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는 아름답다. 타종하는 곁에서 듣는 소리보다는 화살 두어 바탕을 띄운 거리에서 아스라히 들리는 소리가 더욱 아름답다. 아득히 소멸할 때 종소리는 마치 산하로 사무쳐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두웅, 두웅, 두웅, . . . 내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종소리는 관룡사 사하촌 어귀에서 들었던 어둠 속의 종소리였다. 젊은 날 추운 겨울이었고, 버스 종점에서 내리니 이미 사위는 캄캄했다. 그때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긴긴 계곡을 타고 관룡사의 저녁 종소리가 들렸다. 마치 산하를 뒤흔들고 계곡의 대안을 메아리치면서 어둠 속의 깊은 골을 타고 오직 나 하나를 향하여 다가와 두웅 때리는 느낌이었다. 산하가 흔들리고 내 존재가 우우웅 흔들리는 느낌. 그것도 연이어 두웅 두웅 두웅 다가와 나를 사무치게 흔들고 사라졌다. 돌아보니 그때 나로부터 간단히 호흡을 여탈하던 그 소리가 그립고 또 그립다. 그날 나를 흔들던 그 소리는 과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선불교 문헌에서는 혹은 고승들의 법문의 소재로 혹은 여러 선객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한 기연의 매개로 종소리가 자주 등장한다. “세계가 이토록 넓은데 종소리는 어째서 서까래에 닿느냐?”, “세계가 이토록 넓은데 무엇 때문에 종소리를 듣고 칠조가사(七條袈裟)를 입는가?” 하는 운문스님의 사자후가 그 예이다. 가까운 예로는 만공스님 역시 새벽 종소리를 듣고 깨달았다고 한다. 불퇴전의 각오로 수행에 임하던 우번조사가 대오에 이르는 순간 산중에서 신비롭게 석종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여 지금의 지리산 종석대라는 이름이 생기기도 했다. 두우웅, . . . 불퇴전의 수행자들에게 경이로운 세계를 열어젖혀준 그 소리는 과연 무엇일까? 그 소리는 과연 무엇을 뒤흔들고 사라지는 것일까?
세조가 운길산 아래 강변에 배를 대고 묵을 때 어두운 산상의 종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는 어딘가 범상치 않아 보인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국왕이 «법구경»과 «금강경» 언해본을 간행할 정도로 그토록 불교에 정성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가 저지른 죄업 때문이 아니었을까? 긴 동순(東巡)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돌아오던 어느 봄날, 운길산 위에서 비밀에 가득찬 종소리가 들렸고, 알아보니 그 소리는 폐사지의 바위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였다 한다. 그리하여 물종 소리를 들려준 절이라는 뜻의 “수종사”라는 이름으로 절이 창건 내지 중창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아마도 수행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그 종소리를 듣지 못했겠고 오직 세조의 귀에만 들렸으리라. 누군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오, 심중에 쌓인 일생의 회한과 업을 씻어내려 한 바탕 몸부림치는 사람이 아니라면 과연 그 누가 들을 수 있으리오! 하여 수종사는 그 이름만으로도 고귀하고 아름답다. 권력의 정점에 오른 왕이 내면의 투쟁을 벌이는 중에 홀연히 들은 소리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산하와 들녘을 가로질러 단 한 사람의 귀를 울린 소리, 천지간을 우우웅 뒤흔드는 소리, 맑게 떨어져 사라지는 소리이다. 세조는 그 소리의 근원에 절을 세우고 또 은행나무를 심었으니, 후대의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그 소리를 들었던 왕의 심정을 헤아려 주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이 이야기는 전설에 속하지만, 전설에 속하는 것이 정사보다 오히려 내면의 비밀을 더 많이 밝혀주기 마련이다. 나는 그 비밀스런 대화가 좋고, 세조의 종소리가 아득한 천지의 울림처럼 들린다.
수종사 불이문에 이르는 오솔길. 세조의 내면을 뒤흔든 소리는 이 오솔길을 더듬어 내려오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운길산 수종사에 오르는 길이 필생에 단 한 번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들리는 소리를 그리워하는 발길이 된다면 좋은 일이다. 이 그리움을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무엇이 부처님의 음성인가?”를 사무치게 알고자 하는 의문과도 같겠다.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의 눈이며,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의 귀며,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의 코며,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의 혀며,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의 몸이며,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의 뜻이며,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의 몸빛이며,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의 광명이며,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의 음성이며,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의 지혜일까?
— 이운허 역, «화엄경» 권6 “여래현상품”에서
보살들과 여러 세간 맡은 이들이 위와 같은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을 때, 일체법승음(一切法勝音) 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하였다.
부처님 몸 법계에 가득하시나니
모든 중생 앞에 두루 나투시도다
인연 따라 감응하여 두루하시되
언제나 여기 보리좌에 계시도다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眾生前
隨緣赴感靡不周 而恒處此菩提座
이 게송이 바로 수종사 대웅보전 주련으로 걸려 있다. 고색의 꽃살문 사이로 걸려 있는 이 주련은 세조가 들었던 종소리를 근원적으로 알고 있는 안목이 아니면 고를 수 없는 것이겠다. 일체법승음 보살은 다름아닌 일체법으로부터 훌륭한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보살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런 글귀를 접할 때마다 이 세상에는 고수들이 수없이 많으나 한결같이 숨어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아마도 “운길산”이라는 이름도 화엄경에서 비로자나불을 감싸는 길상한 구름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수종사 대웅보전 꽃살문과 주련. “인연 따라 감응하여 두루하시다隨緣赴感靡不周”의 구절 일부가 보인다.
수종사는 세조에게 종소리를 들려주었던 곳이기도 하지만, 다산과 초의가 노닐었던 유구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산과 초의의 저작은 온전히 남아 한 시대의 찬란한 문화를 돌아보게 하고 있으되, 세조의 내면 투쟁은 그저 “수종사”라는 이름과 은행나무의 전설로만 남았다. 그러나 그 기연을 감파한 안목은 화엄경 한 구절을 대웅보전의 주련으로 골라 그 누군가를 향하여 응수하고 있는 듯하다: “모든 중생 앞에 두루 나투시고 . . . 인연 따라 감응하여 두루하시다.” — 이 구절은 종소리가 세조를 향하여 파급하는 운동을 가리킨다. “부처님 몸 법계에 가득하시나니 . . . 언제나 여기 보리좌에 계시도다.” — 이 구절은 세조의 내면을 사무치게 건드리고 다시 산하로 스며드는 종소리의 운명을 말하고 있다. 이 게송을 읊을 때는, 종소리가 사라졌다 울리고 울렸다 사라진다. 이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자, 누구인가?
서울 인근에 위치한 까닭에 주말의 수종사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그런데 앞으로도 터져 있고 뒤로도 터져 있는 수종사 출입문이 절집의 기본 골격을 무너뜨리고 있는 까닭에 대부분의 방문자들은 돌계단을 따라 뒤쪽으로 수종사를 들고 경내를 둘러본 다음 불이문(해탈문), 은행나무를 거쳐 나온다. 그러니까 예스런 오솔길, 은행나무, 불이문, 이런 경로를 거쳐야 정상인데 거꾸로 된 것이다. 절집에는 무엇보다 질서와 선후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이토록 무분별하게 무너진 것은 아쉽다. 정상적인 경로를 거쳐 수종사를 들게 되면, 제일 먼저 손을 맞는 것은 다름아닌 세조가 심은 은행나무와 불이문이 된다. 그리고 은행나무 주변이 몇년 째 가지런히 정리되지 않고 있는 것도 안타깝지만, 늘 방문객들로 붐비는 바람에 수행하기에 부적절한 처소로 변한 것도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런 환경에서는 다산이 서책을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초의가 다선일미를 맛보기에도 곤란한 법이다.
수종사는 다산이 어릴 적부터 드나들었던 곳이요 유숙하며 서책을 읽었던 곳이요 회시會試에 합격한 뒤 금의환향하여 벗들과 함께 유람한 곳이기도 하다. 그는 <수종사에서 노닐다游水鐘寺記>에서 벗들과 함께 수종사에 묵었던 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절에 이르니 해가 막 서산으로 넘어가려 하였다. 동남쪽의 여러 봉우리에는 저녁 햇살이 막 붉게 비쳤다. 이에 강물빛과 햇빛이 창에 어리비치었다. 여러 공들과 서로 즐겁게 노닐었다. 한밤이 되니 달빛이 낮처럼 밝아, 서로서로 배회하며 관망하였다. […] 수종사는 신라의 고찰이다. 절에 샘이 있는데 물방울이 바위틈 구멍에서 나와 땅에 떨어질 때 종소리가 난다. 이 때문에 수종사라 이름한 것이라 한다.
— 이종묵 역, «누워서 노니는 산수» 97면
이렇듯 다산은 수종사와 인연이 각별했기에 경성에서 뱃길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올 때마다 예봉산, 적갑산, 운길산 등 첩첩의 산들을 올려보다가는 까마득히 위태로운 준령에 자리잡은 수종사를 눈여겨보았다. 그곳은 유년기 기억의 공간이었으며, 젊은 날 공부에 일로매진했던 곳이었으며, 벼슬길의 시작을 장식하는 빛나는 황혼과 달빛이었다. 그곳은 곧 세속의 권력과 위험을 모르던 시절의 천진한 역사이기도 했다:
경성에서 돌아올 때마다
흔연히 엿보는 첩첩의 산들
하늘 저 까마득히 수종사
선루禪樓는 세정世情을 초탈하였구나
도 있는 이가 깃들어 있는 것인가
바람결에 들리노니 글 읽는 소리每自京城回 欣窺山萬疊
天畔水鍾寺 禪樓超世情
應棲有道者 風便讀書聲
다산의 시집 «송파수초松坡酬酢»에 실린 한 시편은 이렇게 세정을 초탈한 산사를 기리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필시 도 있는 이가 머무르고 있기에 바람결에 글 읽는 소리가 들린다고 적고 있다. 혹 “도 있는 이”는 다산의 자화상이 아니었을까? 또 다른 시편에서는 “구름 위의 수종사는/ 후일에 은자가 깃들 곳”(雲表水鍾寺 佗年隱者棲)이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혹 그 “은자”는 다산의 꿈이 아니었을까? 이와 같은 시편들은 시인이 세속을 초탈한 고지와 은일의 수종사를 애달프게 사랑했음을 암시한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누군들 그런 탈속의 공간이 없겠는가마는 다산의 수종사는 까마득한 준령 위, 구름 너머에 자리잡고 있어 특히나 고준하고 또 홀가분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의 <수종사에서 묵다宿水鐘寺>는 내면의 공간을 빼어나게 외재화시킨 시편으로 회자될 만하다. 그 시에 따르면, 그의 공간 수종사는 짙푸른 산빛이 높이 솟은 곳이자 문을 열면 강이 들어오는 천혜의 자리이다. 아울러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태자가 돌아본 곳이며 세조가 용의 깃발을 세운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유람하는 이들이 드물어 오르는 길마저 덩굴에 가릴 정도이고 고목의 전나무들이 산사의 입문을 고요히 감싸고 있을 뿐이다. 벽화는 비에 젖어 침침하고 가마솥에는 이끼가 끼어 있다. 절의 역사와 현재가 이와 같았으되 그래도 다산은 맑은 물, 진한 꽃을 놓치지 않고 맛볼 줄 아는 이였다:
맑은 물 흐르니 하늘이 내린 물이요
진한 꽃은 저녁 안개비에 젖는다淨水流天液 濃花潤夕霏
그는 이 풍경을 사랑했다. 잊혀져가는 오솔길, 퇴락한 절, 맑은 물, 안개비에 젖는 꽃 — 이것들은 홀로 설 수 있는 이들만이 진정으로 맛볼 수 있는 기쁨이다. 그는 “즐겁고 즐거웁되 홀로 섰다”(怡怡猶獨立)고 했다.
현재 고찰의 면모를 잃고 몸살을 앓고 있을지언정 세조와 다산, 초의 같은 인물이 있어 수종사는 그래도 수종사이다. 초의 역시 다산을 존경하여 두릉에 들러 인사한 뒤 이곳 수종사에 유숙하지 않았던가. 그는 다산을 방문하고 수종사에 머물며 쓴 시에서 산 아래 지음知音이 살고 있으니 “흰 구름 노니는 집”, 즉 수종사를 오간다고 적고 있다:
꿈속으로 돌아간들 그 누가 앙산의 차를 올리겠는가
경전의 잔편 잡는 것 멀리하고 눈꽃眼花을 씻어내노라
의지할 수 있는 지음知音이 산 아래에 있으니
인연 따라 흰 구름 노니는 곳으로 오가노라夢回誰進仰山茶 懶把殘經洗眼花
賴有知音山下在 隨緣往來白雲家
앙산의 차는 «위산영우선사어록»과 «경덕전등록»에 전하는 선가의 일화이다. 위산영우 스님이 찻잎을 따다가 제자인 앙산에게 “종일토록 찻잎을 따고 있었으나 자네의 소리만을 들었을 뿐 자네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고 말하자 앙산이 차나무를 흔들면서 시작되는 이 문답은 날카로운 기봉이 마주치며 서로가 치고 빠지는 날렵한 움직임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런 대결, 이런 마주침, 이런 만남은 서로가 지음이 아니라면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초의는 앙산의 차를 운위함으로써 꿈속이라한들 만나기 힘든 것이 바로 지음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경전조차 눈 속에 어룽거리는 꽃, 즉 헛꽃에 불과함을 갈파하고서 그 모든 것을 씻어내고 오직 산 아래 생생한 지음만을 의지한다. 그래서 그는 불원천리 해남에서 운길산 수종사까지 온 것이 아니던가. 더구나 그는 손수 덖은 차를 들고서 왔을 것이니 위산과 앙산이 함께 찻잎을 따면서 나눈 선의 문답이 운길산 위아래에서 다시 펼쳐지는 기쁨을 맛보았으리라.
고수들의 시는 이렇듯 보통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깊은 맛, 어둡고 그윽한 자리를 간직하고 있고, 수종사는 이 모든 것을 비밀처럼 간직하고 있다. 수종사의 선불장에는 때마침 초의의 시가 주련으로 걸려 있으니 참으로 이 세상에 가득한 것이 비밀스런 대화가 아닐 수 없다:
절 아래로는 맑은 강, 강 위로는 안개
우뚝한 봉우리는 그림처럼 푸른 하늘로 솟구치다
어느 거센 천둥도 부득이 감추지 못하나니
현명玄冥의 자리는 전각 사이에 있는지고
백화 향기가 진동하고 자고새 우니나니寺下淸江江上烟 峰巒如畵揷蒼天
有力雷公藏不得 玄冥榻在殿中間1
百花香動鷓鴣啼
위 주련 내용은 석옥청공 화상의 시에 차운하여 쓴 초의의 시에서 뽑은 구절로서, 3연의 네 구절에다 다른 연의 한 구절을 덧붙힌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어둡고 그윽한 자리”(玄冥榻)는 거센 폭풍우와 천둥마저도 감출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불전 안에 있지 않고 불전들 사이에 있는 그 어둡고 그윽한 자리는 과연 무엇일까? 주련을 편집한 안목은 그 자리가 바로 “백화 향기가 진동하고 자고새 우는 곳”이라고 선언한다. 과연 예리한 안목이다. 선불장이라는 편액이나 주련의 글씨가 고색창연한 맛이 없는 파격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런 탁월한 안목 때문에 잠시 선불장 앞에서 발길을 멈추지 않으면 안된다.
수종사의 금잔화. 다산은 퇴락한 수종사에서 “저녁 안개비에 젖는 진한 꽃”을 아련히 바라보았으나, 선불장의 선객은 꽃 향기가 전각 사이를 흔들고 지나가면 그 향기에 묻혀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선불장이라! 부처가 될 놈을 뽑는 곳이다. 꽃 향기가 흔들리고 새가 우니는데, 향기에 묻히지 아니하고 소리에 울리지 않는 자는 선불장에 들어설 자격이 없다. 꽃 향기가 전각 사이를 흔들고 지나가면 그 향기에 묻혀버려야 하며, 소리가 흔들고 지나가면 그 소리에 흘려퍼져야 한다. 그렇게 흘려보내고 살아나야 한다. “이곳은 선불장이니 마음을 비워야 급제하여 돌아간다”(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는 방거사의 게송도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함이 아니겠는가.
산 아래의 세조를 뒤흔들고 어둠 속으로 사무쳐 들어간 종소리는 까마득한 산상의 바위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였다 한다. 그것은 맑은 소리였다. 다산은 수종사에 묵으며 그 바위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었다. 특히 그는 수종사의 맑은 물이 하늘에서 내린 물이라고 극찬하였으니, 그 물에 차를 우려 마셨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 맑은 소리로 떨어지는 석간수를 뜬다. 차를 우려내어 마시며 저녁 안개비를 본다. 진한 꽃이 안개비에 아련히 젖는다. 그는 홀로 서서 그것을 즐긴다. 그가 다시 마을로 내려간다. 초의가 오솔길을 헤치고 구름이 노니는 곳으로, 수종사로 오른다. 산 아래 다산에게 차를 건네주고 오르는 길이다. 초의는 위산영우 스님이 제자 앙산을 급습했던 말을 떠올린다: “종일토록 찻잎을 따고 있었으나 자네의 소리만을 들었을 뿐 자네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러자 앙산이 차나무를 흔든다. 그 누가 있어 그렇게 응수하고 그렇게 응대할 수 있으랴. 오직 지음만이 가능하다.
맑은 물방울과 그 떨어지는 소리가 이렇듯 수종사의 역사를 깨끗하게 관통하고 있다. 6·25 전란과 함께 수종사가 폐허가 되었을지언정 그 고준한 역사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그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으되 영원히 비밀처럼 숨어 있다. “백화 향기가 진동하고 자고새 우니는 곳”, 그 유현한 자리에 서서 나는 역사적 인물들을 추억해 본다. 시은市隱이 대은大隱이라고 했던가, 수종사가 관람객들로 붐비고 자동차들이 오솔길 턱밑에까지 치고들어올지언정 그 비밀한 자리를 아는 이여, 당신의 모습 드러내지 마시라. 앙산이 차나무를 흔들고 위산이 묵묵히 찻잎을 따노니, . . .
- 석옥청공 선사의 원운시는 다음과 같다:
山厨寂寂斷炊煙 凍鎖泉聲欲雪天
面壁老僧無定力 又思乞食到人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