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실스 마리아에서의 경험 이후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이해받기 힘든 존재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면서도 부단히 자신을 세상에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후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의 글 형식이 계속 바뀐 것도, 1886년에 저작들을 재간행하면서 서문들을 추가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될 만하다. 그중에서도 «이 사람을 보라»는 그런 노력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심오한 정신은 가면이 필요하다”(KSA 5, 57)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보라»는, 니체에 대하여 가장 많은 것을 말해 주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니체라는 사람(homo)을 보라(ecce)고 가리키는 지시어에 불과하다. 한 마디로, «이 사람을 보라»는 “나에 대하여 약간의 빛과 충격을 퍼트리려는 시도”이다.(KSB 8, 471)
니체를 비추는 “약간의 빛”, «이 사람을 보라»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인용문들로 점철되어 있다. 거의 모든 장마다 빠짐없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문장들이 등장한다. 그만큼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글이 아니다. 마침내 <나는 왜 이렇게 훌륭한 책들을 쓰는가>에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직접 말한다. “나는 이제 차라투스트라의 역사를 이야기하겠다”로 시작되는 이 장은 마치 난만하게 피어나던 오케스트라가 무너지고 주제선율만 외로이 흐르기 시작하는 인상을 준다. 니체가 진정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으로 꼽을 만하다.
이 대목, 즉 “이 사람을 보라 > 나는 왜 이렇게 훌륭한 책들을 쓰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정독하는 김에 기존 번역본들을 검토해 보았다. 국내에서 니체가 어느 정도나 이해되고 있는가, 아니 어느 정도나 오해되고 있는가를 아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국내번역본은 다음과 같으며, 이들을 검토 대상으로 삼았다.
- 곽복록 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976, 20072, 동서문화사)
-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 이 사람을 보라»(1982, 청하)
- 백승영 역, «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 . . .»(2002, 책세상)
곽복록 역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단일 제목과는 달리 «비극의 탄생», «아침놀», «도덕의 계보», «이 사람을 보라»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책으로, 1976년에 처음 출간되었다가 최근 2007년에 새로 출간되었다.
먼저, 1절에서 문제시 할 수 있는 번역 대목을 살펴보자. 니체는 1절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의 시작과 마무리를 이야기한다. 이는 차라투스트라의 역사의 출발점인 1881년 8월 실스 마리아에서의 경험을 전후한 시기를 의미한다. 그중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전제 조건이 되는 “듣는 법에서의 재생”과 관련한 경험 대목:
sicherlich war eine Wiedergeburt in der Kunst zu hören, eine Vorausbedingung dazu. In einem kleinen Gebirgsbade unweit Vicenza, Recoaro, wo ich den Frühling des Jahrs 1881 verbrachte, entdeckte ich, zusammen mit meinem maëstro und Freunde Peter Gast, einem gleichfalls “Wiedergebornen“, daß der Phönix Musik mit leichterem und leuchtenderem Gefieder, als er je gezeigt, an uns vorüberflog.(1절)
확실히 듣는 법에서 재생이 있었다. 이것이 예비조건이었다. 비첸차에서 멀지 않은 어느 조그만 산중 온천 레코아로에서, 내가 1881년 봄을 지냈던 곳에서, 나의 벗, 음악가 페터 가스트, 나와 마찬가지로 “재생한 자”와 함께, 나는 음악이라는 불사조가 이제까지 보여준 것보다 더욱 가볍고 더욱 빛나는 깃털로 우리 곁을 스쳐 비상하는 것을 발견했다.
곽복록 확실히 듣는 기술의 부활이 그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베네치아에서 멀지 않은 레코아로라는 조그만 산간 온천장에서 (…) 여기서 나는 내 음악 교사이며 친구인, 나처럼 ‘다시 태어난 자‘인 페터 가스트와 함께
김태현 확실히 듣는 예술이 나에게 다시 태어났다는 것은 이 사상에 대한 전제조건이었다. 베네치아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레코아르라는 작은 산 온천에서 (…) 거기서 나는 나의 음악가이며 친구인 페터 가스트와 함께–이 사람도 또한 “<다시 태어난> 사람이었는데–
백승영 확실히 예술 안에서의 부활을 들을 수 있었고, 그 부활에 대한 전제 조건이었다 (…) 베네치아에서 멀지 않은 레코아로라는 작은 산간 온천에서 나는 내 스승이자 벗이며 그 역시 ‘다시 태어난 자‘인 페터 가스트와 함께
위 인용문은 실스 마리아의 경험이 있기 두 달 전에 음악적 취향에서 급격한 변화가 있었던 것을 서술하는 대목이다. 그리 어렵지 않은 대목인데 불가사의하게도 모두 이상하게 번역했다. 먼저, “eine Wiedergeburt in der Kunst zu hören”은 “듣는 법에서의 재생”, 또는 “듣는 기술에서 다시 태어남” 정도로 번역해야 하는데, 백승영은 문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예술 안에서의 부활을 들을 수 있었고, 그 부활에 대한 전제 조건이었다”로 오역하는 동시에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실수를 했다. 또한 “Wiedergeburt”는 “재생, 거듭남”의 의미로서 “부활”(Auferstehung)과는 명백히 다른 낱말이다. 이들 낱말이 모두 루터번역성서에서 중요한 의미로 쓰이는 것을 알고 있다면, “Wiedergeburt”는 “재생, 다시 태어남, 거듭남”으로 옮겨야 한다. 특별히 뒷 문장에서 “Wiedergeborner”(재생한 자, 다시 태어난 자)와 호응을 이루고 있는만큼 같은 낱말로 번역해야 하는데도, “부활/다시 태어남”(곽복록, 백승영)으로 다르게 옮긴 것은 의아하다. 그리고 “maëstro”는 그냥 “음악가”로 옮기면 되는데 “음악 교사”(곽복록), “스승”(백승영)으로 옮긴 것도 눈을 의심케 한다. 페터 가스트는 니체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도 그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Vicenza”는 “비첸차”인데 한결같이 “베네치아”로 옮긴 것은 또 무엇인지.
해발 1,800미터 실바플라나 호수에 있는 일명 “차라투스트라 바위”. 니체는 말한다: “나는 이제 차라투스트라의 역사를 이야기하겠다. 저서의 근본개념, 영원회귀 사상, 무릇 도달 가능한 긍정의 최고 공식은, 1881년 8월에 속한다: 그것은 “인간과 시간 너머 6천 피트”라는 서명과 함께 한 쪽지에 투여되었다. 그날 나는 숲들을 지나 실바플라나 호숫가를 걸었다; 수를레이 근처, 피라미드처럼 거대하게 솟은 바윗덩이 옆에서 멈추었다. 그때 그 사상이 내게로 왔다.”
실스 마리아에서의 경험 직후 «즐거운 학문»을 출간하고 이후 곧바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를 내놓았던 만큼, «즐거운 학문»은 차라투스트라가 등장하고 있음을 알리는 “백 가지 조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즐거운 학문» 제4부 마지막 절인 342절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서설의 시작이 될 대목을 먼저 싣고 있으며, 바로 그 전절인 341절은 그 유명한 “최대의 무게”라는 제목으로 영원회귀 사상을 알리고 있다. 그러니까 «즐거운 학문» 제4부 342절이 곧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설 시작 대목이기에 니체는 “그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시작마저 내놓고 있다”고 했으며, 바로 그 앞절은 “차라투스트라의 근본사상”을 내놓고 있다고 했다.
In die Zwischenzeit gehört die “gaya scienza”, die hundert Anzeichen der Nähe von etwas Unvergleichlichem hat; zuletzt giebt sie den Anfang des Zarathustra selbst noch, sie giebt im vorletzten Stück des vierten Buchs den Grundgedanken des Zarathustra.(1절)
“즐거운 학문”은 그 중간기에 속하거니와 그것은 무엇에도 비할 바 없는 그 뭔가가 접근하는 백 가지 조짐이다; 급기야 그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시작마저 내놓고 있으며, 제4부 마지막 바로 전 절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근본사상을 내놓고 있다.
곽복록 결국 그것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첫머리를 그대로 싣고 있고 제4권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부분에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근본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김태현 결국 그것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두 부분을 보여 주고 있기도 하다. 이 책 제4권 2절에서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근본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백승영 결국 «즐거운 학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두 자체이고, 그 4부의 끝에서 두 번째 장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근본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텍스트의 형성사를 면밀히 검토했다면, “결국 «즐거운 학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두 자체”(백승영)라는 번역을 할 수 없다. 백승영 번역본이 그나마 나은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면밀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부주의가 드러나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은 매우 실망이다. 또 하나 언급해야 할 것은, 니체가 원문에서 별도의 괄호나 기호 없이 “차라투스트라”로 지칭하고 있을 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지칭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책과 인물을 동시적으로 가리키고 있어 자못 풍요로운 의미를 띤다. 번역할 때에도 그 의도를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2절에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하기 위한 생리학적 전제로 “위대한 건강”을 꼽고 있으며, 이에 관한 상세한 안내문으로 «즐거운 학문» 제5부 382절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전집번역이라면 두 번역자의 번역내용을 비교해 볼 수 있는 흥미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의외로 책세상 번역본은 백승영 역의 «이 사람을 보라»와 안성찬·홍사현 역의 «즐거운 학문» 번역문이 동일하다. 나중에 간행된 안성찬·홍사현 역이 백승영 역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물론 오역도 그대로 따랐다.
für den das Höchste, woran das Volk billigerweise sein Werthmaß hat, bereits so viel wie Gefahr, Verfall, Erniedrigung oder, mindestens, wie Erholung, Blindheit, zeitweiliges Selbstvergessen bedeuten würde; das Ideal eines menschlich-übermenschlichen Wohlseins und Wohlwollens, welches oft genug unmenschlich erscheinen wird, zum Beispiel, wenn es sich neben den ganzen bisherigen Erdenernst, neben alle bisherige Feierlichkeit in Gebärde, Wort, Klang, Blick, Moral und Aufgabe wie deren leibhafteste unfreiwillige Parodie hinstellt – und mit dem, trotzalledem, vielleicht der große Ernst erst anhebt, das eigentliche Fragezeichen erst gesetzt wird, das Schicksal der Seele sich wendet, der Zeiger rückt, die Tragödie beginnt . . .
그 정신에 비하자면, 군중이 당연하게도 그들 자신의 가치척도로 삼고 있는 최고의 것이 숫제 위험, 타락, 비천함 따위를 뜻하기 마련이며, 그게 아니라면 고작 회복, 맹목, 일시적인 자기망각 따위를 뜻하기 마련이다; 인간적인-초인적인 복된 존재와 복된 의욕의 이상은 빈번하게 진정 비인간적으로 비칠 때가 있는 바, 예컨대 그것이 ‘몸짓·말·소리·시선·도덕·과제’를 빌어서,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가장 생생하고도 비자의적인 패러디’를 빌어서 기존 지상의 진지함 전체와 함께 나란히 제시될 때, 기존의 온갖 엄숙한 것들과 함께 나란히 제시될 때 그렇다 —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위대한 진지함이 처음으로 부각되고 본연의 물음표가 처음으로 제기되리니, 영혼의 운명이 회전하고, 시계바늘이 움직이고, 비극이 시작된다 . . .
곽복록 당연히 가치 척도로서 갖고 있는 최고의 것이 이러한 이상의 정신은 민중에게는 위험, 타락, 굴욕 같은 것 아니면, 최소한 휴양이나 맹목성, 일시적인 자기망각 같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예컨대 이제까지 지상에서 진지하던 몸짓, 말, 음향, 시선, 도덕 과업을 이루기 위한 온갖 의식 옆에 이상이 그것들과 가장 닮은 풍자시처럼 놓인다면, 그 인간적이면서도 초인간적 안녕과 호의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진지함으로 시작되고 본연의 의문 기호가 찍힐 것이다. 그러면 영혼의 운명이 방향을 바꾸고 시계 바늘이 움직이며, 그곳으로부터 비극이 시작될 것이다.
김태현 이러한 이상에게 있어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가치기준으로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최고의 것이란 단순히 위험, 쇠퇴, 저하, 기껏해야 휴양, 맹목, 일시적인 자기망각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비인간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예를 들면 이러한 이상이 지상의 모든 진지함, 몸짓, 말, 소리, 눈, 도덕, 사명에 있어서의 모든 장엄함과 대면케 되면 인간적 초인간적인 행복과 선의라는 이상 그 이상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것들에 대한 구체화된 조롱 시가 되는–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마 이 이상으로써 위대한 진지함이 진정으로 시작되리라. 영혼의 운명은 바뀌고, 바늘은 앞으로 움직여 비극은 시작되리라.
백승영 이 이상에 대해서는 대중들이 자기들의 가치 기준으로 당연시하고 있는 최고의 것은 위험이나 쇠퇴나 저하를 의미하게 되거나, 그것이 아니라도 기껏해야 휴양이나 맹목이나 일시적인 자기 망각을 의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적-초인간적인 행복과 선의라는 이상이지만, 종종 비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의 지상의 진지함 곁에서, 몸짓이나 말이나 소리나 시선이나 도덕이나 과제에 있어서의 온갖 장엄함의 곁에서, 그 이상이 특별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에 대한 패러디로 구현되어 제시되는 경우에서 그렇다–그리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과 더불어 위대한 진지함이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진정한 의문부호가 비로소 찍힐 것이다. 영혼의 운명이 바뀌고, 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비극이 시작될 것이다…
난해한 대목이다. 위 인용문의 앞 문장에서는 “이제까지 ‘성스럽다’, ‘선하다’, ‘불가침이다’, ‘신성하다’고 칭한 모든 것과 더불어 유희하는 정신의 이상”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 정신 혹은 그 정신의 이상에 비하자면 사람들이 최고의 것으로 받들고 있는 것들(가령 ‘선’이니 ‘신성’이니 하는 것들)은 ‘위험’, ‘타락’, ‘비천’에 불과하며 잘 봐줘도 사람들이 생을 견디기 위해 필요한 ‘회복’, ‘맹목’, ‘자기망각’을 뜻하기 마련이라는 것이 니체의 강조점이다. 그런데 그 정신의 이상이라는 것이 제시될 때에는 기존의 언어, 예술, 입장, 도덕, 과제 등을 빌어서 (혹은 그것들의 패러디를 빌어서) 제시될 수밖에 없는 바, 필연적으로 인간적이면서도 초인적인 양면을 띠게 되며, 더 나아가 비인간적인 것으로 비치게 된다. 가령, 니체가 애용하는 말인 ‘악’, ‘악의’ 등이 그렇다. 이것은 도덕의 용어를 빌어서 제시되는 것이자, 기존의 엄숙함을 대표하는 최고가치인 ‘선’, ‘신성’과 함께 나란히 제시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언어를 빌어서 제시된다는 점에서 인간적이며, 그러면서도 기존 언어의 의미와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초인적이며, 그리하여 기존 지상의 가치들을 파괴하면서 제시된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이다. 요컨대, ‘악’이 ‘신성함’과 더불어 유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위대한 건강”이라고 부르는 바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하기 위한 생리학적 전제인 것이다.
이 구절에서 곽복록과 김태현의 번역은 별도로 언급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매우 안 좋다. 백승영의 번역이 그나마 나은 편이긴 한데, 헤매기는 마찬가지이다. 가령, 첫 문장의 우리말 표현이 매우 어색하거니와 “이 이상에 대해서는”이 아니라 “이 정신에 대해서는”으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몸짓이나 말이나 소리나 시선이나 도덕이나 과제에 있어서의 온갖 장엄함의 곁에서, 그 이상이 특별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에 대한 패러디로 구현되어 제시되는 경우”라는 번역문 역시 원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몽롱한 문장이다. “가장 생생한 (패러디)”를 누락한 것도 의외다.
위와 같은 니체의 심오한 문장처럼 철학적 논증을 거쳐 의미를 확정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문장을 잘못 번역해도 (심지어는 정반대의 의미로 번역해도) 이를 지적하는 것이 결코 용이하지 않다. 그나마 구문을 잘못 파악하여 결정적으로 오역이 발생했다면 이를 지적하는 일은 수월한 편인데, 이런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대개는 문장의 의미나 낱말의 뉘앙스를 면밀히 파악하지 못해 오역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3절의 경우에도 그렇다.
Es scheint wirklich, um an ein Wort Zarathustra’s zu erinnern, als ob die Dinge selber herankämen und sich zum Gleichnisse anböten (- “hier kommen alle Dinge liebkosend zu deiner Rede und schmeicheln dir: denn sie wollen auf deinem Rücken reiten. Auf jedem Gleichnis reitest du hier zu jeder Wahrheit. Hier springen dir alles Seins Worte und Wort-Schreine auf; alles Sein will hier Wort werden, alles Werden will von dir reden lernen -“).
실제로,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회상하건대, 사물들이 스스로 다가와 비유가 되어주기라도 한 듯하다 (— “여기에서 모든 사물들이 쓰다듬으며 너의 설법을 향해 다가오고 너에게 살랑댄다: 그것들은 너의 등에 올라타고 싶은 것이다. 너는 여기에서 저마다의 진리를 위하여 저마다의 비유에 올라탄다. 여기에서 너를 위하여 모든 존재의 말이 문득 열리고 말의 상자가 문득 열린다; 모든 존재는 여기에서 말이 되고자 한다, 모든 생성은 너로부터 설하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 —”).
곽복록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떠올려 보면 거기에선 마치 사물들이 다가와서 자기를 비유적으로 제공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사물은 애무하면서 그대의 역설에 다가와서 아첨한다. 그것은 그대의 등을 타고 가려하기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모든 비유를 타고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서는 모든 존재의 말과 말의 상자가 튕겨 열린다. 모든 존재가 말이 되려 한다. 모든 생성이 그대에게서 말하는 법을 배우려 한다.”
김태현 실제로 짜라투스트라가 말한 것을 보면 암시를 얻을 수 있는데 모든 사물은 스스로 접근해 와서 스스로 비유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모든 것은 너의 말이 있는 곳에 달래는 듯이 다가와 아첨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의 등에 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너는 비유를 타고 어떠한 진리에도 도달할 수 있다. 여기서 모든 존재는 말이 되기를 원한다. 모든 생성은 너에게서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한다.)
백승영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기억해보자면 어떤 것이 제 스스로 다가오고 스스로 비유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여기서는 모든 것이 어리광을 부리며 네가 하는 말로 다가와 네게 아첨하리라: 모든 것이 네 등에 업혀 달리려 하기 때문이다. 너는 여기에서 온갖 비유의 등에 올라타고 진리를 향해 달린다. 여기서 모든 존재의 말과 말의 상자가 너를 향해 활짝 열린다; 모든 존재는 여기서 말이 되고자 하며, 모든 생성은 네게서 말하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
3절에서 니체는 실스 마리아에서의 결정적인 경험을 두고 “영감”의 사례로 소개한다. 심심미묘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역자들은 표현 하나하나에 예민해야 한다. 가령, 운명을 뒤바꾼 결정적인 경험의 순간에 사물들이 니체에게 다가온 장면을 두고, 모든 사물들이 아첨한다느니 어리광을 부린다느니 표현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 역자들이 니체의 경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그저 독한사전만 보고 하나같이 “아첨하다”로 옮겼나본데, 안타까운 일이다. 동일한 견지에서, “Auf jedem Gleichnis reitest du hier zu jeder Wahrheit”의 “jede-” 역시 정확하게 “저마다의 비유/저마다의 진리” 내지 “각각의 비유/각각의 진리”로 번역해 주어야 마땅하다. “저마다의 진리를 위하여 저마다의 비유에 올라탄다”는 문장은 “진리를 위하여 비유를 탄다”나 “진리를 위하여 온갖 비유를 탄다”는 문장과는 의미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정적인 차이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번역하지 않는가?
다음 4절은 소위 ‘팩트’의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4절에는 니체가 독일식 지명으로 표기한 “Nizza”와 “Eza”가 등장한다. 이곳들은 현재 프랑스 영토의 “니스”와 “에즈”이다. 그런데, 번역자들이 “니스”는 제대로 표기하고선 “에즈”를 “에쯔아”나 “에차”로 잘못 표기한 것은 그들의 불성실에 대한 증거이다. 이러한 불성실은 2절의 “ein Göttlich-Abseitiger alten Stils”(옛 풍습처럼 신성하게 제정신을 벗어난 자)를 “옛 방식으로 신이 들려 괴상한 자”(백승영)으로 옮긴 데에서도 확인된다. 이 개념이 적어도 플라톤의 이온이나 파이드로스에서 유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면 “괴상한 자”라고 옮길 수 없다. 그러니 “옛날 방식으로 신이 들린 자”(곽복록), “구식으로 신들린 자”(김태현)로 옮기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할 수 있다.
니체의 문체적 특징 중에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반복되는 동사의 빈번한 생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략은 일반적인 독일어에서는 허용되기 힘들 정도이지만, 니체가 그렇게 한 것은 우선은 문장의 리듬 때문일 것이며, 특히 생략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생략하는 희랍어·라틴어의 구문에서 영향을 입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로마시인들로부터 문체를 배웠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Ein Andres ist die schauerliche Stille, die man um sich hört. Die Einsamkeit hat sieben Häute; es geht Nichts mehr hindurch. Man kommt zu Menschen, man begrüsst Freunde: neue Öde, kein Blick grüsst mehr.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제 주위에서 듣는 으스스한 정적이다. 그 고독은 일곱 겹의 피부를 가지고 있다.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뚫고 지나가지 못한다.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벗들에게 인사하지만, 새로운 적막이 인사할 뿐, 더 이상 그 어떤 시선도 인사하지 않는다.
곽복록 사람들에게로 다가가고 친구들에게 인사를 해도 말이다. 새로운 적막이 감돌고 더 이상 인사하는 눈초리라곤 없다.
김태현 사람들, 친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본다. 그러나 더 많은 고립감이 있을 뿐, 어느 누구도 따뜻한 눈으로 반겨주지 않는다.
백승영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친구들에게 인사하지만: 새로운 황무지는 어떤 인사의 눈길도 더 이상 보내지 않는다.
밑줄 그은 문장은 “neue Öde grüsst, kein Blick grüsst mehr” 내지 “kein Blick grüsst mehr, sondern nur neue Öde [grüsst]”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니체는 생략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생략하여 “neue Öde, kein Blick grüsst mehr”로 썼다. 그런데 이러한 니체의 문체에 익숙하지 못한 역자들은 잘못 옮기고 말았다. 다만 곽복록은 “새로운 적막이 감돌고 더 이상 인사하는 눈초리라곤 없다”고 의역하여 체면치레를 하고 있다. 그동안 니체 번역서들을 살펴본 결과, 역자들이 니체의 생략구문을 놓쳐서 의미를 잘못 파악하여 저지른 오역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니체 오역의 사례 중에서 가장 위험한 사례는 다름아닌 정반대로 번역한 경우이다. 설마 그런 경우가 있으랴 의문을 품을 만하지만, 이제까지 내가 확인한 바로는 그런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면 5절의 마지막 구절이 그렇다:
Ich wage noch anzudeuten, daß man schlechter verdaut, ungern sich bewegt, den Frostgefühlen, auch dem Mißtrauen allzu offen steht, – dem Mißtrauen, das in vielen Fällen bloß ein ätiologischer Fehlgriff ist. In einem solchen Zustande empfand ich einmal die Nähe einer Kuhheerde, durch Wiederkehr milderer, menschenfreundlicherer Gedanken, noch bevor ich sie sah: das hat Wärme in sich …
내가 과감하게 암시까지 해주겠거니와, [그런]사람들은 소화력이 좋지 않으며, 움직이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한기寒氣와 불신에 대하여 너무나 활짝 열려 있다, — 불신은, 대개 병인病因을 잘못 짚어 [질병이라고] 진단한 것일 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암소떼의 접근을 감지한 바 있다, 암소떼를 채 보기도 전에, 좀더 온화하고 좀더 인간에게 친밀한 사상들이 회귀하는 것을 단서로 하여: 그것은 온기를 품고 있느니 . . .
곽복록 그런 사람은 소화를 잘 못 시키고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고 한기나 불신감에 내맡겨져 있다고 나는 감히 암시한다—대개 단지 병원학적인 실책에 불과한 불신감에 말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어느 땐가 더 온화하고 더 어진 생각을 다시 하게 되면서, 나는 소떼가 가까이 있음을 느꼈다. 그것을 보기도 전에 말이다. 온화하고 어진 생각 자체는 온기를 지니고 있다.
김태현 그여기서 감히 부언해 둘 것은 그렇게 되면 우리의 소화능력은 감퇴하고 게으르게 되고 한기에 너무 민감하게 되고 불신감에 걸리고 만다. 그 불신감이란 대개 단순한 병원학적인 착오에 불과한 것이지만 내가 그러한 상태에 있었을 때 더욱 온화하고 더욱 인자한 사상이 나에게 다시 떠올랐고 그때 나는 한 우리의 소떼가 나에게 접근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아직 그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것들은>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백승영 그런 사람들은 소화도 잘 못 시키고, 움직이기를 싫어하며, 얼어붙어버리고 지나치게 불신감에 개방되어 있다고 나는 감히 암시한다—여러 경우에서 단지 병인학적 착오에 불과한 불신감에. 그런 상태에서 어느 땐가 더 온화하고 더 인간 친화적인 사유가 내게 돌아오면서 나는 소떼가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그것을 미처 보기도 전에: 그것은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니체는 제5절에서 불멸의 성과를 이룬 자가 치를 수밖에 없는 값비싼 댓가/보상을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그 중 마지막 세번째가 위에 인용한 대목으로, 창조력을 모두 소비하고 나면 모든 방어력이 소진되면서 사소한 상처에도 민감한 피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소화력도 좋지 않고 움직이기를 힘들어한다. 그리고 “한기와 불신”에 대하여 무방비로 열려 있게 된다. 즉 그들은 한기와 불신 자체가 된다. “불신”은 대개의 경우에 병인을 잘못 짚어 질병이라고 진단한 것에 불과할 뿐이요, 불멸을 이룬 이들에게는 존재 자체가 불신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사랑”이니 “행복”이니 하는 (한기와는 정반대인) 온화한 사상들이 접근하는 조짐만 보여도 금방 간파할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그런 상태에서 나는 암소떼의 접근을 감지한 바 있다, 암소떼를 채 보기도 전에, 좀더 온화하고 좀더 인간에게 친밀한 사상들이 회귀하는 것을 단서로 하여 . . .”라고 말한다.
이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설 제3절을 함께 음미할 필요가 있다:
보라! 나는 너희에게 최후의 인간을 선보이겠노라.
“사랑이 무엇이냐? 창조가 무엇이냐? 그리움이 무엇이냐? 별이 무엇이냐?” — 이렇게, 최후의 인간은 묻고는 눈꺼풀을 떤다.
그후 대지는 왜소해졌으며, 만물을 왜소하게 만드는 최후의 인간은 대지 위를 날뛰고 있다. 그의 생식은 잎벌레처럼 근절될 수 없다; 최후의 인간이 가장 장수한다.
“우리는 행복을 창안했다”라고 —, 최후의 인간들은 말하고는 눈꺼풀을 떤다.
그들은 살기에 혹독했던 지역을 떠났다: 사람들은 온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과 마찰한다: 온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병듦과 불신을, 그들은 죄악으로 여긴다: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걸어온다. 아직도 돌부리나 인간에게 채여 비틀거리는 멍청이.
다름아닌 “사랑”, “행복”, “온기”는 최후의 인간의 언어이다. 최후의 인간은 “병”과 “불신”을 죄악으로까지 여긴다. 그렇게 그는 “좀더 온화한 사상들”과 “좀더 인간에게 친밀한 사상들”을 설파한다. 그가 “창조”라는 말을 꺼내면 그 “창조”라는 말도 온화한 사상이 되어 타락하게 된다. 이 최후의 인간과 그를 따르는 인간들을 두고 차라투스트라는 통탄한다: “목자는 없고 한 떼의 무리만 있음이여! 저마다 동일한 것을 원하고, 저마다 동일하다.”
이제 우리는 앞선 인용문에서 “암소떼”가 무엇이며 “온기”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느 땐가 더 온화하고 더 어진 생각을 다시 하게 되면서”(곽복록), “더욱 온화하고 더욱 인자한 사상이 나에게 다시 떠올랐고”(김태현), “어느 땐가 더 온화하고 더 인간 친화적인 사유가 내게 돌아오면서”(백승영) 등의 번역이 니체의 의도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정반대로 번역했다! 무엇이 차라투스트라이고 무엇이 최후의 인간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게 만드는 위험한 번역!
바로 이런 대목이 니체 독해의 어려움이며, 바로 이런 대목이 국내 니체 번역의 한계인 것이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하다. 나는 다른 니체 텍스트에서도 이와 동일한 사례를 빈번하게 마주쳤다. 그리고 이런 대목은 어느 한 번역본만 오역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번역본이 동일하게 오역한다는 사실이 무척 뼈아프다.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니체 번역이 나오기까지는 아직 요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외에 사소한 오역들도 언급하자면 끝이 없겠으므로 이만 줄이고 종합적인 판단을 해 보자면, «이 사람을 보라»의 번역본들을 일부분 비교하면서 검토해본 결과, 김태현 역본은 과연 동일한 텍스트를 토대로 번역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오역이 비일비재하여 이 번역본으로 읽고서 과연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를 읽었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곽복록 역본은 아마도 일역본도 함께 참고했는지 어휘가 풍부하며 가장 매끄럽게 읽히지만 대책없는 오역을 한 경우가 많다.
이들에 비하자면 백승영 역본이 오역이 그나마 덜한 편이긴 한데 문체나 어휘의 유려함에서는 곽복록 역본에 미치지 못한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백승영은 니체전집을 일곱 번이나 읽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의 번역본을 검토해 보건대 그 말은 과장이 아니겠나 한다. 적어도 면밀한 독해는 하지 못한 것같다. 내 판단으로는, 그의 번역은 일곱 번의 독해에 값하는 번역이 아니며, 시간에 쫓겨 서둘러 번역한 인상이 짙다.
삼촌-
정말 너무너무너무 보고싶어요..
Pingback: CTL
선생님 건강하신가요? 근황이 어쩌신지 궁금합니다.
간화선을 읽고 나니, 벽암록을 볼 엄두가 안나서 우선 소개해주신 동국역경원 사이트에서 유마경부터 해서 경들을 조금씩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악에 대해서 갑자기 떠오른 것이 있어서 트랙백을 하나 달았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붑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공부하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군요.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상대방의 정신적 구조와 유사하다면 글을 쓰는 게 어렵지 않지만, 상대방의 정신적 구조와 나의 정신적 구조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다면 글은 수많은 전략을 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제가 틈틈이 인문학 서적을 읽는 것도 상대방의 구조, 상대방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불교적인 가르침에 충실한 나와는 다른 세계이지만, 그 세계의 언어, 그 세계의 감정, 그 세계의 사고가 어떤 식으로 짜여져 있는지 간파하고, 그 구조에 맞는 언어로 글을 써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부지런히 공부해야 할 일입니다.
마지막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