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 고타마는 스승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푸타 문하에서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정에서 나오면 여전히 번뇌가 되살아오고 생사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선정은 일상의식으로는 알 수도 없고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체험이므로, 그 체험은 수행자를 압도한다. 전에는 읽히지 않던 경문이 읽히기 시작하고, 감정과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이 똑똑히 관찰되고, 심리적 장애가 상당 부분 해소된다. 그러나 선정체험이 잦아들고 다시 일상의식으로 돌아오면, 출정후어(出定後語)가 아니라 더 커다란 번뇌가 되살아온다. 이 번뇌가 비어 있다고, 물거품이라고, 아지랑이라고, 번뇌 즉 보리라고 되뇌이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번뇌가 되살아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선정은 출입이 있는 것이며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며 무상한 것이며 결국 괴로운 것이다.
여전히 번뇌는 되살아오고 생사의 의문도 여전히 풀리지 않았으니, 이는 “무상안온한 열반”이 아니다. “이 법은 지혜로 나아가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 못 된다.”(「성구경」) 사문 고타마는 당시 수행풍토에서 가장 높은 선정을 체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혜도 깨달음도 열반도 아님을 알았으며, 마침내 스승의 문중을 떠난다. 일반 수행자라면 높은 선정체험을 바탕으로 문하생들을 가르치면서 한 세월 풍미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분은, 마치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숲속의 꼬끼리처럼, 홀로 간다.
과연 그분은 무슨 비원이 있었기에 그와 같이 홀로 갈 수 있었을까? 단순히 생사의 의문이 풀리지 않아서? 생사의 의문은 누구나 갖고 있는 의문인데,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 우리는 여기에서 사문 고타마, 태자 싯타르타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흔히 부처님의 생은 너무나 위대해서 그분은 인간사 고통은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편견을 거둬내고 생노병사를 겪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분을 바라보면, 문득 새로운 생의 장면이 펼쳐진다.
어머니, 어머니! 싯타르타의 어머니는 싯타르타를 낳은 지 이레 만에 돌아가셨다. 어린 싯타르타는 어머니의 죽음을 알았을 것이며, 더 성장해서는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강렬하게 의식했을 것이다. 그것은 씻을 수 없는 아픔이자 상처였으며, 커다란 그늘, 커다란 슬픔이었다.
어린 싯타르타가 봄날 파종제 때 한 마리 벌레가 새에게 먹히는 것을 보고 축제의 현장을 홀로 벗어나 잠부나무 그늘 아래에서 선정에 들었던 것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강렬한 의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행적이다. 한 마리 벌레가 죽는 일이야 흔하디흔한 죽음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작은 생명의 죽음은 들판을 태우는 불씨와도 같이 싯타르타의 내면에 잠복한 죽음의 상처를 하염없이 뒤흔들었고, 문득 싯타르타는 생사에 대하여 깊이 사유하기 시작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어찌하여 생명은 다른 생명의 죽음으로 살아가는가? 어찌하여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희생으로 태어났는가? 이처럼 미물의 죽음은 나와 세계와 허공 전체를 온통 죽음의 그늘로 덮어버렸고, 어린 싯타르타는 겁초수(劫初樹)와도 같은 커다란 잠부나무 그늘 아래 초선에 든다.
국보 제83호의 소위 “미륵반가사유상”은 바로 이 태자의 초선을 그려낸 것이다. 잠부나무 그늘 아래에서 어머니의 죽음, 생명의 생사를 깊이 사유하는 “태자사유상”. 싯타르타가 궁중생활로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에 데이듯이 노•병•사에 강렬하게 반응하며 출가한 것도 “생사의 바다를 건너고자” 함이었으며, 쟁쟁한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 문중에서 스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홀로 길을 떠난 것도 바로 이 생사의 의문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하니 태자 싯타르타, 사문 고타마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
국보 제83호 태자사유상. 미물의 죽음이 싯타르타와 그의 세계 전체를 생사의 의문으로 가득 채워버렸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어찌하여 생명은 죽음을 먹고 사는가? 나의 생은 무엇인가? 이 깊은 의문으로 인하여 잠부나무 그늘이 더 이상 해를 따라 회전하지 않고 그대로 멈춰 싯타르타를 온전히 드리운다. 세계와 시간이 의식과 함께 사라지고 초선에 든다. 태자사유상은 미물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나의 생과 사를 깊이 사유하는 상, 겁초수 아래 초선의 상이다. 태자사유상은 죽음과 선정의 상이다. (“미륵반가사유상”은 후대의 해석적 명칭에 불과하므로 그 이름은 보조적으로 취해야 한다.)
높은 선정을 체득한 문중을 떠나 고행림을 향하여 홀로 길을 떠나는 사문 고타마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언제나 그분의 뒷모습에서 어머니의 죽음이 드리운 커다란 그늘, 생사의 커다란 의문을 먼저 보게 된다.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고통과 의문이 그분을 고행림으로 내몬 것이다. 발심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거역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 견딜 수 없는 고통, 견딜 수 없는 상처, 견딜 수 없는 슬픔, 나로 인한 어머니의 죽음, 바로 이게 발심이 아니라면 무엇이 발심이겠는가? 이 발심에 비하자면, ‘내가 깨달아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발심은 한갓 작위적인 발심이 아니겠는가?
나의 인생, 나의 생사를 삼켜버리는 커다란 의문이 곧 발심인 것이다. 모름지기 구도의 길에 들어선 자, 스스로의 의문을 되돌아볼 일이다. 출입이 있는 선정체험을 가지고 부처님의 법을 가르치는 이 시대에, 선정체험조차 없이 부처님의 법을 쟁론하는 이 시대에, 과연 자신의 의문이 풀렸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더 나아가 물어야 한다, 과연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슬픔, 허공 전체를 덮어버리는 커다란 의문, 진정한 발심이 있었던가? 이 발심이 없다면 구도의 길은 반드시 중도에 그치고 말 것이니, 공부인이라면 모름지기 되돌아볼 일이다.
“이 법은 지혜로 나아가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 못 된다.” — 이것은 발심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준 사문 고타마의 위대하고 위대한 고백이다. 단 하나의 의문, 단 하나의 번뇌가 남아 있어도 사문 고타마는 어머니의 죽음을 잊을 수 없었고, 그런 법, 그런 선정체험은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위대한 의문과 함께 홀로 길을 떠났던 사문 고타마는 고행림에서 6년의 세월을 보낸 뒤 어느 날 정등각자가 되어 이렇게 첫 사자후를 토하게 될 것이다:
이제 불사의 문이 열렸노라.
귀 있는 자 들으라, 낡은 믿음을 버리고.
생사의 의문, 불사의 문! — 천지를 뒤흔드는 법륜의 굉음을 듣는 자여, 누군가의 죽음이 그대를 불음(佛音)으로 이끌었음을 잊지 마시라, 고통과 상처와 슬픔이 그대의 구도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었음을, 그것이 그대의 스승이었음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