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 밖으로 나서다 — 순례를 시작하며

유채꽃 흔들리는 힌두스탄 대평원을 가로지르노라면, 한 그루 보리수 그늘은 크고 아늑하다. “현자시여, 당신의 그늘은 아늑합니다.” 라훌라가 카필라 성을 방문한 부처님께, 아버지에게 올린 이 고백은 대평원에 그늘을 드리운 한 그루 나무의 커다란 아름다움을 본 자의 것이다. 부처님, 당신의 그늘은 과연 아름답습니다. 사방 가뭇없이 펼쳐진 지평선 위에 울울한 그늘을 드리운 한 그루 나무처럼, 당신의 가르침은 크고 아름답습니다.

갠지스 강 유역에 펼쳐진 힌두스탄 대평원의 겨울은 아침저녁으로 지평선을 따라 안개가 자욱히 흐른다. 그리고 촉촉한 대지 위에서는 가장 밝은 별만이 어두운 허공을 반짝인다. 빛나는 별은 오직 하나, 세상의 모든 별들은 사라진다. 하루의 생은 모두 사라지고, 우주의 어둠과 우주의 별 아래에서 평원의 나무들이 어둠과 안개를 너울 삼아 은신한다. 수행자 고타마는 저 안개에서 안개로, 어둠에서 어둠으로, 나무에서 나무로, 숲에서 숲으로 은신하며 “무서운 숲 속에 벌거숭이로 홀로 앉아” 수행을 했다.

이 세상에 부처가 출현한 곳은 다름아닌 저 어둠 속 대평원의 한 그루 나무 아래, 우주의 별이 반짝일 때였다. 깨달으신 분, 부처를 출현시켰다는 것, 이 하나만으로도 인도의 대지와 하늘은 길이길이 찬탄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므로 힌두스탄 대평원과 그 어두운 하늘에 감사하라, 그리고 행복하라. 안개에 몸을 적신 대지 위의 한 그루 나무에 감사하라, 그리고 행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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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저물고 보드가야 평원의 나무들이 안개와 어둠에 몸을 적신다. 힌두스탄 대평원과 그 어두운 하늘에 감사하라, 그리고 행복하라.

정각자 부처님께서 눈이 맑은 자들을 위하여 녹야원에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시작하신 지 어언 2천 5백여 년. 그 중중무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수한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무한한 수의 생명들이 생사를 거듭하였으나, 그분의 가르침은 퇴전하지 않고 전진하여 동양의 한 작은 나라의 내 귀에도 마침내 들렸다. 그것이 불과 몇해 전이었던가? 불법을 만난 생은 참으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생은 참으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돌아보니, 우리의 불법 인연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관문과 세월과 생사를 뚫고 가능한 일이었다. 아시아의 광대한 대륙을 가로질러 오가며 목숨을 타지에 버린 무수한 전법승과 구법승이 있었으며, 불법을 잇고 지키려는 수행자들의 수천 년 끝없는 출가가 있었으며, 그리하여 면면히 불법을 전등한 조사들의 출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개인적으로 보면, 유교와 서양문화, 세속문화라는 강팍하고 날카롭고 메마른 정신세계의 장막을 흩으며 나에게로 나에게로 다가온, 동으로 동으로 굴러온 법의 수레바퀴가 있었던 것이다. 보드가야·녹야원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굴러온 법의 수레바퀴의 역사를 살필 것 같으면 이토록 장구하고 희유한 일인지라, 맹귀우목이라는 말이 가히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불법을 만나지 못하고 살다간 인생은 바다 속의 수억 수십억 생물처럼 허다하나, 불법을 만난 인생은 눈먼 거북이가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나무에 우연히 부딪히는 일만큼이나 드물다. 하물며 성지순례를 하는 것임에랴.

신라의 현각스님은 7세기 전반에 보드가야의 대각사를 예경하는 소원을 풀고 그곳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그분의 나이 마흔을 갓 넘어선 무렵, 보드가야의 대지와 안개가 그분을 거둔 것이다. 그분 역시 어둑한 니련선하 강물 건너편을 보았을 것인가? 그 대지 위로 떠오른 새벽별을 보았을 것인가? 그것은 무엇이었고 그분의 소원은 무엇이었던가? 의문은 크고 지평선은 아득하다. 지평선 위에 눈물방울처럼 점점이 선 나무들이 희부옇게 사라져간다.

신라에서 보드가야까지의 역정은 흔한 수준의 정신적 방황으로는 추동이 불가능하며, 오직 구법의 열정이라야 가능하다. 그 큰 세계를 보려는 열망, 목숨보다 높은 그 세계를 그리는 열망! 그분과 같은 나이에 그분의 소원을 나도 풀었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그분만한 열정이 없었던 것일까? 그러나 갠지스 강물 위를 흘러가 보니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겠더라. 혹은 다행하게 혹은 불행하게 윤회하는 무수한 생명들 사이에서 나의 것은 무엇이고 나라는 존재는 또 무엇이던가.
 

싯다르타 태자의 구도 열정은 삶에 대한 긍지, 건강에 대한 긍지, 젊음에 대한 긍지를 무너뜨리면서 시작되었다. 살아 있는 자, 건강한 자, 젊은 자가, 죽음·병·늙음이라는 인간의 근본조건 앞에서 자기 존재의 긍지를 남김없이 허물고 일대사의 의문을 품은 것이다.

많이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범부는 스스로는 병들기 마련이며 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남의 병을 보고는 미워하고 천시하며 사랑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나 역시 병에 걸리기 마련이며 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만약 내가 남의 병을 보고 미워하고 천시하며 사랑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다면, 이는 옳지 않다. 나 역시 병드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나를 보았을 때 건강으로 인하여 일어난 긍지가 즉시 사라졌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많이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범부는 스스로는 늙기 마련이며 늙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남의 늙음을 보고는 미워하고 천시하며 사랑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나 역시 늙기 마련이며 늙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만약 내가 남의 늙음을 보고 미워하고 천시하며 사랑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다면, 이는 옳지 않다. 나 역시 늙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나를 보았을 때 젊음으로 인하여 일어나 긍지가 즉시 사라졌다.

— 중아함경 권29 柔軟經

이십대의 건강한 청년이 늙음을 봄으로써 젊음을 회의하고 질병을 봄으로써 건강을 회의하고 죽음을 봄으로써 삶을 회의한다. 그는 인간의 생을 총체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세간의 사람들이 어느 한편에 집착함으로써 다른 한편에 의해 함몰되는 비극적 인생을 잠부나무 아래 그늘에서 고요히 관찰한다. 그는 세간의 사람들이 병듦을 싫어하면서 오히려 병듦을 추구하고 늙음을 싫어하면서 오히려 늙음을 추구하는 기묘한 모순도 발견한다.

나도 본래 위없는 정각을 깨닫기 전에 이렇게 생각했었다. ‘나라는 것은 실로 병드는 법인데 까닭 없이 병드는 법을 구한다. 나라는 것은 실로 늙는 법이요 죽는 법이며 근심 걱정하는 법이고 더러운 법인데 까닭 없이 늙는 법 죽는 법 근심 걱정하는 법 더러운 법을 구한다. 나는 지금 차라리 병이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근심 걱정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는 위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자.’ 나는 그 때 나이 젊은 동자童子로서 맑고 깨끗한 새까만 머리에 한창 나이인 29세였다.

— 중아함경 권56 羅摩經 (역경원 역)

“나라는 것은 실로 병드는 법인데 까닭 없이 병드는 법을 구한다.” 병들 수밖에 없는 자가 병듦을 싫어하면서 도리어 병드는 법을 구하고, 늙어가는 자가 늙음을 싫어하면서 도리어 늙는 법을 구하는 모순 앞에서 한 청년이 커다란 의문을 품은 것이다.

즐거움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괴로움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도 없다. 이것이 생의 비밀이며 이것이 수행자의 의문이다. 젊음을 추구한들 젊음을 얻을 수 없으며 건강을 추구한들 건강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수행자의 출가란, 죽음·병·늙음·슬픔·번뇌를 한사코 회피하나 결과적으로는 죽음·병·늙음·슬픔·번뇌를 필연적으로 지향하는 모순된 인생을 떠나겠다는 결단이며, 반대가치인 삶·건강·젊음만을 추구하고 향유하고 탐닉함으로써 종국에는 재앙과 파국에 이르는 비극적이고 두려운 인생을 떠나겠다는 결단이다.

제자들아, 내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해 붓다가 되기 전 구도자일 때의 일이었다. 나도 반드시 태어나야 하고, 반드시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존재이고, 슬픔에 빠지고, 번뇌에 빠지게 될 존재이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게 만드는 것을 추구하였고 슬픔에 빠지게 하고 번뇌에 빠지게 하는 것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하였다. ‘나는 반드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슬프고, 번뇌롭게 될 존재이면서 어떻게 오히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슬프고, 번뇌롭게 만드는 것만을 추구하고 있는가. 나는 결단코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슬픔과 번뇌가 없는 수행에 의한 안락상태인 최상의 진리의 세계를 추구해야겠다.”라고.

제자들아, 그때 나는 젊었었다. 머리는 새까맣었고 피끓는 청춘이었다. 욕심이란 없는 선하신 어머니, 아버지께서 얼굴 가득 눈물을 흘리시며 마다했지만 나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법의를 입고 출가하였다. 나는 선함을 구하였고 최상의 진리를 추구하였다.

— 중부아함 제26권 聖求經 (최봉수 역)

세간에서 사랑하지도 않으며 생각하지도 않으며 뜻하지도 않는 바 세 가지 법이 있으니, 그 세 가지란 무엇인가. 이른바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니라. 만약 세간에 이 세 가지 법, 즉 사랑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고 뜻할 수도 없는 것이 없었다면 여래·응공·등정각은 세간에 나오지 않았으리라.

— 잡아함경 권14 三法經

이 세상에 부처가 탄생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바로 이 생노병사였다. 이 조건은 모두가 흡사 공기처럼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조건을 생애의 최후까지 무시하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 조건은 “세간에서 사랑하지도 않으며 생각하지도 않으며 뜻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 점에서 생노병사를 둘러싼 기묘한 모순과 커다란 의문은 평범한 인생을 전체적으로 일전一轉시키는 의문이며, 수행자를 탄생시키는 의문, 성스러운 의문이다.
 

싯타르타가 이 성스러운 의문을 품기까지의 과정은 경전에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는 깊고도 풍요로운 비유로 묘사되고 있다. 성 안에서는 병도 몰랐으며 늙음도 몰랐으며 죽음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성 밖으로 나섰다. 그곳에는 병든 자가 있었고 늙은 자가 있었고 주검이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충격적으로 목도한다. 화려하고 밝은 성 안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성문 밖에 있었다.

이 비유에서 카필라 성은 현대사회가 아니고 무엇이랴. 병든 자를 병원에 가두고 늙은 자를 요양원에 가두고 주검을 보이지 않는 곳에 격리시킴으로써 현대사회는 생노병사의 문제를 가급적 눈앞의 현실에서 차단시킨다. 우리의 학교에는 병자가 없고 늙은이가 없고 주검이 없다. 우리는 싯타르타 태자가 노닐었던 성 안에서 노닐고 있다. 카필라 성, 그 깨끗하고 깔끔한 세계. 그 성은 즐겁지만 즐겁지 않고 깨끗하지만 깨끗하지 않고 아름답지만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진실을 감추고 인위적으로 조성된 성, 신기루의 아름다운 매혹을 뿜어내는 허위의 성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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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치대탑 동문 평방의 출가유성 부조. 1세기경. 오른쪽 끝 일산 밑의 법륜이 있는 발자국은 출가한 석존을 나타내며, 가운데 나무는 잠부나무 아래 명상을 나타낸다.

인도의 거리에는 병자가 있고 늙은이가 있고 더러움이 있고 죽음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더러움과 죽음이 있는 세계가 바로 우리의 진실한 세계이며 우리의 존재를 이루는 근본적인 조건이다. 이 조건을 무시하고 이루어지는 모든 생각, 모든 행위는 어둡고 무상하고 미혹된 길이다. 수행자는 그 미혹된 길을 단호히 거부하고 더러움과 죽음을 물샐 틈 없이 온전히 끌어안고 출발한다.

인도로 가는 길은 다름아닌 성문 밖으로 나서는 길, 죽음과 늙음과 병듦과 마주치는 길. 인도는 성문 밖의 참다운 학교와도 같다. 사람의 시체가 눈앞에서 불타고 있고, 병자가 구걸하고 있고, 늙은이가 누워 있다. 짐승들의 질퍽한 똥은 지천으로 깔려 있고, 쓰레기는 방치되어 있고, 매연과 소음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나는 인도의 대도시를 걸을 때마다 매연이며 소음이며 냄새며 그저 내 몸 안으로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흘려보냈다. 나는 더러운 몸, 더러운 존재, 씻고 화장한들 인간의 근본조건을 어이 벗어날 수 있으랴. 깨끗함에 집착한들 어찌 더러운 사람이 아니랴.

싯타르타가 성문 밖으로 나섬으로써 충격적인 일들을 목도했듯, 현대의 소위 문명사회에 사는 이들은 인도로 들어감으로써 예외없이 충격과 더러움을 목도하게 된다. 입국과 동시에 수행자를 강하게 사로잡았던 성스러운 의문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생노병사, 이 더러움을 어이 여읠 수 있을 것인가? 어이해야 죽음과 병과 늙음을 회피하는 동시에 추구하는 기묘한 모순에서 벗어나 무사안온한 열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어이해야 생사를 여의는 법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어이해야 일체를 벗어나고 일체를 자비의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어이해야 삶과 죽음, 건강과 병듦, 젊음과 늙음, 깨끗함과 더러움을 아득한 평원의 나무들처럼 나란히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 인도의 데칸고원에 첫 발을 디디며 나는 성자를 출현시켰던 의문을 던진다.

생사의 구조 안에서 살아가되 그에 집착하지 않고 열반을 구하는 것, 이를 두고 경전은 “성스러운 구함”이라고 했다. 생사의 구조에 얽혀들어 생에 집착하고 건강에 집착하고 젊음에 집착하는 가운데 열반을 구하는 것, 이를 두고 경전은 “성스럽지 못한 구함”이라고 했다. 무사안온한 열반에 이르기를 원하는 자, 부디 세간의 가치, 성 안의 아름다움에 집착하지 마시라. 거룩한 땅, 더러운 땅, 순례의 길에 오르는 자, 부디 죽음과 병과 늙음과 더러움을 정면으로 목도하시라. 그 생사의 법이 예나 지금이나 성자를 탄생시키는 근본 조건이므로. 그것이 바로 대평원의 보리수 아래 정각자를 탄생시켰던 것이므로.

나는 이제 사람의 속임을 받아 문득 부왕의 슬하를 떠난 것도 아니며 또 진심瞋心과 원한심의 까닭도 아니며 또 재물을 구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또 봉록이 적은 까닭도 아니오며 또 천상에 나기를 구하는 것도 아니오, 오직 일체 중생들이 바르지 못한 어둡고 미혹하고 삿된 길로 감을 보고 광명이 되어 주어 이러한 생사의 법을 제하고자 함이오며 세간을 이익케 하고 걱정과 근심 없는 곳을 구하고자 하오며 무상하고 누漏가 있는 행을 끊고자 하여 출가하였읍니다. 크게 자비로운 부왕이시여, 저의 이렇게 즐거이 출가함을 아시고 근심 걱정을 마시옵소서.

— 불본행집경 권18 체발염의품 (역경원 역)

생사의 바다를 건너뛰고
그 뒤 돌아옴이 마땅하나니
이 품은 소원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 몸은 산림에서 없어지리라.

— 붓다차리타

싯타르타 태자는 시종 찬다카에게 이 말을 부왕과 성 사람들에게 전하라 하고는 날카로운 칼로 머리카락을 자른다. “생사의 법을 제하고자”, “생사의 바다를 건너뛰고자 . . .”, 아나바마 강물이 흐르는 곳에서 출가수행자의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어슴푸레한 새벽 강물에 안개가 머리를 풀고, 히말라야 설산이 여명을 받으며 검푸른 하늘 위에 위용을 드러낼 즈음이었다.

성문 밖으로 나서다 — 순례를 시작하며”에 대한 5개의 댓글

  • ‘크고 아름다운 가르침’을 가뭇없는 지평선에 드리운 울울한 그늘에서 보고 오셨군요. 무사귀환을 기뻐합니다^^ 저도 이틀동안 서해쪽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별 기대없이 길을 나섰는데 뜻밖의 보물을 보았습니다. ‘숭림사’ 그리고 망해사 해우소와 귀신사, 개심사. 귀신사는 대적광전에 막 불이 켜지고 비구니승이 독경을 시작했어요.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이었습니다. 허름한 어느 밥집에서는 뜨거운 밥을 한 그릇 더 갖다놓는 놀라운 밥상을 받기도 했는데요. 오랫만에 선생님 글 읽으니 참 좋네요. 힘이 느껴집니다. 유연한 사고가 물 흐르듯 합니다..

    강물
  • 감사합니다. 일정은 강행군이었지만 아무 탈 없이 순례를 마쳤습니다. 수년 간 우리나라 절집 답사를 다닌 관록도 무시를 못하겠더군요. 그 관록 때문에 유적지에 도착하면 짧은 시간 안에 무엇을 보아야 할 지 직감으로 느껴지는 바가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답사도 정신적 내용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데가 좋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허름해도, 정신적 높이가 스며들어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 감동입니다.

    고싱가
  • ‘네가 이루려던 세상은 어떻게 해야 이룰 수 있는가 보라 ‘
    제 수련처에서 어제 이런 공부 과제를 받았어요. 막연하다 싶었는데 오늘 사무실에서
    고싱가 숲을 걷다, 앗! 하는 순간을 맞네요. 생동감 있게 답을 찾는 自性에게 절합니다.

    구질구질한 번뇌로 보이는 제 주변의 일상과 풍경을 어느 생엔가는 우주 만다라로 볼 날이 오겠지요.

    이민영
  • 아하, 제 과제의 답은 고싱가 숲이 빛나는 이유와도 같군요.

    이민영
  • “네가 이루려던 세상은 어떻게 해야 이룰 수 있는가 보라 ” – 어느 수련처인지는 모르겠으나 좀 특이한 공부과제이네요. 불교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는 . . . 아울러 이민영 님께서 탐색하시는 방향과도 반대되는 듯한 . . .

    아무쪼록 건강하고 청정한 일상 속에서 아름다운 여정을 걷기를 빕니다.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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