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2“세간은 실로 무엇에 의하여 감겨 있으며
실로 무엇으로 말미암아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까?
실로 무엇이 세간의 덧칠입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실로 무엇이 세간에서 큰 두려움입니까?”1033“세간은 무명無明에 의하여 감겨 있으며
식별욕識別欲[1]역자들은 “veviccha”를 한결같이 “탐욕”으로 옮기고 있으며 사전에서도 그렇게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낱말은 √vid(알다)의 원망형에서 파생한 것으로 “알고자 하는 욕구”가 기본 뜻이다. 우리는 의미분절을 통해 식별과 분별, 분화와 분열을 일으키며, 그 결과 갖가지 대상물(=존재들)이 출현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앎이자 우리의 세간이며, 식별욕과 분별욕이 광활하게 침투할수록 세간의 진정한 모습, 즉 세간의 기원이 켜켜이 감춰진다.으로 말미암아 드러나지 않습니다,
분분언紛紛言[2]역자들은 “jappā”를 “욕심”, “갈망”, “집착” 등으로 옮기고 있으나, 그 어원을 추적해 보면 √jalp, √lap로서 “어지러이 말하다”가 근본 뜻이다. 식별욕에 의해 출현한 대상물, 즉 유정세간과 기세간을 이룰 갖가지 것들에 수많은 언어와 평가, 애증과 호오의 감정을 어지러히 덧붙힘으로써 “나”(=유정세간)가 성립하며 “세계”(=기세간)가 성립한다. 세간은 사행하는 “분분언紛紛言”에 의해 덧칠되고 윤색되고 두터워진다. 그리하여 세간은 총천연색 입체성과 함께 존재의 위용, 존재의 더미를 드러낸다, 시간, 공간, 과거, 현재, 미래, 생명, 사람, 사물, 추억, 상처, 불안, 두려움, 행복, 기쁨, 괴로움, …, 생노병사, 우비고뇌. 그러므로 고苦는 세간에서의 가장 큰 두려움이다. 고苦는 존재의 더미라는 기류를 타고 세간을 횡행하는 바람인 것이니, 미풍, 남풍, 북풍에서부터 폭풍, 태풍에 이르기까지 출현과 은몰을 반복하면서 존재에 균열을 일으키고 존재더미를 무산시킨다. 고苦는, 분분언을 흩날리며 동물과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고 선악시비에 눈뜬 아담을 향해 “너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직설의 물음이며, 식별욕과 분분언을 몽매하게 펼치고 흩날리기만 하는 아담과 세계를 향한 역습이다. 누가 그 바람, 그 흐름, 그 역습을 막을 것이냐?이 세간의 덧칠입니다, 나는 말합니다,
고苦가 세간에서 큰 두려움입니다.”1034“흐름들은 어디에서나 흐르고 있나이다,
무엇이 그 흐름들을 막는 것이며
그 흐름들에 맞서 지키는 것입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에 의하여 그 흐름들이 덮혀버립니까?”1035“그 흐름들은 세간에서 흐르는 것이니
염念이 그 흐름들을 막는 것이며
그 흐름들에 맞서 지키는 것입니다, 나는 말합니다,
혜慧에 의하여 그것들이 덮혀버립니다.”1036“혜慧라는, 그리고 염念이라는
바로 그 명색名色, 존사尊師시여,
이것이 궁금하여 묻사오니, 말씀해 주십시오,
어디에서부터 이것이 그치기 시작합니까?”1037“이 질문 물었으니, 아지타여,
당신을 위해 그것에 답하겠습니다.
명名과 색色이 온전히
그치기 시작하는 곳,
그곳에서부터 식識의 멸滅에 의하여
그것이 그치기 시작합니다.”1038“법法이 밝혀진 이들이 있는가 하면,
여러 부류의 유학有學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의威儀가 궁금하여 묻사오니,
말씀해 주십시오, 사표師表가 되시는 존사시여.”1039“욕락欲樂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며,
의意가 흐리지 않을 것이며,
일체법에 선善할[3]“kusala”는 전통적으로 “善”으로 옮긴다. 오늘날 이 “善”이 도덕적인 의미로만 고착된 것은 불운이다. 그에 따라 역자들은 “통달”, “깨달음”, “숙달” 등으로 옮기고 있지만, 그 원뜻에 충족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이럴 경우 아예 경전상에 쓰이는 “善”을 현대 의미와는 달리 정의하고서 이 용어를 그대로 활용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다. 가령 법학에서는 “선의善意”가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전후사정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키는 의미로 통용되듯이, 의미의 복원 내지 전이를 통하여 현재 통용되는 해석지평을 해체하고 넘어서는 방법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kusala”의 뜻을 상세히 논할 수는 없겠지만,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선악은 도덕적 의미의 선악을 넘어서는 개념이라는 것을 우선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것이며,
염念하는 비구로서 유행遊行할 것입니다.”— 「숫타니파타」 1032-1039, “젊은 아지타의 질문”
1032“Kena-ssu nivuto loko,
(icc-āyasmā Ajito)
kena-ssu na-ppakāsati,
ki ‘ssābhilepanaṃ brūsi,
kiṃ su tassa mahabbhayaṃ.”1033“Avijjāya nivuto loko,
(Ajitā ti Bhagavā)
vevicchā [pamādā][4]Fausböll의 제안을 따라 삭제한다. 삭제해야 운율이 맞으며, 의미상으로도 “vevicchā”와 “pamādā”의 병기는 어색하다. na-ppakāsati,
jappābhilepanaṃ brūmi,
dukkham assa mahabbhayaṃ.”1034“Savanti sabbadhī sotā,
(icc-āyasmā Ajito)
sotānaṃ kiṃ nivāraṇaṃ,
sotānaṃ saṃvaraṃ brūhi,
kena sotā pithiyyare.”1035“Yāni sotāni lokasmiṃ,
(Ajitā ti Bhagavā)
sati tesaṃ nivāraṇaṃ,
sotānaṃ saṃvaraṃ brūmi,
paññāy’ ete pithiyyare.”1036“Paññā c’ eva sati yañ ca[5]“sati yañ ca” 구절과 관련하여 필사본마다 상이하다. 이 게와 다음 게의 의미 흐름상 매우 중요한 구절이므로 사본마다 필사한 내용을 대조해보면, 다음과 같다:
Baim sati ca; Ckb Bai satī ca; Bm satī yañ ca; Fsb. c’ eva; Nidd. cāpi
PTS 비평본이 교감한 “satī ca”에서, “satī”의 끝음절이 원래와는 달리 장음화된 것은 “yañ”이 생략되면서 남긴 흔적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PTS 비평본 교감내용은 운율에 맞지 않다. 나는 이 게의 질문과 다음 게의 답변 흐름상 “sati yañ ca”로 읽고 싶으며, 이렇게 읽는 것이 운율에도 잘 맞다. PTS 비평본을 따라 이 구절을 읽으면 “혜慧와 염念이 바로 그것일진대,/ 그러면 명색, 존사시여,/ 이것이 궁금하여 묻사오니”로 옮길 수 있으며, “sati yañ ca”로 교감할 경우 이 번역문처럼 “혜慧라는, 그리고 염念이라는/ 바로 그 명색, 존사시여,/ 이것이 궁금하여 묻사오니”로 옮길 수 있다.
(icc-āyasmā Ajito)
nāmarūpañ ca mārisa,
etaṃ me puṭṭho pabrūhi,
katth’ etaṃ uparujjhati.”1037“Yam etaṃ pañhaṃ apucchi,
Ajita taṃ vadāmi te,
yattha nāmañ ca rūpañ
ca asesaṃ uparujjhati:
viññāṇassa nirodhena
etth’ etaṃ uparujjhati.”1038 “Ye ca saṃkhātadhammāse,
ye ca sekhā puthū idha,[6]SN 12.31에서 이 게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다만 “puthū idha”를 “puthu idha”로 달리 새기고 있다. 이에 상응하는 산스크리트 투르판 단편(Tripathi 1962)은 “pṛthagvidhāḥ”이다. 음운현상을 고려해 볼 때 “puthu(g/k)-(v)idha”에서 “puthū-(v)idha → puthū-idha → puthū idha → puthu idha”로 변한 듯하다. 따라서 “여기에는 여러(puthu idha)”로 읽을 것이 아니라 “여러 부류의(puthū-vidhā, puthū-idhā)”로 읽어야 하며, 산스크리트 단편은 이 독법을 지지한다. 더 나아가 두번째 행은 전통적으로 음절의 장단을 불문하고 긴 장음으로 낭송하므로, 설령 끝음절이 단음절로 필사되었더라도 장음절로 보는 것은 아무런 무리가 없다.
tesaṃ me nipako iriyaṃ
puṭṭho pabrūhi mārisa”.1039“Kāmesu nābhigijjheyya,
manasānāvilo siyā,
kusalo sabbadhammānaṃ
sato bhikkhu paribbaje” ti
* 각주
1. | ↑ | 역자들은 “veviccha”를 한결같이 “탐욕”으로 옮기고 있으며 사전에서도 그렇게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낱말은 √vid(알다)의 원망형에서 파생한 것으로 “알고자 하는 욕구”가 기본 뜻이다. 우리는 의미분절을 통해 식별과 분별, 분화와 분열을 일으키며, 그 결과 갖가지 대상물(=존재들)이 출현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앎이자 우리의 세간이며, 식별욕과 분별욕이 광활하게 침투할수록 세간의 진정한 모습, 즉 세간의 기원이 켜켜이 감춰진다. |
2. | ↑ | 역자들은 “jappā”를 “욕심”, “갈망”, “집착” 등으로 옮기고 있으나, 그 어원을 추적해 보면 √jalp, √lap로서 “어지러이 말하다”가 근본 뜻이다. 식별욕에 의해 출현한 대상물, 즉 유정세간과 기세간을 이룰 갖가지 것들에 수많은 언어와 평가, 애증과 호오의 감정을 어지러히 덧붙힘으로써 “나”(=유정세간)가 성립하며 “세계”(=기세간)가 성립한다. 세간은 사행하는 “분분언紛紛言”에 의해 덧칠되고 윤색되고 두터워진다. 그리하여 세간은 총천연색 입체성과 함께 존재의 위용, 존재의 더미를 드러낸다, 시간, 공간, 과거, 현재, 미래, 생명, 사람, 사물, 추억, 상처, 불안, 두려움, 행복, 기쁨, 괴로움, …, 생노병사, 우비고뇌. 그러므로 고苦는 세간에서의 가장 큰 두려움이다. 고苦는 존재의 더미라는 기류를 타고 세간을 횡행하는 바람인 것이니, 미풍, 남풍, 북풍에서부터 폭풍, 태풍에 이르기까지 출현과 은몰을 반복하면서 존재에 균열을 일으키고 존재더미를 무산시킨다. 고苦는, 분분언을 흩날리며 동물과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고 선악시비에 눈뜬 아담을 향해 “너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직설의 물음이며, 식별욕과 분분언을 몽매하게 펼치고 흩날리기만 하는 아담과 세계를 향한 역습이다. 누가 그 바람, 그 흐름, 그 역습을 막을 것이냐? |
3. | ↑ | “kusala”는 전통적으로 “善”으로 옮긴다. 오늘날 이 “善”이 도덕적인 의미로만 고착된 것은 불운이다. 그에 따라 역자들은 “통달”, “깨달음”, “숙달” 등으로 옮기고 있지만, 그 원뜻에 충족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이럴 경우 아예 경전상에 쓰이는 “善”을 현대 의미와는 달리 정의하고서 이 용어를 그대로 활용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다. 가령 법학에서는 “선의善意”가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전후사정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키는 의미로 통용되듯이, 의미의 복원 내지 전이를 통하여 현재 통용되는 해석지평을 해체하고 넘어서는 방법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kusala”의 뜻을 상세히 논할 수는 없겠지만,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선악은 도덕적 의미의 선악을 넘어서는 개념이라는 것을 우선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
4. | ↑ | Fausböll의 제안을 따라 삭제한다. 삭제해야 운율이 맞으며, 의미상으로도 “vevicchā”와 “pamādā”의 병기는 어색하다. |
5. | ↑ | “sati yañ ca” 구절과 관련하여 필사본마다 상이하다. 이 게와 다음 게의 의미 흐름상 매우 중요한 구절이므로 사본마다 필사한 내용을 대조해보면, 다음과 같다: Baim sati ca; Ckb Bai satī ca; Bm satī yañ ca; Fsb. c’ eva; Nidd. cāpi PTS 비평본이 교감한 “satī ca”에서, “satī”의 끝음절이 원래와는 달리 장음화된 것은 “yañ”이 생략되면서 남긴 흔적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PTS 비평본 교감내용은 운율에 맞지 않다. 나는 이 게의 질문과 다음 게의 답변 흐름상 “sati yañ ca”로 읽고 싶으며, 이렇게 읽는 것이 운율에도 잘 맞다. PTS 비평본을 따라 이 구절을 읽으면 “혜慧와 염念이 바로 그것일진대,/ 그러면 명색, 존사시여,/ 이것이 궁금하여 묻사오니”로 옮길 수 있으며, “sati yañ ca”로 교감할 경우 이 번역문처럼 “혜慧라는, 그리고 염念이라는/ 바로 그 명색, 존사시여,/ 이것이 궁금하여 묻사오니”로 옮길 수 있다. |
6. | ↑ | SN 12.31에서 이 게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다만 “puthū idha”를 “puthu idha”로 달리 새기고 있다. 이에 상응하는 산스크리트 투르판 단편(Tripathi 1962)은 “pṛthagvidhāḥ”이다. 음운현상을 고려해 볼 때 “puthu(g/k)-(v)idha”에서 “puthū-(v)idha → puthū-idha → puthū idha → puthu idha”로 변한 듯하다. 따라서 “여기에는 여러(puthu idha)”로 읽을 것이 아니라 “여러 부류의(puthū-vidhā, puthū-idhā)”로 읽어야 하며, 산스크리트 단편은 이 독법을 지지한다. 더 나아가 두번째 행은 전통적으로 음절의 장단을 불문하고 긴 장음으로 낭송하므로, 설령 끝음절이 단음절로 필사되었더라도 장음절로 보는 것은 아무런 무리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