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취향을 말하자면, 낭만주의보다는 계몽주의를 좋아하는 편이고 계몽주의보다는 냉소주의를 좋아하는 편이다. 냉소주의를 멀리하고 낭만주의에 친근했던 학창시절과는 정반대가 된 것은, 이제는 인간 이성이 구축한 진지하고 치밀한 인식체계가 하나의 거대한 농담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불가분 권력과 결탁된 교조주의·도덕주의를 접하노라면 그 농담의 거대함 때문에 저절로 웃음이 난다. 웃음으로 중력의 영, 무거운 정신을 죽이자고 말했던 차라투스트라의 말이 예삿말로 들리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니체의 한기·냉소는 필시 농담·웃음과 연결된 것이리라. 그것은 사심없는 웃음, 증오가 없는 냉소이다.
낭만주의에 대한 선호도가 크게 달라진 것도 이채롭다. 젊은날에는 밤과 어둠을 노래하는 낭만주의를 좋아했는데, 이제는 낭만주의의 감정이 부담스럽다. 그 감정이 가슴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언어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조미된 언어, 축축한 언어라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낭만주의의 감정 자체가 과잉감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계몽주의는? 고증과 실증이 계몽주의의 아들이라는 점에서는 계몽주의를 좋아하지만, 계몽주의가 끊임없이 시도하는 체계적 논리 때문에 계몽주의가 싫다. 체계적 논리와 축축한 언어는 습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동일한 언어가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냉소주의란 다름아닌 체계적 논리를 구축하지도 않고 축축한 언어를 남발하지도 않는 태도를 의미한다.
논리라는 거미줄, 감정이라는 거미줄! 어느 한 감정에 평생을 맡기고 사는 인생이 불쌍하듯, 평생을 논리충동에 맡기고 사는 학자들의 인생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거미줄에 붙들린 인생들이다. 그 거미줄은 한닢 나뭇잎으로 쓱 그으면 없어지고 말 것인데, 거미줄에 한사코 매달린 이들에게는 철옥보다도 더 강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인생은 끝없이 거미줄 위에서 회전한다. “그 삶에는 새로운 것도 없고, 네 삶의 모든 고통, 모든 욕망, 모든 생각, 모든 한숨, 이루 말하기 힘든 모든 대소사가 네게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동일한 순서와 차례에 따라 모든 것이 — 그리고 나무 틈새로 비치는 바로 이 거미와 달빛, 바로 이 순간과 나 자신까지도. 현존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되풀이하여 회전하리라 —”(즐거운 학문 4,341)
강명관의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는, 기존의 관념적·이념적 해석을 냉소하는 뛰어난 실증적 저작이다. 조선시대 책벌레들의 백태를 드러내면서 책의 유통과 해석의 역사, 더 나아가 조선시대의 정신사를 다룬다.
강명관의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는 조선시대와 그 인물들을 (정확히 말하자면, 그 시대와 그들에 대한 해석들을) 냉소한 저작이다. 오랫만에 취향에 맞는 책을 만났다. 그는 주자학·성리학의 억압적 체계성을 혹독하게 비판하며, 그 체계성에 동조하지 못했던 인물들(가령 허균이라든가 박지원 등)에 대한 관념적·이념적 해석도 거리낌없이 비판한다. 사실 관념적·이념적 과잉은 감정적 과잉 못지않게 축축한 언어이며 사태를 오도하는 오염된 언어이다.
요컨대, 강명관은 국가주의·권력체계 내의 인물들을 싫어하며, 국가주의·권력체계에서 비껴난 인물들에 대한 과도한 해석도 싫어한다. 그저 문헌을 통해 성실하게 고증하면서 조선시대의 인물들을 냉소적으로 접근할 뿐이다. 이 때의 냉소라는 것은 인물들 자체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이제까지의 주류·비주류 해석들에 대한 냉소를 말한다. 나는 관념적 해석에 휘둘리지 않는 이런 냉소가 좋다:
나는 천원권 지폐 앞면에 실린 이황에게 존경의 염을 느끼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퇴계보다는 그를 화폐에 안치한 국가주의가 싫다. 한데 그 국가주의를 걷어낸다 해도 퇴계는 여전히 별로다. 퇴계가 생각했던 이상적 인간과 사회가 나의 세계관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퇴계가 민족의 스승일지는 몰라도 나의 스승은 아니다.(86)
율곡이란 천재에 의한 텍스트의 고정과 절대화는 당연히 다른 텍스트들을 배제했다. 유교의 경전과 성리학 서적이 아닌 타자들은, 이단이 되거나 잡류가 되었다. 이것은 지식과 사유의 폭을 제한하고 자유로운 지식과 사유의 분출을 잡도리하였다. 이단 잡류의 서적은 잠시도 보아서는 안 될 것이었다. 적어도 성종 때까지는 학문의 다양성이란 것이 존재했다. 하지만 사림 정권 이후 그 학문적 다양성은 실종되었다.(109)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허균은 중세를 벗어나려 한 ‘조숙한 근대인’으로 보일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나는 이런 허균의 이미지를 믿지 않는다. 아마 허균에 씌워진 ‘조숙한 근대인’이란 이미지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서구 근대의 모습을 찾으려는 한국인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구일 것이다. 이제 이 선입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146)
연암의 사유를 꼼꼼히 검토하면 양명좌파와 공안파의 사유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언어를 빌려오는 것을 표절이라 한다면, 사유의 틀을 통째 빌려오는 것은 뭐라 말해야 할 것인가. 연암은 독창을 말했지만, 그 독창을 설파하는 사유 자체는 남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하늘 아래 어디에 새로운 것이 있다던가.(261)
잘라 말해 정조는 근대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아니, 정조와 근대를 연결하는 그 생각조차 끔찍하다. 정조는 자신이 다스리는 세상이 가장 보수적인 정통주자학에 의해 완벽하게 작동하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그는 책을 좋아하기는 했으되, 지배 이데올로기 곧 주자학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사유를 담은 책들을 철저히 탄압했던 인물이다. 나에게 정조는 책과 사상의 탄압자로 기억될 뿐이다.(263)
위와 같은 강명관의 평가들은 세간의 평가를 충분히 전복시키고도 남는다. 그는 의도적으로 전복적인 평가를 시도한 것이 아니라, 성실한 책읽기 끝에 수월하게 이런 결과를 도출해낸 것같다. 사실, 결과의 도출보다는 결과를 도출시키는 고증의 과정이 이 책의 백미이다. 그는 체질적으로 관념적 해석을 싫어하고, 마치 놀이하듯 텍스트를 성실히 고증하면서 읽기를 좋아하는 학자, 한 마디로, 책벌레인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책을 좋아하여 음악이나 여색에 빠진 것과 같았다”(131)는 미암 유희춘에 대한 평은 그에게도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강명관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책벌레들의 생애와 기록을 통하여 조선시대에 책이 어떻게 인쇄되고 유통되고 읽혀지고 해석되었던가를 실증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권력과 시문詩文이 하나였던 시대였던 만큼 책벌레들의 인생은 곧 권력·반권력의 역사이기도 했다. 권력과 시문이 하나였던 시대였던 만큼 문헌해석은 곧 목숨을 건 권력투쟁이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시대만큼 책의 유통과 해석을 통해서 한 시대의 정신적 면모가 전반적으로 규명될 수 있는 시대는 흔치 않을 것이며, 따라서 성실한 책벌레가 아니라면 그 시대를 제대로 규명하기 힘들 것이다.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가 책벌레들의 소묘에 그치지 않고 조선시대 정신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저작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와 조건들을 충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의 민화 책가도. 책을 소장하고픈 마음, 책을 읽고픈 마음이 책가도를 낳았다. 독서할 겨를이 없으면 책이라도 만지고픈 마음, 서안이라도 쓸어보고픈 마음, 하다못해 책 그림이라도 보고픈 마음이 책가도에 잘 담겨있다.
사상사를 다룬 저작들을 읽을 때 등장하는 인물들은 언제나 모호하다. 그 저작들이 인물보다는 사상에 역점을 두어 소개하고, 인물 소개를 하더라도 그 내용은 생몰년과 간단한 이력 정도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말·사상으로 환치되어 머리에 각인되기 마련이고, 그들이 어떤 인간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늘 모호한 채로 남는다. 과거의 역사를 다룬 저작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늘 그런 점이 아쉬웠다.
관념적·이념적 해석에 치중할수록 인물의 소소한 일상은 무시되기 일쑤다. 그러나 관념적·이념적 해석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 인물의 대소사가 모두 관심거리가 된다. 가령 그가 먹는 것, 노는 것, 구입한 것, 빌린 것, 읽은 것, 베낀 것, 방문한 곳, 교유한 인물, 소소한 목록 등 모든 것이 관심거리가 된다. 자연히 고증에 치밀하게 되고 한 인간으로서의 생존조건을 중시하게 된다.
강명관이 이런 소소한 것들(사실은 정말 중요한 것들)에 충실한 것은 그가 기존의 관념적·이념적 해석, 아니 관념적·이념적 해석 자체를 가급적 냉소하는 체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여러 대목에서 인물들의 천태만상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것도, 그의 냉소와 그의 웃음이 긴밀히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굉박宏博한 책벌레들에게 엄숙한 교조주의나 관념적·이념적 해석은 얼마나 우스운 것이냐. 거기에다 강명관처럼 혜안이 번뜩이는 책벌레라면, 조선시대 정신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역할을 십분 감당하고도 남으리라고 본다.
결과적으로, 강명관의 붓을 거친 인물들은 모호하지 않고 선명하게 드러난다. 감정에 치우쳐 인물을 축축하게 적시거나 관념·이념에 치우쳐 인물을 형해화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 인물의 취향과 전략, 습관, 호오를 분명히 드러낸다. 아마 이 점이 내가 강명관을 호평하는 결정적 원인일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인간 백태를 드러낸다.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는 조선시대의 책벌레들이 어떻게 책을 입수하고 어떤 책을 어떻게 소장하고 읽었는가, 국가가 어떤 책을 어떻게 인쇄하고 어떻게 유통시켰는가에 관심을 두고 이를 세세하게 서술한다. 이것이 이 책의 주요 서술 의도이겠지만, 이 책은 그 의도에 충분히 부합하면서 그 의도를 훨씬 상회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오랫만에 형의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습니다.
비도 시원하게 오고 해서 형, 비 시원하게 내리네요, 라고 안부인사 남기려고 들어와서 읽고 있는데 소영이가 마루에서, 비가 죽죽 오네, 하데요^^
이상하게 좀 쪽팔렸습니다 -,-
이래저래 힘들게 어거지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술은 조금씩만 먹고요.
하하, 거의 나한테 생활점검 받는구먼! 잘 지내시게. 난 쪽팔리는 건 반댈세.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랫만입니다.
‘냉소주의’에 대해 사견을 말씀드리자면…
그 어원이 ‘개’에 있고, 자연스레 헤라클레이토스가 ‘개는 낯선 사람을 보면 짖는다’는 말이 떠올라,
평소 ‘냉소적’ = ‘개같다’고 생각하던 터,
냉소주의를 좋아한다는 말씀에
그 맥락상 의미는 이해가 되지만 과연 태도를 표현하기 위한 적합한 용어인지 어떤지는 여전히 의문스럽습니다.
주말 새벽(?) 덜 깬 잠을 핑계로 몇 자 친한 척하고 갑니다.
쿨룩^.*
맞는 지적입니다. 사실 냉소라는 말 자체가 저한테는 매우 ‘센’ 낱말입니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런 센 낱말이 구미에 당길 때가 있더군요.
세상이 온통 웃음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냉소와 온소의 비율이 어떻게 될가 생각이 드는군요.(^-^)
냉소를 꼭 나쁘게만 보는것보다는 조금은 비판적인 정신으로 긍정적인 면도 있을 것 같은데요. ‘센’ 농도가 너무 심하지 않고 유우머와 손잡을 수 있다면 오히려 약이 되고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좋지 않을가 싶은데요.
어쨋던 냉소주의도 필요하고 쓰일데가 있겠지요.
모든 언어는 그 언어를 말하는 사람의 감각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냉소”라는 말도 언어는 동일하지만 쓰는 사람에 따라서 그 말의 온도차가 여러 스펙트럼으로 존재할 겁니다.
제가 “냉소라는 말 자체가 저한테는 매우 센 낱말”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저한테는 냉소라는 말이 센 낱말이 아니라 덕지덕지한 감정들(니체의 표현을 빌면, “어중간한 것들”)을 떨궈버린 상태, 가령 체로금풍의 상태를 지칭하는 언어이죠. 좋아하는 언어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분들에게는 ‘센’ 낱말로 비치기 때문에 그 감각의 구조를 존중하여 그렇게 말했을 뿐이죠.
일반인에게 니체의 언어는 ‘센’ 언어이겠지만 저한테는 하등의 ‘센’ 언어가 아닙니다. 기존 언어의 활용범위를 완전히 재편하는 니체의 언어는 저한테는 매우 절친한 언어, 참으로 경탄할 만한 섬세한 감각의 언어입니다.
문제는 니체의 감각구조와 일반인의 감각구조가 언어라는 허깨비를 매개로 운명적으로 조우했을 때이죠. 니체의 언어를 통하여 니체의 감각구조를 민감하게 냄새맡을 수 있다면 그의 언어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 언어의 폭력을 느끼게 되겠지요.
조금 어려운 문제를 꺼냈지만, 한번쯤은 생각해볼 문제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