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와 매연이 화려하게 하늘을 날던 밤, 아라비아 해에 면한 뭄바이에 들다. 밤인지 새벽인지 모를 시간에 버스와 기차에 몸을 싣고 데칸고원을 향하여 달린다. 고원, 그 낭만적인 이름. 비옥한 중인도 대평원을 딛고 완만히 상승하다가 빈드야 산맥을 필두로 융기한 인도 남부의 고원지대는 북인도·중인도와는 지형적으로 차단되어 있어 고대로부터 다른 세계를 형성해 왔다. 따라서 불법의 흥성과 쇠퇴도 다른 궤적을 그리며 역사를 수놓았다.
인도인들은 인도 아대륙 전역에 걸쳐 1,200여 곳의 석굴을 만들어놓았으며, 그 중 900여 곳이 이곳 인도 서남부의 데칸고원 일대에 포진해 있다. 그 중에서 불교석굴은 8할에 해당한다고 한다. 고원, 그 낭만적인 이름과는 달리 척박한 토양. 보이는 것은 벌판, 황무지, 민둥산, 돌산, 먼지 쓴 나무들 뿐인데, 이런 곳이 어떻게 수세기 동안 고대인들의 마음을 품어주었던 것일까?
데칸고원의 강들은 대부분 고지대인 서고츠 산맥에서 발원하여 동고츠 산맥을 향하여 흐른다. 그러니까 서해안 뭄바이 인근의 나시크, 엘로라, 아잔타, 아우랑가바드 등지는 데칸고원에서도 고지대에 속하는 바, 바로 이 일대에 수백 여개의 석굴이 현존하고 있다. 일찌기 아라비아 해라는 국제적 교역로를 통하여 서방과의 교역이 발달하였으며, 나시크 인근에서 발원하여 동해안의 벵골만으로 빠지는 고다바리 강을 따라 동서 인도를 가로지르는 교역로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하나, 아잔타·엘로라 석굴은 교역로나 마을과는 다소 무관한 듯 험준한 지경에 자리잡고 있다. 아잔타 석굴을 예로 들자면, 석굴 밖으로 몇 걸음 내딛으면 단애의 절벽이요, 절벽 아래 계곡과 고원의 산들은 지형적으로 사람들의 접근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아잔타로 가는 길, 고원의 일풍경
시작은 수행자들이 파고들어간 석굴이었을 것이다. 영취산 산정에 자연 석굴을 주처로 삼아 정진했던 부처님과 위대한 제자들의 행적을 따라, 석굴을 파고들어가 자신의 몸을 영구적으로 가두고 일망무제 고원을 바라보며 깨달음을 구했던 수행자들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백 년 전 목숨을 내놓고 정진했던 부처님과 제자들을 숭앙하고, 당대에 정각자가 출현하기를 바라는 재가신도들의 비원이 뒤따랐을 것이다. 1세기 무렵부터 고원 일대에 이런 석굴들이 조성되기 시작하여 7~8세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새삼 부처님 재세시의 위대했던 시대를 그리워하는 후대인들의 열망이 놀랍기만 하다.
데칸고원 서부 역시 여느 인도 땅과 마찬가지로 건기와 우기로 뚜렷이 구분된다. 건기는 겨울철을 지나며 봄철에 절정을 이루는데, 그때에 이르면 대지는 타는 듯한 더위, 건조한 바람에 생기를 잃는다. 이윽고 초여름 몬순의 계절이 다가오면 격심한 폭풍우가 데칸고원을 휩쓸며 비를 쏟는다. 고원의 지평선 가득히 먹구름이 몰려오는 장엄한 광경은 인도인들을 들뜨게 한다. 먼짓빛 초목은 생기를 되찾고 벌판은 초원이 되어가고 물은 무섭게 범람한다. 재작년 몬순의 계절에 홍수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 이들이 이곳 데칸고원 서부지역에서만 4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바짝 마른 대지에 퍼붓는 빗물이 얼마나 성스럽고 얼마나 위험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강렬한 템포의 기후와 척박한 토양 탓에 데칸고원 일대는 선사시대부터 정착한 드라비다 인이 다수를 차지하고서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때는 723년 무렵. 중인도 대평원의 카나우지에서 출발하여 빈드야 산맥을 넘고 고원의 강들인 네르마다 강과 타파티 강을 건너 이곳 데칸고원 서부로 걸어온 청년이 있었다. 그는 상카시아 인근의 카나우지(중천축 서울)에서 출발하여 데칸고원의 나시크(남천축 서울)까지 석달을 걸려 당도했다. 아마도 몬순이 임박한 시절이었던가 보다. 그가 데칸고원 서부에 발을 디딘 날은 바람이 거셌으며, 고원 위로는 구름 사이로 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혜초, 스무 살 가량의 앳된 청년. 우리가 엘로라·아잔타 석굴에서 출발, 보팔의 산치대탑,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경유하여 상카시아로 들어가는 고된 여정은 곧 혜초가 석달을 걸려 카나우지에서 나시크까지 걸었던 험난한 여정과 비슷하다.
데칸고원의 일출. 건기의 나무들과 낮은 민둥산 위로 해가 뜬다. 이런 풍광은 혜초가 순례했던 당시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을 것이다.
법현과 현장이 학식을 갖춘 신분으로 혹은 도반들과 함께 혹은 제자들과 함께 구법순례를 했다면, 혜초는 앳된 젊은이로서 혈혈단신 순례를 했다. 그런가 하면, 앞선 두 구법승의 <불국기>와 <대당서역기>의 기록이 순례기 내지 지리지로서 높이 평가받는 반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후대의 학자가 “절망적일 정도로 소략하다”고 평할 정도로 간단하다. 법현과 현장은 유적지에 도착해 눈물을 뿌리며 비감에 젖기도 하지만, 혜초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낼 정도로 건조하고 단순한 서술로 일관하다가 문득 감흥이 밀려올 때에만 오언시 몇 수를 읊을 뿐이다. 가령, 보드가야와 관련한 혜초의 기록은 아래의 인용문이 전부이다:
급기야 마하보리사에 도착하고 나니 내 본래의 소원에 맞는지라 무척 기뻤다. 내 이러한 뜻을 대충 오언시로 엮어본다.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 않는데
어찌 녹야원이 그리 멀다 하리오.
가파른 길 험하다고만 근심할 뿐
업연의 바람 몰아쳐도 개의찮네.
여덟 탑을 친견하기란 실로 어려운데
오랜 세월을 겪어 어지러히 타버렸으니
어찌 뵈려는 소원 이루어지겠는가.
하지만 바로 이 아침 내 눈으로 보았노라. (정수일 역)
그의 기록에서 보드가야에 관한 실제적인 서술은 대각사에 도착했다는 것과 대각탑을 보았다는 내용 뿐이다. 법현이 전정각산·유영굴·고행림·니련선하·보리수·금강좌 등을 거리와 방향을 제시하며 낱낱이 기록하였고 현장이 그 모든 유적지에서 벌어진 부처님의 일대기를 후대에 완벽하게 되살리려는 듯 샅샅이 기록하였던 것과 비교하면, 혜초의 기록은 절망적일 정도로 소략하다. 하도 소략하여 경이롭게 느껴질 정도이다. 혹 그는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혹 그는 아는 바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문득 그의 정신세계가 궁금해진다. 그는 16세 무렵에 신라를 떠나 중국에 들어가 남천축 출신의 금강지로부터 밀교를 배웠다. 그의 사형 불공삼장 역시 천축국 출신이었다. 혜초의 스승 금강지는 중국밀교의 개조이니, 혜초는 동아시아인들 중에서 중국에서 밀교를 맨 처음 배운 수행자에 속한다. 밀교를 전하기 위해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인도인과 불교를 배우기 위해 신라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신라인이 중국 광주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난 것이니, 참으로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하겠다.
밀교라는 명칭은 깨달음을 드러낸 가르침 즉 “현교”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설법으로 드러나지 않는 가르침을 뜻한다. 밀교는 호주(護呪, paritta)와 진실어(眞實語)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바, 호주는 독충이나 뱀에게 물리지 않도록 몸을 보호하는 주(呪)이며, 진실어는 존재 전체의 진실을 담아 드러내는 언어이다.
가령, 희대의 살인마 앙굴리마라가 출가하고 나서 탁발을 나가 어느 집에 이르렀을 때 산모가 그를 보고 무서워 벌벌 떨며 고통에 빠진다. 앙굴리마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내가 거룩한 삶을 얻은 이래 고의적으로 살아 있는 것들의 목숨을 빼앗은 일이 없다. 이 진리에 의해(tena saccena) 그대에게 안온함이 있으리라”는 주를 산모에게 외운다. 그러자 산모가 산고에서 해방된다. 호주는 뱀을 향하여 대자비심을 발휘하여 외는 주로서 이 주를 외우면 뱀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초기 경전과 율장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한결같이 진실과 자비를 담은 언어의 실천을 의도하고 있다. 현지 인도인들이 뱀이 옆으로 지나가도 놀라지 않고 무연히 일상처럼 바라보는 것도 그러한 주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들에 대한 대자비심의 마음이며 그 자비심을 존재 전체로 진실하게 실천한 결과인 것이다.
원시불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요소들이 힌두교의 주술적 요소와 습합함으로써 불교의 밀교화가 진행되었다. 불교의 밀교화는 320년에 흥기한 굽타왕조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바라문교를 국교로 삼은 굽타왕조 치하에서 (바라문교가 토착화된 종교로서의) 힌두교가 번영하게 되었던 까닭이다. 가령 힌두교의 만다라 신전에 드리는 기도처럼 불·보살에 드리는 기도의 작법, 즉 의궤가 점차 정비되어 다라니나 진언(mantra)의 수도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밀교적 요소가 우리나라 불교신자들이 사랑하는 신묘장구대다라니나 반야심경에까지 들어와 살아남아 있는 것을 보면 새삼 그 생명력에 경탄하게 된다.
사실 다라니나 진언은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주문으로서 주술적 요소가 강한 것이었는데 밀교로 들어오면서 성불을 이루기 위한 비밀스런 언어로 변용된다. 그리하여 진언이나 다라니는 성불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행방법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에 걸맞는 염송과 의궤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의궤와 법식이 정비되면서 <대일경>과 <금강정경> 등이 성립된다. 밀교는 <대일경>과 <금강정경>의 출현과 함께 비로소 어엿한 종파로서 자립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경전류들은 다름아닌 혜초의 스승과 사형인 금강지와 불공삼장이 산스크리트어에서 중국어로 번역했던 것이다.
혜초는 중국 광주에서 스승으로부터 삼사년 간 그 밀교를 배운 뒤 인도 순례길에 올랐던 것이니, 새삼 한 인간의 어깨에 드리워진 역사가 매우 장중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의 데칸고원 여정은 다름아닌 밀교를 번영시켰던 땅으로 가는 여정이자 스승의 나라를 향해 가는 여정이기도 했다. 그러했으니 대평원을 떠나서 데칸고원 서부에 당도할 때까지 석달 동안 고원을 걸으면서 그가 외웠던 다라니나 진언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자못 궁금하다. 진언 중에는 필시 “옴 바즈라다투 밤”도 있었을 것이며, “바즈라”는 금강을 뜻한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스승의 이름은 다름아닌 “바즈라보디”, 금강같은 깨달음, “금강지”(金鋼智)가 아니던가.
“바즈라”(금강)는 밀교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데칸고원 서부의 순례여정에서 우리는 그 이름을 여러 번 만나게 되는데, 엘로라·아잔타 석굴에 조각되거나 그려진 “바즈라파니”, 금강을 든 자, 금강수(金鋼手) 보살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에서 아잔타 제1굴의 감실 입구 양편에 그려진 금강수 보살(Vajrapani)과 연화수 보살(Padmapani)의 벽화는 아잔타 석굴예술의 백미로 꼽힌다. 더 나아가, 부처·연화수·금강수를 배치하는 형식은 밀교의 경전인 <대일경>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니, 아잔타 제1굴의 감실은 밀교를 화려하게 펼쳐보인 예술인 셈이다.
바즈라파니, 금강 혹은 벼락을 든 자, 금강수 보살. 아잔타 제1굴 감실 입구 오른편 벽화
그렇다면 과연 그 아름다운 연화수와 금강수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다름아닌 정각자의 내면세계이다. 금강은, 외부에서 내면으로 들어오는 일체의 감각과 생각을 부수어 안개처럼 흩어버리는 성스러운 파괴의 상징이며, 연꽃은, 내면에서 외부의 생명을 향하여 가없이 펼쳐내는 대자비심의 상징이다. 정각자는 금강인 동시에 연꽃이며, 벼락인 동시에 향기이다. 밀교의 수행자들은 진언과 다라니를 염송하면서 자기 존재를 허공처럼 비워버려 금강이 되고 연꽃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끄달리지 않는 진실한 상태가 되어야만 모든 생명을 향하여 연꽃을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수행자 혜초가 이 진실을 담아 다라니를 외고 진언을 외웠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고서는 중인도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그토록 간결한 서술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듯, 그는 눈에 보이는 것에 감동이나 환희로 흔들리지 않는다. 다만 다라니를 염송하며 허공처럼 비울 뿐, 감격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무소의 뿔처럼 바람을 가르며 혼자서 가는 것이다. 어렸으나 그토록 담박했던 그를 생각하면, 아잔타 벽화 앞에서 감동하고 두서없이 사진을 찍어대는 내가 몹시 부끄러울 따름이다. 우연히도 바즈라파니 벽화 앞의 조명이 들어오지 않아 그 어둑한 형태만 가까스로 확인하고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면 다행이겠다. 나는 밀교 수행자 혜초가 추구하는 내면세계의 전모를 실펴볼 만한 자격이 안 되었던 것이다.
아잔타 석굴을 배관하고 주요도로로 빠져나오니 톨게이트가 보인다. “나시크” 톨게이트. 몹시 허름한 표지판이지만 저 이름에는 머나먼 동북방에서 건너온 한 수행자의 삶이 묻어 있다. 그는 자신을 신라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천축으로, 중천축에서 남천축으로 몰았던 업연의 바람에 개의치 않았다. 다만 가는 길이 험난함을 근심했을 뿐. 그랬던 그가, 카나우지에서 나시크까지의 고된 여정을 “중천축국에서 석달가량 가면 남천축국 왕이 사는 곳에 이른다”는 단 한 문장으로 정리했던 그가, 이례적으로 스승의 나라에 도착해서는 자신의 고향을 돌아보았다. 바로 이 나시크 순례길에서.
때마침 남천축국의 여행길에서 하고픈 말을 오언으로 이렇게 읊었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정수일 역)
고향 편으로 흘러가는 뜬구름에 소식을 전해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그의 소식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만다. 허공에 뜬 달은 밝고, 고원을 쓸고가는 바람은 수년 간의 구도역정을 흩어버린다. 후세에 고국의 누가 그를 기억할 것인가? 그는 왜 이역만리 고원에서 민둥산 위로 떠오른 달을 보고 있는가?
그리하여 인도 순례길에서 처음 만난 역사적 인물은 바람이 거센 어두운 고원 위의 혜초가 된다. 새들이 지나간 허공의 자취처럼 완벽하게 사라졌다 천 수백년이 흐른 뒤 학자들의 손길에 의해 되살아난 혜초. 그는 저 하늘가 북쪽에서 온 순례객. 모든 생명을 향하여 연꽃을 들고자 남의 나라 땅끝 고원을 걸었던 그 어린 수행자를 앞에 두고 마음으로 삼배를 올리며 기도한다. 바즈라파니, 금강을 든 자처럼, 파드마파니, 연꽃을 든 자처럼, 그대 아름다우소서. 진리의 체험이 그 어떤 높이보다 높고 그 어떤 아름다움보다 아름답고 그 어떤 기쁨보다 기쁨을 우리 알게 하소서. 삼가 진언을 염송하나니.
옴마니반메훔! 금강같은 지혜로 모든 번뇌를 부수어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생명을 향해 연꽃을 들리라 . . .
‘정각자는 금강인 동시에 연꽃이며 벼락인 동시에 향기이다’ 울림이 큽니다…. 1세기경부터 석굴이 조성되었다는 데칸고원의 황량함은 터키 카파도키아 괴레메마을에 조성된 기독교인의 석굴과 닮았군요. 그런데 세번째 사진 금강수보살은 깨달은 자의 눈에만 보이나요…
하하. 이미지 주소를 저만 볼 수 있는 로컬서버로 해놓았군요. 고쳐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끔 제가 이런 ‘허당’이 되곤 합니다. 안 보이다가 보이는 것인 만큼 더 아름답게 여겨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