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2“어디에서 다툼과 쟁론,
한탄과 슬픔과 미혹,
자만과 오만, 비방이 일어납니까?
그것들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이를 말씀해 주십시오!”863“사랑하는 것에서 다툼과 쟁론,
한탄과 슬픔과 미혹,
자만과 오만, 비방이 일어나나니,
다툼과 쟁론은 미혹에 얽매인 것이요,
비방은 쟁론에서 생겨난 것입니다.”864“실로 세간에서 사랑하는 것들,
혹은 세간을 돌아다니는 탐욕들은 어디에서 인연하며,
바라는 것들, 의지하는 것들,
즉 사람들이 미래를 위해 기대하는 것들은 어디에서 인연합니까?”865“세간에서 사랑하는 것들,
혹은 세간을 돌아다니는 탐욕들은 욕구에서 인연하며,
바라는 것들, 의지하는 것들,
즉 사람들이 미래를 위해 기대하는 것들도 욕구에서 인연합니다.”866“그러면 세간에서 욕구는 어디에서 인연하며
변별들은 어디에서 일어나며,
발분發憤과 망언妄言과 의문,
혹은 사문에 의하여 법들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어디에서 일어납니까?”867“세간에서 ‘호好ㆍ불호不好’라고 하는 것,
그것을 의지하여 욕구가 생겨납니다.
대상(色)들에서 비존재와 존재를 보고서
세간의 유정은 변별을 짓습니다.868발분과 망언과 의문,
이것들 역시 바로 두 겹으로 법들입니다.
의문이 있는 자는 앎의 길에 이르기 위해 배우십시오,
앎으로써 [그것들은] 사문에 의하여 법들이라고 불립니다.”869“호ㆍ불호는 어디에서 인연하며,
무엇이 없을 때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습니까?
또한 ‘비존재와 존재’라는 것, 그 뜻,
그것은 무엇에서 인연하는 것인지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870“호ㆍ불호는 촉觸에서 인연하는 것,
촉觸이 없을 때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비존재와 존재’라는 것, 그 뜻,
그것을 당신께 말해주노니, 여기에서 인연하는 것입니다.”871“그러면 세간에서 촉觸은 어디에서 인연하는 것이며,
움켜쥔 것들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들입니까?
무엇이 없을 때 ‘나의 것 삼음’이 없으며,
무엇이 없어질 때 촉觸들이 접촉하지 않습니까?”872“명名과 색色을 인하여 촉觸들이 있으며,
바람에서 인연하여 움켜쥔 것들이 있으며,
바람이 없을 때 ‘나의 것 삼음’이 없으며,
대상(色)이 없어질 때 촉觸들이 접촉하지 않습니다.”873“어떻게 계합한 자에게 대상(色)이 없어지며,
또한 안락이나 괴로움은 어떻게 없어집니까?
어떻게 없어지는지, 그것을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제게 있었나이다.”
874“상想의 상想이 있는 자도 아니요, 비상非想의 상想이 있는 자도 아니요,
상想이 없는 자도 아니요, 상想이 없어진 자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계합한 자에게 대상(色)이 없어지나니,
실로 희론戱論ㆍ명명命名은 상想에서 인연하는 것입니다.”875“저희가 여쭈었던 바를 당신께서 명예롭게 하셨나이다.
다른 것을 여쭙겠사오니, 이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실로 어떤 현자들은 이 정도의 궁극을 말하며,
여기에 야차의 청정이 있다고 말합니다.
혹 그중 어떤 현자들은 다른 청정을 말합니까?”876“실로 어떤 현자들은 이 정도의 궁극을 말하며,
여기에 야차의 청정이 있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그들 중 어떤 현자들은 계합을 말합니다,
무의자無依者들을 두고 선덕善德들이라 칭하는 현자들!877이러한 것들 역시 ‘의지물依支物’임을 알고서,
의지처들을 알고서 사량思量하는 자, 그는 모니牟尼입니다.
알고서 해탈하였으니 쟁론에 이르지 않으며
존재ㆍ비존재와 합하지 않나니, 그는 선인禪人입니다.”— «숫타니파타», “다툼과 쟁론 경”(Snp 4.11) 전문
* * *
우리나라의 경우 불교가 선불교 위주로 전승되어 현재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어 있는 까닭에 ‘사량’이라는 낱말은 ‘사량분별’이라는 용어와 함께 매우 부정적인 어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초기불교 경전의 용례를 살펴보면, ‘사량思量(vīmaṃsā)’은 ‘살펴서(思, man) 가려낸다(量, vi)’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매우 긍정적인 용례로 쓰인다.
그래서 이런 용례들을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초기불교의 지적인 전통이 대승불교에 의해 부정되었다고 판단하고, 사유와 합리적인 이해를 복원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매우 그럴싸한 주장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실은 무지몽매한 주장에 불과하여 별도로 반박할 가치도 없다고 본다. 일례로 이 경문에서 말하는 ‘사량’이라 함은, 심리적 장애가 모두 걷히고 청정에 계합한 자만이 가능한 것으로, ‘의지처들을 알고 살펴서 가려내는 것’을 말한다.
의지처? 지금 이 언어를 바탕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느끼는 과정에서 일렁이는 정신적ㆍ심리적ㆍ감정적 물결들이 모두 의지처이다. 언어도 의지처, 생각도 의지처, 감정도 의지처이다. 이런 것들이 의지처라는 것을, 언어적 사고를 거치지 않고서, “존재ㆍ비존재(=시비, 유무)”에 합하지 않고서, 알고서 살펴 가려낼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이 ‘의지처이다(是)’, ‘의지처가 아니다(非)’라는 “시ㆍ비”에 합하지 않고서, ‘의지처’임을 알고 가려낼 수 있는가? 지금 여기에서? 머리와 가슴 속에서 수런거리는 과정 일체를 거치지 않고, 즉 “청정”에 합하고서, 실시간 빈틈없이 ‘의지처들을 알고서 사량’할 수 있는가?
설마하니 ‘의지물, 의지처’를 의지하여 ‘의지물, 의지처’를 알거나 살펴 가려낼 수 있겠는가? ‘의지물, 의지처’를 알고서 살펴 가려낼 수 있는 자는 실은 범부가 아니라 모니牟尼, ‘청정’에 합한 무의자無依者, 시비ㆍ유무에 합하지 않는 선인禪人이다. 이 지점에서 범부는 모름지기 입을 다물고 생각을 그쳐야 한다.
‘의지처들을 알고서 사량함’에서의 ‘사량思量’은 모니의 언어, 무의자의 언어, 선인禪人의 언어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선불교 선사禪師들은 ‘사량’을 쳐버렸을까? ‘사량’이라는 낱말이 범속화되었기 때문이다. ‘사량’을 입에 올리는 인사들이 한결같이 시비ㆍ유무에 함몰된 자들이었고, 그래서 선인禪人이 ‘사량’을 범부에게 말하는 순간 시비ㆍ유무의 그물에 걸리고 말기 때문이다. ‘사량’이 속절없이 ‘시비, 유무’와 동의어가 되는 시절이니, ‘사량’이라는 언어의 효력이 다한 것이다. ‘시비ㆍ유무’와 동의어가 되어버린 ‘사량’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천신의 언어가 범속화됨으로써 마라의 언어가 되고 말았으니, 쳐버린다.
‘청정’은 또 어떤가. 선인禪人이 ‘청정’을 말하여도 범부들에게는 ‘청정’이라는 ‘의지물, 의지처’가 되고 만다. ‘청정’이 범부에게 닿는 순간 즉시 그 반댓말인 ‘의지물’로 번역된다. 범부에게 ‘청정’은 ‘청정’이 아니라 ‘의지물’이다. 범부는 그 어떤 것도 모두 의지물로 만들 수 있다. 그는 마라의 권속이다. 이것이 바로 고금의 성현들이 근심했던 바이며, 부처님께서도 이를 염려하여 “이러한 것들(‘청정’, ‘계합’, ‘무의자’) 역시 ‘의지물’임을 알고서,/ 의지처들을 알고서 사량思量하는 자, 그는 모니”라는 검법을 쓰신다. 이 뜻을 이어받아 금강경의 ‘A는 A가 아니라 그 이름이 A이다’라는 사구백비를 치는 논법이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초기불교 경전에서 ‘사량思量’을 마주치는 순간, 수천년의 언어사, 전승과 절단과 혁신의 역사가 눈앞에 펼쳐져야 한다. 모니의 희유한 언어가 범부의 입을 거침으로써 범속화되고, 후대의 명안明眼이 등장하여 한때 성스러웠으나 범속화된 언어를 쳐내고, 이후 새로운 언어가 출현하는 무림의 역사를 살려낼 줄 알아야 한다. 절단을 통해서 잇는 절묘한 솜씨, 표현으로는 전승을 파괴했으나 뜻으로는 전승에 살과 피를 입혀 되살려낸 살활의 검술, ‘청정’에 합하는 검술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말하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술述’이 아니겠는가. 공자가 ‘술이부작’을 말하고 나서 괜히 팔백년을 살았다는 팽조와 자신을 빗댄 것이 아니다. 언어의 넝쿨을 쳐내고 고금을 꿰뚫는 안목이 있어야, 주희처럼 모르기 때문에 짓는 일(作)을 멀리하고서, 옛과 지금을 노닐며 새로운 언어로 ‘述’할 수 있는 법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즉 옛 언어를 통달하고 새 언어로 술述할 줄 아는 자가 바로 스승이며, 이런 스승이야말로 천년을 산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지금 이 시절의 불교 공부인은, ‘사량思量’의 사례처럼, 경전 언어를 둘러싼 천신과 마라의 누천년 전쟁사를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 기본 자세를 갖추어야만 비로소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 진영 싸움이나 자기만의 전통에 매몰되지 않고,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의 소중한 가르침들을 모두 수용하여 새로운 언어를 내놓을 수 있다. 이 기본 자세에서 출발하여 유장한 호흡으로 세간의 유수한 학자들의 표피적이고 메마른 해석을 흩어버리고, 다툼과 쟁론을 멀리하고, 욕구와 탐욕을 버리고, 호불호ㆍ시비ㆍ유무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촉觸을 넘고 바람을 넘어, 명名과 색色, 희론과 명명, 상想의 폭류를 건너, 청정에 합하고, 무의자로서 모니로서 선인으로서 노닐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의지처들을 알고서 사량思量하리니”, 사량思量하는 자, 그는 더 이상 시비ㆍ유무에 합하지 않으리라!
I have only words to play with…..
바람이 불어 일어나고 뭉치고 회오리치고 흩어지고 사라지고 또 일어나고 뭉치고 흩어지고 사라지고 이리로 저리로 흩날리며 ….. 끊임없이 흘러가는 파동의 물결속에서….
자등루님께서 보신 것처럼, 바람(願)과 바람(風)의 흐름이 동일하지요. 이 바람의 흐름을 보고 들을 수 있다면, «장자» 제물론(齊物論) 첫 장의 극히 아름다운 비유가 금방 간파되실 겁니다.
범부는 무언가를 두고 ‘괴롭다’라는 정의를 내려놓고 그 괴로운 무언가를 해결하려고 애쓰지만, 공부인은 ‘괴롭다’라는 정의를 내리는 자기 내면의 흐름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내면의 흐름, 바람이 어디에서 인연하는지 살필 줄 알아야겠지요.
“다툼과 쟁론 경”은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다툼과 쟁론”, “발분(분노)과 망언(이치에 맞지 않는 말)과 (얽히고 설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어디에서 인연하는지 살피기 시작하면서, “호불호”, “시비·유무”, “삼사화합의 촉”(육입·명색·식), “명과 색”, “바람”, “고와 낙”, “희론과 명명”, “상想”까지 추적해 들어가고, 마침내 나아가 “청정”에 합하는 장엄한 여정의 문답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분노와 망언과 의문”, “호불호”, “시비·유무”가 안(육입)과 밖(명색)이라는 “두 겹”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볼 수 있다면 그 공부인에게 그것들은 바로 “법”이며, 거기에서 비로소 사문으로서의 공부 여정이 시작된다 하겠습니다. (“분노와 망언과 의문”, “호불호”, “시비·유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다툰다면 범부이며, 그것들을 “법”으로 볼 수 있다면 사문이라 하겠지요.)
이 몸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세간이란 없으며, 이 몸 안에 세간이 있으며, 이 몸 안에 세간의 일어남이 있으며, 이 몸 안에 세간의 사라짐이 있으며, 이 몸 안에 세간의 사라짐에 이르는 걸음이 있다는 “로히탓사 경”의 요지는, 이 몸의 인연을 빌어 벌어지는 모든 희노애락이 바로 “두 겹으로 법”임을 아는 데에서 비롯된다 하겠습니다.
“바람이 불어 일어나고 뭉치고 회오리치고 흩어지고 사라지고 또 일어나고 뭉치고 흩어지고 사라지는 (…) 물결”을 알아차려, 마침내 청정에 계합하시기를 빕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래도 인적이 드문 숲에서 이렇게나마 숨을 쉬고, 누군가 남기고 간 발자국을 바라보는 기쁨이 이를데 없이 감사합니다.
솔직히 876 절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정도의 궁극을 말하는 것이 야차의 청정이며 그보다 위의 청정이 계합이라는 뜻인지… 즉 계합을 하여 상이 없어진 자가 야차의 청정이며
또 다른 청정이 있어 계합하여 무의자의 경지가 된다는 것인지…. 설명이 필요하면 좀 부탁드립니다. 문자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만 글자 하나 하나를 꼭꼭 씹어 음미해 봅니다.
바람(願)과 바람(風)의 흐름을 동일한 뜻으로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심전심이라 반갑습니다. 이 심오한 두가지 뜻이 한 단어에 실려있음을 알고는 우리말의 깊이가 절묘하여 속으로 무릎을 쳤댔습니다. 결국, 바람속에 바람이 있고, 또 바람속에서 바람이 일어나 두 차원이 한 단어에 계합이 되었으니….
다툼과 쟁론경은 한국인의 핏줄을 타고난 사람들이 겪는 작금의 세월속에서 누구나 한번 읽어보면 좋치 않을가 하는 적절한 울림을 주는 경이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상想이 있어야 ‘이다/아니다(시비)’, ‘있다/없다(유무)가 가능합니다. ‘이다/있다’는 것도 상想에서 비롯하며 ‘아니다/없다’는 것도 상想에서 비롯합니다. 이 언설을 중첩적으로 적용하면, ‘이것은 상想이다’, ‘이것은 상想이 아니다’도 상想에서 비롯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법은 “때를 기다리지 않는 것(akālika, present)”, “지금 여기”를 떠나지 않는 법이어서, 지금 이 댓글을 읽으시는 동안 뭔가를 음미하고 숙고하고 계셔도, 그렇다고 하여 뭔가를 음미하거나 숙고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셔도, 계속 “상想이 있는 자”로서 “상想에서 비롯한 것들”을 가지고 “이다/아니다라는 상想”을 상想하고 계신 겁니다.
이 지점에서 부처님께서는 “상想의 상想이 있는 자도 아니요,/ 비상非想의 상想이 있는 자도 아니요,/ 상想이 없는 자도 아니요,/ 상想이 없어진 자도 아닙니다”(874)는 말씀을 하시지요. 여기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간디야 경”의 마간디야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지몽매한 가르침”으로 간주합니다. 이해도 불가능할 뿐더러 자신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다”라고 쳐버리니까요. 능엄경의 표현을 빌면, 마치 알고 있었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당혹감에 빠지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입니다. 이는 선가에서 말하는 “백척간두 진일보” 지점이며, 더 이상 발을 디딜 의지처가 없습니다. 선가의 가르침은 대부분은 바로 이 지점에서 벌어지는 문답들입니다. 그리고서 등장하는 말이 바로 “계합”이며 “청정”입니다.
“다툼과 쟁론 경”의 질문자는 미상의 인물입니다만, 이 질문자 역시 “계합”과 “청정”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후퇴합니다. 그 후퇴의 지점(사실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서 던지는 질문이 바로, “어떤 현자들은 이 정도의 궁극을 말하며,/ 여기에 야차의 청정이 있다고 말합니다. 혹 그중 어떤 현자들은 다른 청정을 말합니까?”(875)입니다.
질문자는 “청정이 있다(는 상想)”을 지닌 자로서 “이 정도의 청정(이라는 상想)”을 가지고 “또 다른 청정(이라는 상想)”에 대하여 묻습니다. 질문자 뿐만 아니라 일부 현자들도 일시적으로 청정에 계합하고서 그렇게 “이 정도의 청정(이라는 상想)”을 말하고 가르칩니다. 쉽게 말해, 계합했던 “청정”을 대상화하여 의지물로 만들어 의지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더 이상 “청정”이 아닙니다.
질문자가 후퇴의 자리에서 던진 질문(875)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나아가 그들 중 어떤 현자들은 계합을 말합니다,/ 무의자無依者들을 두고 선덕善德들이라 칭하는 현자들!”(876)이라고 답하십니다. “계합”과 “무의자”를 언급하심으로써 질문자의 의지처, 즉 “또 다른 청정(이라는 상想)”을 쳐버리시는 현장입니다. 부처님의 답은 곧 자등루 님의 “그보다 위의 청정(이라는 상想)”, “계합을 하여 상이 없어진 자(라는 상想)”을 쳐버리는 금강검입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것들 역시 의지물”이라고 답하심으로써 자등루 님께서 품고 계신 “청정(이라는 상想)”, “계합(이라는 상想)”, “무의자(라는 상想)”까지 쳐버리십니다.
그러므로 상想을 가지고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상想을 가지지 않고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계합이라는 상”, “청정이라는 상”, “무의자라는 상”을 가지고도 그것들을 가지지 않고서도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스로가 해결해야 합니다. 나무 아래, 숲속에서, 빈터에서, 동굴에서, 한적한 곳에서, 일실一室에서,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을 곧게 세우고 전면에 유념을 확립하고서, . . .
“실로 어떤 현자들은 이 정도의 궁극을 말하며,
여기에 야차의 청정이 있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그들 중 어떤 현자들은 계합을 말합니다,
무의자無依者들을 두고 선덕善德들이라 칭하는 현자들!
쳐버리신다는 표현으로 덕분에 막혔던 문장의 전체적인 문맥과 대답의 의도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청정(이라는 상想)”, “계합(이라는 상想)”, “무의자(라는 상想)”이라는 말들은 문자들일 뿐, 그 경지를 알수 없는 범부로서는 그저 짐작해 볼 뿐, 매 일초일각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상들의 연속적인 흐름속에서 욕구와 탐욕, 호불호ㆍ시비ㆍ유무의 근원 속에서 휘둘리며 숨쉬고 있는 범부로서 갈 길이 아득함을 느낍니다. 사량에 대해서 좀 더 집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에게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