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번역본이 공역으로 출간되었다. 블로그에 《비극의 탄생》 관련 첫 글을 쓴 게 2005년, 12년 만이다. 내 청춘을 위로해 주었고 서양 고대언어를 공부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던 니체, 그리고 불교를 공부하면서 새롭게 보였던 니체. 그러나 나는 사십대에 접어들면서 니체를 한 시절 벗으로 생각하고 추억 저편으로 떠나보냈다. 한때는 《비극의 탄생》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두 텍스트만큼은 반드시 내 손으로 번역하여 니체를 위로해 주어야겠다는 뜻을 품기도 했지만, 불교공부를 하면서 그 뜻마저 흘려보낼 줄 알게 되면서 나와 니체는 더 이상 인연이 없을 줄 알았다.
프리드리히 니체, 김출곤ㆍ박술 옮김, 《비극의 탄생》(읻다 2017). 스물 여덟에 쓴 《비극의 탄생》은 니체의 저술 중에서도 난해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실험적인 문체와 고조된 감정, 암호 같은 의미분절이 있으며, “희귀한 예술경험”을 함께 겪은 자가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서술로, “지식인이라는 세속의 평신도”를 차단하는 도도하고 열광적인 책으로서 쓰여졌다. 니체 자신의 평가처럼 니체 사상이 지속적으로 생장했던 토양이었으며, 학문과 지식인의 시류에 반하는 “새로운 영혼”의 반시대적ㆍ영웅적 진군이었다.
읻다 프로젝트의 최성웅 대표가 내게 연락해 온 것은 3년 전이었다. 그전에도 몇 군데 출판사에서 연락을 해오기도 했지만, 모두 번역문에 대해 스스로 평가할 수 없었던 이들인지라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서양인문학을 공부하다가 도중에 작파하고 불교공부로 돌아선 학계 바깥의 인물이 번역한 결과물을 누가 수용해 줄지 의문이었던데다가, 적어도 내가 이해한 니체 텍스트에 대하여 출판 관계자 스스로 평가하고 확신할 수 있어야 출간작업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성웅 대표는 번역 원고를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에 만났다.
박술 선생과 함께였다. 조부께서 논어 술이편의 “술이부작述而不作”에서 따와 지은 이름이라던데, 일반적으로 이 구절을 두고 공자가 “作”할 수 있는 수준의 분인데도 겸양하게 다만 “述”할 뿐이라고 하신 것으로 읽는다. 하지만 나는 “述”이란 고금을 통하는 지혜가 있어 새로운 언어로 옛 것을 생생하게 되살려내 전술傳述하는 것으로 읽고 싶으며, “作”이란 그 지혜가 없기에 어쩔 수없이 옛 것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려 해석하는 것, 즉 “지어내는 것”으로 읽고 싶다. “부지이작不知而作”, 즉 모르기 때문에 짓는 것이지, 아는 자는 짓지 않는다. 아는 자는 수백년의 세월을 꿰뚫는 지혜가 있기에(즉 수백년을 산 팽조의 삶과 다름없기에), 고금을 아울러 현재의 언어로 “述”할 수 있으며, 하여 옛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술이부작述而不作”과 관련한 이 간단한 견해를 말하려면, 하나의 종교적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는 기존 해석을 건드려야 한다. 언어는 이와 같은 투쟁이 벌어지는 야전이며, 때로는 위계ㆍ패권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는 니체의 언어도 이와 같은 투쟁이 벌어지는 야전이라고 본다. 준비되지 못한 자가 쉽사리 헤엄칠 수 있는 개울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니체를 번역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본다. 나의 경우에는 독일어의 극미한 뉘앙스 포착에 늘 아쉬움이 있어서 그 부분의 보완이 필요했다.
어렸을 때부터 독일에서 생활한 박술 선생의 독일어는 완벽했다. 거의 모든 독일어 낱말의 뉘앙스를 숱한 용례를 들어 내게 설명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삼십대에 접어드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사람을 대하는 자세, 의견을 묻고 반박하고 논의하는 품이 정교하고 원숙했다. 스무 해 조금 못 미치는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함께 텍스트를 읽고 논할 만한 상대였다. 그리하여 니체를 함께 읽으며 배우고 싶다는 바람에서 시작된 3인의 니체 독해 모임은 어느새 번역 모임으로 바뀌었고, 박술ㆍ김출곤 공역으로 《비극의 탄생》을 번역, 출판하기로 뜻을 모았다. 최성웅 대표는 2년 반 가까이 지속된 번역 모임 대부분을 매주 함께하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의 용기와 열정이 없었다면 나의 니체 번역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공동번역은 서로에게 커다란 배움이 되었다. 세대차로 인한 우리말 감각의 차이, 독일어 이해의 간격, 문장과 낱말을 다루는 자세와 텍스트를 독해하는 시각의 다름 등등, 처음에는 서로 간에 이견이 많았다. 특히 나 같은 경우에는 고전문헌학을 공부한 탓에 낱말 하나하나, 어투, 문체와 어순에 대한 고집스런 집착이 있었다. 나는 공동번역을 진행하면서 그와 같은 집착을 하나하나 깨가면서 니체의 초기 문체를 다루는 수완을 터득해 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2회에 걸친 공동검토가 마무리될 무렵에는 독일어든 우리말이든 텍스트를 장악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래서 십여년 전 이 블로그에 흥미 삼아 조악하게 번역해 올렸던 번역문과는 전혀 다른 문체, 훨씬 높은 수준의 원고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커다란 진전은, 박술 선생의 수많은 비평과 대안 제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정암학당 초대 학당장이신 김인곤 선생님과 출판사 편집자 선생님도 중간부터 동참하여 비평을 더해 주신 덕분에 복에 겨운 번역작업을 한 셈이었다.
나의 첫 번역이 공동작업을 통해 공역서로 나온 것은 행운이다. 문장을 둘러싼 여러 분의 반응을 직접 확인해가면서 번역의 기본 골격을 익혔으며, 난해한 니체 텍스트의 의도를 상대에게 이해되도록 설명하고 논의할 기회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나는 독일어 낱말과 문장 구조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수많은 텍스트 오독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공동번역을 통하여, 한 명의 역자일 때 저지를 수 있는 불각의 실수와 오류들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다. 그 결과 기존 우리말 번역서들의 성과를 뛰어넘는 탄탄한 번역이 탄생했다고 자부하지만, 평가는 역자의 몫이 아니라 독자들의 몫이겠으므로 향후 비평의 견해를 달게 받아야 할 것이다.
이 번역서는 소위 ‘니체 마니아’를 위한 번역이다. 니체 독일어에 대한 문헌학적 접근과 개념적 엄밀성을 가급적 유지함으로써 니체 사상의 난해함과 충격을 훼손하지 않으려 하였으며, 그러면서도 흡입력 있게 잘 읽히도록 우리말 문장과 어순, 역어를 다각도의 시선으로 조율하면서 퇴고를 거듭했다. 이제 그 결과물이 손을 떠났으니, 부디 니체를 아끼시는 분들께, 니체를 소중하게 품고 계신 분들께 기쁨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니체 번역은 앞으로도 계속할 예정이다. 물론 출판사 사정과 《비극의 탄생》 번역본에 대한 독자들의 호응도와 평가에 따라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어 《비극의 탄생》으로 그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한들 아쉬움은 없다. 내 청춘을 위로해 준 니체에게 진 빚을 일부나마 갚았기 때문이다. 우상의 황혼, 선악 너머, 이 사람을 보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적어도 이들 작품은 번역하고 싶지만, 세간사가 뜻대로 이루어질 필요는 없는 것이니 그저 간간이 니체 저술을 들춰보며 한 줄기 스치는 바람의 인연으로 대하리라.
《비극의 탄생》은 이토록 문제적인 작품이다. 문헌학계가 보기에는 촉망받던 젊은 학자의 죽음이요, 바그너가 보기에는 자신의 필생의 과업을 선전할 젊은 영웅의 등장이며, 훗날의 니체가 보기에는 너무 어마어마한 문제를 새파란 나이에 때 이르게 풀어내고자 악전고투한 결과물이다. 오늘날에는 《비극의 탄생》이 철학서로 다루어지는 까닭에 이 책의 문제성에 대해 선뜻 수긍하기 어려울지 모르겠으나, 학자로서의 니체의 생애를 종식시킬 정도로 파급력이 큰 도발이었으며, 니체의 생애를 결정적으로 뒤바꾼 하나의 운명, 《비극의 탄생》의 표현을 빌면, 니체라는 비극적 영웅을 세계의 무대에 출현시킨 디오니소스적 분출이었다.
— 〈작품 해제〉 중에서
“《비극의 탄생》은 나에게 모든 가치의 첫 번째 전도顚到였다. 하여 나의 의욕과 나의 능력이 생장하는 토양으로 나 다시 돌아가 서노라, 나,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가, 나, 영원회귀의 스승이…”(KSA 6,160)
선생님의 니체 번역을 읽고 싶다는 소망을 몇년전에 방명록에 올렸던 사람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주문했습니다. 앞으로 번역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언젠가는 제가 영역본으로 즐겨 읽던 “이 사람을 보라”도 제대로 된 한글번역으로 읽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인생 길에 벗하여 주시고 오랜 세월 기다려 주셔서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축하 축하 드립니다.
고싱가 님의 숲속에서 크게 자리하고 있는 니체의 영역을 일부러 외면하고 전혀 읽어보지 않았던것은, 저 자신의 의식속에 남아있는 니체를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 다시 읽는다는 것이 어쩌면 순수했던 내 개인적인 만남을 훼손할 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기피증이었겠지요.
그런데 몇년전에 칼 구스타프 융(Jung)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같은 시대에 가까이에 스치며 살았지만 전혀 서로의 사상을 나눈적도 없고 만난적도 없는 것 같은 니체와 융이 대비되어 느껴지면서 특히 정신병리학적인 시각으로 니체를 평가한 융의 개인적 견해가 아주 흥미로워서 언제 시간이 나면 다시 니체를 한번 읽어봐야겠다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반가운 소식이군요.
고싱가님의 새 번역본으로 다시 읽어본다면 거의 50년만에 다시 니체를 만나보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성장기에 빠져서 흠모했던 니체와 인생의 후반기에 다시 만나는 니체가 얼마나 다르게 닥아올지 기대가 됩니다.
노고에 감사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읽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자등루 님께서도 니체와 인연이 깊으셨군요.
예전에 이 블로그 글을 읽으시는 분을 오프라인에서 뵌 적이 있는데, 그분께서도 니체 관련 글만 빼고 다 읽었다고 하셨습니다. 별다른 이유는 말씀 안하시고요. 그분도 아마 선생님과 비슷한 인연이 있지 않았을까 돌아보게 되네요.
기존 대부분의 번역서에서 놓친 부분들을 놓치지 않고 살려냈다는 자평을 하고 싶고, 다름아닌 니체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신 분들께만큼은 반가운 소식이 될 것으로 봅니다. 선생님께도 자그마한 기쁨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오랜만에 들어왔더니 좋은 소식이 있네요. 니체에 문외한 이지만 번역하신 도서 읽어보고싶어 주문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