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거품 미망 속으로 — 제6회 농심신라면배 이창호 대 왕시 관전기

농심신라면배는 한중일 간 국가바둑대항전으로 국가별로 각 5명의 기사가 출전하여 승자는 계속 두고 패자는 물러나는 체제로 진행됩니다. 결국, 최종 승자로 남은 국가가 승리하는 단체전입니다. 제6회 농심신라면배는 2004/2005 시즌에 벌어졌으며, 한국은 이미 2차전에서 이창호 9단만 홀로 남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최종 3차전을 각 2명이 생존한 일본·중국과 대회전을 치루게 됩니다. 여기에서 이창호 9단은 2차전을 포함 5연승으로 최종 승자로 남아 한국이 우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 관전기는 최종3차전 마지막 판인 이창호 9단 대 중국의 왕시 5단의 대국에 대하여 쓴 것으로, 제가 apolis라는 필명으로 2005년 3월 9일에 이창호 홈페이지에 올린 것입니다.

다른 관전기:
*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낸다 — 제6회 농심신라면배 이창호 대 장쉬 관전기 (2005.03.04)
* 관념에 물들지 않는 얼굴 — 제6회 농심신라면배 이창호 대 왕레이 관전기 (2005.02.28)

 

“이창호는 너무 강하다!”(왕시)

왕시는 이창호와의 만남을 기다려왔다. 그는 이번 농심신라면배에서 왕레이보다 먼저 나서고자 하였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최면을 걸듯 “자신 있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그러나 왕시의 그 자신감 표명을 신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미워할 수도 없다. 그것은 이창호를 상대해 보지 못한 많은 이들이 그동안 보여주었던 제스쳐의 재현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이창호를 상대해 보지 못한 그는 행복하다. 아마도 그는 제8회 삼성화재배 8강전에서 셰허 5단이 한 방의 날카로움과 시종일관하는 침착함으로 첫 대면한 거함 이창호를 침몰시켰던 기억을 새롭게 떠올렸을 것이다. 왕시는 자신의 침착함과 날카로움이라면 셰허처럼 이창호를 상대할 만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왕시 이외의 모든 이들은 왕시의 상상력에 의지해 당면한 현실을 왜곡할 수가 없다. 그들은 왕시가 오늘 비로소 이창호에게 한 판 배우게 될 것임을 예상하고 있다. 그는 이창호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이해할 것인가. 그 궁금증과 함께 농심신라면배 마지막 대국이 시작되었다.

장면1도(9~18)
반전무인盤前無人의 길

바둑판에 돌이 여덟 개 놓였다. 이 정도의 수가 놓인 시점에는 아직 기자들이 대국실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둑내용 자체로도 집중을 요하는 장면도 아니고, 우리들이 수없이 보았던 한유로운 포석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이창호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백 두 점 위로 흑1을 날린다. 하마 명경지수에 바람이 다가서는 듯. 이틀 전 왕레이가 이창호를 상대로 우변에서 펼쳤던 공략과 동일하다. 동일한 공략의 수이지만, 그러나 왕레이의 한 수가 습격의 냄새를 흘렸다면 이창호의 오늘 한 수는 잔잔한 바람이다. 돌에 감정을 싣는 것과 돌에 감정을 싣지 않는 것의 차이가 동일한 수의 맛을 다르게 만들고 있다. 이창호는 이렇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같아 그냥 그렇게 두고 있다. 그러나 왕시는 묘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야전에서 수없이 봐온 장면이기에 새삼스러운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는 이창호와 손을 맞추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수순을 진행한다.

왕시가 백8로 흑1을 톡 끊었을 때 이창호는 엊그제의 “왕레이처럼” 흑9로 뻗는다. 이제 백10을 놓을 시점에서 왕시는 엊그제의 “이창호처럼” 되었다. 어떻게 할까? 흑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상변을 선점할까? 엊그제의 이창호는 그렇게 했다. 엊그제 이창호가 상변 흑 세력을 견제할 겸 좌변 백 세력을 키울 겸 상변으로 날개를 펼친 기억이 떠오른다. 왕시가 상변으로 날아가면 그는 엊그제의 이창호가 된다. 이창호는 왕레이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 왕시에게 이창호의 가면을 씌워주고 있다. 왕레이? 이창호? 엊그제 왕레이와의 만남에서 드러났던 이창호의 얼굴이 설핏 떠오른다. 왕시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그 얼굴을 지운다. 왕시는 다짐한다, “나는 나의 바둑을 두련다.” 왕시는 자신의 바둑을 위하여 백10으로 침착하고 두텁게 흑 한 점을 제압하지만, 나는 나의 바둑을 두련다는 다짐과 함께 반전무인의 길에서 멀어진다. 반전무인의 길에는 상대도 없고 나도 없지만, 백10의 한 수에는 내가 있음으로써 상대가 있게 되었다. 반전무인의 길은 선문답의 깨달음처럼 어려운 것이다.

장면2도(19~32)
최상의 선은 흐르는 물과 같다(上善若水)

왕시가 왕시의 길을 가자 이창호는 이창호가 되어 상변으로 돌아간다. 흑1이다. 돌과 돌의 호응을 고려하자면 우변 중앙의 흑 세력을 감안하여 상변 화점으로 착점할 만도 하지만 이창호는 한 줄 밑인 3선에 착점한다. 이것은 실리 취향의 수인가? 한 판의 바둑을 실리/세력의 구도로 바라보는 이는 당연히 실리 취향의 수라고 평가할 것이다. 그것은 그 구도에 물든 이들이 가질 수 있는 하나의 훌륭한 시각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시각, 하나의 구도일 뿐 그 수의 선악은커녕 그 수의 취향에 대한 절대평가가 될 수 없다.

다른 구도로 흑1을 한 번 살펴보자. 흑1이 놓임으로써 중앙의 영역과 상변의 영역이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헐거워진다. 그것은 국면을 자잘하게 분리시키는 메스와도 같다. 비록 중앙과 상변이 분리되었지만 훗날 흑1을 발판으로 흑이 중앙을 향하여 “A” 자리로라도 한 칸 뛰면 중앙과 상변이 확고하게 결합될 것이다. 따라서 “A” 자리는 이 판의 바둑이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주목을 받는 장소로 작용할 것이다. 이창호는 중앙과 상변의 관계를 헐겁게 함으로써 하나의 요처를 여운처럼 남겨 두었고, 왕시는 그곳을 하나의 쟁처로 간주하여 흑1이 놓인 시점에서부터 끝까지 주목하게 된다. 흑1은 하나의 여운, 하나의 쟁처를 구체적으로 공간화시킨 수이기도 하다.

왕시는 주저없이 삼삼으로 침입한다. 이것 역시 흑1이 만든 흐름이다. 백이 우상귀 흑 한 점에 붙히거나 걸치면서 상변에 침투하는 것은 3선에 놓인 흑1로 인하여 갑갑한 흐름으로 이어지고 만다. 그래서 왕시는 삼삼으로 침입하였다. 이창호 역시 그것을 예상하였다. 그는 상변쪽으로 막은 다음, 좌변을 향하여 빠져나가려는 백을 흑5, 흑7로 이단 젖힌다. 상당히 고압적이다. 왕시는 잠시 멈칫하지만 백8로 단수하고 백10으로 흑 한 점을 잡는 이외의 특별한 묘안은 없다.

이창호는 순조롭게 흑11로 몰고 흑13으로 중앙을 틀어막았다. 왕시는 잠시 숨을 고른다. 예상보다 흑이 두터워보인다. 지난 장면에서 우변 백 일단을 안정시키려 백△로 흑 한 점을 제압한 것이 실수였을까? 아니다. 아직 선악을 말할 단계가 아니다. 왕시는 다음 수를 고민한다. “B”로 연결할까, 아니면 백14로 귀쪽으로 뻗어둘까? 왕시는 주변에 놓인 돌들을 둘러본다. 우변의 백 일단은 백△로 흑 한 점을 제압하였으니 따로 분리시켜도 안정에 지장이 없다. 그리고 흑1이 4선이 아니라 3선에 놓여 있으므로 백14로 뻗음으로써 흑 진영으로 구멍을 터 두는 것의 효과가 더 크다. 그는 놓인 돌을 거점으로 하여 다음 수를 생각한다. 왕시는 놓여 있는 돌과 돌의 호응, 관계, 배치를 최대한 고려한다. 그리고 그것을 최적화시켜 물처럼 흐른다. 백14는 흐르는 물과 같다. 그것이 그로서는 최상의 선이다.

장면3도(33~42)
수로를 벗어나기 시작하는 물길

흐르는 물처럼 흘러가는 왕시의 수순들을 이창호는 무심히 지켜보고 있다. 대국후 인터뷰 내용에 의하면 이창호는 왕시가 이렇게 흐를 것임을 이미 예상하였다. 그만큼 왕시는 물길 따라 물처럼 흘러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 물길은 누가 만들었을까? 왕시가 만들었을까, 아니면 이창호가 만들었을까? 왕시가 삼삼으로 침입하는 길은 이창호의 흑▲가 터놓은 물길이었고, 왕시가 백□로 뻗는 길은 왕시의 백△와 이창호의 흑▲가 합심하여 터놓은 물길이었다. 백의 물길은 실은 이창호가 주도적으로 설계한 수로였고, 왕시는 그 수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창호는 흑1로 우상귀 석점을 몰아 우상귀 백과 우변 백을 분리시키고서, 좌하귀 백에 흑3으로 걸친다. 그는 이제 좌변의 설계에 들어간다. 역시 왕시는 그 설계대로 흘러간다(백4). 그리고 흑5, 이창호는 마음에 근심없이 길을 가고 있다. 하지만 왕시는 상변의 쟁처 “A”가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좌하귀 포석에서 흑이 선수를 잡고 좌상귀 백에 먼저 걸치기라도 하는 날엔 상변의 쟁처 부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도 있다. 그래서, 흐름을 일신하여 백6으로 좌상귀를 먼저 벌린다. 좋은 수이다. 백의 물길이 흑의 설계도를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왕시는 끝내 상변의 쟁처가 흘리는 마력을 두려워한 것이다. 이창호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는 상변의 쟁처가 쟁처가 아니라 하나의 여운과도 같은 곳인데, 상대가 그곳을 그토록 신경쓸 줄은 몰랐다.

이창호는 갈길 몰라 방황하는 급물살을 제어하듯 좌하귀 백을 가두기 시작한다. 흑7, 흑9, 이창호가 근육을 자랑하며 둑을 쌓기 시작한다. 그 둑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왕시가 분출한다. 백10을 날카롭게 던짐으로써 이제 그는 백의 수로를 스스로 설계한다. 그 흐름이 격랑이 될 것인가, 아니면 최상의 선이 될 것인가? 마침내 그의 독자적인 행보가 시작되었다.

장면4도(43~56)
흐르는 강물 위에 황혼빛이 부숴지고

왕시는 백△를 던지며 이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흑이 이어주면 백은 귀를 막아 살아두거나 중앙으로 한 칸 뛰어 뻣뻣한 흑을 상대로 탄력 있게 움직일 생각이다. 그러나 이창호는 잇지 않고 백 일단에 부딪힌다(흑1). 이것도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수. 왕시가 백2로 중앙을 향해 한 칸 뛰자 이창호는 연달아 백 일단에 어깨를 부딪히며 팍팍한 분위기를 조성한다(흑3, 흑5). 흑5의 빈삼각은 그 팍팍한 분위기의 표상일 뿐 우형의 표상이 아니다. 모든 수의 가치는 하나의 분위기일 뿐 선악으로 직결되지 않는다.

왕시는 이런 팍팍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그는 내내 침착하게 움직이다가, 약점을 드러내며 운신하는 적의 돌들에 한 칼 찌르기를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이창호가 팍팍하게 나오자 그는 백6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힘을 비축한다. 어깨싸움을 한 판 벌인 이창호는 팔을 뻗고 기지개를 펴듯 하변으로 벌린다(흑7). 하루 해가 저물고 어스름이 순식간에 펼쳐지듯, 하변에서 중앙으로 흑의 땅거미가 스르르 깔릴 때세다. 백8, 왕시는 그 어스름을 훌훌 몰아내며 중앙으로 흘러나온다. 흐르는 강물의 수면 위로 황혼의 빛살이 부숴지며 빛난다. 그러자 중앙으로 부풀어오르던 흑의 어스름은 하변으로 물러난다(흑9).

이제 어디로 갈까? 물 흐르듯 가리라. 하변의 흑 진영에 다가가되 물처럼 흘러들리라. 왕시는 좌변에 외롭게 떨어진 흑 한 점(흑▲)과 동반하여 흘러들기로 한다. 백10으로 흑▲를 향하여 다가간다. 이창호는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중앙을 향하여 한 칸 뛴다(흑11). 왕시는 흘러가는 그 흑의 어깨를 툭 건드려 서게 만든 뒤(흑13) 예정대로 중앙을 향하여 함께 흘러들었다(백14). 성공이다. 백14가 놓임으로써 좌변에서 흘러나오는 흑 석 점이 고립된 한편으로 하변은 하변대로 여차하면 백의 물줄기가 흘러들 태세이다. 하변 흑 진영에 들어가 있는 백△ 한 점이 반짝반짝 빛난다. 칭찬에 인색하던 해설자도 백14가 놓이는 것을 보고 “좋은 수”라고 칭찬한다. 이제 이창호는 어떻게 할 것인가? 왕시는 그동안 헤플 정도로 일사천리 착점하였던 이창호가 오래 숙고할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왕시는 황혼녘에 흐르는 강물에 임하여 대안의 수양버들을 바라보듯 편안하다. 최상의 선이다.

장면5도(57~66)
흑, 백의 물줄기를 베어버리다

그러나 이창호는 왕시의 짐작과는 달리 별 생각도 없이 흑1로 톡 찌른다. “거긴 왜 두죠?” 해설자가 묻고 있다. “거기 정말 왜 뒀을까?” 해설자가 거듭 묻는다. 해설자는 왕시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이 수는 백2로 쌍립을 서게 함으로써 좌변 흑을 약하게 만들고 백을 강하게 만드는 이적수인데, 이창호가 왜 이런 수를 두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궁금하기 짝이 없기는 하지만, 백은 백2 이외에 달리 두기 어렵다. 왕시는 갸우뚱하며 침착하게 백2로 쌍립을 섰다. 그러자 이창호는 섬광처럼 흑3으로 찌르고 흑5로 그어 백 한 점을 팟 끊어버렸다. “앗!”(해설자)

흑5를 보고 나서, 비로소 흑1은 흑의 자충의 용량을 비워내면서 수상전이 벌어졌을 경우의 힘을 비축한 수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비축된 힘을 바탕으로 백 한 점을 가차없이 끊어버린 것이다. 이 백 한 점이 단순히 돌 하나에 불과한가? 불행히도 이 백 한 점은 왕시가 이 판에서 처음으로 자생시킨 백의 흐름, 백의 물줄기와도 같다. 이창호는 그 백의 물줄기를 훅 베어버린 것이다. 이창호의 섬광같은 수순은 무협영화에 등장하는 침묵의 절세고수가 폭포수를 상대로 칼을 휘두르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도무지 베어질 것같지 않았던 물줄기가 베어져 끊어지는 것을 목도한 왕시는 충격에 빠진다.

백의 물줄기가 베어지는 60여 수의 수순이 진행되기까지 이창호는 10분도 채 쓰지 않았다. 왕시는 전광석화같이 당한 것이다. 그는 충격 속에서 비틀거리며 이후의 수순을 진행한다. 그는 백6으로 상대를 향하여 한 수 찌른다. 찔리고 베인 충격이 찌르는 수를 부른 것이다. 흑은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곧장 흑7로 상대의 얼굴에 얼굴을 들이댄다. 그 기세에 눌려 백은 다소곳이 흑 한점을 따먹고 있을 수가 없다. 강수로 버틴다(백8). 강수의 흐름이 이어지자 이창호는 그 흐름에 편승하여 흑9로 백6의 뒷머리를 홱 젖혀버린다. 왕시는 물러서지 않고 이번에는 백10으로 옆구리를 찌른다. 이번 판에서 그는 처음으로 꿋꿋이 버티면서 연달아 찌르고 있으나 다른 대국들에서 보여주던 날카로움은 감지되지 않고 어쩐지 솜이불에다 푹석푹석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기회만 닿으면 “A” 지점을 끊고서 싸우겠다는 복안을 공공연히 노출시키며 찌르고 있기에, 왕시의 찌르기는 날카롭지 않다. 그의 의도는 대부분이 알고 있다. 그가 충격 속에서 헤매고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백의 물줄기가 끊어진 대지에서 왕시의 한점 한점은 대하의 꿈을 잃고 물방울처럼 흩어져 아롱진다.

장면6도(67~85)
1선의 강타, 또 끊어지는 물줄기

이창호는 하변 백 두 점의 아롱진 눈매를 반개한 눈으로 고요히 거둬들인 뒤 흑1로 찌르고 흑3으로 친다. 백이 곧장 막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흑3은 강력한 1선의 타격이 된다. 두 번째 충격이다. 왕시가 휘청거리며 백4로 물러서자 이창호는 흑5로 가만히 내려선다. 치고 조이는 절묘한 리듬이다. 생사가 위급해진 백은 혼미한 상태에서 백6, 백8로 찌르고 잇는다. 백의 혼미한 흐름을 타고 흑은 왼쪽 날개를 푸드덕 펼친다(흑7, 흑9). 그리고 백10, 겨우 목숨을 보전하였다. 그제야 이창호는 느긋히 흑11로 잇고는 하변 옆구리를 찌르고 있는 백 두 점을 자신의 어깨 너머로 바라본다. 고수의 풍모다. 눈을 슴벅이는 백의 두 점이 애처롭다.

왕시는 우변 백의 본진과 유리되는 사태를 무릅쓰고 하변을 향해 들어간다. 백12, 백14로 흑 한 점을 몰고 잇자 이창호는 백 한 점을 끊는다(흑15). 백16으로 몰 때 흑17로 백 한 점을 따내면서 이창호는 왕시에게 하변을 살릴 것이냐 아니면 백△ 석 점을 살릴 것이냐 묻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각오했던 터, 왕시는 백△ 석 점을 버리고 하변 백의 삶을 모색한다(백18). 마침내, 이창호의 흑19가 놓임과 함께 토굴 속에 갇혔던 흑▲ 한 점이 살아 돌아오고, 백△ 석 점이 비명횡사한다. 백△ 석 점 중에서 두 점은 우변 백의 안정을 위하여 흑▲ 한 점을 제압했던 돌들이고, 나머지 한 점은 부풀어오르는 흑의 그림자를 몰아내며 황혼빛을 싣고 흐르던 강물이었다. 한때 흠이라곤 없이 최상의 선이 되어 흘렀던 백의 물줄기마저 끊어져버렸다. 그 청명했던 돌들이 죽음으로써, 그 눈부신 물줄기가 끊어짐으로써, 우변 백의 안위가 현안으로 등장하고 흑의 그림자가 하변으로부터 중앙으로 광활하게 드리워진다. 하변 백의 목숨도 부지해야 한다. 백은 손쓸 틈도 없이 필패의 국면을 향하고 있다.

장면7도(86~92)
흰 거품 미망 속으로

돌아보면 참 놀랍다.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60여수가 진행되기 전까지 말 그대로 순조로운 흐름이었다. 흑의 두터움이 좋아보이기는 하지만 흑과 백은 노자의 “최상의 선은 흐르는 물과 같다”는 철학을 상호 실천하기라도 하듯 그렇게 흘렀다. 그러다가 이창호가 불의의 습격을 하듯 흑61(장면5도 흑3)로 백의 도도한 물줄기를 베어버림으로써 모든 흐름이 뒤집혔다. 순식간에 국면이 요동하였다. 이창호의 마력적이며 승부사적인 진실이 “흐르는 물”이라는 안정된 허구를 쓸어버리고 지나간 것이다.

왕시는 우변 백의 안위도 보살펴야 하고 하변 백의 삶도 모색해야 하고 중앙에 검게 드리워지는 흑의 그림자마저 걷어내야 한다. “흐르는 물”에 마음을 의탁하며 안정적으로 길을 걸어왔건만, 지금은 곳곳에서 죽음과 굴헝이 도사리고 있다. 순식간에 위급한 곳 투성이이다. 어쩌다 바둑이 이렇게 되었는가. 이것이 이창호인가? 이것이 이창호의 바둑인가? “이창호는 너무 강하다!”(왕시) 왕시에게는 “강하다”는 탄성 이외에 다른 언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는 이창호의 바둑을 추상화시키지 못하고 이창호와 부딪히며 느낀 육체적인 감각에 의존해 이창호의 바둑을 말하고 있다. 그는 비로소 이창호로부터 바둑 한 판을 배운 것이다.

왕시는 찰나에 겸허한 자세로 돌아와 마음을 비운다. 일단 백1, 백3으로 붙여끌어 우변 백의 안위를 확보하고 흑의 다음 한 수를 기다린다. 선수를 잡은 이창호는 하변 백 일단의 머리 위에 나비처럼 흑4를 날려보낸다. 하변 백을 살아두라고 한다. 그러나 백이 하변의 생에 집착하노라면 상변과 중앙에 펼쳐질 흑 세력을 감당할 수가 없다. 왕시는 초반에 이창호가 여운으로 남겨두었던 쟁처(백7)를 바라본다. 내 저곳으로 가리라. 흐르는 물결이 유혹하던 저곳으로. 왕시는 백5로 임시변통을 해놓은 채 하변의 생사를 여의고 상변의 쟁처를 향하여 호올로 비상한다.

백7, 이제 그는 초반부터 내내 꿈꿔왔던 고원에 올라섰으나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 “흐르는 물”의 허구성이 무너지고 난 이후, 그 허구성이 만들어놓았던 고원에 올라선들 무슨 소용 있으랴. 그러나 그는 한 마리 상처 입은 허약한 짐승이 되어 수구초심의 심정으로 그 고지에 올랐던 것! 과거를 그리워하며 그는 “흐르는 물”의 미망에 빠져본다. 이창호가 휩쓸어버렸던 흰 거품 미망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중앙의 흑 세력을 좀 더 효율적으로 지울 수 있는 착점 위치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왕시는 굳이 그 지점을 택했다. 자신이 사랑하였던 미망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그 그리운 지점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타버린 가슴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백7은 전략의 한 수라기보다는 지극히 시적인 한 수에 가깝다. 이 수는 왕시의 비극적인 심정을 빼어나게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한 수에 대하여 고대 그리스의 시인 아나크레온의 서정시를 부치고 싶다:

다시 사로잡힌 나 레우카스 암벽에서
흰 거품 파도 속으로 뛰어드노라 사랑에 취하여

“나중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다만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말일 뿐이며 패한 것은 패한 것이며 현재 괴로운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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