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층대, 구층난야, 구층암
예로부터 암자 이름의 끝말로는 ‘난야’, ‘정사’, ‘암’, ‘대’ 등등이 쓰였다. 구층암도 이러한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아, ‘구층난야’, ‘구층대’, ‘구층암’으로 불린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먼저 <화엄사사적>(1924)을 보면 ‘구층난야’라는 이름이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나며 이후 ‘구층대’라는 이름이 뒤이어 나타난다. ‘구층대’라는 이름은 1937년의 <구층대상량문>의 제명에서도 보이는 바, 이 상량문은 과거의 역사를 충실히 이어받은 기록이라는 점에서 ‘구층대’라는 명칭이 이전부터 두루 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외 박한영 스님이 쓴 1941년의 <화엄사포월대선사진영> 찬문에서도 보이는데, 이 찬문에서는 구층대를 수식하여 ‘구층향대’라고 칭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현칙 스님의 <산중일기>에 보면 1950년대에 지리산 일대의 사찰과 암자를 만행한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서도 ‘구층대’로 부르고 있다.
현재의 암자 이름인 ‘구층암’은 1899년 매천 황현이 쓴 <중수구층암기>의 제명에서 최초로 확인되며, 이후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1918), <속수구례지>(1961) 및 일제강점기의 관련 기록들에서 두루 확인되고 있다. 현재 구층암에 들 때 처음 보이는 <구층암>이라는 편액은 걸려 있는 위치로 보나 서법으로 보나 근현대에 쓴 글씨로 추정된다.
구층암 편액. 본존요사에 걸려 있는 이 편액은 근현대 글씨로 보인다.
위와 같은 사료들을 종합하여 볼 때, ‘구층난야’ 내지 ‘구층대’가 ‘구층암’보다 유서 있는 이름이며, 근현대기에는 ‘구층대’와 ‘구층암’이라는 이름이 한동안 병행하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층대’라는 이름은 수행자들의 기록에서 줄곧 등장하는 반면, ‘구층암’이라는 이름은 학자들의 붓끝에서 시작되어 보편화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세간에는 예로부터 이 암자에 구층석탑이 있었기 때문에 ‘구층암’이라는 이름이 생겼을 것이라고 알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추정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정은 화엄사를 종합적으로 안내한 <화엄사>(일지사, 1976)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어 이후 문화재 관련 도서들에 파급된 것으로 짐작된다. 1961년에 석탑 부재들이 수습되어 세워진 현재의 삼층석탑과 암자 주위에 널려 있는 석재들을 살펴볼 때 구층석탑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 아울러, 구층탑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모든 도서들이 아무런 문헌적·실질적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오로지 ‘구층암’이라는 이름을 유추해서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몹시 의아하다.
앞서 말했다시피 암자의 이름이 ‘구층난야’, ‘구층대’, ‘구층암’ 등으로 불리다가 최종적으로 구층암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으나, 정신사적 배경을 볼 때 ‘구층대’라는 이름이 암자의 근본 취지에 부합한다고 본다. 특히 수행자의 가풍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구층대’라는 이름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격의 규모가 암자임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구층암’이라는 이름이 훗날에야 대외적으로 널리 쓰인 듯하다.
구층대
그렇다면 ‘구층대’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현존하는 문헌들 중에서 구층대를 언급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노자의 <도덕경>으로, “구층의 누대九層之臺도 한 줌의 흙으로부터,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구절에 등장한다. 구층대九層臺 는 구층지대九層之臺를 약칭한 것으로, 예로부터 인간이 건축할 수 있는 최대·최고의 건축물을 상징했다.
그리하여 구층대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대한 비유이기도 했다. 예컨대, 성현의 지위를 논함에 있어서 최고의 지위인 성인을 구층대에 오른 이로 비유하기도 하며, 선불교 문헌에서는 깨달음의 궁극을 구층대로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면, <만선동귀집>에서는 “돈頓은 종자를 이미 싸고 있는 것과 같으며 […] 또 구층지대를 보는 것과 같으니, 곧 단박에 보느니라”(頓如種子已包[…]又如見九層之臺則可頓見)고 언급하고 있다. 이밖에 규봉종밀의 돈점론에서도 비슷한 맥락에서 구층대를 언급하고 있다.
산승들은 이러한 정신사적 배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학자들이 편의상 ‘구층암’이라고 칭하던 시기에도 굳이 ‘구층대’라고 칭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구층암’이라는 이름이 구층대의 정신사적 배경을 지운 것은 아니니 ‘구층대’ 대신 ‘구층암’으로 불리는 것을 아쉬워할 것은 없겠다. 다만 ‘구층암’이 ‘구층대’에서 유래했음을 아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러나 구층탑이 있었기 때문에 구층암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주장은 위와 같은 수행자의 가풍을 간과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겠다.
화엄사 계곡을 따라 구층암에 들 때 거치는 대숲 길. 구층암 입문 역할을 하고 있다.
“1772년, 봉암장로 등이 구층난야에서 경찬법회를 베풀다.” ─ <화엄사사적>은 구층암의 중수와 관련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수백년 전의 노장 스님들은 과연 ‘구층’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누구나 그 의도를 상상할 자유가 있겠지만, 우리는 “단박에 깨치는 것은 마치 구층대를 봄과 같으니 곧 단박에 볼 수 있느니라”는 돈견頓見을 삼가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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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보전(千佛寶殿)
천불보전은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불전으로, 정면의 어간이 양 협간보다 두배 정도 넓다. 화려한 다포양식의 팔작지붕으로 아담한 규모에 비해 장중하고 화려한 맛을 풍긴다. 내부에는 아미타불과 천불상 및 제석탱이 봉안되어 있다.
어간의 문살은 소슬살문이며 좌우 협간의 문살은 빗살문이다. 화엄사 원통전과 대웅전의 문살도 역시 빗살문으로 깔끔한 맛을 풍긴다. 이와 대조적으로 어간의 소슬살문은 단아한 가운데 화려한 멋이 숨어 있다.
기둥 위 주심포 밑에는 거북의 등에 올라탄 토끼상이 조각되어 있어 민속적인 흥미를 일으키고 있으며, 어간 기둥머리에는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살미가 역동적으로 뻗어오르는 위에 연꽃봉오리가 벙글어 있어 아담한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잡화엄식의 장중한 맛이 있다.
수세전(壽世殿)
수세전은 팔작지붕에 정면 두 칸, 측면 1칸의 칠성각이다. 내부에는 근래에 봉안한 산신탱과 칠성탱이 있다.
수세전은 초라한 듯하면서 예쁘다. 창방에 민화풍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이채롭다.
선실(禪室)
선실은 모과나무 그대로 건물의 기둥을 삼은 것으로 잘 알려진 요사채이다. 좌우에 방장실을 두고 가운데에 큰방을 둔 구조로서, 역사적으로 선실·강원·결사도량 등으로 쓰였던 까닭에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가령, “선원”을 비롯하여 “강원”, “본존요사”, “대방채”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선원”·“강원”·“본존요사” 등의 이름은 당대의 쓰임새에 맞추어 명명되었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으며, “대방채”라는 이름은 큰방을 둔 요사채로서 다용도 건물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현재에는 다실(茶室)로 쓰이고 있으므로 “다실”로 불려도 무방하나, 과거 이곳이 용맹정진 선원으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유서 있는 역사적 도량이라 할 것이므로 그 전통을 존중하여 “선실”이라 부르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선실”이라는 이름의 사용은 한국불교연구원에서 펴낸 한국의 고찰 제8권의 «화엄사»(일지사, 1976년)에 보인다.
선실은 팔작지붕에 정면 7칸, 측면 4칸이다. 어느 건축가는 이 선실의 건축에 감명을 받고 “자연주의 건축”이라 명명했다.
삼층석탑
삼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었다. 1961년 각황전 보수작업에 참여한 드잡이 김천석과 신영훈 목수 일행이 구층암 일대에 흩어져 있던 석탑 부재들을 찾아내어 복원한 것이다. 현재 구층암 뜨락에는 또 한 기의 삼층석탑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석탑 부재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탑신 1층 앞면에는 여래좌상을 새겨놓았으나, 탑의 본래 앞면이 어느 쪽이었가는 확실하지 않다. 아울러 탑의 위치 또한 절집의 향배와 어긋나는 면이 있다. 탑의 원위치와 관련해서는 추측만 있을 뿐 확실한 자료는 없다.
신라말에서 고려초로 연대를 잡는다.
단정한 맵시를 자랑하는 이 석탑은 일류봉 쪽에서 해가 뜰 때 여래좌상이 그림자를 떨어뜨리며 선정에 든 상호를 밝게 드러내신다.
석등과 배례석
삼층석탑과 마찬가지로 1961년 각황전 보수작업에 참여한 드잡이 김천석 일행이 복원한 것이다. 당시 구층암 주변에 흩어져 있던 지대석·하대석·옥개석 등 부재들을 수습하였으나 기둥돌과 불박기집은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남은 부재의 규격에 맞게 기둥돌과 불박기집을 새로 만들어 세웠다. 이 석등은 옛 장인의 솜씨를 이어받은 뛰어난 현대 장인의 안목과 옛 부재가 결합하여 세워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불보전 앞에 있는 이 석등은 높이 2.4미터로 기본적인 8각석등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석등 양식은 일반적인 신라 석등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제작연대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석등 앞에 놓인 배례석은 옆면에 무늬곽을 베풀고 윗면 한가운데에는 연꽃무늬를 새겨놓았다.
(2009년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