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 관련 책을 읽은 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칸트를 필두로 한 독일관념론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에서 정립된 철학용어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고 알고 있다. 이런 철학사의 흐름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으나, 일본이 근대화되던 시기에 독일관념론의 용어들을 번역하면서 한자로 조어한 용어들이 현재 우리나라 언어로 고스란히 계승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철학용어는 결코 무시할 게 못된다.
우리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서양철학사 관련 책들을 읽기 시작할 때 독일관념론 철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도 다름아닌 그 번역용어들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한 생각이 아닐 것이다. 가령, “관념”, “객관”, “인식”, “본질”, “오성”, “이성”, “지성”, “현상”, “경험”, “감각”, “감관”, “의미”, “근거”, “인과” 등등의 낱말들은 길게 역사를 추적하면, 일본 번역어를 거슬러올라가 독일관념론,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철학용어에 다다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그 용어들을 입에 올릴 때 우리의 개념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우리의 개념은 그 체계와 분리된 의미를 띠기 어렵다. 다름아닌 일본 번역어가 독일관념론에서 정의된 개념에 맞게 번역된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칸트 이전의 모든 철학이 칸트라는 저수지로 흘러든 뒤 이후의 철학사를 향해 흘렀다는 칸트주의자들의 평가는 과장된 면이 있겠으나, 적어도 그 용어들의 흐름을 고려해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닐 성싶다. 그만큼 우리는 그 용어들을 독일관념론에서 정의된 개념의 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개념틀은 엄밀히 말해 한 시대의 정신에 불과한 것이다. 하이데거가 그 용어들의 역사성을 밝혀내면서 개념틀을 뿌리채 흔든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라이프니츠-볼프 이래의 개념체계, 즉 몇 세기에 걸쳐 서양철학사를 주조했던 개념체계를 해체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현대독일어 문법에 허용되지 않는 희한한 독일어를 남발하는 것은 독일철학 용어로 편입된 언어들을 옛 시대의 의미로 복원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그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으니까.
에크하르트는 라이프니츠-볼프보다 약 400년 앞선 세대에 속한다. 따라서 그의 논고에는 “인식”, “이성”, “오성”, “본질”, “현상”, “근거” 등의 독일어가 등장하지만,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개념틀 내지 독일관념론의 개념틀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까닭도 바로 이러한 철학사적 흐름 때문이다. 바꿔 말해, 에크하르트의 글에 등장하는 “인식”, “이성”, “오성”, “본질”, “현상”, “근거” 등의 낱말들은 강단철학에서 협소한 개념체계로 굳어지기 이전의 의미를 갖고 있다. 거기에다 그의 중세고지독일어(Mittelhochdeutsch)는 현대독일어의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언어에 접근할 때 매우 조심스럽게 전후좌우를 살피면서 다가가야 할 것이다.
가령, “ein lebende wesende istige vernünftigkeit”(이부현은 “살아 있고 본질적이고 존재하는 이성”으로 옮겼다)에서 “wesend istig”(본질적이고 존재하는)라는 낱말들은 현대독일어에서 이미 사어가 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형으로부터 “Wesen”(본질)이라는 명사의 동사가 있었으며, “Sein”(존재)이라는 명사 내지 동사의 형용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본질하다”로? 아니다, 그것은 우리말의 어법상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질”이라는 번역어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협소한 개념에만 적합할 뿐, 그 이전의 언어세계에는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경우 현대독일어에 남아 있는 “abwesend”(결석하다), “anwesend”(참석하다)라는 분사형을 함께 거론하며 “Wesen”이 원래 동사임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본질” 대신에 “임재하다”, “임하다”, “출석하다” 등의 의미로 개념을 복원시킨다. 이렇듯 언어들이 본래의 의미로 회귀하게 되면, 독일관념론같은 개념체계는 언제라도 허물어질 수 있는 사상누각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 체계는 한갓 협소한 시대정신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언어는 독일어의 본래 의미와 함께 움직인다. 따라서 에크하르트의 글을 읽을 때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 이래 형성된 개념틀을 깡그리 잊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철학적 개념들을 거의 모두 잊고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따라서 본래적인 이해로 보면 신은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명백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지성이거나 인식이므로, 그러니까 다른 어떤 존재도 섞이지 않은 순수 인식이므로, 그 유일무이한 신이 자신의 인식을 통하여 사물들을 존재 속으로 호출하기 때문이다, 다름아니라 신 안에서만 존재는 인식이므로. . .
신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한 것은, 신의 온 존재는 인식 자체이므로 신은 순수 지성이라는 점이다.
Es ergibt sich also offentlich, daß Gott im eigentlichen Verstande einzig ist. Und da er Intellekt oder Erkennen ist, und zwar reines Erkennen ohne Beimischung irgendeines andern Seins, so ruft dieser einzige Gott durch sein Erkennen die Dinge ins Sein, eben weil in ihm allein das Sein Erkennen ist . . . Er wollte und lehren, daß Gott reiner Intellkt sei, dessen ganzes Sein das Erkennen selbst ist.
— Josef Quint, Deutsche Predigten und Traktate, 7. Auflage, 24면
위 인용문에서 “신은 지성”, “신은 인식”, “신은 순수 인식”, “신의 존재는 인식 자체”, “신은 순수 지성” 등의 표현을 현대적인 개념틀로 파악한다면 십중팔구 그르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번역은 이렇게밖에 하지 못할 것이고, 필연적으로 중층적 몰이해의 위험에 노출된다. 그러나 그 중층적인 몰이해를 걷어낼 수 있는 역량의 독자들을 위해서, 물론 그런 독자들은 소수이겠지만, 그래도 각 용어들에 대하여 엄밀히 번역해야 한다. 가령 우리말의 자연스런 가독성을 위해 “Intellekt”, “Vernunft” 등을 일괄적으로 “이성”으로 번역한다거나, “Vernunft”의 번역어로 “지성”이나 “이성”을 번갈아 채택한다거나 하지는 말아야 한다. (실제로 이부현의 번역은 이런 착오를 범하고 있다. 이것이 의도적인 것인지 착오인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그의 일관되지 못한 번역어 채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문제는 나중에 이부현의 번역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서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 개념들, 즉 “순수 인식”, “인식 자체”, “순수 지성” 등의 개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역사적으로 그 개념들의 변천사를 면밀히 검토한다하여 그 의미가 포착될 리는 만무하고, 우선은 자신이 그 개념들에 대하여 품고 있는 의미를 모두 털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개념들은 에크하르트의 직접 경험을 시사하는 암시의 언어일 뿐, 사상 체계를 확립하거나 분석하는 치밀한 논리의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문제는 역시 경험이다. 성실한 책읽기와 분석을 요구하는 언어가 있는 반면, 고도의 직접 경험을 요구하는 언어도 있다. 에크하르트의 언어는 바로 후자의 언어이다. 남녀의 감정놀음인 사랑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직접 경험을 요구하는 판에,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사태를 가리키는 언어를 그런 경험이 전혀 없이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다.
신비가는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언어를 그 극한까지 밀어붙혀 사용한다. 그는 당대의 언어는 물론 당대의 사상적 체계조차도 자신의 경험 뒤에 따라오는 하나의 그림자, 하나의 가벼운 도구로 사용한다. 언어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역사적으로 흔들린다는 의미에서 그 언어는 극한에 이른다. 바로 이 의미에서, 니체는 “사람들은 이미지가 무엇이고 비유가 무엇인지 더 이상 개념을 얻지 못하리라”고 단언한다.
이미지나 비유가 어느 사상체계나 어느 감각세계 내에서 그 구조에 맞게 피어나는 꽃이라면, 신비가의 경험에서는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사용하는 모든 수법들, 모든 표현들, 모든 사상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구조 자체가 이미지요 비유가 된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들은 “영원의 철학”의 언어가 아니라 (그런 형이상학적 언어를 추종하는) 철학자들의 심리를 폭로하는 실마리, 즉 일종의 비유나 이미지 같은 것, 심리학적 언어가 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빌어 말하자면, 현실은 (혹은 현실이라고 믿는 그 무엇은, 혹은 철학자들이 몸담은 사상체계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또 다른 그림자인 것이다. 그리하여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이미지와 실제, 비유와 사실 간의 복합적 관계가 혁신되거나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비가의 언어라는 언어는 모두 이미지나 비유나 상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가면에 가깝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는 이미지나 심리의 연상을 따라가면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지만(그것은 그림자 놀이이므로), 사상서들을 읽을 때는 추론이나 논변, 논리를 따라가면 그 귀결에 도달할 수 있지만(그것 역시 그림자 놀이이므로), 신비주의 문헌을 그런 식으로 독해하면 필연적으로 그림자에 속아넘어가 좌초하게 될 것이다(그것은 그림자 놀이가 아니라 그림자 바로 그것일 뿐이므로).
가면은 가면 뒤에 얼굴이 있다는 것만 알릴 뿐, 얼굴을 묘파하지 않는다. 가면과 얼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이 강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기에 신경을 쓰지 말라. 이 진리와 같아지지 않는 한, 이 강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폐되지 않은 진리, 즉 신의 마음으로부터 직접 도래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 설교 32
그의 강론, 그의 언어는 그림자와 그림자가 긴밀히 연계되는 그림자 놀이가 아니다. 그의 언어는 찰나찰나 흔들리는 그림자, 찰나찰나 명멸하는 그림자, 순수한 그림자다. 진리를 가장 덜 은폐하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그림자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주로 그 사용에 의해서 의미가 부여된다고 러시아 언어학자 비고츠키가 주장하던데 ,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에크하르트의 언어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비슷한 주장은 철학자 kripke가 referring 문제를 논하면서 주장하는 것을 젊은 시절에 읽은 기억이 있네요
이것은 철학 그리고 가장 엄밀한 학문이라고 간주된느 수학에서도 마찬가지라고 michael Polany(칼 폴라니의 동생)도 그의 “개인적 지식” , “암묵적 차원”이라는 개념으로 주장한 걸로 알고 잇읍니다.
수학에서는 이 이론을 “사회구성론”이라고 부르는데, 비트겐슈타인도 “life forms”이라고 주장한 걸로 기억합니다
동양 사람이 서양 철학을 아무리 깊이 파고 들어도 이해하기가 힘 든 이유는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 즉 언어는 그 민족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경험이라는 배경을 갖고 있어야 이해될 수 있는 성질 대문일 수도 있을 겁니다.
칼 융도 그의 책 <>에서 그런 비슷한 주장을 한 걸로 기억합니다.
니체도 언어가 인간의 세계관을 결정하고 다라서 언어가 다르면 보는 세계도 다르다고 주장한 걸로 압니다
http://en.wikipedia.org/wiki/Sapir%E2%80%93Whorf_hypothes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