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솟아난 분노를 다스리는 비구는
마치 퍼진 뱀독을 약으로 다스림 같아라.
그는 아래든 너머든[1]“아래든 너머든”으로 옮긴 “orapāraṃ”은 숫타니파타의 이 경에만 보인다. “oraṃ(아래, 아래로)”과 “pāraṃ(너머, 너머로)”이라는 두 부사가 결합된 낱말이다. 흔히 “이 세상 저 세상”으로 옮기고 있으나 이는 뚜렷한 경증이 없는 해석이다. “전후상前後想”처럼 심계발과 관련한 표현일 수도 있기에 “아래든 너머든”으로 옮겼다.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2탐貪을 남김없이 잘라버린 비구는
마치 연지蓮池에 뛰어들어 줄기와 꽃을 꺾어버림 같아라.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3애愛를 남김없이 잘라버린 비구는
마치 급류를 말려 강물을 끊어버림 같아라.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4만慢[2]“만慢(māna)”은 흔히 “자만, 오만”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이는 재고해야 한다고 본다. 아라한에 이르기 직전 최후까지 남은 “결박”임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나는 “māna”의 어근이 “√man(생각하다)”보다는 “√mā(재다, 측정하다)”로 보고 싶으며, “māna”를 인식과 존재의 기준점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래서 “아만我慢”으로 번역되는 “asmi-māna”도 “‘나’라는 기준”, “‘나는 있다’라는 기준”, 흡사 데카르트 좌표계의 절대좌표 같은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이 해석은 다음 행의 “약한 갈대둑”이라는 비유와 잘 어울린다. “약한 갈대둑”은 인식체계 및 존재구조인 셈이다. 인간의 인식체계 및 존재구조는 범부에게는 철위산과 같은 것이겠지만, “만慢”을 잘라버린 성자에게는 거미줄처럼 허약한 것이다. “道須通流”라 하였으니, 道는 모름지기 인식과 존재의 둑을 쓸어버리고 통하여 흐르는 것이다.을 남김없이 쳐버린 비구는
마치 대폭류大暴流가 약한 갈대둑을 쓸어버림 같아라.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5유有들에서 심재心材[3]“심재”는 나무의 심을 말한다. “有”(인식ㆍ존재)의 “핵”, “실체”라 하겠다. 이것을 찾아 해매는 자는 꽃이 피지 않는 무화과나무에서 꽃을 찾는 것과도 같다.를 찾지 않는 비구는
마치 무화과나무들에서 꽃을 찾지 않음 같아라.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6안에서부터 일렁임[4]“일렁임”이라 옮긴 “kopa”는 보통 “화, 분노”로 옮긴다. 어원을 살펴보면, “부풀다, 붇다, 일렁이다, 이글거리다, 끓다, 흔들리다, 동요하다”가 기본 뜻이며, 이것이 거칠어지고 강화되어 “화, 분노”로 구체화 된다. 이렇듯 고대언어의 낱말들은 의미의 스펙트럼이 넓어서 번역 및 해석의 허용폭이 상당히 크다.이 없는 비구는
유有ㆍ비유非有일랑 뛰어넘은 자.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7심尋[5]“vitakka”는 고대한역에서 “覺”(구역) 또는 “尋”(신역)으로 옮겼다. “想” 이후 “戱論” 이전에 진행되는 語行으로서 “언어” 이전의 움직임을 말한다. 흔히 “생각”, “사유”로 번역되고 있지만, 현대인의 “생각”, “사유”란 늘 언어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생각과 사유는 “尋”이 아니며 “想”은 더더욱 아니다. 언어를 그물로 비유한다면, “尋”은 언어라는 그물을 짜기 위해 실을 잣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언어라는 그물을 짜기 위해 “내면에서 실을 잣는 움직임”을 관찰한 적이 있는가? 없다면 절대 “尋”에 접근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尋”은 초선初禪의 요건인 것이다. 그런데 그 “尋”마저 흩어져 없어진 비구라면? 최소 第二禪에 入禪한 비구이다.들이 흩어져 없어진 비구는
안으로 남김없이 가지런한 것.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8쓸려가지도 않고 거스르지도 않는 비구는
이러한 희론戱論 일체[6]앞서 비유했던 것처럼 언어를 그물로 비유하자면, 희론(papañca)은 “그물을 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학적으로 말하자면, 의미분절이다. 하나의 언어(=하나의 그물코)를 출현시키기 위해서는 그 언어를 둘러싼 여타 언어들의 연결과 배열이 필요하다. 하나의 언어를 출현시킬 때마다 실시간으로 늘 새로운 그물이 짜여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희론이다. 희론(papañca)의 어원이 “퍼지다, 펼쳐지다, 확산하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언어로, 생각으로 희론이 무엇인지 알려고 한다면? 아들이 어머니를 낳으려고 하는 격이다. 그러니 정확한 개념파악을 통해 희론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낳았다고 주장하는 얼간이에 불과하다.
그러면 왜 여기에서 “이러한 희론 일체”라고 했을까? “이러한 희론 일체”라는 표현 이전의 일곱송에서 출현했던 모든 언어들이 사실은 희론이라는 그물코들의 무한배열을 통해 실시간으로 출현하고 있는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이 “희론”이라는 언어조차도 희론을 통해 지금 눈앞에서 출현하고 있는 것이니 과연 이 리얼타임의 희론을 어떻게 넘어설 것이냐? 여기에서 언어로 이루어지는 모든 움직임, 언어를 출현시키는 일렁임이 그쳐야 한다. 그러면 “想과 尋과 희론과 생각과 언어와 세간”이라는 것은, 쥐려고 하면 바스스 부서지고 마는 허망한 것, “실답지 못한 것”, 즉 “오래오래 묵은 뱀의 허물”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想과 尋과 희론”이라는 “아래”도 버리며, “(想과 尋과 희론을 통해 출현한) 언어의 습격과 세간의 확립”이라는 “너머”도 버리게 된다. 그러한 비구가 “(언어와 세간에) 쓸려가지도 않고 (언어와 세간을) 거스르지도 않는 비구”이다. 그렇게 세간을 알고서 애욕과 탐진치를 떠나버린다.를 넘어선 자.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9쓸려가지도 않고 거스르지도 않는 비구는
‘이것 일체가 실답지 못하다’라고 세간을 아는 자.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10쓸려가지도 않고 거스르지도 않는 비구는
‘이것 일체가 실답지 못하다’라고 애욕을 떠나버린 자.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11쓸려가지도 않고 거스르지도 않는 비구는
‘이것 일체가 실답지 못하다’라고 탐貪을 떠나버린 자.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12쓸려가지도 않고 거스르지도 않는 비구는
‘이것 일체가 실답지 못하다’라고 진瞋을 떠나버린 자.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13쓸려가지도 않고 거스르지도 않는 비구는
‘이것 일체가 실답지 못하다’라고 치癡를 떠나버린 자.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14잠재성潛在性[7]“잠재성”은 “想과 尋과 희론”, 언어의 습격, 세간의 확립을 평생동안 반복하면서 켜켜이 쌓아온 업식, 업장과도 같은 것이다. 한역에서는 “수면隨眠”으로 옮겼다.이 전혀 없는 비구는
불선한 뿌리들이 근절된 것.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15고뇌에서 비롯한 것 전혀 없는 비구는
아래로 도래하는 인연 다한 것.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16우거짐에서 비롯한 것 전혀 없는 비구는
有에 속박되는 원인 다한 것.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17다섯 덮개(오개五蓋)[8]“환하게 빛나는 心”을 가리고 함몰시키는 심리적 그늘이 “다섯 덮개”라고 할 수 있다. 경에서 언급되는 대표적인 다섯 덮개는, “갈구kamacchanda”, “적대vyapada”, “혼침ㆍ수면thinamiddha”, “도거ㆍ악작uddhaccakukkucca”, “의혹vicikicchā”을 말한다. 이와 같은 덮개들은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우며, 수행과 경증을 통해 확인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 다섯 덮개가 “심尋”, “희론”, “애욕”, “탐ㆍ진ㆍ치”, “수면隨眠” 등등과 함께 언급되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를 버린 비구는
동요됨 없고 의문을 건너고 화살을 뽑아버린 자.
그는 아래든 너머든 모두 버리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벗어버리듯.
* 각주
1. | ↑ | “아래든 너머든”으로 옮긴 “orapāraṃ”은 숫타니파타의 이 경에만 보인다. “oraṃ(아래, 아래로)”과 “pāraṃ(너머, 너머로)”이라는 두 부사가 결합된 낱말이다. 흔히 “이 세상 저 세상”으로 옮기고 있으나 이는 뚜렷한 경증이 없는 해석이다. “전후상前後想”처럼 심계발과 관련한 표현일 수도 있기에 “아래든 너머든”으로 옮겼다. |
2. | ↑ | “만慢(māna)”은 흔히 “자만, 오만”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이는 재고해야 한다고 본다. 아라한에 이르기 직전 최후까지 남은 “결박”임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나는 “māna”의 어근이 “√man(생각하다)”보다는 “√mā(재다, 측정하다)”로 보고 싶으며, “māna”를 인식과 존재의 기준점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래서 “아만我慢”으로 번역되는 “asmi-māna”도 “‘나’라는 기준”, “‘나는 있다’라는 기준”, 흡사 데카르트 좌표계의 절대좌표 같은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이 해석은 다음 행의 “약한 갈대둑”이라는 비유와 잘 어울린다. “약한 갈대둑”은 인식체계 및 존재구조인 셈이다. 인간의 인식체계 및 존재구조는 범부에게는 철위산과 같은 것이겠지만, “만慢”을 잘라버린 성자에게는 거미줄처럼 허약한 것이다. “道須通流”라 하였으니, 道는 모름지기 인식과 존재의 둑을 쓸어버리고 통하여 흐르는 것이다. |
3. | ↑ | “심재”는 나무의 심을 말한다. “有”(인식ㆍ존재)의 “핵”, “실체”라 하겠다. 이것을 찾아 해매는 자는 꽃이 피지 않는 무화과나무에서 꽃을 찾는 것과도 같다. |
4. | ↑ | “일렁임”이라 옮긴 “kopa”는 보통 “화, 분노”로 옮긴다. 어원을 살펴보면, “부풀다, 붇다, 일렁이다, 이글거리다, 끓다, 흔들리다, 동요하다”가 기본 뜻이며, 이것이 거칠어지고 강화되어 “화, 분노”로 구체화 된다. 이렇듯 고대언어의 낱말들은 의미의 스펙트럼이 넓어서 번역 및 해석의 허용폭이 상당히 크다. |
5. | ↑ | “vitakka”는 고대한역에서 “覺”(구역) 또는 “尋”(신역)으로 옮겼다. “想” 이후 “戱論” 이전에 진행되는 語行으로서 “언어” 이전의 움직임을 말한다. 흔히 “생각”, “사유”로 번역되고 있지만, 현대인의 “생각”, “사유”란 늘 언어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생각과 사유는 “尋”이 아니며 “想”은 더더욱 아니다. 언어를 그물로 비유한다면, “尋”은 언어라는 그물을 짜기 위해 실을 잣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언어라는 그물을 짜기 위해 “내면에서 실을 잣는 움직임”을 관찰한 적이 있는가? 없다면 절대 “尋”에 접근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尋”은 초선初禪의 요건인 것이다. 그런데 그 “尋”마저 흩어져 없어진 비구라면? 최소 第二禪에 入禪한 비구이다. |
6. | ↑ | 앞서 비유했던 것처럼 언어를 그물로 비유하자면, 희론(papañca)은 “그물을 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학적으로 말하자면, 의미분절이다. 하나의 언어(=하나의 그물코)를 출현시키기 위해서는 그 언어를 둘러싼 여타 언어들의 연결과 배열이 필요하다. 하나의 언어를 출현시킬 때마다 실시간으로 늘 새로운 그물이 짜여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희론이다. 희론(papañca)의 어원이 “퍼지다, 펼쳐지다, 확산하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언어로, 생각으로 희론이 무엇인지 알려고 한다면? 아들이 어머니를 낳으려고 하는 격이다. 그러니 정확한 개념파악을 통해 희론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낳았다고 주장하는 얼간이에 불과하다. 그러면 왜 여기에서 “이러한 희론 일체”라고 했을까? “이러한 희론 일체”라는 표현 이전의 일곱송에서 출현했던 모든 언어들이 사실은 희론이라는 그물코들의 무한배열을 통해 실시간으로 출현하고 있는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이 “희론”이라는 언어조차도 희론을 통해 지금 눈앞에서 출현하고 있는 것이니 과연 이 리얼타임의 희론을 어떻게 넘어설 것이냐? 여기에서 언어로 이루어지는 모든 움직임, 언어를 출현시키는 일렁임이 그쳐야 한다. 그러면 “想과 尋과 희론과 생각과 언어와 세간”이라는 것은, 쥐려고 하면 바스스 부서지고 마는 허망한 것, “실답지 못한 것”, 즉 “오래오래 묵은 뱀의 허물”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想과 尋과 희론”이라는 “아래”도 버리며, “(想과 尋과 희론을 통해 출현한) 언어의 습격과 세간의 확립”이라는 “너머”도 버리게 된다. 그러한 비구가 “(언어와 세간에) 쓸려가지도 않고 (언어와 세간을) 거스르지도 않는 비구”이다. 그렇게 세간을 알고서 애욕과 탐진치를 떠나버린다. |
7. | ↑ | “잠재성”은 “想과 尋과 희론”, 언어의 습격, 세간의 확립을 평생동안 반복하면서 켜켜이 쌓아온 업식, 업장과도 같은 것이다. 한역에서는 “수면隨眠”으로 옮겼다. |
8. | ↑ | “환하게 빛나는 心”을 가리고 함몰시키는 심리적 그늘이 “다섯 덮개”라고 할 수 있다. 경에서 언급되는 대표적인 다섯 덮개는, “갈구kamacchanda”, “적대vyapada”, “혼침ㆍ수면thinamiddha”, “도거ㆍ악작uddhaccakukkucca”, “의혹vicikicchā”을 말한다. 이와 같은 덮개들은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우며, 수행과 경증을 통해 확인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 다섯 덮개가 “심尋”, “희론”, “애욕”, “탐ㆍ진ㆍ치”, “수면隨眠” 등등과 함께 언급되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