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밧티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칼라라캇티야 비구는 존자 사리풋타가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나아가서 존자 사리풋타와 함께 반가워했다. 반가움과 인사를 나눈 뒤 한쪽에 앉았다. 그리고 한쪽에 앉아서 칼라라캇티야 비구는 존자 사리풋타에게 말했다, “몰리야팍구나 비구는, 벗 사리풋타여, 배움을 그만두고 낮은 삶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실로 그 존자는 이 법률法律[1]“법률”(dhammavinaya)은 “법”과 “율”을 나열하는 일반적인 병렬복합어가 아니라 “법”과 “율”이 합하여 한 단위로 취급되는 복합어이므로, “법과 율”보다는 “법률”로 번역함이 문법적으로 옳다. 이 복합어는 “법”과 “율”이 분리되지 않고 연속되어 있음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에서 안식安息을 얻지 못했나 봅니다.”
“실로 존자 사리풋타께서는 이 법률에서 안식에 이르셨습니까?”
“나는, 벗이여, 미혹이 없습니다.”
“그러면 미래는, 벗이여, 어떻습니까?”
“나는, 벗이여, 의혹이 없습니다.”
그때 칼라라캇티야 비구는 그곳에서 일어나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갔다. 나아가서 세존께 예를 올리고 한쪽에 앉았다. 그리고 한쪽에 앉아서 칼라라캇티야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말했다. “존자 사리풋타는, 대덕이시여, ‘生은 다했으며 梵行은 실현되었으며 할 일은 마쳤으며 다시는 이곳을 위함이 없음을 나는 了知한다’라는 智를 답하였습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다른 비구를 부르셨다. “오너라 그대, 비구여, 나의 말을 전하여 사리풋타를 부르라, ‘스승께서 당신을, 벗 사리풋타여, 부르십니다’라고. “알겠습니다, 대덕大德이시여”라고, 그 비구는 세존께 답하고서 사리풋타가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나아가서 존자 사리풋타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승께서 당신을, 벗 사리풋타여, 부르십니다.” “알겠습니다, 벗이여”라고, 존자 사리풋타는 그 비구에게 답하고서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갔다. 나아가서 세존께 예를 올리고 한쪽에 앉았다.
그러자 한쪽에 앉은 존자 사리풋타에게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그대는, 사리풋타여, ‘生은 다했으며 梵行은 실현되었으며 할 일은 마쳤으며 다시는 이곳을 위함이 없음을 나는 了知한다’라는 智를 답하였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그러한 말들과 그러한 표현들로 義[2]“義”(attha, Sk.artha)에 대해서는 앞서 一句의 법에서 간단하게 언급한 바 있으며, 나중에 좀더 상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法門으로든, 사리풋타여, 선남자善男子가 智를 답하면, 그때 답한 것은 답한 것으로부터 보이게 마련이니라.”
“참으로 저 역시, 대덕이시여, 이와 같이,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그러한 말들과 그러한 표현들로 義를 말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나이다.”
“만일 그대에게, 사리풋타여, 어떤 이들이 이와 같이, ‘당신은, 벗 사리풋타여, 어떻게 알고(知) 어떻게 보면서(見), ‘生은 다했으며 梵行은 실현되었으며 할 일은 마쳤으며 다시는 이곳을 위함이 없음을 나는 了知한다’라는 智를 답하였습니까?’라고, 묻는다 하자. 이와 같이 그대에게 묻는다면, 사리풋타여, 어떻게 답할 것인가?”
“만일 저에게, 대덕이시여, 어떤 이들이 이와 같이, ‘당신은, 벗 사리풋타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면서, ‘生은 다했으며 梵行은 실현되었으며 할 일은 마쳤으며 다시는 이곳을 위함이 없음을 나는 了知한다’라는 智를 답하였습니까?’라고, 묻는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저에게 묻는다면, 대덕이시여, 이와 같이, ‘어떤 것을 밑바탕 삼은 것이, 벗들이여, 生이며, 그 밑바탕이 다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다하기에 이르기까지[3]7격 명사변화와 관련해서 엄밀한 접근이 필요한 대목이다. “tassa nidānassa khayā khīṇasmiṃ khīṇāmhīti viditaṃ”에서 7격명사 “khīṇasmiṃ”을 “마침내 다하기에 이르기까지”로 번역한 이유는, 일반적인 7격명사형 “khīṇe” 대신 여기에서는 이형인 “khīṇasmiṃ”을 썼기 때문이다. 이렇듯 7격명사형이 “khīṇe/khīṇasmiṃ”로 달리한 것은 산스크리트어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아무래도 팔리어에서 7격명사의 뜻이 세분화되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단순히 어미만 달리할 뿐 뜻 차이는 없다는 결론은, 「대념처경」에서 “몸에서(kāye) 몸을 관찰한다”와 “集滅法을 관찰하면서 몸에(kāyasmiṃ) 머문다”를 연이어 쓴 용례에 비추어 볼 때 불합리하다. 따라서 어미 “-e”를 취하는 7격명사형과 어미 “-asmiṃ”을 취하는 7격명사형은 그 뜻을 달리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리고 이 경의 후반부에서 “yaṃ kiñci vedayitaṃ taṃ dukkhasmiṃ”(受된 것은 무엇이든 괴로움에 이른다“의 용례도 함께 살펴보면, “-asmiṃ”의 7격명사형이 “종점ㆍ귀착점으로서의 장소”를 가리키지 않나 싶다. 이렇게 볼 경우, 「대념처경」의 “samudayav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ṁ viharati”는 “혹은 集滅法을 관찰하면서 마침내 몸에 이르러 머문다”로, 본 경의 경문은 “그 밑바탕이 다하기 시작하여(5격명사) 마침내 다하기에 이르기까지(7격명사)”로 새길 수 있다. 팔리어 문법서에서는 이와 관련한 언급을 확인할 수 없는 바, 앞으로 여러 경문을 대조하면서 자세히 규명할 일이다. 실로 [그것이] 다했음을 밝히 압니다. 실로 [그것이] 다했음을 밝히 알고서,[4]“밝히 알다”로 옮긴 “vidita”는 “√vid”를 어근으로 한 것으로, “알다, 밝다”의 뜻을 갖는다. 사리풋타는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면서”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vidita”, 이 한 마디를 내놓았다. 따라서 “알다”와 “보다”를 병합하는 의미로서 “밝히 알다”로 옮기는 것도 좋다고 보았다. 生이 다했으며 梵行이 실현되었으며 할 일은 마쳤으며 다시는 이곳을 위함이 없음을 나는 了知합니다’라고, 답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저에게 묻는다면, 대덕이시여, 이와 같이 답하겠습니다.”
“만일 그대에게, 사리풋타여, 어떤 이들이 이와 같이, ‘生은, 벗 사리풋타여, 무엇을 밑바탕 삼고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고 무엇으로부터 존립한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하자. 이와 같이 그대에게 묻는다면, 사리풋타여, 어떻게 답하겠는가?”
“만일 저에게, 대덕이시여, 어떤 이들이 이와 같이, ‘生은, 벗 사리풋타여, 무엇을 밑바탕 삼고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고 무엇으로부터 존립한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저에게 묻는다면, 대덕이시여, 이와 같이, ‘生은, 벗들이여, 有를 밑바탕 삼고 有로부터 일어나고 有로부터 생겨나고 有로부터 존립한 것입니다’라고, 이와 같이 답하겠습니다.”
“만일 그대에게, 사리풋타여, 어떤 이들이 이와 같이, ‘有는, 벗 사리풋타여, 무엇을 밑바탕 삼고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고 무엇으로부터 존립한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하자. 이와 같이 그대에게 묻는다면, 사리풋타여, 어떻게 답하겠는가?”
“만일 저에게, 대덕이시여, 어떤 이들이 이와 같이, ‘有는, 벗 사리풋타여, 무엇을 밑바탕 삼고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고 무엇으로부터 존립한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저에게 묻는다면, 대덕이시여, 이와 같이, ‘有는, 벗들이여, 取를 밑바탕 삼고 取로부터 일어나고 取로부터 생겨나고 取로부터 존립한 것입니다’라고, 이와 같이 답하겠습니다.”
“만일 그대에게, 사리풋타여, 어떤 이들이 이와 같이, ‘取는, 벗 사리풋타여, 무엇을 밑바탕 삼고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고 무엇으로부터 존립한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하자. 이와 같이 그대에게 묻는다면, 사리풋타여, 어떻게 답하겠는가?”
“만일 저에게, 대덕이시여, 어떤 이들이 이와 같이, ‘取는, 벗 사리풋타여, 무엇을 밑바탕 삼고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고 무엇으로부터 존립한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저에게 묻는다면, 대덕이시여, 이와 같이, ‘取는, 벗들이여, 愛를 밑바탕 삼고 愛로부터 일어나고 愛로부터 생겨나고 愛로부터 존립한 것입니다’라고, 이와 같이 답하겠습니다.”
“만일 그대에게, 사리풋타여, 어떤 이들이 이와 같이, ‘愛는, 벗 사리풋타여, 무엇을 밑바탕 삼고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고 무엇으로부터 존립한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하자. 이와 같이 그대에게 묻는다면, 사리풋타여, 어떻게 답하겠는가?”
“만일 저에게, 대덕이시여, 어떤 이들이 이와 같이, ‘愛는, 벗 사리풋타여, 무엇을 밑바탕 삼고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고 무엇으로부터 존립한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저에게 묻는다면, 대덕이시여, 이와 같이, ‘愛는, 벗들이여, 受를 밑바탕 삼고 受로부터 일어나고 受로부터 생겨나고 受로부터 존립한 것입니다’라고, 이와 같이 답하겠습니다.”
“만일 그대에게, 사리풋타여, 어떤 이들이 이와 같이, ‘당신은, 벗 사리풋타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고 있기에,[5]6격 절대구로 볼 수 있다. 7격 절대구와 6격 절대구의 의미를 분명히 구별하기는 쉽지 않으나, 문맥상 ‘화자의 의외성’이 개입할 경우 6격 절대구를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알고 봄”과 “受들에 대한 기쁨이 일어나지 않음”이 쉽사리 연결되지 않는다는 의외성을 보여준다. 이를 두고 서양학자들은 “the genitive of disrespect”라 정의하기도 한다. 受들에 대한 기쁨이 일어나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 하자. 이와 같이 그대에게 묻는다면, 사리풋타여, 어떻게 답하겠는가?”
“만일 저에게, 대덕이시여, 어떤 이들이 이와 같이, ‘당신은, 벗 사리풋타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고 있기에, 受들에 대한 기쁨이 일어나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저에게 묻는다면, 대덕이시여, 이와 같이, ‘그 受들은, 벗들이여, 세 가지입니다. 어떤 것이 셋입니까? 낙수樂受, 고수苦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입니다. 그것들, 벗들이여, 세 가지 受들은 무상한 것들입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임을 밝히 알았으니, 受들에 대한 기쁨이 일어나지 않습니다’라고, 이와 같이 답하겠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사리풋타여. 바로 이 義를, 사리풋타여, 간결하게 답하자면, ‘受된 것은 무엇이든 괴로움에 이른다’라는 法門이다.”
“만일 그대에게, 사리풋타여, 어떤 이들이 이와 같이, ‘당신은, 벗 사리풋타여, 어떻게 해탈하여서, 生은 다했으며 梵行은 실현되었으며 할 일은 마쳤으며 다시는 이곳을 위함이 없음을 나는 了知한다’라는 智를 답하였습니까?’라고, 묻는다 하자. 이와 같이 그대에게 묻는다면, 사리풋타여, 어떻게 답하겠는가?”
“만일 저에게, 대덕이시여, 어떤 이들이 이와 같이, ‘당신은, 벗 사리풋타여, 어떻게 해탈하여서, 生은 다했으며 梵行은 실현되었으며 할 일은 마쳤으며 다시는 이곳을 위함이 없음을 나는 了知한다’라는 智를 답하였습니까?’라고, 묻는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저에게 묻는다면, 대덕이시여, 이와 같이, ‘안으로 해탈하여서, 벗들이여, 일체의 取가 다하여서, 더 이상 새어듦(漏)이 없을 만큼 念이 이루어져 머무르며, 我를 경시하지 않습니다’[6]“我를 경시하지 않는다”(attānaṃ nāvajānāmi)의 분명한 뜻은 다른 경증을 통해 좀더 살펴봐야 한다. 다만 이 경문에 의존해서 살펴보건대, 念이 흩어져 漏가 있을 경우, 取가 발생하고 안으로 해탈하지 못하여 마침내 我가 존립하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念이 흩어지자마자 삽시간에 我가 일어서는 것이므로, 我를 경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사문에 의해서 말해진 漏”, 그것은 세존의 언어를 타고서도 올 수 있는 것이며, 세존의 언어가 “漏”가 되느냐 아니면 “義”가 되느냐는 듣는 자의 역량에 온전히 좌우된다. 세존의 언어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로서, 한 갈래는 “말과 표현”으로 이어지며, 다른 갈래는 “말과 法門”으로 이어진다. 끝없이 찰나찰나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 위에서 단 한 줄기 미혹이나 의혹이 없는 자, 그는 이름하여 “사리풋타”, 세존의 수좌首座인 것이다. 낮이 다하도록, 밤새도록, 주야로, 이틀 주야로, 사나흘ㆍ대엿새ㆍ이레 주야로 세존의 언어가 끝없이 다가올지라도, 사리풋타는 단 한 가닥 미혹도 의혹도 없이, 평원의 바람을 가르고 사자후를 토하면서 “이 義”의 길을 갈 수 있는 아라한이다. 존자 사리풋타와 비구 칼라라캇티야와 세존에 의해서 세 번이나 동일하게 되풀이되는 마지막 경문들은 평원의 바람을 가르고 들려오는 사자후에 다름아니다. 이 경문들을 들을 때에는, 법계가 뚫린 아라한으로부터 나오는 사자후가 물상物象으로 들려야 한다.라고, 답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저에게 묻는다면, 대덕이시여, 이와 같이 답하겠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사리풋타여. 바로 이 義를, 사리풋타여, 간결하게 답하자면, ‘사문에 의해서 말해진 漏, 그것에 대해 나는 미혹이 없으며 의혹이 없다’라는 法門이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서善逝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서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거처로 들어가셨다.
그때 존자 사리풋타는 세존께서 떠나신 뒤 비구들에게 말했다. “조금 전, 감수感受[7]“感受”로 옮긴 팔리어 “paṭi-saṃvidita”는 일반적으로 “~에 대하여 느끼다”, “~에 대하여 지각하다” 등으로 옮길 수 있지만, 이 경이 受와 관련된 것임을 고려할 때, “(낙수ㆍ고수ㆍ불고불낙수에 대하여) 受하다”, 즉 “(낙수ㆍ고수ㆍ불고불낙수를) 感受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번역에서는 이 구절을 두고 사리풋타가 세존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답을 못하다가 마침내 그 의도를 알고 나서 답을 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하여 옮기고 있지만, 이는 문제가 있는 해석으로 보인다.하지 않는 나에게, 벗들이여, 세존께서 첫번째 질문을 물으셨을 때, 그것에 대해 나에게는 [말문을] 닫음[8]“말문을 닫음”(dandhāyitatta)의 어원은 불분명하다. 경전에서는 답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에 쓰이는 낱말이며, “우물쭈물함”, “지체함”, “더딤”, “(말문을) 열지 않음, (입을) 닫음” 등으로 옮길 수 있다. 이 “dandhāyitatta”와 앞의 “paṭi-saṃvidita”를 연계해서 읽어야 하며, 이 두 낱말의 해석에 따라 세존과 사리풋타의 “첫번째 질문”과 관련한 문답이 판이하게 이해된다. 즉 사리풋타가 세존의 질문 의도를 몰라서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그 의도를 간파하고 답하기 시작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으며, 아니면, 사리풋타에게는 受되는 바가 없기에 受되는 낱말들(즉 ‘生’, ‘다함’, ‘梵行’, ‘할 일’ 등등의 名色)이 세존의 질문을 빌어 다가올 때 우뢰와 같은 부정否定, 우뢰와 같은 침묵으로 그것들을 격파한 뒤 “이 義”를 답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후자의 해석이 이상하게 보이는가? 역으로 묻고 싶다, 팔리 니카야 경문이 차마 세간의 방식으로 공부하면 이해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기야 하겠는가? 세간의 공부방식은 “受—愛—取—有—生”을 타고 세존의 말씀을 음미하고 운위하는 것이요, 그것은 팔사도八邪道를 걷는 것에 불과하다. 팔사도를 걸으면서 어찌 팔정도가 이해될 수 있겠으며 감히 팔정도를 논할 수 있겠는가? “팔정도”를 운위한들 어찌 그것이 팔정도이겠는가? 모름지기 자신을 살필 일이다. 우리는 경전 내용을 전부 섭렵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경향이 있다. 경전은 무서운 깊이가 있다, 우리가 모르는, 범부는 결정코 다가갈 수 없는 깊이 말이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벗들이여, 세존께서 첫번째 질문을 기뻐하셨을 때, 그것에 대해 나에게는, 벗들이여, 이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낮 동안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낮 동안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 밤새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밤새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 주야로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주야로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 이틀 주야로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이틀 주야로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 사흘 주야로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사흘 주야로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 나흘 주야로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나흘 주야로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 닷새 주야로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닷새 주야로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 엿새 주야로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엿새 주야로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 이레 주야로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이레 주야로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라고.”
그때 칼라라캇티야 비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갔다. 나아가서 세존께 예를 올리고 한쪽에 앉았다. 그리고 한쪽에 앉은 칼라라캇티야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말했다. “존자 사리풋타는, 대덕이시여,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조금 전, 감수感受하지 않는 나에게, 벗들이여, 세존께서 첫번째 질문을 물으셨을 때, 그것에 대해 나에게는 [말문을] 닫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벗들이여, 세존께서 첫번째 질문을 기뻐하셨을 때, 그것에 대해 나에게는, 벗들이여, 이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낮 동안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낮 동안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 밤새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밤새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 주야로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주야로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 이틀 주야로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이틀 주야로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 사흘 주야로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사흘 주야로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 나흘 주야로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나흘 주야로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 닷새 주야로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닷새 주야로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 엿새 주야로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엿새 주야로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 이레 주야로 나에게 세존께서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으셔도, 이레 주야로 나는 세존께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하리라’라고.”
“실로, 비구여, 사리풋타에 의하여 법계法界는 뚫렸다. 법계가 뚫렸으니, 낮 동안 내가 사리풋타에게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어도, 낮 동안 나에게 사리풋타는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할 것이다. 밤새 내가 사리풋타에게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어도, 밤새 나에게 사리풋타는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할 것이다. 주야로 내가 사리풋타에게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어도, 주야로 나에게 사리풋타는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할 것이다. 이틀 주야로 내가 사리풋타에게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어도, 이틀 주야로 나에게 사리풋타는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할 것이다. 사흘 주야로 내가 사리풋타에게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어도, 사흘 주야로 나에게 사리풋타는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할 것이다. 나흘 주야로 내가 사리풋타에게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어도, 나흘 주야로 나에게 사리풋타는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할 것이다. 닷새 주야로 내가 사리풋타에게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어도, 닷새 주야로 나에게 사리풋타는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할 것이다. 엿새 주야로 내가 사리풋타에게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어도, 엿새 주야로 나에게 사리풋타는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할 것이다. 이레 주야로 내가 사리풋타에게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물어도, 이레 주야로 나에게 사리풋타는 이 義를 여러 말들과 여러 法門들로 답할 것이다.”
— 「상응부」 12.32, “칼라라 경”
* 각주
1. | ↑ | “법률”(dhammavinaya)은 “법”과 “율”을 나열하는 일반적인 병렬복합어가 아니라 “법”과 “율”이 합하여 한 단위로 취급되는 복합어이므로, “법과 율”보다는 “법률”로 번역함이 문법적으로 옳다. 이 복합어는 “법”과 “율”이 분리되지 않고 연속되어 있음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
2. | ↑ | “義”(attha, Sk.artha)에 대해서는 앞서 一句의 법에서 간단하게 언급한 바 있으며, 나중에 좀더 상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
3. | ↑ | 7격 명사변화와 관련해서 엄밀한 접근이 필요한 대목이다. “tassa nidānassa khayā khīṇasmiṃ khīṇāmhīti viditaṃ”에서 7격명사 “khīṇasmiṃ”을 “마침내 다하기에 이르기까지”로 번역한 이유는, 일반적인 7격명사형 “khīṇe” 대신 여기에서는 이형인 “khīṇasmiṃ”을 썼기 때문이다. 이렇듯 7격명사형이 “khīṇe/khīṇasmiṃ”로 달리한 것은 산스크리트어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아무래도 팔리어에서 7격명사의 뜻이 세분화되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단순히 어미만 달리할 뿐 뜻 차이는 없다는 결론은, 「대념처경」에서 “몸에서(kāye) 몸을 관찰한다”와 “集滅法을 관찰하면서 몸에(kāyasmiṃ) 머문다”를 연이어 쓴 용례에 비추어 볼 때 불합리하다. 따라서 어미 “-e”를 취하는 7격명사형과 어미 “-asmiṃ”을 취하는 7격명사형은 그 뜻을 달리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리고 이 경의 후반부에서 “yaṃ kiñci vedayitaṃ taṃ dukkhasmiṃ”(受된 것은 무엇이든 괴로움에 이른다“의 용례도 함께 살펴보면, “-asmiṃ”의 7격명사형이 “종점ㆍ귀착점으로서의 장소”를 가리키지 않나 싶다. 이렇게 볼 경우, 「대념처경」의 “samudayav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ṁ viharati”는 “혹은 集滅法을 관찰하면서 마침내 몸에 이르러 머문다”로, 본 경의 경문은 “그 밑바탕이 다하기 시작하여(5격명사) 마침내 다하기에 이르기까지(7격명사)”로 새길 수 있다. 팔리어 문법서에서는 이와 관련한 언급을 확인할 수 없는 바, 앞으로 여러 경문을 대조하면서 자세히 규명할 일이다. |
4. | ↑ | “밝히 알다”로 옮긴 “vidita”는 “√vid”를 어근으로 한 것으로, “알다, 밝다”의 뜻을 갖는다. 사리풋타는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면서”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vidita”, 이 한 마디를 내놓았다. 따라서 “알다”와 “보다”를 병합하는 의미로서 “밝히 알다”로 옮기는 것도 좋다고 보았다. |
5. | ↑ | 6격 절대구로 볼 수 있다. 7격 절대구와 6격 절대구의 의미를 분명히 구별하기는 쉽지 않으나, 문맥상 ‘화자의 의외성’이 개입할 경우 6격 절대구를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알고 봄”과 “受들에 대한 기쁨이 일어나지 않음”이 쉽사리 연결되지 않는다는 의외성을 보여준다. 이를 두고 서양학자들은 “the genitive of disrespect”라 정의하기도 한다. |
6. | ↑ | “我를 경시하지 않는다”(attānaṃ nāvajānāmi)의 분명한 뜻은 다른 경증을 통해 좀더 살펴봐야 한다. 다만 이 경문에 의존해서 살펴보건대, 念이 흩어져 漏가 있을 경우, 取가 발생하고 안으로 해탈하지 못하여 마침내 我가 존립하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念이 흩어지자마자 삽시간에 我가 일어서는 것이므로, 我를 경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사문에 의해서 말해진 漏”, 그것은 세존의 언어를 타고서도 올 수 있는 것이며, 세존의 언어가 “漏”가 되느냐 아니면 “義”가 되느냐는 듣는 자의 역량에 온전히 좌우된다. 세존의 언어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로서, 한 갈래는 “말과 표현”으로 이어지며, 다른 갈래는 “말과 法門”으로 이어진다. 끝없이 찰나찰나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 위에서 단 한 줄기 미혹이나 의혹이 없는 자, 그는 이름하여 “사리풋타”, 세존의 수좌首座인 것이다. 낮이 다하도록, 밤새도록, 주야로, 이틀 주야로, 사나흘ㆍ대엿새ㆍ이레 주야로 세존의 언어가 끝없이 다가올지라도, 사리풋타는 단 한 가닥 미혹도 의혹도 없이, 평원의 바람을 가르고 사자후를 토하면서 “이 義”의 길을 갈 수 있는 아라한이다. 존자 사리풋타와 비구 칼라라캇티야와 세존에 의해서 세 번이나 동일하게 되풀이되는 마지막 경문들은 평원의 바람을 가르고 들려오는 사자후에 다름아니다. 이 경문들을 들을 때에는, 법계가 뚫린 아라한으로부터 나오는 사자후가 물상物象으로 들려야 한다. |
7. | ↑ | “感受”로 옮긴 팔리어 “paṭi-saṃvidita”는 일반적으로 “~에 대하여 느끼다”, “~에 대하여 지각하다” 등으로 옮길 수 있지만, 이 경이 受와 관련된 것임을 고려할 때, “(낙수ㆍ고수ㆍ불고불낙수에 대하여) 受하다”, 즉 “(낙수ㆍ고수ㆍ불고불낙수를) 感受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번역에서는 이 구절을 두고 사리풋타가 세존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답을 못하다가 마침내 그 의도를 알고 나서 답을 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하여 옮기고 있지만, 이는 문제가 있는 해석으로 보인다. |
8. | ↑ | “말문을 닫음”(dandhāyitatta)의 어원은 불분명하다. 경전에서는 답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에 쓰이는 낱말이며, “우물쭈물함”, “지체함”, “더딤”, “(말문을) 열지 않음, (입을) 닫음” 등으로 옮길 수 있다. 이 “dandhāyitatta”와 앞의 “paṭi-saṃvidita”를 연계해서 읽어야 하며, 이 두 낱말의 해석에 따라 세존과 사리풋타의 “첫번째 질문”과 관련한 문답이 판이하게 이해된다. 즉 사리풋타가 세존의 질문 의도를 몰라서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그 의도를 간파하고 답하기 시작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으며, 아니면, 사리풋타에게는 受되는 바가 없기에 受되는 낱말들(즉 ‘生’, ‘다함’, ‘梵行’, ‘할 일’ 등등의 名色)이 세존의 질문을 빌어 다가올 때 우뢰와 같은 부정否定, 우뢰와 같은 침묵으로 그것들을 격파한 뒤 “이 義”를 답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후자의 해석이 이상하게 보이는가? 역으로 묻고 싶다, 팔리 니카야 경문이 차마 세간의 방식으로 공부하면 이해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기야 하겠는가? 세간의 공부방식은 “受—愛—取—有—生”을 타고 세존의 말씀을 음미하고 운위하는 것이요, 그것은 팔사도八邪道를 걷는 것에 불과하다. 팔사도를 걸으면서 어찌 팔정도가 이해될 수 있겠으며 감히 팔정도를 논할 수 있겠는가? “팔정도”를 운위한들 어찌 그것이 팔정도이겠는가? 모름지기 자신을 살필 일이다. 우리는 경전 내용을 전부 섭렵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경향이 있다. 경전은 무서운 깊이가 있다, 우리가 모르는, 범부는 결정코 다가갈 수 없는 깊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