 장부 「대반열반경」과 상응부 55.8경에서 언급되는 “법경法鏡(dhammādāsa)”은 ‘법을 비추는 거울’, 즉 “(법이 비칠 만큼 오염원이 완연히 걷힌) 환히 빛나는 맑은 心”을 비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오염원이 침범하여 心을 매몰시킬 경우, 법은 더 이상 현현하지 않으며, 다만 삼사화합의 觸에 의해 연기되어 수・애・취・유・생・노・사・우비고뇌로 윤회할 뿐이다. 경전에서 말하는 “心”은 ‘청정심’을 가리키는 것이지 우리가 흔히 알고 쓰는 ‘마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17. 경명이 “빠름 경(Tuvaṭakasutta)”인 이유는 “평온(santi)”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중부 제152경의 용례를 보면, 감각기관을 수호할 경우 손가락 튕기는 순간처럼 “빠르게” 쾌・불쾌가 사라지고 무심(捨)이 확립된다고 설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희론의 뿌리”를 부숴 버리고 안팎으로 그 어떤 법이든 붙잡지 않을 경우, 안으로 고요하여 “빠르게” 평온에 이른다. 이와 같은 “평온처”에 이르기 위해 지켜야 할 율의, 삼갈 律, 자내증의 法이 있다는 게 이 경의 요지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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