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세존께서는 사밧티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존자 사리풋타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사리풋타여, 도피안품到彼岸品 아지타의 질문[1]「숫타니파타」, 도피안품, “젊은 아지타의 물음”을 말한다. 여기에서 “도피안품 아지타의 질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붓다 재세시에 이미 고층古層의 「숫타니파타」는 하나의 성전聖傳으로서 유통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에서 [아지타가] 말한 것이다.
법法이 밝혀진 이들[2]“saṅkhāta-dhammāse”는 유재석有財釋 복합어이고 “saṅkhāta”는 과거수동분사이므로 “법이 밝혀진 이들”로 번역함이 좋다. “saṅkhāta”는 “saṃ-√khyā”를 어근으로 하는 낱말로, 육파철학의 하나인 “상키야 학파”의 “sāṃkhya”와 어원이 같다. 어근 “saṃ-√khyā”의 뜻은 “밝히다, 헤다, 헤아리다, 세다”이며, 우리말의 “혀다(옛말), 켜다, 헤다, 세다”와 같은 의미군으로 보인다. “법이 밝혀진 이들”은 아라한을 가리킨다.이 있는가 하면,
여러 부류의 유학有學들[3]입류, 일래, 불환의 성자들을 말한다. “여러 부류의”(puthū idha) 구절과 관련해서는 앞서 번역한 젊은 아지타의 물음에서 비평한 내용이 있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의威儀가 궁금하여 묻사오니,
말씀해 주십시오, 사표師表가 되시는 존사시여.
이 간결하게 말한 것, 사리풋타여, 그 義는 어떤 풀이로 보여야 하는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존자 사리풋타는 침묵했다.
두번째로 세존께서 존자 사리풋타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사리풋타여, 도피안품 아지타의 질문에서 말한 것이다.
법이 밝혀진 이들이 있는가 하면,
여러 부류의 유학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의가 궁금하여 묻사오니,
말씀해 주십시오, 사표가 되시는 존사시여.
이 간결하게 말한 것, 사리풋타여, 그 義는 어떤 풀이로 보여야 하는가?” 존자 사리풋타는 두번째에도 침묵했다.
세번째로 세존께서 존자 사리풋타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사리풋타여, 도피안품 아지타의 질문에서 말한 것이다.
법이 밝혀진 이들이 있는가 하면,
여러 부류의 유학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의가 궁금하여 묻사오니,
말씀해 주십시오, 사표가 되시는 존사시여.
이 간결하게 말한 것, 사리풋타여, 그 義는 어떤 풀이로 보여야 하는가?” 존자 사리풋타는 세번째에도 침묵했다.
“‘이것[4]“이것”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당연하다. 더할 나위없이 고준한 문답이기 때문이다. 사리풋타는 왜 붓다의 세번에 걸친 질문에 침묵했으며, “이것은 존재물이라고 보는가?”라는 물음에 비로소 입을 열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상세히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은 존재물’[5]“존재물”(bhūtam)은 과거수동분사로 직역하자면 “유有가 된 것, 존재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십이지연기의 “有”(bhava)와 관련된 것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생겨난 것, 된 것” 등으로 옮기고 있으나, 이는 “有”를 피상적으로 해석했을 경우, 즉 서양철학 문법의 “존재/생성, 인식/존재” 등의 이분법적 사고로 “有”에 접근했을 경우에만 허용되는 번역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서양철학의 기본문법, 다름아닌 우리의 상식적인 사고로 접근하면 불교의 묘의妙義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으로 본다.이라고, 사리풋타여, 그대는 보는가?” “‘이것은 존재물’이라고, 사리풋타여, 그대는 보는가?”
“‘이것은 존재물’이라고, 대덕大德이시여, 존재물 그대로[6]“yathābhūtaṃ”은 흔히 “있는 그대로”로 옮기고 있다. 마치 일체의 개념이나 감정을 배제하고 진실한 모습 그대로 보라는 의미로 읽는 듯하다. 그러나 “존재물(bhūtaṃ)”은 십이지연기의 “有”와 관련된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yathābhūtaṃ”은 “존재물을 존재물 그대로”, 즉 “존재물을 연기된 有로” 보라는 의미가 아닐까? 정혜正慧로 그는 봅니다. ‘이것은 존재물’이라고,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보고서, 존재물에 끌리지 않도록 존재물을 탐하지 않도록 존재물이 사라지도록, 그는 걸음을 걷는 자입니다. ‘그것의 食이 생겨남’[7]“tad-āhāra-sambhava”는 여러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일단, “tad”는 별도의 인칭대명사가 아니라 복합어의 일원이므로, “tad-āhārasambhava”는 의주석依主釋이나 지업석持業釋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그것의 食集生”, “그것을 위한 食集生”, “그것이라는 食集生” 등등으로 옮길 수 있다. 아마도 “tad-āhāra-sambhavan-ti”의 “ti” 때문에 “그것은 食集生이라고”로 옮기는 것이 적절한 듯 보이기도 하겠지만, 이는 “tad”를 복합어의 일원이 아닌 별도의 인칭대명사로 해석한 것이므로 잘못이다. 별도의 인칭대명사라면, “so”나 “ta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낱말과 대비를 이루는 “tad-āhāranirodhā”가 복합어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때의 “ti”는 뒤에 나오는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i”라는 정형구의 목적절 내지 목적어를 분명히 지시할 때 쓰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을,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그는 봅니다. ‘그것의 食이 생겨남(食集生)’을,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보고서, 식집생食集生[8]雜阿含經(三四五)에서 “sambhava”를 “集生”으로 옮겼다. 그리고 경명을 “集生”으로 하여 경의 주제가 다름아닌 “食集生”이라고 보았다.에 끌리지 않도록 食集生을 탐하지 않도록 食集生이 사라지도록(厭離ㆍ離貪ㆍ滅),[9]“āhāra-sambhavassa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는 6격명사 하나(“食集生”)에 4격명사 셋(“厭離ㆍ離貪ㆍ滅”)이 결합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6격명사는 결합하는 명사의 의미에 따라, 1격ㆍ2격ㆍ4격ㆍ6격ㆍ7격 등의 의미로 번역 가능하다. 따라서 이 번역문처럼 대괄호를 써서 6격명사를 보충하여 번역하든가 아니면 아예 대괄호를 없애고 6격명사를 세번 반복해서 번역해야 한다. 이 구절을 “食集生의 厭離”, “離貪”, “滅”로 각기 분리해서 읽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걸음을 걷는 자입니다. ‘그것의 食이 사라짐으로써 존재물인 것은 사라지는 법’이라고,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그는 봅니다. ‘그것의 食이 사라짐(食滅)으로써 존재물인 것은 사라지는 법(滅法)’이라고,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보고서, 멸법滅法에 끌리지 않도록 滅法을 탐하지 않도록 滅法이 사라지도록, 그는 걸음을 걷는 자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대덕이시여, 유학有學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대덕이시여, 법法이 밝혀진 자입니까? ‘이것은 존재물’이라고, 대덕이시여,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그는 봅니다. ‘이것은 존재물’이라고,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보고서, 존재물에 끌리지 않음으로써 존재물을 탐하지 않음으로써 존재물이 사라짐으로써 존재물을 잡지 않음으로써, 그는 해탈된 자입니다. ‘그것의 食이 생겨남’을,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그는 봅니다. ‘그것의 食이 생겨남(食集生)’을,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보고서, 食集生에 끌리지 않음으로써 食集生을 탐하지 않음으로써 食集生이 사라짐으로써 食集生을 잡지 않음으로써(厭離ㆍ離貪ㆍ滅ㆍ不取),[10]팔리 니카야에서 정형구로 등장하는 “厭離ㆍ離貪ㆍ滅”을 이렇게 우리말로 “끌리지 않음ㆍ탐하지 않음ㆍ사라짐”으로 풀어서 놓고보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개념들이지만, 범부는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사실은 불가사의한 개념들이다. “不取”는 십이지연기의 “取”와 관련된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食은 “愛ㆍ取ㆍ有”의 연기를 작동시키는 유위인 것이지 무슨 먹거리 음식은 아니라고 본다. 四食 중에서 “미세하거나 거친 덩이”를 우리 몸을 지탱하는 음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해탈된 자입니다. ‘그것의 食이 사라짐으로써 존재물인 것은 사라지는 법’이라고,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그는 봅니다. ‘그것의 食이 사라짐(食滅)으로써 존재물인 것은 사라지는 법(滅法)’이라고,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보고서, 滅法에 끌리지 않음으로써 滅法을 탐하지 않음으로써 滅法이 사라짐으로써 滅法을 잡지 않음으로써, 그는 해탈된 자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대덕이시여, 법이 밝혀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대덕이시여, 도피안품 아지타의 질문에서 말한 것,
법이 밝혀진 이들이 있는가 하면,
여러 부류의 유학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의가 궁금하여 묻사오니,
말씀해 주십시오, 사표가 되시는 존사시여.
이 간결하게 말한 것, 대덕이시여, 그 義를 저는 이와 같은 풀이로 了知하고 있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사리풋타여. ‘이것은 존재물’이라고, 사리풋타여,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그는 본다. ‘이것은 존재물’이라고,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보고서, 존재물에 끌리지 않도록 존재물을 탐하지 않도록 존재물이 사라지도록, 그는 걸음을 걷는 자이다. ‘그것의 食이 생겨남’을,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그는 본다. ‘그것의 食이 생겨남(食集生)’을,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보고서, 食集生에 끌리지 않도록 食集生을 탐하지 않도록 食集生이 사라지도록, 그는 걸음을 걷는 자이다. ‘그것의 食이 사라짐으로써 존재물인 것은 사라지는 법’이라고,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그는 본다. ‘그것의 食이 사라짐(食滅)으로써 존재물인 것은 사라지는 법(滅法)’이라고,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보고서, 滅法에 끌리지 않도록 滅法을 탐하지 않도록 滅法이 사라지도록, 그는 걸음을 걷는 자이다. 이와 같은 것이, 사리풋타여, 유학有學이니라.”
“그러면 어떠한 것이, 사리풋타여, 법이 밝혀진 자인가? ‘이것은 존재물’이라고, 사리풋타여,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그는 본다. ‘이것은 존재물’이라고,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보고서, 존재물에 끌리지 않음으로써 존재물을 탐하지 않음으로써 존재물이 사라짐으로써 존재물을 잡지 않음으로써, 그는 해탈된 자이다. ‘그것의 食이 생겨남’을,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그는 본다. ‘그것의 食이 생겨남(食集生)’을,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보고서, 食集生에 끌리지 않음으로써 食集生을 탐하지 않음으로써 食集生이 사라짐으로써 食集生을 잡지 않음으로써, 그는 해탈된 자이다. ‘그것의 食이 사라짐으로써 존재물인 것은 사라지는 법’이라고,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그는 본다. ‘그것의 食이 사라짐(食滅)으로써 존재물인 것은 사라지는 법(滅法)’이라고, 존재물 그대로 정혜로 보고서, 滅法에 끌리지 않음으로써 滅法을 탐하지 않음으로써 滅法이 사라짐으로써 滅法을 잡지 않음으로써, 그는 해탈된 자이다. 이와 같은 것이, 사리풋타여, 법이 밝혀진 자이니라. 그러므로, 사리풋타여, 도피안품 아지타의 질문에서 말한 것,
법이 밝혀진 이들이 있는가 하면,
여러 부류의 유학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의가 궁금하여 묻사오니,
말씀해 주십시오, 사표가 되시는 존사시여.
이 간결하게 말한 것, 사리풋타여, 그 義는 이와 같은 풀이로 보여야 하느니라.”
— 「상응부」 12.31, “집생경集生經”[11]팔리어 경명은 “Bbhūtamsutta”로 “존재물경”을 뜻한다.
* 각주
1. | ↑ | 「숫타니파타」, 도피안품, “젊은 아지타의 물음”을 말한다. 여기에서 “도피안품 아지타의 질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붓다 재세시에 이미 고층古層의 「숫타니파타」는 하나의 성전聖傳으로서 유통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2. | ↑ | “saṅkhāta-dhammāse”는 유재석有財釋 복합어이고 “saṅkhāta”는 과거수동분사이므로 “법이 밝혀진 이들”로 번역함이 좋다. “saṅkhāta”는 “saṃ-√khyā”를 어근으로 하는 낱말로, 육파철학의 하나인 “상키야 학파”의 “sāṃkhya”와 어원이 같다. 어근 “saṃ-√khyā”의 뜻은 “밝히다, 헤다, 헤아리다, 세다”이며, 우리말의 “혀다(옛말), 켜다, 헤다, 세다”와 같은 의미군으로 보인다. “법이 밝혀진 이들”은 아라한을 가리킨다. |
3. | ↑ | 입류, 일래, 불환의 성자들을 말한다. “여러 부류의”(puthū idha) 구절과 관련해서는 앞서 번역한 젊은 아지타의 물음에서 비평한 내용이 있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
4. | ↑ | “이것”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당연하다. 더할 나위없이 고준한 문답이기 때문이다. 사리풋타는 왜 붓다의 세번에 걸친 질문에 침묵했으며, “이것은 존재물이라고 보는가?”라는 물음에 비로소 입을 열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상세히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5. | ↑ | “존재물”(bhūtam)은 과거수동분사로 직역하자면 “유有가 된 것, 존재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십이지연기의 “有”(bhava)와 관련된 것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생겨난 것, 된 것” 등으로 옮기고 있으나, 이는 “有”를 피상적으로 해석했을 경우, 즉 서양철학 문법의 “존재/생성, 인식/존재” 등의 이분법적 사고로 “有”에 접근했을 경우에만 허용되는 번역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서양철학의 기본문법, 다름아닌 우리의 상식적인 사고로 접근하면 불교의 묘의妙義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으로 본다. |
6. | ↑ | “yathābhūtaṃ”은 흔히 “있는 그대로”로 옮기고 있다. 마치 일체의 개념이나 감정을 배제하고 진실한 모습 그대로 보라는 의미로 읽는 듯하다. 그러나 “존재물(bhūtaṃ)”은 십이지연기의 “有”와 관련된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yathābhūtaṃ”은 “존재물을 존재물 그대로”, 즉 “존재물을 연기된 有로” 보라는 의미가 아닐까? |
7. | ↑ | “tad-āhāra-sambhava”는 여러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일단, “tad”는 별도의 인칭대명사가 아니라 복합어의 일원이므로, “tad-āhārasambhava”는 의주석依主釋이나 지업석持業釋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그것의 食集生”, “그것을 위한 食集生”, “그것이라는 食集生” 등등으로 옮길 수 있다. 아마도 “tad-āhāra-sambhavan-ti”의 “ti” 때문에 “그것은 食集生이라고”로 옮기는 것이 적절한 듯 보이기도 하겠지만, 이는 “tad”를 복합어의 일원이 아닌 별도의 인칭대명사로 해석한 것이므로 잘못이다. 별도의 인칭대명사라면, “so”나 “ta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낱말과 대비를 이루는 “tad-āhāranirodhā”가 복합어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때의 “ti”는 뒤에 나오는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i”라는 정형구의 목적절 내지 목적어를 분명히 지시할 때 쓰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
8. | ↑ | 雜阿含經(三四五)에서 “sambhava”를 “集生”으로 옮겼다. 그리고 경명을 “集生”으로 하여 경의 주제가 다름아닌 “食集生”이라고 보았다. |
9. | ↑ | “āhāra-sambhavassa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는 6격명사 하나(“食集生”)에 4격명사 셋(“厭離ㆍ離貪ㆍ滅”)이 결합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6격명사는 결합하는 명사의 의미에 따라, 1격ㆍ2격ㆍ4격ㆍ6격ㆍ7격 등의 의미로 번역 가능하다. 따라서 이 번역문처럼 대괄호를 써서 6격명사를 보충하여 번역하든가 아니면 아예 대괄호를 없애고 6격명사를 세번 반복해서 번역해야 한다. 이 구절을 “食集生의 厭離”, “離貪”, “滅”로 각기 분리해서 읽는 것은 잘못이다. |
10. | ↑ | 팔리 니카야에서 정형구로 등장하는 “厭離ㆍ離貪ㆍ滅”을 이렇게 우리말로 “끌리지 않음ㆍ탐하지 않음ㆍ사라짐”으로 풀어서 놓고보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개념들이지만, 범부는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사실은 불가사의한 개념들이다. “不取”는 십이지연기의 “取”와 관련된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食은 “愛ㆍ取ㆍ有”의 연기를 작동시키는 유위인 것이지 무슨 먹거리 음식은 아니라고 본다. 四食 중에서 “미세하거나 거친 덩이”를 우리 몸을 지탱하는 음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
11. | ↑ | 팔리어 경명은 “Bbhūtamsutta”로 “존재물경”을 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