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추상적ㆍ학문적 언어는—사실 모든 언어는 추상적인 것이지만—, 그 기원을 살피자면, 일본이 근대화 시절에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면서 조어한 한자어가 태반이다. 그 한자어가 우리나라 개화기 지식인들에 의하여 그 어떤 비판과 검증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수용되었으며, 이후 그것이 과거 조선시대 한어漢語를 전면적으로 대체하였다. 오늘날에는 우리말이 되고 말았으며, 우리의 정신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우리가 현재의 추상적ㆍ학문적 언어 자체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그 뿌리에 접근할 경우, 필연적으로 서양 근대철학, 더 나아가 칸트 이전 라이프니츠ㆍ볼프 체계의 세계관에 당도하게 된다. 일본 근대화 시절에 정면에서 마주한 서양의 정신ㆍ철학은 다름아닌 칸트 이후의 근대철학이었으며, 사상 분야의 일본 조어한자는 바로 그런 서양철학을 상대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이 없는 사태이지만, “라이프니츠ㆍ볼프 체계→칸트→서양 근대철학→일본 조어한자→우리나라 개화기 수용→오늘날 우리의 추상적ㆍ학문적 언어”라는 이식移植의 결과물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대부분의 한자어이다. 나는 이 잡종의 한자어를 가지고 근대적 사고를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더 나아가, 이 한자어를 가지고 사유를 펼치려는 시도는 그 어떤 새로운 사상도 낳지 못한 채 허사가 될 것으로 본다. 비유컨대, 서양 근대철학의 용어를 위주로 하여 노자ㆍ장자를 소화하려는 시도가 과연 가당하기나 하겠는가? 그런데도 그런 시도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괴이하기까지 하다.
노자ㆍ장자를 다루는 소장학자들의 해석이 대개 지리멸렬한 해석에 그치고 마는 것은, 내 생각에는, 바로 그 일본 조어한자에 지배된 그들의 정신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 그들은 어느 세대보다도 그 한자어의 정신적 세례를 받고 성장한 탓에 그것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사용한다. 객관? 주관? 대상? 개인? 국가? 본질? 실체? 상상? 존재? 본성? 정치? 경제? 인문? 논리? 언어? 자연? 심리? 의식? — 이 익숙한 용어들이 무슨 의미인가를 알기 위해 과연 우리는 무슨 책을 들춰보는가? 대부분 서양철학사나 (서양)철학사전, 백과사전, 어학사전 따위를 보지 않겠는가? 혹은 이런 용어들은 누구에게나 다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아무런 의구심 없이 남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용어들을 사용하는 한 서양 근대철학의 세계관을 벗어나기는 좀체 힘들다. 물론 “인문”이니 “언어”니 “의식”이니 하는 용어들은 본래 동양사상 고유의 술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정신이 서양 근대철학의 세계관에 지배 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조차도 동양사상 고유의 뜻을 잃은 채 유통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서양의 근대적 세계관에 흘레붙은 동양의 술어들이나 일본 조어한자를 불가피하게 쓸 수밖에 없을 때에는 매우 조심스럽게 다룬다. 그것들은 서양 근대철학이 설치해 둔 강력한 덫이기 때문이다. 국어사전, 일한사전, 영한사전, 독한사전 등도 그 덫들을 양산하는 기지基地에 다름아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사막화 되어가는 불모지에서 영영 수원水源을 찾아내지 못하고 고사될 운명인 지도 모르겠다.
우리말에 대한 위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자라면, 선가의 선어록만큼 언어의 충격을 주는 경우는 만나기 힘들다. 물론 선어록 역자들마다 특색이 있어서 가독성을 높인답시고 일본식 조어한자를 남발하는 번역서도 있어서 선어록이라고 무조건 권할 것은 못되겠지만, 내 개인적 경험으로는, 선림고경총서로 간행된 「벽암록」(장경각 1993) 번역서가 참으로 신선했다. 삼십대에 처음 그 어록을 접했을 때 언어와 문체가 대단한 충격이었다. 일단, 국어사전에도 등장하지 않는 언어들이 즐비했으며,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언어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저 한자를 확인하면서 그 의미를 겨우겨우 추정하면서 읽었을 정도였다. 그런데다가, 이십대 시절에 내 정신을 철저히 유린했던 일본 조어한자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신선함과 충격을 넘어 차라리 경이였다.
지분거리고 너덜거리던 용어들을 깡그리 일소하고서 새로운 시공간에서 호흡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물론 선어록에도 주객主客ㆍ빈주賓主 등의 술어가 등장하지만, 워낙 다른 세계의 언어들인지라 주객이라는 술어도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언어로 다가왔다. 실제로도 이런 언어는 요즘의 언어와는 글자만 같을 뿐 의미는 전혀 다르다. 이런 표현을 쓰기는 싫지만 불가피하게 쓰자면, “의미론적 공간”이 달라지면서 모든 언어가 달라진 것이다. 마치 구강구조가 바뀌면 낱낱 글자의 발음이 전부 달라지듯이, 의미의 세계도 동일한 변화가 가능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언어의 의미를 달리 규정한다고 해서 새로운 사상이 출현할 수는 없으며, 모든 언어의 의미를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전부 탈바꿈시킬 정도로 “의미론적 공간”이 달라져야 새로운 사상이 나올 수 있음을 직감했다. 문제는 의미의 재정의도 아니며 화용론적 맥락도 아니며, 언어를 말하는 자가 속해 있는 세계인 것이다.
비구들이여, 물든 ‘희열’이 있으며 물들지 않은 ‘희열’이 있으며 물들지 않은 것보다 더 물들지 않은 ‘희열’이 있다.
물든 ‘안락’이 있으며 물들지 않은 ‘안락’이 있으며 물들지 않은 것보다 더 물들지 않은 ‘안락’이 있다.
물든 ‘평정’이 있으며 물들지 않은 ‘평정’이 있으며 물들지 않은 것보다 더 물들지 않은 ‘평정’이 있다.
물든 ‘해탈’이 있으며 물들지 않은 ‘해탈’이 있으며 물들지 않은 것보다 더 물들지 않은 ‘해탈’이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물든 희열인가? […]
— 「상윳타 니카야」, “물들지 않음 경”(SN 36.31)에서
사람들은 “희열(喜)”, “안락(樂)”, “평정(捨)”, “해탈”이라는 동일한 언어를 구사하지만, 비록 동일한 언어라 해도 그것을 쓰는 자의 수준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고 부처님은 설한다. 크게 구분하여 사람은 세 층위의 수준이 있으며, 언어 역시 그 수준에 따라 세 층위의 의미론적 공간이 있는 것이다.
안이비설신ㆍ색성향미촉이 세운 오욕락의 세계에 물든 자가 언어를 구사하면 그 언어는 “물든 언어”가 된다. 적어도 오욕락의 세계와 불선법不善法을 떠나 초선初禪에 든 자가 언어를 구사해야 그 언어가 “물들지 않은 언어”가 된다. “초선에 든 자에게는 언어가 멸滅하며”(SN 36.11), 언어를 탄생시키려는 밑흐름(尋ㆍ伺)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의 출생의 비밀을 안다. 따라서 초선 이후에야 비로소 출정후어出定後語가 탄생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물들지 않은 언어”가 된다. 물들지 않은 언어는 입선入禪한 자의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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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물들지 않음 경”의 기준에 의하면, 이세상에서 소통되는 거의 모든 언어는 사실상 “물든 언어”에 불과하다. 입선하지 못한 자의 언어는 어떻게 의미를 규정해서 말하든 “물든”(팔리어 원뜻으로는 “맛들린sāmisa”) 언어를 벗어날 수 없다. 물든 희열, 물든 안락, 물든 평정, 물든 해탈, 물든 마음, 물든 법, 물든 사념처, 물든 사성제, 물든 일체, 물든 열반, …. 그러나 입선한 자가 언어를 토하면 그 언어는 모두 “물들지 않은 언어”, 출세간의 언어가 된다. 물들지 않은 희열, 물들지 않은 안락, 물들지 않은 평정, 물들지 않은 해탈, 물들지 않은 마음, 물들지 않은 법, 물들지 않은 더러움, 물들지 않은 똥, 물들지 않은 오줌, ….
이렇듯 언어를 말하는 자의 수준에 따라 언어의 의미가 달라진다면, 그 언어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언어를 말한 자를 알아야 한다. 그 언어를 말한 자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면, 그 (기록된, 혹은 전달된) 언어의 의미는 제대로 파악될 수 없다. 따라서 기록된 언어는 기본적으로 유령의 언어이며, 그 언어의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언어, 그 언어의 아버지를 살해한 언어이다. (학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부친살해!”) “물든 언어”의 의미에 대한 규정이라면 굳이 그 언어의 아버지를 알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언어가 진정한 “물들지 않은 언어”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언어의 아버지를 만나 남김없이 간파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나는 플라톤이 기본적으로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파이드로스」 후반부에서 “말/글”의 간극을 극대화시켰다고 본다.
「벽암록」을 읽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사실은 그 언어의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물든 언어”의 세계에 속한 자는 부친살해를 통해 「벽암록」을 자신의 언어세계로 끌어내린다. 거기에서 “기록된 언어”, “물든 벽암록의 언어”가 탄생하며, 거기에서 비로소 벽암록의 이해가 가능하다. 이렇게 “물든 자”가 “물들지 않은 언어”를 수용할 때에(즉 이해할 때에) 대단원의 비극이 시작되며, 완벽한 몰이해로서의 이해가 탄생한다. 이를테면 “물든 자”가 「벽암록」을 이해한 순간부터, 사실은 「벽암록」의 언어가 총체적으로 훼절되어 그의 교언영색을 위해 치장되는 언어로 전락하고 만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모두를 위한 책, 그 누구도 위하지 않는 책”이라는 부제도 바로 이런 비극을 시사한다. 니체는 자신과 “현대인”의 간극을, “거리감”, 더 나아가 거리감을 극도로 강조하여 “거리의 파토스”라고 표현했으며, 어떤 현대인도 그 간극을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가 모두(“현대인”)에게 이해되는 순간, 차라투스트라는 완벽하게 훼손된다. 모두가 이해하는 책이 되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책이 된다. “현대인”은 니체 살해를 통해 니체 언어를 이해하며, 차라투스트라 살해를 통해 차라투스트라 언어를 이해한다. 그렇다면 누가 니체의 “현대인”인가? 혹시 그 어떤 독자보다도 오히려 니체 전공자들이 니체의 “현대인”이 아닐까? 혹시 그들이야말로 니체 살해를 통해 니체의 저술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다고 본다.
“물들지 않은 자”의 언어도 그러할진대, 과연 “물들지 않은 자보다 더 물들지 않은 자”의 언어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팔리 니카야 경전은 “물들지 않은 자보다 더 물들지 않은 자”의 법문이므로, 불교를 배우는 학인은 반드시 “거리의 파토스보다 더한 파토스”를 염두에 두고 경전에 접근해야 마땅하다. 그 어떤 구절도 쉽게 보아 넘겨서는 안된다. 쉽고 간단하게 보아 넘기는 순간, 팔리 니카야는 극심하게 훼손된다. 우리는 이 비극을 남일로 간주하기 십상이지만,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 다름아닌 우리가 속한 전통이 팔리 니카야를 극심하게 훼손하고 있는 전통이며, 우리의 해석은 그 훼손을 대대로 전승한 해석일 수도 있음을, 심지어는 팔리 니카야의 정통해석이라 자부하는 해석이 그런 전통일 수도 있음을.
이와 같은 언어의 층위를 고려하자면, “물들지 않은 자”가 “물든 자”를 상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물든 자”의 “물든 언어세계”를 부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었으며, 소크라테스는 대화상대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김으로써 순산을 돕는 산파였다.
나와 교제하는 이들은 출산하는 여인들이 겪는 바로 그런 걸 겪는다네. 산고를 겪으며 밤이나 낮이나 곤경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일세. 그것도 저 여인들의 경우보다도 훨씬 더 심하게 말이야.
—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정준영 역(이제이북스 2013), 89면
흔한 말로 “인식체계”니 “사상체계”니 “세계관”이니 하지만, 실은 언어로 기워진 “가상세계”를 찢어서 고통을 주는 것이다. 가상세계를 찢는 것에 불과한데 어찌 산고보다 더한 고통을 겪는 것일까? “물든 자”는 다름아닌 그 가상세계에 물들고 맛들린 자로서, 그 물듦과 맛들림에 의해 가상세계가 진짜 세계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그 세계에 완벽하게 빨린 채 수십년을 살아온 자를 그 세계에서 건져내려면, 그 세계(즉 인식체계ㆍ사상체계ㆍ세계관 등으로 지칭되는 가상세계)에 파문과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야말로 긴급한 일이다.
부처님은 그보다 더하다. 행복도 괴로움, 고통도 괴로움, 기쁨도 괴로움, 슬픔도 괴로움, 생도 괴로움, 병도 괴로움, 늙음도 괴로움, 죽음도 괴로움, 안이비설신의ㆍ색성향미촉법의 일체가 괴로움이다. “물든 언어”, “물든 세계”에 속한 그 어떤 것도 괴롭지 않은 게 없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전복시킨다. 대단히 불편한 진실, 끝끝내 감추고 싶은 진실을 노골적으로 꺼내 이야기한다. 이는 비관주의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진실론자의 이야기, 진정한 고수의 이야기이며, 안이하고 표피적인 사고 저변에 커다란 수렁이 있음을 일러주는 이야기이다. 언어로 기워진 세계, 언어가 누비는 세계는 무상하며 괴로움이며 무아이다. 즉, 가짜 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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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나누자면, 이 세상에는 “물든 자”와 “물들지 않은 자”가 있다. 이 두 부류가 동일한 언어를 말한다고 하여 그 의미를 단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물든 자”는 “물들지 않은 자”와 오해 없이 소통하는 게 불가능하다. 불교경전에서는 그 간극이 있음을 분명히 설한다. 그러므로 불교를 배우는 학인이라면, “청정”이니 “해탈”이니 “반야”니 “사념처”니 “선정”이니 “화두”니 “사성제”니 “팔정도”니 “상좌부”니 “대승”이니 하는 언어를 접할 때, 그 언어를 내뱉는 자의 염染ㆍ무염無染을 단번에 간파해야 하는 법이지 꼬랑지를 흔들며 그 사람의 언어를 따라가선 안된다. “師子咬人 韓獹逐塊”, 사자는 흙덩이를 던진 사람을 무는데, 한나라 개는 흙덩이를 좇아간다고 하던가? 조주의 “무無”자를 들으면 그 조주를 물어야 하는 것이지 “무”자를 따라가면 개밖에 더 되겠는가?
“물든 자”에서 “물들지 않은 자”로 건너게 되면, 필연적으로 세간에 널리 유포되어 깊이 고착된 언어, “진하게 물든 언어”에 대해서 심한 이질감ㆍ괴리감을 느끼는 까닭에 가급적 그것을 기피하게 마련이다. 이에 대해서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여러 시편으로 아름답게 노래한 바 있다, “나는 서정시인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봐요/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 이렇듯 “진한 언어”를 대하는 태도는 공부인에 따라 저마다 다르다. 니체처럼 파괴적이고 공격적으로 대할 수도 있다. 따라서 어떤 이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감각으로, 어떤 이는 유려하고 파괴적인 공격으로, 어떤 이는 고독의 광기로, 어떤 이는 흔적 없는 자취로, 어떤 이는 원숙한 가르침으로….
부처님은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하게 “물든 언어”를 대한다, 폭풍처럼 산들바람처럼 나비의 너울거림처럼. 그분의 가르침은 그 무엇보다 철학적이며 그 무엇보다 혁명적이며 그 무엇보다 유려하고 아름답다.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니,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한때 세존께서는 욱카타의 수바가숲 큰 사라수 아래 머물고 계셨다. 그곳에서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입을 여셨다, “비구들이여”. “세존이시여”, 비구들은 세존께 답했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일체법의 근본법문根本法門을 설하겠노라. 이를 들으라, 잘 작의作意하라, 설법하리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은 세존께 답했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여기, 비구들이여, 무문범부無聞凡夫, 성자들을 만나지 못한 자, 성자의 법을 알지 못한 자, 성자의 법에 들지 못해 [세간을] 떠나지 못한 자, 진인眞人들을 만나지 못한 자, 진인의 법을 알지 못한 자, 진인의 법에 들지 못해 [세간을] 떠나지 못한 자, 그는 땅으로부터 땅을 추출한다. 그는 땅으로부터 땅을 추출하고서 그 땅을 생각하고, 그 땅과 함께 생각하고, 그 땅에서부터 생각하고, 그 땅을 내 것으로 생각하고, 그 땅을 환희한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에게는 요지了知가 없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는 물로부터 물을 추출한다. 그는 물로부터 물을 추출하고서 그 물을 생각하고, 그 물과 함께 생각하고, 그 물에서부터 생각하고, 그 물을 내 것으로 생각하고, 그 물을 환희한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에게는 요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
“그는 열반으로부터 열반을 추출한다. 그는 열반으로부터 열반을 추출하고서 그 열반을 생각하고, 그 열반과 함께 생각하고, 그 열반에서부터 생각하고, 그 열반을 내 것으로 생각하고, 그 열반을 환희한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에게는 요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 「맛지마 니카야」, “근본법문 경”(MN 1)에서
“물든 땅”, “물든 물”, “물든 불”, “물든 바람”, “물든 희열”, “물든 안락”, “물든 해탈”, “물든 일체”, “물든 열반”은 이렇게 하여 탄생한다. 무슨 까닭으로 모든 것이 “물든 언어”가 되고 마는가? 그 언어의 아버지에게 “요지了知”가 없기 때문이다. 그 언어의 아버지가 “물든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안眼ㆍ색色ㆍ안식眼識”(처ㆍ계)의 연기, “안ㆍ색ㆍ안식의 화합(觸)→수受→상想→사思”의 연기를 보지 못한다. 그는 수수관受隨觀도 하지 못하므로 수受를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수受는 흔히 말하는 “느낌”이 아니다. 수受를 알고 보는 자라면, 땅으로부터 땅을 추출(想)하고서 그 땅을 생각하고, […] 그 땅을 환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受를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는 땅으로부터 땅을 추출(想)하고서 그 땅을 생각하고, 그 땅과 함께 생각하고, 그 땅에서부터 생각하고, 그 땅을 내 것으로 생각하고, 그 땅을 환희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의 언어를 공격하면 그는 불쾌하다. 누군가가 그의 생각을 공격하면 그는 분노한다. “생각”은 내 것이고, “언어”는 내 것이고, 그러므로 “땅”도 내 것, “물”도 내 것, “해탈”도 내 것, “열반”도 내 것, “일체”가 내 것이기 때문이다.
“물든 언어”의 의미를 제아무리 재정의한들, “물든 자”가 “물들지 않은 자들”에 합류할 수는 없다. 반면에, “물들지 않은 자”는 언어를 조율하는 구조가 판이하므로, 언어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도 “물들지 않은 언어”를 자연스럽게 내놓을 수 있다. 언어의 질서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내가 벽암록을 처음 접했을 때 벽암록의 그 어떤 언어도 정의할 수 없었으며, 오로지 다른 차원만이 펼쳐졌던 것이다. 그로 인해 “물든 언어”, “물든 세계”를 망연자실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장자」의 우언을 빌자면, 천하의 백성을 평온히 다스린 요 임금이 막고야산의 신인神人들을 만나고 나서는 천하를 잃어버렸다고 하던가? “물든 천하”의 정점에 오른 성군聖君조차도 “물들지 않은 산”의 신인들을 만나면 그렇게 되고 마는 법이다. “물든 열반”에 이른 자도 “물들지 않은 입출식념”을 확립한 자를 만나면 그렇게 되고 만다. 이것이 불교 공부의 세계이다.
무문범부無聞凡夫,
성자들을 만나지 못한 자,
성자의 법을 알지 못한 자,
성자의 법에 들지 못해 세간을 떠나지 못한 자,
진인들을 만나지 못한 자,
진인의 법을 알지 못한 자,
진인의 법에 들지 못해 세간을 떠나지 못한 자,
그는 먼저 “물든 언어”, “물든 세계”, “물든 천하”, 요컨대 그 자신의 “일체”를 잃어야 한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학인의 배움이 시작되는 것이니, 이를 일러 성제자聖弟子의 길, 유학有學의 길, 학인學人의 길이라 한다.
어제, 폭풍우에 흔들리는 숲을 보았다. 의미의 질서가 산산히 무너질 때, 일체가 흔들릴 때, 고통이나 격정보다는 오히려 적멸 속 장엄함이 보일 때가 있으리니, 바야흐로 그때가 호시절이다.
문득 검색하면서, 여기까지 왔네요. 불교의 인문적 성찰이 좋았습니다. 앞으로 종종 들러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말하지 않는 자는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합장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