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간단(間斷)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선지식을 만나 법문 한 마디 얻어 듣기란 천만겁에 만나기 어려운 일이니, 법문 한 마디를 옳게 알아 듣는다면 참선할 것 없이 곧 나를 깨달을 수 있나니라.
법문 들을 때는 엷은 얼음 밟듯 정신을 모아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하느니라.
공부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전생에 놀고 지낸 탓이니, 그 빚을 어서 갚아야 수입이 있게 되나니라.
공부하는 사람이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은 먼저 나를 가르쳐 줄 선지식을 택하여야 하고, 나를 완성한 후에 남을 지도할 생각을 해야 하느니라.
참선법은 평범한 언구나 공부가 아니요, 대(對)가 끊어진 참구법, 곧 터럭 끝 하나 얼씬거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느니라.
백년의 연구가 일분간의 무념처(無念處)에서 얻은 한 낱 이것만 같지 못하다.
일체 중생은 날 때부터 이성(異姓)의 감응(感應)으로 말미암아 세세 생생에 익히는 것이 음양법(陰陽法)이니, 정신 모으는 데는 이성적 장애가 제일 힘이 센 것이니, 공부하는 사람은 이성(異姓)을 가장 멀리 해야 하나니라.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一念)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 버린 무념처(無念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나니라.
소아적(小我的) 나는 소멸되어야 하기 때문에 공부의 성취를 하기 전에는 썩은 그루터기같이 되어 추호도 돌아보지 않을 만큼 나의 존재를 없애야 하나니라.
짚신 한 켤레를 삼는 데도 선생이 있고, 이름 있는 버섯 한 송이도 나는 땅이 있는데, 일체 만물을 총섭(總攝)하는 도를 알려는 사람이 도인의 가르침 없이 어찌 도인이 될 수 있으며, 천하 정기를 다 모아 차지한 도인이 나는 땅이 어찌 특별히 있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도반의 감화력은 선생의 가르침보다도 강한 것이니라.
경주 남산에서
수도(修道) 중에는 사람 노릇할 것은 아주 단념해 버리고 귀먹고 눈먼 병신이 되어, 일체 다른 일에 간섭이 없게 되면 대아(大我)는 저절로 이루어 지나니라.
하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요, 이 정신 영혼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니, 하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고? 의심을 지어 가되 고양이가 쥐를 노릴 때에 일념에 들 듯, 물이 흘러갈 때에 간단(間斷)이 없듯, 의심을 간절히 하여 가면 반드시 하나를 알게 되나니라.
참선한다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다른 데 미련이 남아 있거나, 인간으로서의 자랑거리인 학문이나, 기이한 재주 등 무엇이라도 남은 미련이 있다면 참선하기는 어려운 사람인 것이니, 아주 백지로 돌아가야 하나니라.
참선하려면 먼저 육국(六國) 전란을 평정시켜 마음이 안정되어야 비로소 공부할 준비가 된 것이니라.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일체가 생기고, 한 생각이 멸할 때 일체가 멸하나니라. 내 한 생각의 기멸(起滅)이 곧 우주의 건괴(建壞)요 인생의 생사니라.
공부가 잘 된다고 느낄 때 공부와는 벌써 어긋난 것이니라.
공부인(工夫人)은 공부를 아니하는 공부를 하여야 하는데, 공부 아니하기가 하기보다 더욱 어려우니라.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문제보다는 이 공부밖에 할 일이 없다는 결정적 신심부터 세워야 하나니라.
참선은 모든 업장과 습기를 녹이는 도가니니라.
사람을 대할 때는 자비심으로 대하여야 하지만, 공부를 위하여서는 극악 극독심(極惡劇毒心)이 아니면 8만 4천 번뇌마를 쳐부수지 못하나니라.
사형이 집행될 시간 직전에도 오히려 여념(餘念)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진 중에는 털끝만한 어른거림이라도 섞여서는 아니 되나니라.
인신(人身)을 얻기가 극히 어려운 일이니 사람 몸 가졌을 이 때를 놓치지 말고 공부에 힘쓰라. 사람 몸 한 번 놓치게 되면 또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니라.
참선하는 사람의 시간은 지극히 귀중한 것이라, 촌음(寸陰)을 허비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공부가 늦어지는 까닭은 시간 여유가 있거니 하고 항상 미루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라. 자고 나면 오늘은 죽지 않고 살았으니, 살아 있는 오늘에 공부를 마쳐야 하지 내일을 어찌 믿으랴! 하고 매일매일 스스로 격려해 가야 하나니라.
사선을 넘을 때 털끝만큼이라도 사심(私心)의 여유가 있다면 참선하는 기억조차 사라져 없어지느니라.
선학자(禪學者)는 선학자의 행위를 엄숙히 가져서 입을 열지 않고서라도 남을 가르치게 되어야 하느니라.
공부가 완성되기 전에 미리 알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정진을 게을리하다가는 불법인연마저 떨어지기 쉬우니라.
아무리 문명이 발달한 나라라 하더라도 도인이 없으면 빈 나라요, 아무리 빈약한 나라라 하더라도 도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 나라는 비지 않은 나라이니라.
— 만공스님의 <나를 찾는 법—참선법> 중에서
좋은 글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싱가 선생님의 책 소개에 따라 마스타니 후미오의 아함경을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특히 부처 스스로 자자를 제일 먼저 행하는 부분에서는 눈에 물방울이 맺히기도 했습니다. 다만 둑카를 즐거움에만 대비시켜서 이야기하는 듯 해서 조심스러움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마스타니 후미오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읽고 있습니다. 초심자가 읽을 다른 책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부처님 가르침으로 알고 소중히 읽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CTL님께서 불교에 접근하는 길목은 역시 저와 비슷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읽으신 라훌라와 후미오의 두 책에 필적하는 불교 안내서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고 봅니다.
그 다음으로는 불교경전을 읽거나 직접 수행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불교경전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워 무엇부터 읽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어느 경전을 읽든지 수행이 동반되지 않으면 중도에 힘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하는 가운데 조금씩 안목이 열리기 시작하면, 경전만큼 아름다운 책도 드물 것입니다. 아함경, 금강경, 유마경 정도는 필히 읽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법구경, 숫타니파타도 좋고요.
아함경은 최근 일아스님이 번역한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민족사)을 추천합니다. 금강경은 조계종 표준번역본이 나와 있고요. 유마경은 마음에 쏙 드는 번역을 아직 못만났는데, 동국역경원 웹사이트에서 읽어보셔도 될 것입니다. 법구경은 등하스님 번역이나 거해스님 번역, 숫타니파타는 최근 번역본들보다는 김운학 번역을 추천합니다.
또한 동아시아 불교전통에서는 선불교 어록들이 경전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CTL님과 같은 단계에서 책으로 불교에 접근하면서 결국에는 실참을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참선을 하고 있고요. 참선에 관한 기본안내서는 «간화선»(조계종출판사)이 훌륭합니다. 지난 번에 «벽암록»을 추천해 드렸는데, 사실 그런 책들은 참선을 하지 않는 이상 도대체 무슨 말인지 감도 잡기 힘듭니다. 나중에라도 CTL님께서 수행하는 가운데 선어록을 읽을 단계가 되면, 그때 또 관련 책들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은 제 스스로 불교를 배워가면서 만난 책들입니다. 따라서 다른 분들에게는 잘 맞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CTL님 같은 경우에는 좋은 경로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봅니다.
반갑습니다
참선수행 , 그 정진은 하루하루의 쌓아감…
아득한 느낌 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미타불비님 반갑습니다. 만공스님의 참선법은 너무나 간절한 법문이어서 어느 구절 하나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듯합니다. 맑은 정진 있기를 빕니다.
마스타니 후미오님 덕분에 좋은 사이트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후미오님의 근본불교와 대승불교, 새로운 마음의 불교를 통해
불교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혹시 읽어 보셨는지요.
정릉쪽에 사시는것 같은데(저는 미아삼거리쪽에) 돈암동에 위치한 불교서적상에 ‘새로운 마음’은 재고가 있는 것 같습니다.
http://buddhabook.co.kr/front/php/product.php?product_no=1656&main_cate_no=25&display_group=1
혹시 가지고 계시지 않다면 추천해드립니다..
공부함에 있어 고싱가님이 밟아 가신 길을 따라 가보는 것도 좋은 방편이 될 것 같습니다.(저는 아직 알랭드보통이 쓴 ‘삶의 철학산책’ 정도의 위안거리정도로만 종교,철학을 대하고 있는 중입니다.)
자주 놀러 오겠습니다.
마스타니 후미오의 글은 불교에 처음 접근하는 분들이 거의 예외없이 좋아하는 듯합니다. 말씀해 주신 책 감사합니다. 이미 읽은 것인데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좋은 서평 감사드립니다 ^^
혹시 수행과 관련된 책 중에서 추천하고 싶으신 책이 있으신지요.
저도 몇 년 전부터 불교,명상,깨달음에 관심을 갖게 되어서
혼자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기초적이고 체계적인 이해가 부족한 것 같아 자꾸 헤매게 됩니다.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책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고싱가 님의 추천을 기다려도 될까요 ^^
아무쪼록 늘 평화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책 소개는 음반 소개만큼이나 어려운 것 같아요. 사람마다 다들 취향이 다르니까요. 저조차도 모르는 게 많은데다 질문이 너무 일반적이면 특히 어렵네요.
저는 불교에 입문할 때 처음 벽암록을 읽었어요.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고수들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리고 불교성전, 월폴라 라훌라, 마스타니 후미오 등을 읽었고요. 그외에도 읽은 책들은 꽤 되겠지만 그 정도가 기억에 남네요. 그러다가, 김홍근의 참선일기를 읽고 아 이제 참선을 해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읽을 당시는 그 책이 상당히 임팩트가 있었는데(아마 실참하는 것을 처음 엿보아서 그런 듯합니다), 지금은 너무 초보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보리님께서 말씀하신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책”으로는 참선일기가 괜찮을 듯합니다. 말 그대로 참선하면서 일기를 쓴 것이니까요.
불교공부에서 결정적인 전환, 결정적인 도약이 이뤄진 것은 사찰에서 마련한 참선수련회에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산사에서 모든 것을 끊고 하루 종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하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책읽기도 중요하지만, 결정코 이 의문을 풀겠다는 간절한 발심이 없으면 불교 공부는 메마른 지혜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좋은 날 되시길 빕니다.
추천해 주신 책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벌써 구해서 읽으셨어요? 마음에 안 들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드네요. 그래서 책 소개는 중매 서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 같습니다.
저는 요즘 달라이라마가 직접 쓴 영문책들과 공식웹싸이트인 http://www.dalailama.com/webcasts/ 에서 비디오클립을 번갈아 가면서 보고 있습니다. 비디오클립에서는 설법 당시의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고, 책에서는 좀 더 체계적이고,간결하며,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됩니다.
달라이라마께서는 티벳종교지도자 이전에 당대 최고로 훌륭한 스승들로 부터 직접 교육을 받으신 분이고, 대교과를 마치신 학자이십니다. 또한 매일 수행을 하십니다. 어렸을 적 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아서, 매년 과학자들과 학술 토론회가 있습니다. 공식웹싸이트에있는 과학자들과의 학술 토론회(Mind and Life)를 보면서, 불교에 대한 폭넓고 깊은 이해를 위해선 양자물리학(Quantum physics), 심리학(Psychology), 뇌과학(Neuroscience), 현상학(Phenomenology) 등이 많은 도움이 된다는 걸 느꼈습니다. 또한 이런 비불교인들과의 대화는 종교적 아집이나 편집을 막을 수 있고, 21세기의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불교적 접근법이 많은 도움이 된다는 걸 느끼게 되고, 끊임없는 불교자체의 자성 또한 생각하게 만듭니다.
제 입장에서는 참선의 접근에서도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본래 참선은 상근기인 사람들만 할 수 있다고 흔히 말하는데, 실제 스승의 도움없이 참선을 하다보면 당연히 어렵고 따라서 아! 나는 상근기가 아닌가보다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초등학생에게 삼차방정식 풀라고 했던게 잘못이었지요. 어떤 배움의 과정이든 초급, 중급, 상급 수련이 있듯이 수식, 사념처 수행 등을 차근차근 밟아서 나아간다면 누구든 참선을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남방수행책 중에서는 Ajahn Brahm의 “Mindfulness, Bliss, and Beyond”를 추천하고, 계정혜중 정(Samatha) 수행법으로는 B. Allan Wallace의 “The Attention Revolution”을 추천합니다. 특히, 이 책의 awareness of awareness는 전통 묵조선의 수행법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제가 티벳불교의 영문번역서를 추천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한문에 조예가 깊지 않은 저희가 한문번역책을 읽는 다면 많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가령 “공”이란 말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저에게는 마치 선문답처럼, 시처럼, 또는 수수께끼처럼 때로는 깨달은 이들만 말할 수 있는 근접하지 못할 말로만 들렸거든요. 하지만, 용수보살의 사상에 입각한 티벳사상에서는 연기법을 바탕으로 진제와 속제 두 측면에서 철학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령 금강경에 “과거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을 어떤 한문번역책들에는 “얻을 수 없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문번역서에는 “이해할 수 없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얻을 수 없다거나 이해할 수 없다거나 언뜻 비슷한 듯하지만 차이가 많다고 봅니다. 물론 한문에 조예가 깊으신 분들은 당연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석하시겠지만, 번역만 읽는 저희야 얻을 수 없다라고 알테고, 무슨 물건도 아닌 과거심을 어떻게 얻어야 될 지 생각해보면 상식에 어긋나게 되지요. 물론 시에서는 가능합니다만, 철학에서는 큰 일이죠. 이런 번역들이 불교철학을 불교 수수께끼 아님 불교 시 정도로 오해하게 만들지요.
영어는 우리 나라 말처럼 “sound language”이기 때문에 번역이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 우리 나라나 일본의 과거 교육의 특징이 분석 이전에 대학자의 “Summary”에 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한문 자체의 특성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Summary”만 읽게 되면 마치 수학 공식만 암기하듯 그 전반적인 논린의 전개는 무시하게 되지요. 하지만, 아함경 등을 읽어보게 되면, 부처님의 논법은 선사의 언어이전의 말이 아닌 철학자의 체계적인 대화법에 가깝습니다. 가령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이 무슨 물건인고”라는 공안의 기본 바탕은 아주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공”과 “연기”를 대비해서 묻는다는 걸 먼저 이해하지 않는 다면 수수께끼와 다르지 않겠지요. 수수께끼 붙들고 한 시간 이상 씨름하신 분 계신가요? 어떤 수수께끼를 한 시간이상 붙잡고 노력하셨다면 많은 의식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다보면 상기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근본적인 공과 연기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있으면, 이 질문은 아주 깊은 메아리를 울리게 되겠죠. 즉, 초등학생에게 근의 공식을 던져주고 암기하고 그 뜻을 알아서 오라고 하면 그 초등학생에게는 고문입니다. 하지만, 차근차근 이해를 시키면 나중에 우아한 근의 공식을 보여주면 그 우아하고 간결함에 감탄할 것이고 이해와 공식 둘 다 능숙하면 다른 이차방적식을 아주 잘 풀겠지요.
어떤 분들은 “공”만 앞세우셔서 “아무 것도 없다” 또는 “인생 뭐 있나”까지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연기”에 대한 깊은 사유가 부족해서 일 듯합니다. “일체유심조소”를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있다”로 까지 번역한 책들을 읽으시면 어떻게 “유심론”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이론들은 인도인 특유의 이성적 고찰로부터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일본 학자들은 제 견해로는 “Summary”편집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수학정석의 “근의 공식” 엄청 외웠죠. 하지만, 서양학자들은 공식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수분해의 과정을 숙달 반복 시키죠. 접근방법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날 수 많은 불자인들이 “반야심경”을 암송하면서 반야심경의 근본 뜻을 물어보면 모르는 분이 제 생각에는 90%이상인 것 같습니다. 불교이해가 목적인데, 한문이라는 큰 벽에 부닥친거지요. 왜 불교에서는 창조자를 인정하지 않는지, 왜 나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 지에 대한 철학적 이유에 대해 설명을 들은 적이 있으신가요? 제 기억엔 한번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다고 한다면, 신념을 강조한 다른 종교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혹시 제가 두서없이 늘어놓은 제가 부닥쳤던 문제들을 한번씩이라도 느끼신 분들은 티벳불교의 영문번역서를 추천합니다. 또한 달라이라마의 강연과 책을 먼저 추천해드립니다. 먼 훗날 산스크리스트 원전을 읽게 되면 더 없이 좋겠지만…
행복과 그 행복의 원인을 찾기를 기원합니다.
참 깜빡했네요. 혹시 아함경의 영문번역을 읽어실려면 http://www.accesstoinsight.org 를 참조하세요. 이 싸이트는 팔리어를 영문번역서를 많이 올려놓고 있습니다. 물론 책을 사서 보시려면 이 싸이트에서 자주 인용하고 있는 Bhikku Bodhi나 Bhikkhu Thanissaro의 책을 아마존에서 구입하셔서 읽어보시면 되구요. 아함경은 초기경전이기 때문에 티벳불교에서도 싼스크리스트어가 아닌 팔리어를 번역했다고 합니다. 팔리어가 싼스크리스트어로 번역되고, 다시 싼스크리스트어가 한문으로 번역되고 (구마라집이나 현장스님은 싼스크리스트어 학자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대승학자이기 때문에 초기경전 번역시 의역이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것을 일본학자가 다시 일본어로 번역하고, 이 일본역을 한글로 번역한 것 읽는 것보다는, 팔리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 훨씬 원문을 읽는 데 가깝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풀의꿈님, 소중한 시간 할애하셔서 좋은 가르침과 알찬 정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저 역시 불교를 배우면서 아함경으로부터 시작했으며 지금도 틈틈이 아함경을 읽으며 감동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무엇보다도 선불교 전통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학창시절에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철학적 훈련을 거치지 않았다면, 초기경전의 논법들과 용수·무착·천친 등 위대한 대승논사들의 전통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깊이 공부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철학적이고 체계적인 논법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그 철학적 논법을 내놓은 근원이 언제나 관심사였습니다. 연기법에 대한 이해보다는 연기법을 “본” 그 자리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니까, 서양철학에 대한 관심을 벗어나 불교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이성적 이해보다는 수행전통이 언제나 관심사였습니다. 이성적 이해라는 것이 정견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겠지만, 그 이상이 되려면 아무래도 수행이 필요하니까요.
아마도 이런 저의 정신적 이력 때문이겠지만, 아함경이나 상좌부전통의 논서들보다는 유마경·금강경·화엄경 등의 대승경전이 저에게는 황금처럼 빛나는 가르침으로 다가옵니다. 선불교 전통은 모든 것을 벼락처럼 자르는 금강같은 가르침으로 다가왔고요. 특히 선불교 전통은 우리나라 불교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수행전통인지라 인연이 닿으면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이점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학문·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서양식 교육체계의 세례를 받은 이후로, 앞으로 우리나라 재가불자들도 애오라지 선불교 전통이나 대승불교 전통에만 매달리지 않고 초기불교 전통이나 티벳불교 전통으로 관심이 확대되겠지만, 저는 그 서양식 교육체계의 전통에 대하여 뼈저린 한계를 느끼고 동아시아의 대승불교 전통으로 귀의한 사례입니다. 어느 전통이 좋고 훌륭한가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초기불교의 전통이 가장 훌륭한 가르침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대승불교의 전통이 가장 훌륭한 가르침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선불교가 가장 훌륭한 가르침일 수 있겠지요. 어느 전통이든 스스로에게 맞는 가르침을 따라 배워들어가면서 생활 속에서 소화해낸 내용을 서로 나누는 것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풀의꿈님께서 말씀해 주신 의견도 그런 일환일 것이고, 저의 소박한 의견도 그런 일환일 것입니다.
제가 선불교 전통에 들어서서 배웠던 바를 이 블로그를 통하여 조금씩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좋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좋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 나름의 소화력을 갖추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니 앞으로도 풀의꿈님께서 훌륭한 전통의 가르침을 통하여 배운 바가 있다면, 저에게도 가르침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이번과 같이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고싱가님 말씀은 항상 담담하고 소박하면서도 정감이 뜸북 깃들여져서 제 마음이 편안합니다. 사실 이런 글을 올리기에는 제 공부가 미천해서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저도 수행없이는 불교를 이야기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싱가님의 말씀대로 자신에게 맞는 수행을 생활 속까지 소화해낸다면 깨달음으로 가는 최선의 방법이고 바른 방법이라는데 동의합니다. 다만, 간화선을 우선시 하는 한국불교에 대해서 한번 반성해봐야 되지 않나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볼 뿐입니다. 물론 고싱가님처럼 간화선이 가장 적합한 분들에겐 제 글은 잡음일 것이고, 혹시 다른 수행법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는 분들이 계실까봐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심인종 재단에서 세운 중학교와 조계종 재단에서 세운 고등학교를 나왔고 불교학생회에서 활동하면서 불교를 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편입니다. 참선이 제일 빠른 방법이라는 큰스님들의 말씀대로 선어록 등 참선관련 서적과 유명하신 선사님들이 쓰신 책들을 읽었고, 화두도 타고 나름대로 참선을 한다고 애쓰봤지만 별 진전이 없었습니다. 마음은 항상 불타고 있는데 어둠속에서 항상 제자리를 멤도는 기분이었지요.
저는 어릴 적 부터 부처님이나 깨달으신 분들의 마음은 어떠할까가 궁금했습니다. 말하자면 이게 저의 화두인 셈이죠.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 마구 쏟아지는 눈물 앞에서 항상 꽃피고 새우는 소식으로는 해결 안되는 모순이 많았거든요. 부처님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항상 고요하기만 하실까? 관세음보살님은 어떨까? 참선으로 깨달으면 모든 모순이 단박에(?) 해결될까?
저는 캐나다에 이민해서 살면서 한국불교외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령, 얼마전에 티벳불교의 Four Immeasurable이란 수행법을 알게 되었죠. 자비심, 사랑, 기쁨, 평등심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저 대입하고 점차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까지 넓혀나가는 수행이지요. 사랑을 관조하다 애착심이 들게 되면 평등심으로 막고, 자비심을 관조하다 슬픔으로 빠지면 기쁨으로 막는 수행법이죠. 그런데 Ajahn Brahm의 책에 깨달은 분(아라한)의 모든 행동의 근원이 이 사무량심이라고 설명되어 있더군요. 간접적이나마 부처님의 마음을 엿볼 수가 있었죠. 그런데, 교리수업에서 사무량심에 대해 들었던 건 분명한데, 구체적인 수행법은 기억에 없더군요. 또 다른 예로 티벳불교에서는 Bodhichitta(보리심)수행을 가장 중요한 수행법 중의 하나라고 해서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수행법이 많은데, 제 기억엔 한국에선 자비심을 강조하지만 자비심을 어떻게 성취하는지에 대한 구첵적인 수행법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습니다. 물론 티벳불교에서도 불성을 보면 자비심 수행법이 따로 필요없다고 하지만, 대체로 먼저 보리심을 수행하면서 다른 수행을 하거든요.
첫째, 흔히 많은 큰스님께서 간화선이 가장 빠른 수행법이라고 하십니다. 물론 저도 간화선이 최상승법이고, 바른 수행법이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가장 빠른 수행법이 바른 수행법일까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사념처 수행법을 설명하시면서 사념처 수행법이 깨달음에 이르는 직접적인(direct) 법이라고 하셨지, 빠른 법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마 수 많은 경전에서 직접적인 수행법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수행법은 몇 안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빠른 수행이 깨달음으로 가는 직접적인 수행일까요? 즉, 모든 분들께 간화선이 가장 빠른 수행법일 수 없고, 자칫 깨달음으로 가는 직접적인 수행법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두번째, 한국 불교는 대승불교라고 하는 데, 왜 사무량심, 육바라밀에 대한 구체적인 수행법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 걸까? 용수, 무착, 적천 스님 등은 나란다대학의 대승불교의 뛰어난 학자이면서 넘볼 수 없는 수행승이셨고 깨달은 분들이십니다. 이 모든 스님들께서 사무량심, 육바라밀, 보리심 수행법을 정혜쌍수 수행법 이전 또는 동시에 틈틈히 해야할 수행법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굳이 따지면 점차로 가는 수행법이지요. 하지만, 한국 불교계에서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폄하하면서 정작 간화선외엔 대표적인 대승불교 수행법에 대해선 언급이 없습니다. 사실 제가 다양한 수행방법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탓도 있젰지요. 아니 바로 들어가면 되지 왜 다른 수행법이 필요한가 하는 분위기인데, 전통적인 대승수행법 없는 한국불교가 대승불교일까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실 제가 깜짝 놀란 사실은 영문번역을 한글로 옮겨서 인터넷에 검색해보니까 티벳불교의 많은 수행법들이 실제 경전에 나와있다는 겁니다. 단, 차이점이 티벳에서는 경전에 나오는 수행법을 실제 생활 속에 녹이는 거죠. 가장 기초적인 수행법 중 하나가 Seven-limb(일곱가지) practice인데 화엄경보현행원품의 내용이 아주 비슷합니다. 혹시 스님들은 저희들 몰래 좋은 수행은 다해보시고, 저희를 너무 사랑하시는 마음에서 알짜배기만 던져주시는 걸까요?
세번째, 보조스님의 경우 정혜쌍수를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참선을 하면서 성성적적하면서(정) 그 마음자리를 의심하는 것(혜), 즉 정혜쌍수 이기는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정은 참선법을 혜는 폭넓은 공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폭 넓은 공부 없이 간화선만 들게 되면 자칫 옆 길로 샐 수도 있다는고 생각해봅니다. 부처님 이전에도 삼매에 드는 많은 수행법이 있었고, 부처님 자신이 이미 두분의 스승 밑에서 완벽한 삼매에 들었지만 깨달음에 들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삼매에 드는 수행법을 가르치면서 또한 모든 현상을 관조하는 것에 대해 많은 강조를 하셨죠. 그렇지 않다면 저 많은 팔만사천법과 그에 따른 주석서 등은 필요가 없겠죠. 선이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하지만, 그 마음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바른 견해는 폭 넓은 공부 밖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책을 통해 수영을 배울 수는 없지만, 수영만 잘 해서는 어디로 가야할 지 또는 그 수영을 어떻게 바르게 가르칠 지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봅니다.
네번째, 티벳불교에서는 수행의 깊이를 따질 때, 중생에 대한 따뜻한 마음의 넓이를 따지는 것 같습니다. 제 경험에서도 몇 분의 스님에게서는 어린 시절 추운 날에 벌벌 떨다 들어온 저를 따뜻하게 품어주시던 친할머님의 따뜻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깨달음의 목적 자체가 자비라고 생각하고, 지혜보다 자비를 더 위에 두고 있습니다. 즉, 완전한 자리이타를 발현하기 위해서, 나라는 집착에서 깨어나야 되기 때문에 공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죠. 하지만, 제가 읽었던 선사님의 책들에서 이런 따뜻한 자비심은 별로 느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즉, 깨달으시고도 습을 제거하지 못하신 것은 보리심에 대한 수행이 없어서라고 생각해봅니다. 이런 경우 티벳불교에서는 불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생각하죠.
다섯째, 저의 짧은 경험으로 볼 때 간화선이 딱히 특별한 수행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경전에는 선정의 대상에 대해서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물론 경전 끝에 각 수행법의 수승함에 대해서 찬탄이 있고 따라서 그 경전의 제목이 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대표적인 교과서에는 어떤 선정의 대상이 우월하다고 설명하지 않고, 사람들의 경향을 분류하고 각 성향의 사람들에겐 적합한 수해법을 추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즉, 화두도 선정의 대상 중의 하나일 뿐이지 더 수승하다고는 개인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 한소식 하신 스님들은 자신의 수행법이 수승하다고 합니다. 사실 평생 호흡법을 통해서 한 소식하셨는데 다른 수행법을 설명할 수는 없죠. 하지만 어떤 스님들은 많은 경험을 통해서 사람들의 경향에 맞는 대상을 추천해주시기도 합니다. 결혼 당일 신랑 신부 얼굴보고다 잘 살았다지만, 전 많은 사람을 만나봐야 된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병의 원인에 따라서 처방전이 달라져야 합니다. 부처님을 의사에 비유하기도 하고, 실제 사성제는 병과, 병의 원인, 병이 없는 상태, 병을 없애는 처방의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삼독(탐진취)이 제일 중하지만, 부처님은 많은 다른 독에 대해서도 설명하셨고, 여기에 대한 처방전을 내리셨습니다. 수행중에 많은 장애가 오는 것은 각 장애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각 장애에 대한 대처법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뛰는 코끼리를 묶어 놓는 다고 코끼리가 얌전한 코끼리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먼저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는 놓아야 겠지만, 각 코끼리의 성질에 따라서 다양한 훈련법이 필요하고, 단계마다 훈련법도 달라져야 합니다. 정말 선지식 한 분 밑에서 단계마다 코치를 받을 수 있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대부분의 인연이 닿지 않은 일반인은 스스로 코끼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아함경에 나오는 수 많은 설법들이 부처님께서 슬기롭게 장애를 해결해나갔던 방법들, 즉 부처님도 수 많은 장애를 가지셨고, 여기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어떻게 해결하셨는지에 대한 친절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아함경이야 말로 참선의 훌륭한 지도책이지요.
얼마전 불교방송에서 한국 불자들을 위한 달라이라마의 입보리도론 강연을 봤습니다. 강연 중에서 달라이라마께서 눈물을 펑펑 흘리시는 걸 봤습니다. 어떤 강연에서는 달라이라마 본인은 깊은 삼매에 든 경험은 분명이 없다고 못 박아서 말씀하시곤 합니다. 그럼 달라이라마가 깨닫지 못해서 눈물을 흘릴까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죠. 티벳에서 깊은 수행의 경지에 든 분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돌아가신 후에 이주일 이상 시체가 썩지 않는 경지까지 가신 분들도 몇 분 계시구요. 하지만, 이런 경지에 드신 수행승들도 죽지 전에 달라이라마를 친견하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그 깊은 수행을 통해서도 달라이라마처럼 중생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는 자비로운 마음이 깃들지는 못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물론 티벳도 종파가 많아서 다른 종파나 또는 같은 종파의 모든 스님들이 달라이라마를 우러러 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대부분의 스님들은 달라이라마를 어머님 보듯 쳐다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제가 티벳불교 우상주의 또는 달라이라마 신봉자라고 생각할까 다소 염려스럽습니다. 사실 티벳불교에 대해 겨우 관심을 갖고 책 몇권 읽었다고 이런 글을 쓰니 당연히 비난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저는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즉 석가모니 부처님외에는 아직 스승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단, 저의 지혜가 낮아서 제 스승님의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다양한 스님들의 친절한 가르침을 소중히 할 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정혜쌍수입니다. 참선수행과 함께 폭 넓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경전암송만 해서는 안되고 깊은 사색도 필요합니다. 중학교부터 반야심경 외웠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대략이나마 이해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반야심경 뜻 모르고 외우면 주문 외우는 거랑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폭 넓은 공부에는 남방불교, 티벳불교 등도 포함되고, 다양한 수행법도 접해보시길 부탁드립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여기서 분명 모든 법문을 다 배우겠노라 서원하셨지요? 삼예의 논쟁에서 카마라쉴라가 마하연스님께 이렇게 물었다죠? 중생의 근기가 다 다른데 어떻게 최상승근기에 맞는 법으로 다른 근기의 중생을 가르치는가라고.. 연꽃처럼 나의 근기도 그러하거니와 중생의 근기도 때때로 다른데 돈오만 강조하면 어떻게 나와 중생을 이끌겠습니까. 저도 육조스님 존경합니다만, 개인적으로 신수스님의 시가 없으면 육조스님의 시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시가 나란히 옆에 있기에 완전한 가르침을 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단박에 깨닫는 것이 하루아침에 깨닫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나팔꽃이 잎망울을 찰나에 터트리는데에 수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연꽃처럼 바깥 잎부터 차근차근 여는 꽃도 있습니다. 너무 성급하지맙시다. 제가 공부는 짧은데 나이만 들어가니 시간에 많이 쫓겼는데, 싼티데바(적천)스님의 입보리도론에 나오는 이 구절을 암송하면서부터 마음에 여유가 많아졌습니다. “허공계가 다하고 단 한 명의 중생이 남아 있는 한 저는 이 세상에 머물면서 중생의 고통을 없애는 자로 남겠습니다.” 이 서원세우시면 빨리 성불해서도 안됩니다.
다들 천천히 성불하시길 기원하면서…
풀의꿈님의 고견에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저뿐만 아니라 이 글을 접하시는 분들께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