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스님이 번역하고 강설한 «초발심자경문»(조계종출판사, 2009). 깔끔한 편집 디자인에 신선한 제목을 달고 나왔다.
“처음처럼,” 이 말처럼 또 설레는 말이 있을까. 누구나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는 법이며, 또 그 순간에는 반드시 질적인 생의 변화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출가의 길은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생의 변화이자 도약이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감각의 수용방식, 사고의 틀, 감정의 표출방식을 끊고 나아겠다는 결단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너무나 당연시되어 온 구조이기 때문에, 그 구조 속에서 찬동하고 반대하는 움직임은 활발하지만, 그러면서 사람들은 성숙하지만, 차마 그 구조 자체를 아예 벗어나려는 시도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사실 인간적인 생각과 인간적인 감각은 관습적인 허구에 불과하다. 전통적인 불교용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습”(習)이다.
단순히 어느 가치에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생산하고 가치를 폐기하는 뭇 순환의 구조를 벗어나려는 것이기 때문에, 출가는 가장 커다란 생의 전환이다. 출가자는 모두가 당연시하는, 너무나 당연시하는 것들을 하나의 “습”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결정적으로 깨뜨리고자 한다. 슬픔도 습이며, 기쁨도 습이며, 괴로움도 습이며, 생각도 습이며, 지식도 습이며, 예술도 습이다.
감각·감정이 생성되어 그 감각·감정에 몸과 마음을 의탁할 때 밀려오는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찬탄과 멸시, 환희와 좌절, 그 모든 것은 익숙한 것이 만들어놓은 가짜 세계에 불과하다. 게임의 세계에 기쁨과 슬픔이 있듯, 세간에도 기쁨과 슬픔이 있다. 두 세계의 기쁨과 슬픔은 서로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질의 감각이다. 그러므로 그 감각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익숙한 감각의 길들을 통해 소통되는 세계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세간의 기쁨과 슬픔은 가장 익숙한 길, 가장 기발한 허구, 가장 실감나는 게임이어서 그 게임의 세계를 벗어나기란 참으로 어렵다. 아니, 그 게임의 세계를 벗어나기 전에는 그것이 게임이라는 것조차 알기 어렵다.
그러나 벗어나고 보면, 그것은 한 바탕 꿈에 불과하다. 벗어나고 보면, “웃음이 대지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타고르) 한 바탕 꿈, 한 바탕 게임에 놀아난 세월이 우습고, 여전히 허다한 참가자들에 의해 활기차게 진행되고 있는 거대한 유희의 세계가 우습다.
<계초심학인문>은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지은 것으로 제목 그대로 불교에 처음 입문한 초심자를 훈계하는 내용부터 사찰 내에서의 대중 생활의 규범과 선방에서의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을 경각시키는 내용”(166)이다. 한 바탕 커다란 웃음을 터트린 큰 스승이 “수행의 첫 마음을 낸 이들”(초심학인)을 경각시키는 것이니 뭔가 유장하고 호흡이 깊은 내용을 기대할 법하지만, 의외로 수행자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령, <계초심학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夫初心之人은 須遠離惡友하고 親近賢善하야 受五戒十戒等하야 善知持犯開遮니라. 但依金口聖言이언정 莫順庸流妄設이어다.
무릇 처음 불문에 들어온 사람은 모름지기 나쁜 친구를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 이를 가까이하며, 오계와 십계 등을 받아서 지키고 범하고 열고 막을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만 부처님의 거룩한 말씀을 의지하고 어리석은 무리의 허망한 말을 따르지 말라.(12, 16)
너무나 당연하며, 누구나 쉽게 실행할 수 있을 듯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나쁜 친구와 좋은 친구를 분별하기는 어려우며, 계를 받아 지키고 범할 줄 아는 것 또한 어려우며, 부처님의 거룩한 말씀과 어리석은 무리의 허망한 말을 구분하기도 어렵다. 깨달은 자의 안목으로야 낱낱이 매순간 분명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자의 안목으로는 꼬아놓은 새끼줄이 뱀으로 보일 수 있듯이, 허망한 말이 거룩한 말씀처럼 보일 수도 있으며 황금의 입이 어리석은 무리의 주둥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
<계초심학인문>의 문장들은 이렇듯 너무나 당연한 말들로 가득한데,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말들로 가득한데, 가만가만 들여다보면, 어느새 아득한 차원이 열린다. 그러니, “항상 부드럽고 화목하고 착하고 온순할 것”, “아만을 부려 잘난 체하지 말 것”, “나쁜 말로 사람을 상하게 하지 말 것”, “동료를 업신여기거나 속여서 시비하지 말 것”, “할 일 없이 다른 사람의 방이나 집에 들어가지 말 것”, “은밀한 처소에서 구태여 남의 일을 알려 하지 말 것” 등등, 누구나 언급할 만한 말들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이 말들은 큰 스승이 정신적 절정에 오른 뒤 초심을 가진 이들에게 얼굴을 돌려 이른 말씀임을 명심하고 깊이 음미해야 한다.
따라서, <계초심학인문>에는 유장한 사유의 궤적도 보이지 않으며, 빛나는 황금의 비유들도 보이지도 않으며, 감동적인 수행담도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과 생활자세가 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그 어떤 사유의 궤적도 유장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황금의 비유도 빛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수행담도 감동적이지 않을 것이다. 거꾸로 말해, 불교의 고준한 가르침들은 그것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눌은 “첫 마음을 낸 이들”(初心之人)을 향하여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 즉 그 어떤 고준한 가르침보다 고준한 가르침, 가장 절실한 가르침을 고구정녕 일렀을 것이다.
공부하는 처소에 있을 때에는 사미와 함께 지내는 것을 삼가며, 인사 차리느라고 오가는 것을 삼가며,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참견하는 것을 삼가며, 문자만을 너무 구하는 것을 삼가며, 잠을 정도에 지나치게 자는 것을 삼가며, 속된 반연에 꺼들려 산란함을 삼갈지어다.(39)
너무나 기본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건만, 참으로 통렬한 금언들이다. 속세, 그 거대한 유희의 세계를 영단하고자 불문에 첫걸음을 내딛었던 초심자 시절을 생각하면, 지눌의 경계문이야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그 첫 마음이 약해지면, 조금이라도 허세에 물들면, 지눌의 경계문만큼 어려운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전 인류를 사랑할 수는 있어도 곁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듯이”, 마음으로는 모든 중생을 구제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는 곁에 있는 사람의 잘잘못을 참견하지 않기는 어렵다. 왜 그처럼 위대한 일들은 쉽고 사소한 일들은 어려운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허위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계초심학인문>은 바로 그 허위를 가차없이 부순다. 그래서 매우 통렬하다.
«초발심자경문»은 지눌의 <계초심학인문>, 원효의 <발심수행장>, 야운의 <자경문>을 합해 놓은 책이다. 그러니까 이 세 글의 제목들에서 “초”자와 “발심”, “자경문”을 각각 취하여 서명을 지은 것이다. 지눌의 <계초심학인문>이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매우 자상하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원효의 <발심수행장>은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촌음을 아껴 수행할 것을 당부하는 글이다:
喫甘愛養 此身定壞 著柔守護 命必有終
助響巖穴 爲念佛堂 哀鳴鴨鳥 爲歡心友
拜膝如氷 無戀火心 餓腸如切 無求食念
忽至百年 云何不學 一生幾何 不修放逸좋은 음식 먹고 몸을 돌봐도 끝내 죽고 마는 몸, 비단으로 감싸줘도 이 목숨 길이 살지 못하는 것이니, 메아리 울려오는 바위 동굴로 염불하는 법당을 삼고 슬피 우는 새소리로 마음을 즐겁게 하는 벗을 삼을 것이니라. 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차더라도 따뜻한 불 생각 말고 주린 창자가 끊어질 것 같더라도 밥 생각을 말 것이니, 백 년 세월 훌쩍이니 안 배우고 어이하며 한평생이 얼마기에 닦지 않고 방일할까?(66-67)
위의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발심수행장>은 제자를 거침없이 막다른 곳으로 내몬다. 더구나 사사조의 시문이어서 급박하고 절박한 울림을 준다.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이 몸은 홀연히 흩어져 버리는 것이라 오래도록 머묾이 보장되지 않는 것, 오늘이 저녁인가 했더니 어느새 아침이 오는구나.”(77) 사실 엄격히 따져보면, “홀연히 흩어지는 것,” 아무렇지도 않게 끝날 수 있는 게 바로 삶이다. 별다른 일 없이 아침이 오듯, 별다른 일 없이 죽음이 다가올 수 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마치 평범한 아침이 오듯 죽음이 올 수 있다. 그래서 죽음은 그토록 충격적인 것이며 그래서 죽음은 너무나 어이없는 것이다. 죽음만큼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것은 없다. 그러므로 방일하지 말고 수행하라는 것, 더구나 세월은 얼마나 빠른가!
시간, 시간이 옮겨가 밤낮이 빨리 지나가며, 하루, 하루가 옮겨가 보름과 그믐이 빨리 지나가며, 다달이 옮겨가 홀연히 해가 가고 해가 오며, 한 해, 두 해 옮겨가서 잠깐 사이에 죽음의 문에 이른다. […] 얼마나 살 것이기에 닦지 아니하고 헛되이 밤낮을 보내며, 헛된 몸이 얼마나 살아 있을 것이라고 일생 동안 수행 한 번 아니하는가? 몸은 반드시 죽고 마는 것이니 죽은 다음에 받는 몸을 어찌할 것인가? 급하지 아니한가, 생각할수록 급하지 아니한가?
원효는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사정없이 몰아부친다. <발심수행장>은 마치 전투의 평원을 향해 달리는 말을 더욱 화급하게 몰아치는 채찍과도 같다. 세 글 중에서 가장 짧지만 가장 강렬하다.
“말법의 시대가 되어 성인이 가신 지는 오래되고 마魔는 강해지고 법法은 약해지고, 사람들이 간사하고 사치한 이가 많아서 수행을 이루는 자는 적고 실패하는 이가 많으며, 지혜로운 이는 적고 어리석은 이가 많아서 스스로 도는 닦지 않고 남을 괴롭히나니, 무릇 도를 닦지 못하게 하는 인연을 이루 말할 수 없느니라.”(100) — 이와 같은 말법의 시대에, 흔들림없이 수행의 길을 가겠다는 각오로 쓴 것이 야운의 <자경문>이다. 그는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부르고는, “그대가 길을 잘못 들까 염려하여 내 좁은 소견으로 열 가지 문을 지어 경책”(100)한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향한 열 가지 경책이 <자경문>의 주요 내용을 이룬다. 그 중 일부 내용을 단편적으로 소개한다:
부드러운 옷과 맛있는 음식을 받아쓰지 말라.(105)
사흘 동안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가 되고 백 년 동안 쌓은 물건 하루 아침 티끌이 되고 마느니라.(110)
입은 화의 문이니 반드시 엄격히 지켜야 하고, 몸은 재앙의 근본이니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자주 나는 새는 그물에 걸릴 위험이 있고 가벼이 날뛰는 짐승은 화살 맞을 재앙이 없지 않느니라.(114-115)
새가 쉴 적에 반드시 숲을 가리고 진리를 배우는 사람은 스승과 벗을 선택한다.(119)
일생을 헛되이 보낸다면 만겁에 한이 될 것이다. 덧없는 세월은 찰나와 같으니 날마다 놀라 두려워할 것이며, 사람의 목숨은 잠깐이니 실로 늘 보존되는 것이 아니니라.(123)
밖으로 나타난 위의는 존귀한 것 같으나 수행해 얻은 바가 없으면 썩은 배와 같으니라.(129)
비록 어두운 방에 혼자 있을 때라도 큰손님을 맞이한 것처럼 하고(134)
사랑을 덜어 내고 부모를 떠난 것은 법계가 평등한 탓이니 만약 친소가 있다면 마음이 평등하지 못한 것이다.(148)
하나같이 귀한 경책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 늘 곁에 두고 스스로를 지키는 문으로 삼을 만하다.
«초발심자경문»의 번역본은 여럿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번역본들을 평가할 만한 입장은 아니기에 번역에 관하여는 달리 할 말이 없지만, 지안스님이 번역하고 강설한 «처음처럼»(조계종출판사, 2009)만큼 세련된 편집본은 없을 듯하다. 단락별로 원문을 큼직하게 앞세우고, 조그만 글씨로 음과 현토를 달았다. 그리고 번역문, 강설, 주가 뒤따른다. 강설과 주는 번잡하거나 과도하지 않으며, 일목요연하다. 단정하고 깔끔한 편집이 더욱 일목요연한 인상을 주고 있을 것이다. 조계종출판사에서 참불서시리즈로 처음 간행한 것이라 하니, 이 시리즈물이 기대가 된다.
제목을 “처음처럼”이라고 한 것을 보니 역시 수행자가 수행자의 세계를 잘 아는 것인가 보다. 출가자들이 강원에 들어가 처음 배우는 것이 다름아닌 «초발심자경문»이다. 어느 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대학원에서 경전과 어록을 쉴새없이 읽어제꼈는데, 막상 출가하여 강원에 들어가니 얼마 되지도 않는 문장으로 몇 주, 몇 달을 끄는 것에 처음에는 적응하기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학자와 수행자의 차이라면 차이겠는데, 수행자에게 «초발심자경문»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하나의 숨결이요 하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어두운 방에 혼자 있을 때 큰손님을 맞이한 것처럼” 생활하지도 못한다면 그 글귀를 읽어제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빛나는 글귀, 빛나는 문장은 삶에 있는 것이지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불문에 들어선 “초심”과 «초발심자경문»의 만남은, 그래서 더욱 신선할 것이다. 어디선가 들은 말들이지만, 언젠가 읽어본 문장들이지만, 초심지인(初心之人)에게, 발심한 자에게, 언어와 사고의 유희를 벗어난 이들에게, 그 문장들은 경이롭고 새롭다. 그리고 그 문장들은 거의 암기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느리게 느리게 강설된다. 그것은 삶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발심자경문» 한 권만 똑똑히 배우면 평생 중노릇 잘할 수 있다.”(5)
그러니 우리나라 수행자들에게 «초발심자경문»은 “첫 마음” 바로 그 자체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소위 “말법의 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정신적 고향으로 회고될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을 이루는 이가 적을수록, 지혜로운 이가 적을수록, 강물 위에 썩은 배가 즐비할수록, 더욱 “처음처럼”을 되새길 일이다. 그 아름다운 말, “처음처럼”을, . . .
오랜만에 방문해 좋은 글보니 감사합니다.
몸으로 실행하지 못하는 일 입으로 말할때,
초발심자경문은 청정한 죽비소리를 낼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이 세상에 죽비소리만큼 간명하면서도 호흡을 여탈하는 무기가 또 어디있겠습니까. 마침 동안거 기간이니 불문에서 가르치는 한마디 한마디가 준엄하게 들립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잠을 정도에 지나치게 자는 것을 삼가며…저는 왜 이게 가장 어렵게 느껴질까요;
저와 똑같은 어려움을 느끼고 계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