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6욕락을 갈망하는 자
그것을 성취하면,
바라는 바 얻으매
명멸자여, 참으로 기뻐하는구나.767욕락을 갈망하는 자
욕구에서 태어난 유정有情,
욕락들이 무산霧散하면
화살 박힌 자처럼 괴로워하는구나.768욕락 피하기를
뱀 머리 밟지 않듯 하는 자,
그는 세간에 대한 이 낱낱 집착
유념하여 넘어서노라.769토지와 물질과 황금
소와 말, 노비와 하인
여인과 친족, 갖가지 욕락 —
이것들을 집착하는 사람,770약한 여인들이 남자를 세게 휘어잡듯
곤경困境이 그런 사람을 압박한다.
하여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파손된 배에 물이 스며들듯.771그러므로 유정有情으로서 늘 유념하고
욕락들을 피하라.
욕락들을 버리고 폭류를 건너라,
뱃물 퍼내고 저편 가는 자여!Kāmaṃ kāmayamānassa tassa
ce taṃ samijjhati,
addhā pītimano hoti laddhā
macco yad icchati.Tassa ce kāmayānassa
chandajātassa jantuno
te kāmā parihāyanti,
sallaviddho va ruppati.Yo kāme parivajjeti
sappasseva padā siro,
so imaṃ visattikaṃ loke
sato samativattati.Khettaṃ vatthuṃ hiraññaṃ vā
gavāssaṃ dāsaporisaṃ
thiyo bandhū puthu kāme
yo naro anugijjhatiabalā va naṃ balīyanti,
maddante naṃ parissayā,
tato naṃ dukkham anveti
nāvaṃ bhinnam ivodakaṃ.Tasmā jantu sadā sato
kāmāni parivajjaye.
te pahāya tare oghaṃ
nāvaṃ siñcitvā pāragū ti— «숫타니파타» “욕락경欲樂經”(Snp 4.1) 전문
«숫타니파타»의 네번째 품인 <팔송품八頌品>의 첫 경, 여섯 송으로 된 “욕락경”이다. “욕락”이란 “안ㆍ이ㆍ비ㆍ설ㆍ신에 의해 식별되어 바라고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고 욕심나고 탐나는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토지와 물질과 황금, 소와 말, 노비와 하인, 여인과 친족”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공부가 진척되면 이와 같은 욕락들을 대신하여 다른 욕락들이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전을 읽다보면, 부처님 재세시에 출가비구들이 암송하여 말하는 “경”들이 보인다. 이 경들은 부처님 재세시에 이미 부처님의 말씀이 일부 결집되어 인도 각지 비구들에게 암송되어 전해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일례로 «자설경»의 “소나경”을 확인해 보면, «숫타니파타»의 <팔송품>은 신참 출가비구들이 필수적으로 암송하는 경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나경”의 인연을 보자. 인도 중부(경전에서는 “남부”로 언급된다) 아반티국에서 출가한 신참비구 소나는 극소수의 비구들만 있는 수행 환경을 떠나 세존을 친견하기 위해 장도의 순례길을 오른다. 오늘날 마디아 프라데시의 “인도르”에서 우타르 프라데시 “스라바스티”까지 약 일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걸어 사밧티의 아나타핀디카 정사에 이른다. 족히 한달 이상 걸렸을 것이다. 비구 소나는 정사에 당도하여 자신을 출가시킨 스승의 이름으로 부처님께 문안을 올리고 부처님의 허락하에 함께 머문다. 부처님께서 여러 날 야외에서 지내고 비구 소나도 여러 날 야외에서 지낸다. 그리고 어느 날 부처님께서 발을 씻고 승당에 드시고 비구 소나도 발을 씻고 승당에 든다. 그날 승당에서 하룻밤 함께 묵고 깨어난 이른 새벽, 부처님은 비구 소나에게 이렇게 청하신다.
“그대 비구여, 이리 와 법을 말해 보라”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존자 소나는 세존의 말씀을 듣자와 열 여섯의 팔송품을 모두 암송하였다.
— «자설경» “소나경”(Udana 5.6)에서
“열 여섯의 팔송품”(soḷasa aṭṭhakavaggikāni)이라는 이름은, 품에 있는 열 여섯 경 중에서 네 경이 “팔송”(여덟 연)으로 이루어진 점에 착안하여 붙여진 듯하다. 이를테면 출가한 지 일년 된 신참비구가 어느 날 새벽 사원에서 열 여섯 경을 모두 암송한 것이다.
- 욕락경
- 동굴 팔송경
- 악의 팔송경
- 청정 팔송경
- 최상 팔송경
- 늙음 경
- 팃사 멧테야 경
- 파수라 경
- 마간디야 경
- 부서지기 전 경
- 다툼·쟁론 경
- 결집경·小
- 결집경·大
- 신속경
- 몽둥이 경
- 사리풋타 경
이 열 여섯 경은 모두 운문으로 된 시편으로서, PTS 판본으로 39면 분량이다. 전통적인 게송 낭송방식에 따라 직접 소리내어 낭송해 보니, 정확히 68분이 소요되었다. 이를 암송하여 보통 속도로 좀 더 능숙하게 낭송할 경우 적어도 50~60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므로 신참비구 소나가 부처님과 여러 비구들이 고요히 지켜보는 가운데, 새벽 어스름에 한 시간 가량 홀로 “열 여섯의 팔송품”을 낭랑하게 낭송한 것이다. 이는 대중의 절대적 침묵 속에서 피어오르는 음성, 신참비구의 발원문, 새벽예불과도 같다. 태양의 후예 대영웅 앞에서, 그리고 우러러 뵈는 성자들에 둘러싸인 응집된 시공간에서, 가부좌를 틀고 허리를 곧게 세우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유념하고 알아차리면서,
욕락을 갈망하는 자
그것을 성취하면,
바라는 바 얻으매
명멸자여, 참으로 기뻐하는구나.욕락을 갈망하는 자
욕구에서 태어난 유정,
욕락들이 무산하면
화살 박힌 자처럼 괴로워하는구나.욕락 피하기를
뱀 머리 밟지 않듯 하는 자,
그는 세간에 대한 이 낱낱 집착
유념하여 넘어서노라.토지와 물질과 황금
소와 말, 노비와 하인
여인과 친족, 갖가지 욕락 —
이것들을 집착하는 사람,약한 여인들이 남자를 세게 휘어잡듯
곤경이 그런 사람을 압박한다.
하여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파손된 배에 물이 스며들듯.그러므로 유정으로서 늘 유념하고
욕락들을 피하라.
욕락들을 버리고 폭류를 건너라,
뱃물 퍼내고 저편 가는 자여!
이와 같은 음성이 일천 킬로미터 여정을 답파한 신참비구의 입에서 울려퍼진 것이다. 이와 같은 인연이 있어 “열 여섯의 팔송품” 중 첫 경, “욕락경”은 불문佛門에 갓 들어선 이가 마땅히 수지·독송해야 할 경이 된다.
부처님께서는 “욕락경”을 시작으로 “사리풋타 경”까지 소나 비구의 열 여섯 경 낭송을 한 시간 가까이 침묵으로 들으시고, 다음과 같이 문답하셨다고 한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비구여. 열 여섯의 팔송품을, 비구여, 잘 지니고 잘 유의하고 잘 명심하고 있구나. 그대의 말은 청아하고 낭랑하고 맑으며, 뜻을 알기 쉽구나. 비구여, 그대는 [출가한 지] 몇 해 되었는가?”
“한 해 되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여, 어찌 이리 늦었는가?”
“대덕이시여, 저는 오래 전부터 욕락들에서 환난을 보았음에도 번다한 재가자로서 의무와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 뜻을 아시고 그때 이 자설自設을 읊으셨다.
세간에서 환난患難을 보고
무의無依의 법을 알고
성자는 악을 기뻐하지 않아라,
청정자, 악을 기뻐하지 않아라.disvā ādīnavaṃ loke
ñatvā dhammaṃ nirūpadhiṃ
ariyo na ramati pāpe,
pāpe na ramati sucī ‘ti.— «자설경» “소나경”(Udana 5.6)에서
무외無畏의 대웅大雄과 늙은 신참비구의 새벽예불은 그렇게 완성되었던 것이다. 번다한 세간사에 파묻혀 세월을 보내다가 늙은 나이에 들녘으로 숲으로 산으로 출가한 비구가, 데칸고원에서 출발하여 힌두스탄 대평원을 가로지르고 항하를 건너고 비구들의 숲에 이르러, 마침내 생애에서 가장 거룩한 어느 날 새벽을 맞은 것이다.
간만에 들러서 좋은 글들을 보고 갑니다…
늘 좋은 말씀나눔을 해주심에 감사드리며
좋은 새해를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
좋은 나날 되십시오!
사띠라는 단어 때문에 초기불교에 관심을 가진 봄봄입니다.
사띠(sati/sato)를 ‘념두’로 번역하셨네요.
봄봄은 ‘기억’이라는 의미로 念頭라고 표현하곤 했습니다.
설명과 함께 본문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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慾界 중생은
1. 味 – 원하는 慾(食)을 얻으면 기뻐하지만,
2. 患 – (배가 고프면^^) 화살을 맞은듯 괴로워한다.
3. 離 – 이러한 (味)患을 念頭에 둔 자(sato)는
뱀의 머리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듯이, 조심스럽게 慾을 피하여
世間에서의 갖가지 애착을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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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vā ādīnavaṃ loke [*(味)患을 보고서 그것을 念頭에 둔 자]
ñatvā dhammaṃ nirūpadhiṃ [*우빠디를 벗어남 – 담마(=非依法 !)를 알고서]
(베개/받침/依 – 慾의 대상; 본문에서는 外인 토지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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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_()_
유념으로 쓴다는 것이 념두로 …. ^^
‘사띠’를 ‘기억’으로 옮기는 것은 학자적 관점에서는 옳을 지는 몰라도 실제 수행의 관점에서는 허용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사띠’를 ‘기억’으로 옮기는 순간, ‘사띠’는 머리로 암기하는 등의 인식작용으로 각인되며, 이는 수행자의 관점에서는 수행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기억’이라는 것이 지극히 현대적인 관점의 의미분절을 통해 탄생한 언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고대의 수행자에게 가르침의 ‘암송’ 내지 ‘기억’은 너무나 당연한 과정이어서 그것 자체가 수행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암송한 가르침을 유념 내지 명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유념’이나 ‘명심’을 ‘기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수행의 관점에서 ‘유념’이나 ‘명심’은 마음이나 가슴 전체, 혹은 온몸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기억’은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양자는 뚜렷이 구별됩니다. 그런 점에서 ‘염두’라는 번역어도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혹자는 경전의 정의를 근거로 ‘사띠’는 ‘기억’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경전에서 정의된 팔리어 자체에 대한 해석에 따라 충분히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특히 현대문화에서 ‘기억’이 차지하는 매우 협소한 의미를 고려해야 하며, 고대의 ‘기억’과 현대의 ‘기억’이 일대일로 대응한다고 생각해서도 곤란합니다. 비록 ‘사띠’가 ‘기억’의 의미를 갖고 있다한들, (그리고 ‘기억’으로 옮겨야 할 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고대와 현대의 의미분절이 판이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작정 ‘기억’으로 옮기는 것은 수행에서 치유불능의 손상을 입힐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실수실참을 하시는 입장이라면, ‘기억’이라는 번역어는 도저히 허용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유념’이 ‘기억’까지 포괄하는 개념인만큼, 굳이 협소한 틀의 ‘기억’으로 옮길 이유도 없어 보입니다.
어느 번역어가 옳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해석에 따라 자신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삶이 괴로움의 증가로 이어지느냐, 아니면 괴로움의 소멸로 이어지느냐 하는 갈림이 중요하겠지요. 자신의 해석이 자신의 존재를 만듭니다.
사띠라는 단어가 ‘알아차림’ 혹은 ‘앎’이라는 의미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고,
오히려 ‘기억’이라는 의미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심리현상에서 아주 중요한, ‘기억’이라는 요소를
불교에서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현대용어의 ‘기억’이라는 표현에 상응하는
불교용어가 있다면(수지受持라는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모르겠지만
만약 없다면 현대적 용어인 ‘기억’에 가장 근접한 단어가 사띠라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다만 ‘기억’이라는 표현이 일상용어와의 범주의 충돌을 피할려면
새로운 조어 혹은 기존의 漢譯의 활용 –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 조어 혹은 漢譯에 대해서도 經에서의 용례에 따라 의미규정이 필요하게 됩니다.
언어의 한계, 표현에 대한 각자의 語感차이는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입니다.
유념留念이라는 표현도 사전상 정의는
‘잊거나 소홀히 하지 않도록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여 생각함.’이므로
과거 전생의 사띠(‘기억’)까지 아우르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
대부분 말씀하시는 취지는 이해하였다고 생각하는데….
[무엇보다 실수실참을 하시는 입장이라면, ‘기억’이라는 번역어는 도저히 허용될 수 없습니다.]
…는 말씀의 취지는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번거럽게 하지 않았기를…
자세하고 상세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