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지혜를 뒤엎고 만고의 흉금을 열어 젖힌다 — 남회근의 「중국문화 만담」을 읽고

동양고전을 읽는다 함은 마치 종교 교의의 숲에 들어서는 것과도 같다. 노자, 장자, 공자 등의 저술에 대한 해석은 적어도 이천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후대의 권력들은 노장과 유가에 대한 해석을 장악하기도 했으므로, (오늘날 학자들의 해석까지 포함해서) 후대의 주해ㆍ해석을 읽는다는 것은 유서 있는 종교 종파의 해석 전통에 들어서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느 고전을 읽든 우리는 어느 해석 전통에 의해 채색되고 윤색되고 때로는 변질된 고전을 읽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후대의 주해ㆍ해석을 완전히 제거하고서 성현들의 경전을 읽을 수는 없을까? 단언컨대, 없다. 다름아닌 한자의 뜻 자체가 후대 해석사에 의해서 원뜻이 복원될 수 없을 정도로 덧칠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자전인 「설문해자」 역시 노장과 유가의 경전이 확립된 때로부터 사오백 년 뒤에 편찬되었으니, 현재의 우리가 경전 한자의 뜻을 자전이나 옥편을 통해서나 후대의 주해서들을 통해서 적확하게 복원할 수 있다고 보는 것 자체가 무망한 일이다. 이와 같은 해석의 숲, 권력의 숲, 교의의 숲에서 어떻게 해야 길을 헤매지 않을 수 있을까? “경으로써 경을 풀이하는 것”(以經解經)이 가장 훌륭한 독해방식이겠지만, 대단한 안목이 아니고서는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후대의 태생적 손실을 메꾸기 위해 갑골학을 공부하기도 하지만, 갑골문에 들어서면 마치 「장자」의 “아무것도 없는 고을, 광막한 들”에 들어서는 것과도 같아 기존 학술적 방식에 의한 고증 자체가 매우 어렵다. 한 마디로, 기존의 해석도구들을 모두 버려야 하는 무장해제를 당하게 된다는 얘기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와 같은 세대가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한자를 배우면서 익히 들었던 「논어」의 첫 문장,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에서 “학學”자와 “습習”자, 이 너무나 쉬운 글자들의 해석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희의 「논어집주」에서 해석한 대로, “(성현을) 본받다”, “(반복하여) 익히다”로 보는 게 그래도 가장 정통하고 올바른 해석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나는 공자가 그런 평범한 수준의 말을 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런 정도라면 나는 공자를 존경할 수 없다.

「도덕경」의 해석서들을 읽으면서도 「장자」의 해석서들을 읽으면서도, 가장 깊고 정통하다고 평가받는 왕필의 주해나 곽상의 주해를 읽으면서도 나는 도무지 만족할 수 없었다. 감산의 주해는 나름 도움이 된 바가 있었지만 불만족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감산의 장자주해는 실망스러웠다. 「장자」 “소요유”편의 종지를 드러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성인聖人, 신인神人, 지인至人을 하나로 해석한 것은 너무 단견이 아닐까? 하긴 대부분의 주해서가 이를 하나로 해석하고 있으며, 설령 다르게 해석한다하더라도 그 각각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이천년이 넘는 해석 전통에서 성인, 신인, 지인조차 명쾌하게 드러내는 주해서가 없다니,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록 짧은 공부여정이긴 하지만 나는 동양고전을 읽으면서 기존 전통, 기존 방식만을 고집해서는 경전의 깊고도 깊은 뜻을 결코 맛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붓다에 대한 붓다고사의 해석을 따를 수 없고, 노자ㆍ장자에 대한 왕필ㆍ곽상의 해석을 따를 수 없고, 플라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을 따를 수 없고, 공자에 대한 주희의 해석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해석을 기본적으로는 공부해야겠지만, 경전의 가장 깊은 뜻을 음미하자면 그들의 해석을 완연히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마치 바둑을 배우기 위해서는 정석을 익혀야 하지만, 자신의 바둑을 두기 위해서는 정석을 잊어야 하는 이치와도 같다. 더 나아가 고수의 바둑은 정석을 새로 쓰지 않던가.

그렇다면, 더 깊은 공부여정에서는 어떤 해석을 의지해야 할까? 전통적ㆍ정통적 해석에 대해 과감하게 반기를 든 패기 있는 해석서들을 의지해야 할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반전통적 해석서치고 전통적 해석서의 품격과 깊이를 넘어서는 경우를 거의 접하지 못했다. 특히 현대 학자들의 자유분방하거나 치기와 분노로 얼룩진 반전통적 해석서들, 혹은 실존적ㆍ정치적 고뇌로 풀어낸 해석서들은 몇 문장만 읽어도 저절로 눈과 귀를 씻게 된다.

전통적 해석의 고루함ㆍ경직성ㆍ몽매함에 의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반전통적 해석의 치졸함ㆍ경박함ㆍ너절함에도 의존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드물게 읽히는 것으로, 나는 남회근의 책들을 꼽고 싶다. 동양고전 독해에서 이와 같은 진퇴양난에 처한 독자들은 남회근의 경전과 고전 해석에서 드러나는 신선한 통찰과 파격, 박람함에 대해서는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물론 전통적 해석에 매몰된 이들은 남회근을 비정통적이라 치부할 것이요, “하나의 감투에 유효한 앎”(知效一官)으로 반전통적 해석을 일삼는 이들은 남회근을 전통적 해석의 아류쯤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런 각축장이 바로 우리의 세상이다. 학문은 바로 이와 같은 저자거리의 세상인 것이다. 옳고 그름이 드러나지 않고 끝없이 다툼이 계속되는 이 세상 말이다. 공부인은 바로 이런 세상에서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야 한다. 마침내 이 세상 모든 것을 수용하고, 즉 더러움과 깨끗함, 권력과 좌절, 강직과 음험, 폭력과 아픔, 부와 가난, 욕설과 맑은 눈, 욕망과 명경지수, 그 모든 것을 수용하고 홀로 공부여정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들을 배척하고 비난하고서 떠나는 공부여정은 힘의 쇠약을 불러올 것이지만, 그 모든 것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받아들이고 떠나는 공부여정은 힘의 증강을 불러올 것이니, 공부인이라면 모름지기 그 출발점에서부터 예사 수준을 뛰어넘어 성숙해야 하는 법이다.

남회근의 「중국문화 만담」(신원봉 옮김, 부키 2012)은 이 세상 성숙한 공부여정에서 한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책들을 읽어보면 장광설이 지나친 면이 없잖고 경전의 깊은 오의奧義까지는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적어도 기존의 전통적ㆍ정통적 해석에 대한 과감한 해체와 실감나는 역사적 풍경의 복원과 가치질서의 재편은 누구보다도 탁월하다. 더불어 일반 학자들의 안목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통찰을 지녔으니만큼, 그의 동양고전에 대한 재해석은 신선하고 호쾌하고 파격적인 맛이 있다. 이와 같은 맛이 「중국문화 만담」에도 고스란히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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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회근의 「중국문화 만담」은 기존의 고루한 해석의 틀을 벗어나 장쾌하게 경사經史를 독해하는 솜씨를 보여준다. 강연 내용인만큼 쉽고 깊다. 더 나아가 과연 학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기존 관념에 균열을 일으키며, 천여년 전통의 해석을 뒤집고 만고의 흉금을 열어젖히려는 기상이 있다.

특히 이 책은 학당을 방문한 이들에게 덕담을 하듯이 깊은 뜻을 쉽게 강연한 내용을 필사한 것이므로, 동양고전을 전혀 접해보지 못한 이들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 아울러 동양이란 무엇이며 동양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일면모를 알게 될 것이며, 기존 전통의 가르침과는 다른 파격과 감동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동양고전을 제법 접한 이들도 이제까지 접했던 해석서와는 차원이 다르게 펼쳐지는 역사와 국학(한학)과 중국문화 이야기에 연방 감탄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남회근의 어마어마한 독서량과 수행이력은 차치하고라도, 독자들이 그간 접했던 다른 동양고전 해석서들은 십중팔구 어느 종교 교리서처럼 한 해석전통에 고착된 해석들이어서 그런 해석들에서 홀연히 벗어난 남회근처럼 경ㆍ사ㆍ자ㆍ집經史子集을 종횡무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학자적 엄밀함과 고전적 신중함이 결여되어 있어 학술적으로 논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평할 이들도 있겠으나, 중국 인민대학의 국학연구원에서 교수들과 박사과정 학생들이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단체로 남회근 선생의 강의를 듣고자 학당을 방문했고 이 책의 일부가 그들에게 강연한 내용이라는 사실은 그런 평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동양철학 전공자들은 이 책은 물론이거니와 남회근의 다른 저작들도 애써 무시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해석전통에서 벗어나 운신할 수 있는 (권력적ㆍ정신적) 폭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동양고전 해석은 (오히려 중국보다도 훨씬) 경직되어 있다고나 할까.

어쩌면 학자들은 비루먹은 생각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학자들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가 무엇이 쇠이고 무엇이 녹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녹이 슬어버린 해석전통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거위왕은 물과 우유를 섞어놓아도 우유만을 가려 마실 수 있다는데, 과연 누가 쇠와 녹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물음은 현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천여년 동양고전 해석사를 겨눈 엄중하고 장중한 물음이다. 혹시 주희가, 혹시 왕필과 곽상이, 혹시 붓다고사가 가장 강력한 녹을 입힌 이들은 아닐까? 나는 어쩐지 해석적 권력의 왕좌에 오른 그들에 대해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모름지기 권력의 왕좌에 오르려면 그 정도 힘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짜 쇠를 잡아먹을 수 있는 녹, 즉 가장 위력적인 녹이어야만 적어도 천년은 쇠를 완벽히 대체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다수의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소수의 사람들만이 진정한 쇠를 원하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강력한 녹을 원하기 때문이다.

남회근은 “드물게도” 주희의 해석에 대해 비판적이다. 비유컨대, 천여년 해석사에서 진짜 쇠로 받아들여진 주희의 해석이 “가장 강력한 녹”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구심인 것이다. 주희의 해석에 대해 의구심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어떤 사회에서는) 사실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붓다고사의 해석에 의구심을 던지는 것이요, 왕필과 곽상의 해석을 비판하는 것이요, 중세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을 비판하는 것이요, 우리나라 조계종으로 치면 경허와 성철을 비판하는 것과 동급이기 때문이다. 이 각각의 전통에 예속된 학자들은 소위 그 “위대한” 해석을 비판한다는 게 얼마나 곤란한 일인가를 잘 알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문 밖에 있는 놈, “문외한門外漢”이야 그 어떤 해석전통에도 구애받지 않고, 나 스스로에게 솔직히, 내 마음속 의구심을 숨기지 않고, 그 어떤 권력적ㆍ심리적 울결도 없이, 투명하게 드러내놓고 촌평이라도 할 수 있으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할까.)

주희 선생의 학문과 인품에 대해서는 대체로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서오경에 대한 그의 주해를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몹시 불경스러운 말이지만 책임지고 말하건대, 문제가 너무 큰데다 완전히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논어강의ㆍ상」(송찬문 옮김, 마하연 2012), 10면)

남회근은 「논어강의」를 시작하면서 위와 같이 주희를 점잖케 비판했지만(아마도 젊은 시절 1970년대 대만에서의 강의였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논어강의」 전체에 걸쳐 (이름을 특정하지는 않고) 송대 이래 유학자들의 일반적 해석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래서 “원래의 진정한 공맹 사상을 파악하려면, 당송 이후의 주석을 옆으로 밀쳐두고 원문만 읽어나가면 됩니다”(6면)라고까지 말한다. 더 나아가, 「중국문화 만담」(2007년 중국에서의 강연)에서도 남송시대 진량陳亮의 글을 빌어 우회적으로 주희를 크게 비판한다. 주희의 학문적 태도는 요즘 학자들의 학문적 태도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늘 “주자”라고 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주희”라고 불렀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입장으로 인하여 남회근의 동양고전 해석에 대한 호오가 크게 갈리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상쾌한 기분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중국문화 만담」이라는 비전문적ㆍ비학술적 강연을 소개하는 마당에 이토록 서론을 길게 쓴 것은, 동양고전이라는 해석의 역사가 워낙에 두텁고 무거운지라, “빛나던 공자 사상 전체가 대단히 두텁고 무거운 그림자에 뒤덮여”(「논어강의ㆍ상」 6면) 있다는 것을 알아도 이를 걷어낼 묘책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 묘책을 약간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동양고전 해석을 둘러싼 운명적인 대회전大會戰의 중원에 반드시 들어서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중원에 들어서야 비로소 경직된 해석체계에서 벗어나, “한 시대의 지혜와 용기를 뒤엎고, 만고의 흉금을 열어 젖힌다”(「중국문화 만담」 189면)는 기상을 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제가 고서를 읽는 법은 여러분과 다릅니다. […] 제가 고서를 읽어본 경험에 따르면 여러분의 독서는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기름 같아서 그 아래 깊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중국문화 만담」(이하 동일) 52면)

중국인이 말하는 독서란 정수리에 하나의 눈, 지혜의 눈으로 역사를 통찰하고 서적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151면)

“만약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대로 다할 뿐이다.” 이 한평생을 묵묵히, 또 아주 적막하게 스스로 즐길 뿐입니다. 학문이 있는데 뭐가 두렵습니까! 아주 적막하게, 마치 출가한 사람처럼 그대로 다할 뿐입니다. 적막함을 즐거움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적막을 즐기는 학문적 수양이 없이는 진정한 학문은 불가능합니다. (192면)

듣기 거북하겠지만 저는 ‘교육 무용론’을 말합니다. 현재의 이런 교육에 반대한다는 것이죠. 이런 교육은 인재를 망쳐 미래에 해를 끼칩니다. (178면)

어떤 종교든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모두 즐겨 연구합니다. 21세기에 들어서서는 모든 종교가 종교적 외피를 벗어던져야 합니다. […]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종교적 외피를 벗어던지고 종교의 대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종교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127면)

사마천은 「사기」를 다 쓰고는 아주 오만하게, “명산에 숨겨 놓고 안목 있는 사람에게 전한다”(藏諸名山, 傳之其人)고 했습니다. 이는 마치 아무도 「사기」를 이해할 사람이 없어 산속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두었다가 장래 이해하는 자가 나타나면 전해 주겠다는 것이나 같습니다. 실제로 한번 보십시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질책하는 데도 정말 기교가 뛰어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 겁니다. 이 시대 너희들은 모두 바보 같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 같은 자들에겐 희망이 없으니 읽어 볼 필요도 없다. 뒤에 오는 뛰어난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는 “명산에 숨겨 놓고 안목 있는 사람에게 전한다”고 한 겁니다. (52-53면)

위 인용문들은 그저 만담처럼 이야기되는 것들이고 내용으로 들어가보면 이보다 훨씬 격조 있고 깊이 있게 경사자집을 이야기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책을 직접 읽으면서 확인하기를 바란다. 「중국문화 만담」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북경대 광화관리학원(경영대) 소속 기업인들에게 “중국문화 속의 기업가”에 대하여, 2부는 인민대학 국학원의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국학과 중국문화”에 대하여, 3부는 중국은감회(우리나라의 금융감독원 격) 소속 임직원들에게 “중국 문화와 금융 문제”에 대하여 수일간 씩 강연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3부는 중국 근현대의 금융제도 확립과 관련한 자전적 경험 위주로 강연한 것이어서 나 같은 동양고전을 읽고 싶은 학인들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는 바가 없었지만, 1부와 2부는 국학, 즉 넓은 의미에서의 한학을 어떻게 공부하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많은 영감을 준다. 더불어 사마천의 「사기」에서 드러나는 철학이 어떤 것인가, 그 일면모를 감동적으로 엿볼 수 있게 해줌으로써, 과연 학문을 한다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전체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게 만든다. 학문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사고에 균열을 일으키는 남회근의 사유 한 조각을 엿들어 보자.

사람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정말입니까? 제대로 된 학생이 하나도 없다고요? 저는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문무文武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저만큼은 해야 합니다. 옛사람이 말했습니다. “말을 타면 도적을 죽이고 말에서 내리면 격문을 쓴다”고요. 또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붓을 들어 천 마디를 쓰되, 곧 출발할 말을 세워두고 한다.” 종교, 철학, 과학에다 허풍도 칠 줄 알아야 합니다. 풍수, 복괘, 산명에다 사람을 속이는 데에도 통달해 통하지 못하는 게 없어야 합니다. 주색잡기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하는 게 없고 그런 뒤 놓아 버려야 제 학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 조건은 이렇습니다. 이 때문에 저에게 학생이 없습니다. 도덕과 문장을 갖추고 자기 나름의 장기를 갖추는 건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장사를 하면 곧 돈을 벌 수 있어야 하고, 도둑질을 한다면 반드시 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붙들리면 제 학생이 아닙니다. 물론 이건 비유입니다. (137면)

“한 조각 흰 구름이 계곡 어귀를 가로막아 많은 새들이 돌아갈 둥지를 찾아 헤맨다”(17면)는 선가의 명문처럼, 한 시절의 해석, 한 시대의 해석에 갇혀, 한 시대의 권력과 전통과 세력에 갇혀, 한 마디로 자신의 생각이라는 너울에 가려져 귀착처를 알지 못하고 해매는 이들에게, 남회근의 이야기들은 그 한 자락 구름, 한 꺼풀 너울을 날려버리는 광막한 바람이 아닐런지 . . .

한 시대의 지혜를 뒤엎고 만고의 흉금을 열어 젖힌다 — 남회근의 「중국문화 만담」을 읽고”에 대한 1개의 댓글

  • 좋은 글월 보고 갑니다.

    koo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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