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견해와 관념을 내려놓으면 진실을 보리니 — 구나라타나 스님의 「위빠사나 명상」을 읽고

선불교 전통의 나라에 초기불교의 수행법이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수행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참선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의 동일점과 차이점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선불교 전통은 언어와 개념과 사고를 가장 파격적으로, 극단적으로 다루는 수행법인지라 안목이나 신심이 없는 이들에게는 오해를 사기 십상이며, 위빠사나 전통은 언어와 개념이라는 양날의 검을 비교적 적극적으로 활용하기에 현대의 지성(이것이 과연 좋은 것인가는 불문하고)을 갖춘 이들에게는 쉽고 친절하게 다가온다. 그 두 전통은 겉보기에는 매우 다른 듯 보인다.

더구나, 위빠사나 수행법은 팔리경전과 논서에 기반한 수행법이라는 역사적 아우라가 있어, 우리나라 불교가 선불교 우위의 전통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는 위빠사나 수행법이 갈수록 보급될 것으로 예상된다. 역사학적 증명과 지적 추론을 좋아하는 이들은 위빠사나 수행법만이 정통이라고 주장할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러나 수행은 역사학적 증명도 아니며 논리적 추론도 아니다. 오직 직접 경험을 통한 안목일 뿐이다.

샨티데바의 「입보리행론」을 볼 것 같으면, 초전법륜은 받아들이면서 어찌하여 제2전법륜, 제3전법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탄식하는 구절이 있다. 이는 초기불교와 다른 방식의 수행법, 다른 방식의 가르침이 있을 수 있으며, 그런 상이점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모두가 한결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아마도 샨티데바의 탄식은, 시대와 풍토에 따라 수행법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방식, 어느 한 전통만을 국집함으로써 툭 트인 안목을 갖춘 자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수행법 자체가 아니라, 수행으로부터 비롯하는 경험과 안목이다. 그러나 경험이라는 것은 언제나 아름다움과 위험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것은 전통의 가르침을 화석화시키지 않고 생생한 아름다움, 살아있는 가르침으로 불러세울 수 있는 반면에, 그 경험을 가능하게 했던 전통만을 국집하도록 만들 위험도 있다. 바야흐로 모든 수행법에 누구나 다가갈 수 있는 시대에 이르러, 이제 그런 국집도 서서히 사라질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느 수행법이 수승한 것일까? 수행법의 수승함/열등함이란 있을 수 없으며,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수행법이 곧 수승한 수행법일 것이다.
 

동양의 북방과 남방에서는 불교 전통이 유구한 까닭에 어느 한 수행법만이 보편화되어 있고 다른 수행법은 배척된 경향이 있지만, 최근 수십 년 전부터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해진 미국의 경우에는 남방의 위빠사나, 동북아의 선불교, 힌두교의 요가, 티벳의 밀교가 다양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아 거리낌없이 여러 전통을 골고루 경험하고 있으며, 상이한 수행법들 간에 다툼이나 배척이나 알력은 없다. 그런 점에서, 혹시 미국은 불교의 가르침을 가장 건강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가 아닐까?

“오늘날 사람들은 위대한 스승들의 말과 단어에 집착하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선병(禪病)을 가지고 있다”는 숭산 스님의 말은,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한 전통에 집착하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선병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숭산 스님이 미국에서 발간된 위빠사나 전통의 「아잔 차 스님의 오두막」(A Still Forest Pool)에 서문을 쓴 것이 과연 우발적인 일이었을까? 그 글에서 숭산 스님은 아잔 차 스님을 가리켜 “나의 도반”(my Dharma friend)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모든 관념과 견해를 내려놓는다면, 진실은 바로 그대의 눈앞에 있다”고 했다. 서양과 동양, 북방과 남방의 전통에서 비롯한 모든 관념과 견해를 내려놓고 법을 보았기에(사실은 법을 보았기에 모든 관념과 견해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이런 만남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숭산 스님이 미국이라는, 다양한 불교적 수행전통이 구비되어 있는 나라에서 활동했기에 또한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위빠사나 전통의 가르침과 선불교 전통의 가르침이 근본에서 동일하다고 본다. 다만 시대와 문화적 요청에 따라 좀더 유효한, 좀더 효과적인 수행법이 계발되고 전파되고 정착되었을 뿐이라고 본다. 바야흐로 이제는 지역과 언어의 차이를 불문하고 각종 수행법에 대한 접근과 배움이 가능한 시절이므로, 어느 수행법에 대해서든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열린 눈을 가졌다면, 선불교만을 고집할 것도 아니요, 위빠사나만을 고집할 것도 아니요, 어느 한 전통을 배척할 것도 아니요, 어느 한 전통을 수승하다고 주장할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느 한 전통에 속한 스승의 입장에서는 제자가 구도의 길에 온몸을 던질 수 있도록, 그 전통을 수승하다고 가르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전통은 예외없이 스스로를 수승하다고 말해야 한다.
 

어느 한 수행전통만을 고집하지 않는 나라, 불교적 수행에 있어서 건강한 나라라고 할 수 있을 미국에서 오래 전부터 남방의 위빠사나 수행을 가르치고 있는 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스님의 「위빠사나 명상」(마름드리미디어 2007, 손혜숙 옮김)을 접하고 보니, 내가 선불교 전통에 머물면서 배웠던 바와 다르다고 할 만한 내용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전까지 접한 위빠사나 관련 글에서는 그와 같은 정도의 유사함 내지 동일함을 자각하기 어려웠는데, 유독 구나라타나 스님의 글에서 그렇게 느껴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마도 “쉬운 영어로”(in plain English) 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Mindfulness in plain English”로 “쉬운 영어로 쓴 알아차림”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구나라타나 스님은 고답적인 방식의 설명방식을 따르지 않고, 전통적 전문용어의 틀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스스로의 수행경험과 안목에 입각하여 평이하고 단순한 영어로, 현 시대의 언어로 깨달음의 길을 가르쳤기 때문일 것이다.


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스님의 「위빠사나 명상」의 원제는 「쉬운 영어로 쓴 알아차림」(Mindfulness in plain English)이다. 그 제목 그대로 가장 단순하고 평이한 언어로 위빠사나 수행을 소개하는 책이다. 그러나, 그 깊이는 이루 말할 수 없으며, 통쾌하고 능란한 솜씨는 장자의 포정해우에 비할 만하다.

이렇게 너무나 단순한 언어로 가르친 덕분에, 불교수행이 자칫 엄격하고 딱딱한 세계에 머물 위험에서 벗어나 일상생활로 파고드는 마법, 현대인의 심리적 구조를 능란하게 파해하는 마법을 보여준다. 이 책은 수행경험과 안목에 입각하여, 전통적인 모든 것, 즉 전통적 수행법과 전통적 어휘와 전통적 설명방식을 낱낱이 해부하여 현대인의 일상언어로, 심리적 언어로 완벽하게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경이롭다. 이 책은 “대단한 역작이다. 그 어떤 찬사로도 부족하다”(존 카밧진). 월폴라 라훌라 스님의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가 불교입문에 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구나라타나 스님의 「위빠사나 명상」은 위빠사나 수행 입문에 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분 다 스리랑카 스님인 것을 보면, 역사 속에서 팔리삼장을 보존해온 스리랑카 불교의 유산이 새삼 위대하게 다가온다.
 

위빠사나 수행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미얀마의 마하시 전통과 태국의 아잔 차 스님의 가르침, 교학적 자부심이 묻어나는 스리랑카 전통에 대하여 두루두루 관심을 가져보았을 것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미얀마의 전통은 경전과 수행에 근거한 고전적인 방식의 가르침이 돋보이고, 아잔 차 스님의 가르침은 명료하고 미묘하고 날카로운 사자후가 인상적이고, 스리랑카 수행전통은 아쇼카 왕과 다르마팔라 스님의 원력을 가슴깊이 새긴 전법의 열정과 교학적 유산이 감동적이다. 일천한 나의 경험에 바탕해서 범박하게 말하자면, 스리랑카 스님들로부터는 현대인을 향한 부단한 전법의 원력을 배우며, 미얀마 전통으로부터는 초기경전 속의 수행법을, 아잔 차 스님으로부터는 학인을 제접하는 선지식의 탁월한 솜씨를 배운다. 그리고 그 모든 전통이 내가 불교에 입문하면서 가장 먼저 접한 선불교 전통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배운다.

구나라타나 스님의 「위빠사나 명상」이라는 작고 쉽고 경이로운 책을 소개하는 마당에 서두가 길었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한 것은 내가 위없이 위대한 불교의 전통과 유산을 하나하나 배워나가면서 만난 과정을 빼면 이 책이 이토록 돋보이지 않았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소중한 만남은 적절한 시기와 적절한 이력이 동반되어야 가능한 법이므로, 누군가는 이 책을 그저 쉬운 입문서 정도로만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시대는 누구나 훌륭한 유산과 전통을 배울 의지만 있으면 배우고 접근할 수 있는 시대인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숙고 없이 안목 없이 함부로 다른 수행전통을 평가절하하는 이들 역시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처럼, 상이한 전통에 대하여 무량한 존경을 표하는 학인도 있음을 알려주고 싶으며, 어느 한 수행전통과 유산을 쉽게 평가할 일은 아님을 말해주고 싶기도 하다. 물론 그런 바람조차 하나의 욕망, 하나의 그림자, 하나의 경계에 불과하며,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에 불과하겠지만.

알아차림은 모든 인식의 덧없음을 본다. 그것은 인식되는 모든 것들에서 덧없음과 가변성을 보고, 조건지어진 모든 것들에 내재된 불만족성을 본다. 그것은 이 스쳐가는 쇼들에서 뭔가를 움켜쥐어봤자 아무 의미가 없음을 본다. 평화와 행복은 그런 식으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알아차림은 모든 현상에 내재된 무아성을 본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특정 인식 묶음을 임의로 선택하여 굽이쳐 밀려오는 체험의 물결에서 그것을 떼어낸 다음, 지속적인 개별 실체로 개념화하는지 보는 것이다. 실제로 알아차림은 이런 것들을 본다. 그것은 그것들에 관해 생각하지 않고 직접 그것들을 본다.(196)

위 인용문은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를 현대적 언어로 설명한 것이다. 불교의 핵심인 삼법인을 쉽게 설명하자면, 모든 인식의 덧없음(제행무상), 덧없는 모든 것에 내재된 불만족성, 덧없는 모든 것을 붙잡을 때의 괴로움(일체개고), 모든 현상에 내재된 무아성(제법무아)인 것이다. 알아차림은 이 삼법인을 보는 것,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심리 상태의 구조, 인식의 과정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생각과 느낌과 감각을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정신적 구조물로 고정시키고는 거기에 ‘나’라는 딱지를 붙인다. 그런 다음에는 그것을 영구히 바뀌지 않는, 정태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른 모든 것들과는 분리된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그 영원한 변화 과정인 우주의 나머지 부분에서 자신을 떼어내고는, 그 사무치는 외로움에 비통해한다. 우리는 다른 모든 존재와 우리가 맺고 있는 그 본연의 관련성을 무시해버리고, ‘나’는 ‘나’를 위해 더 많이 갖기를 작정한다. 그러고 나서는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탐욕스럽고 비정하냐면서 놀라워한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다.(58)

그것들은 심리 상태다. 그것들은 왔다가 가고 생겼다가 사라진다. […] 그것이 다가올 때, 그냥 하나하나 바라보기만 하라. 그것이 무엇이고, 얼마나 강하며,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보라. 그런 다음 그것이 밀려나가는 것을 지켜보라. 그 모두가 당신 자신의 마음이 펼치는 지나가는 쇼일 뿐이다.(176)

우리는 당신이 생각에서 벗어나 숨이라는 직접적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비개념적인 체험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166)

생각을 자각하는 것과 생각을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그 차이는 아주 미묘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느낌 또는 결의 문제다. 열린 집중으로 생각을 자각하는 것은 그 결이 성글게 느껴진다. 말하자면 생각과 그 생각을 바라보는 자각 사이에 거리감이 있다. 이때, 생각은 거품처럼 가볍게 일어나, 생각의 고리 안에서 반드시 다음 생각으로 이어지지는 않은 채 사그라든다. 반면에 보통의 의식적 생각은 그 결이 훨씬 촘촘하다. 그것은 묵직하고, 명령조이고, 강제적이다. 그것은 당신을 삼켜버리고 의식의 통제권을 장악한다. 그 본성상 그것은 강박적이어서 어떤 간격도 없이 생각의 고리 안에서 다음 생각으로 곧바로 이어진다.(97)

만약 이 가르침들을 전통적 어휘를 빌어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사념처니 심념처니 법념처니 운운하면서, 사마타 수행이니 위빠사나 수행이니 정념이니 정정이니, 사성제니 팔정도니 하면서 고답적으로 설명했다면(사실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대해서는 각 전통마다 설명이 달라 명쾌한 정의를 내리기 곤란하다), 이처럼 강렬하고 생생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심리학 서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심리적 언어로 시종일관하고 있으며, 이 이상의 평이한 언어로 불교 수행의 핵심을 소개하기는 어렵다고 할 만큼 현대적이다. 유구한 전통의 불교가 일상언어에 최대한 육박하여 불교가 더없이 세련되게 최첨단으로 환골탈태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수행경험에서 비롯한 안목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며, 다음으로 현대인의 사고구조와 심리구조를 성실히 상대하고 면밀히 해부하고 그 해부도를 따라 그대로 반야의 칼을 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장자의 포정해우(庖丁解牛)처럼. 포정은 소를 잡을 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소의 몸을 따라 그대로 칼을 놀려 살이나 뼈를 다친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구나라타나 스님의 칼을 놀리는 솜씨가 대단하다. 책 전체가 현대인의 사고와 심리를 파해하는 번뜩이는 통찰로 가득하다. 그 칼놀림에 우리의 사고와 감정이 떨어져나가는 것이, 마치 흙덩이가 투두둑 땅에 떨어지는 듯하다.
 

책날개에 실린 저자 소개와 법보신문에 실린 김재성의 「서구 위파사나 열풍 주도하는 박사 수행자」라는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듯, 그분의 전법 원력과 44세에 미국의 대학에 입학하여 초로의 53세에 박사학위를 받은 이력은 새삼 감동적인 귀감이 된다. 현대인에게서 그들의 언어를 빼앗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그들의 심리구조를 동강내는 솜씨는 결국에는 선불교 스승들의 솜씨와 다를 바 없다. 그들의 언어를 완벽하게 빼앗아 거둠으로써 단박에 은산철벽 앞으로 몰아부치는 선지식의 솜씨나, 그들의 언어를 능란하게 활용하여 심리구조의 정체와 비밀을 낱낱이 폭로함으로써 그들 스스로의 심리구조에 맞서 전투를 벌이게 하는 구나라타나 스님의 솜씨나 결국에는 동일하다. 다만 그 방식과 과정이 다를 뿐.

명상은 힘들다. 그것은 속성상 고독한 행위다. 그것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엄청나게 강력한 힘, 명상의 주체이기도 한 바로 그 심리 구조 일부에 맞서 전투를 벌이는 행위다. 실제로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 당신이 마침내 찾아내게 되는 것은 충격적인 깨침에 직면한 자신의 모습이다. 어느 날 당신은 내면을 들여다보다가 자신이 저항하고 있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깨달을 것이다. 당신이 꿰뚫으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촘촘하게 짜여진 직물이어서 빛이라고는 한 자락도 새어 들어오지 않는 견고한 벽과 흡사하다. […] 그건 굉장히 무서운 느낌, 무척이나 외로운 느낌이다. […] 이런 느낌을 감당하려면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들도 앞서 이 길을 지나갔다. 그들 또한 같은 장벽에 마주쳤고 빛을 향해 그것을 뚫고 나갔다. 그들은 그 일을 위해 규칙들을 마련했고,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하는 형제애로 뭉쳤다. 부처가 자신의 길을 찾아 뚫고 지나간 것도 바로 이와 똑같은 벽이었고 많은 이들이 그 뒤를 따라갔다.(121-122)

구나라타나 스님은 이와 같이 학인이 수행 중에 겪게 될 과정을 자상하게 일러줌으로써 혹시 있을 지도 모를 위험을 이기도록 도와주는 반면에, 선불교의 선지식이라면 행여나 그 설명조차도 학인에게 끄달림의 계기가 될까봐, 즉 결정적인 국면에서 재차 개념화의 굴레에 빠져들게 될까봐 일부러 일러주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일말의 장애라도 생기지 않게 하려는 자비심의 발로이지 무정한 가르침이 아니다. 그러므로 두 방식 다 자비로운 가르침이며, 두 방식 다 종국에는 망상이 곧 열반임을 보도록 이끄는 수승한 가르침이다.

“사실 우리는 지금껏 중단 없는 알아차림이라는 이상적 상태와는 전혀 반대되는 심리 습관들을 양성하는 데 전생애를 허비해왔다.(110)” 전생애를 바쳐 연마한 심리 습관들, 그 교묘한 심리 구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전략이 필요하다. 사람은 사람마다 다르므로, 그 전략은 다들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이들에게는 위빠사나 수행이 적절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선불교의 수행이 적절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 일률적으로 어느 수행법이 수승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자상한 가르침이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단숨에 제접하는 솜씨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간파하고 적절한 가르침을 펼쳐낼 수 있는 안목은, 수행경험이 없이 논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판단하려는 나같은 자들의 몫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하심하는 가운데 편견없이 배울 일만 있을 뿐이다, 역사와 현재 속의 위대한 수행전통들을 배울 수 있는 시절 인연에 감사하면서.
 

아잔 차 스님에게, “새로 제자가 된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물었을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견해입니다. 모든 것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수행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견과 관념들입니다. […] 그들의 마음은 이런저런 것들에 대한 견해들로 가득 차 있고, 너무 영리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습니다. […] 그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더럽고 썩은 물로 채워진 컵은 쓸모가 없습니다. 상한 물을 비운 다음에야 그 컵을 쓸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서 견해들을 비워 내야 합니다. 그러면 볼 것입니다.

— 「아잔 차 스님의 오두막」(침묵의향기 2005) 253-254면

법의 길을 갈 때, 수행에 대한 이런저런 견해와 관념, 그 훌륭한 사고와 그 매력적인 감정은 더럽고 썩은 물에 불과하다. 모든 견해와 관념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부처님께서 가신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에서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그 길에는 누가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이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죽는다. 예외는 없다. 당신은 자기 삶의 쉼 없는 변화를 깨닫는다. 당신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모든 것이 유전하는 것을 본다. 모든 것이 말이다. 그 모두가 오르고 내리며, 흥하고 쇠하며, 생하고 사한다. 모든 생명이, 무산소의 것에서 넓디넓은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당신은 이 우주를 웅장하게 흐르는 체험의 강으로 인식한다.(233)

이 상변(常變)하는 체험의 끝없는 흐름 속에 있는, 이 온갖 정신의 하드웨어 더미에서 당신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전 과정에 의해 야기되고 조건지어진 무수한 비개별적 과정들뿐이다. 발견할 수 있는 정태적 자아란 건 어디에도 없다. 그 모두가 과정이다. 당신은 생각은 발견하지만 생각하는 사람은 찾아내지 못하고, 감정과 욕망은 발견하지만 그것을 시행하는 사람은 찾아내지 못한다. 그것은 빈 집이다. 그 집에는 주인이 없다.(235)

모든 견해와 관념은 흥하고 쇠하며 나고 죽는 것, 그러므로 덧없는 것, 괴로운 것, 빈 집이다. 수행에 대한 이런저런 견해와 관념도 덧없는 것, 괴로운 것, 빈 집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오직 모를 뿐!, 오직 할 뿐!, 오직 수행일 뿐!

모든 견해와 관념을 내려놓으면 진실을 보리니 — 구나라타나 스님의 「위빠사나 명상」을 읽고”에 대한 3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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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 잘 읽었습니다. 소개하신 책 읽어 보았습니다.
    제가 배운 수행법은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방법 이었는데
    숨을 관찰하는 것과 방법은 달라도 몸을 알아차림 한다는 것에서 동일하고, 또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저도 어른으로부터 들었던 가르침과 다르지 않고
    또한 명쾌한 설명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번역 가운데 bare attention을 ‘열린 집중’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이 조금 혼란스러워서 차라리 직역해서 ‘순수한 주의(알아차림)’정도로, 알아차림 이라는 의미를 살리면 concentration과 헷갈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체 책 찾다가 들른 사람인데, 좋은 사이트 같네요! ^^

  • 니체와 불교에 대해 함께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 보군요! 샘님, 반갑습니다.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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