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자판 G80-3000

워낙 사람을 적게 만나는 탓에 타인의 취향을 두루 접해보지는 못했지만, 드물긴 해도 필기구에 대한 남다른 취향을 가진 분들을 만나면 새롭게 보인다. 가령 만년필로 필기를 한다거나 아니면 정성스럽게 깎은 연필로 필기를 하는 분들을 보면, 손글씨에 대한 애정 여부를 떠나 손맛에 대한 남다른 감각이 엿보여서 달리 보이는 것이다. 특히 만년필의 경우 나 역시 청소년 시절부터 적응하려고 몇 번이나 애썼으나 실패하고 만 기억이 있어서 만년필로 필기하는 분들을 보면 외경심마저 든다. 내가 왜 만년필에 적응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손맛에 맞는 만년필을 만나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이제는 필기를 하는 일조차 드물어 만년필이나 연필 필기에 대한 나만의 취향을 갖추는 일은 영영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저 책읽기를 하면서 연필로 밑줄을 긋거나 표기를 해놓는 정도일 뿐 공책에 따로 기록을 해놓는 일이 전혀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 대신 컴퓨터 자판이 필기의 기능을 거의 대체하고 말았다.

컴퓨터 자판에 대한 고집스런 취향이 생긴 것은 아마도 필기구 손맛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는 손가락에 부담을 덜 주고 조용한 자판을 선호해서 펜타그라프 자판을 사용해왔으나, 마음에 들던 자판이 단종되고 더는 구할 수 없어 마침내 삼사 년 전께 컴퓨터 자판에 대한 탐색을 시작했다.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 기계식 자판의 존재였다. 그리고 기계식 자판에 대한 종류를 익힌 뒤 처음으로 구한 것이 독일의 체리 자판 G80-3494(적축)이었다. 기계식 자판은 일반적으로 펜타그래프 자판이나 멤브레인 자판보다 소리가 큰 편이었기 때문에, 기계식 자판 중에서 가장 소리가 작고 키압이 낮은 적축으로 선택하게 된 것이다.

처음 체리 적축 자판을 사용했을 때는 무척 실망했다. 소리가 작고 키압이 낮아 손가락이 아주 편하기는 했지만 보강판 때문인지 키감이 영 아니었다. 그런데 1~2주 사용해보니 갈수록 익숙해지고 키감 자체가 문제되지 않을 정도로 편하고 좋았다. 다만 한영 전환키가 일반 자판의 위치보다 오른쪽에 위치해 있어서 거기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런데 얼마 전에 우리집 아이가 자판에 오미자차를 쏟아서 기계식 자판을 다시 구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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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rry G80-3000 흰색자판(갈축). 기계식 자판의 기본으로 통하며 키감은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 자판이 104키여서 일반적인 106키 자판 사용자에게는 한영 전환키 사용이 불편하다.

이번에는 체리 적축이 아니라 체리 갈축을 선택했다. 새로운 키감도 맛보고 싶고 검정색 자판보다는 흰색 계열의 자판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적축보다 소리가 크고 키압이 약간 높기는 했지만 그 정도 차이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으며, 키감은 가장 뛰어나다는 평대로 타건감이 시원시원하여 단연 좋았다. 다만 디자인에 대한 호오가 크게 엇갈리는 편인데, 나같은 경우에는 진정으로 원하고 원했던 디자인이다. 일체의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투박한 디자인,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이다. 확실히 나는 독일이나 북유럽 스타일의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특히 Lock을 표시하는 연노랑 불빛이 연하고 부드러워 시선을 자극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사용해본, 체리 적축 자판을 포함한 모든 자판은 이 불빛이 내게는 너무 강했던지라 늘 테이프로 가려 사용할 정도였으니, 체리 G80-3000의 이 표시등이 얼마나 반갑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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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k 표시등이 시선을 자극하지 않아 좋다.

늘 곁에 두고 사용해야 하는 물건이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큰 기쁨이냐. 이 자판과 평생 함께할 듯한 예감이 든다. 구입한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밖에 있을 때에도 문득 이 체리 자판이 생각날 정도이다. 이 또각또각 소리와 손맛, 경쾌하고 깊은 타건, 그리고 깔끔하고 단순한 디자인. 타자하다가 가끔 자판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져들 정도이니, 손맛에 대한 내 취향이 이 정도였던가 싶다.

일반 자판보다 열배 가량 비싼 물건인지라 호사스러운 취향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아내는 다른 것은 몰라도 자판에 대해서만큼은 괜찮다고 한다, 당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면서. 하하하, 원했던 손맛의 만년필을 만나지 못한 스산한 과거가 마침내 보상받았다. 아들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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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체리 자판과 평생을 함께할 것같다. 키감과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든다.

체리 자판 G80-3000”에 대한 2개의 댓글

  • 저는 사무실에서 기계식 키보드를 쓰려 했으나… 타자 소리가 소음으로 들리는 분도 있다 하여 조용히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쓰다 보니 초등학교 시절, 처음 컴퓨터를 배우던 그 시절의 그 키감이 떠올라 조금 놀랐습니다.(자판 위에 카셋트를 끼워 게임을 할 수 있었던 바로 그 키보드!)
    소설가 김영하 씨가 자기의 머리는 손 끝에 달려 있다고 했던가요, 딸각거리는 기계식 키보드의 묘한 쾌감은 연필보다 빠르게 전달되는 듯 합니다.

    토돌이
  • 옛날 키보드는 모두 기계식 키보드였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컴퓨터의 모든 부품은 성능과 품질이 지속적으로 향상되었지만, 오직 키보드만은 오히려 퇴보했다는 불편한 진실…ㅎㅎ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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