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휘대에 처음 나타나던 바로 그 순간 빈을 정복했다. 청중에 대한 그의 지배는 마지막까지 깨지지 않았다.”(64) — 브루노 발터가 빈 오페라단의 지휘대에 오른 구스타프 말러를 두고 평한 말이다. 독선적이고 비타협적이고 독재적이었던 지휘자 말러가 그 까다롭기로 유명한 빈의 청중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작곡가의 작품에 대한 완벽한 헌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작곡가의 “작품을 완벽하고 명료하고 남김없이 드러내는 공연”(131)을 위해 악단에게 “절대적인 엄밀성”을 요구했으며, “악보에 대해 광적으로 충실”(126)했다. 그래서 “그의 연주에서 임의적이거나 주관적인 수정은 설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129)
“구스타프 말러, 천상과 지옥의 두 얼굴”
어느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그 예술가의 내면을 직접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들여다볼 수 없다면 해석의 명료함이란 있을 수 없다. 이 명료함은 한낮의 이성적인 명료함이 아니라, 어둠 속의 파도소리를 맑고 뚜렷하게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들을 수 있는 명료함이다.
말러의 탁월한 해석을 지배하는 것은 ‘명료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낮과 같은 명료함은 아닙니다. 음악은 한낮의 예술은 아니지요. 그늘 없는 영혼에게는 음악이 비밀스런 뿌리나 궁극적인 깊이를 내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드러나며, 어둠 속에서 이해되고 느껴져야 합니다. 그것은 지중해의 청량한 푸른색이 아니라 대양의 어둠침침한 한숨 소리를 닮았습니다. 말러의 영혼에는 어둠이 파도치고 있습니다. 그의 눈은 밤에 익숙해져 있으며 음악의 깊이를 인식하기 위해 태어난 눈입니다.(129-130)
어느 작곡가의 작품을 통하여 대양처럼 망망한 어둠이 파도치는 소리, 그 장면, 그것을 명료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지휘자는 그 작곡가의 악보나 지시사항에 최대한 복종하는 가운데 작품을 해석할 수 있다. 말러에게는 특히 모차르트와 바그너의 악보가 신성불가침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 두 작곡가의 내면을 명료하게 파악했던 것일까? 과연 말러의 음악에는 모차르트적인 아름다움과 바그너적인 고통, “천상과 지옥의 두 얼굴”(13)이 혼재해 있다. 거장들의 내면을 이해했다는 것은 관습적인 수준의 감정들, 의지들, 신앙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위치에 올라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높은 위치에서는 격렬한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감정들마저 극히 섬세하게 장악할 수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정 교향곡>(Symphonia Domestica)의 공연이 기억납니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격렬한 폭풍우와 그런 폭풍의 고삐를 풀어놓은 지휘자의 고요한 자세가 너무 대조적이어서 으스스할 정도였습니다.(132)
감정의 극한, 의지의 극한, 아름다움의 극한, 고통의 극한은 다름아닌 죽음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에게는 언제나 죽음의 냄새가 나기 마련인데, 그 까닭은 죽음이 여타의 감정과 여타의 의지와 여타의 아름다움을 단번에 소멸시킬 수 있는 최대치의 감정, 최대치의 의지, 최대치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최대치의 자리에서 창조성이 나타난다. “거장들의 작품이 영원성을 가지는 이유는 거기 들어 있는 창조적 힘과 감정의 깊이와 또 무엇보다도 아름다움 때문”(177)이다.
사실 죽음 앞에서는 죽음 이외의 모든 것이 모두 피상적이므로, 그 죽음을 정면으로 통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이 드러나야 한다. 물론 앤디 워홀처럼 피상성을 인간 삶의 본질로 규정하는 예술가도 있겠지만,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가들은 창조성을 위해 피상성을 최대치로 걷어내는 작업을 한다. 인간의 도덕, 인간의 제도, 인간의 종교마저 피상성으로 간주하는 예술가는 그래서 피상성의 끝인 죽음과 가까울 수밖에 없다. 모차르트도 “죽음의 영상은 저한테는 더 이상 섬뜩한 모습을 전혀 띠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대단히 아늑하고 위안이 되는 것”(1787.4.4,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이라고 했다. 이 죽음은 예술적 창조를 위한 죽음, 곧 나라는 존재의 죽음, 새로운 나의 탄생이다. 나라는 존재의 죽음과 탄생은 작품을 해석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그는 열정적인 연주에 몰두하여 자기를 버림으로써 스스로를 넘어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들어가며, 그런 상태에서 가장 강렬한 의미를 얻습니다. 그와 같은 황홀경 속에서 느슨해진 개인적 속박을 초월하며 타자의 재현이 공동의 창작, 거의 ‘나’의 창작이 됩니다. […] ‘타자’가 흘러넘치는 마음과 상상력은 일종의 혼연일체를 만들어냅니다. 창조자와 재현자 사이에 놓인 장벽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며 지휘자는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말러는 설사 공감이 가지 않는 작품일지라도 작곡가에게 충실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진실할 연주를 하곤 했습니다.(131)
이렇듯, 브루노 발터가 “말러 사망 25주년 기념일을 맞아” 말러를 회상하며 “감정이 한껏 북받쳐 오른 채 써내려간”(13)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마티 2005, 김병화 옮김)은 천재에 대한 천재의 보고서, 브루노 발터가 그린 말러의 초상이다. 말러는 발터의 스승이자 벗이었으며, 발터는 말러로부터 결정적인 시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짧은 글에서 그 어떤 학자의 책에서보다도 훨씬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예술, 예술가, 창작, 연주, 해석 등에 관한 무수한 영감을.
그러나 브루노 발터는 말러와는 달리 온화한 지휘자였고 종교적인 가르침에 충실했다. 브루노 발터가 “여러 해 뒤, 내 영혼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거치면서 그[말러]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했던 시기”(34)는 바로 그 성향의 차이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에 일생동안 충실했던 듯한 발터는 그 성향상 감정이라는 요소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도덕적인 가르침은 거의 예외없이, 니체의 표현을 빌면, “좀더 온화하고 좀더 인간에게 친밀한 사상들”과 감정들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원래 내가 음악에 들어 있는 감정이라는 요소와 극적이고 시적인 표현의 측면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고, 절대적인 정확성을 희생하더라도 한 작품의 정신적 내용을 충분히 표현하는 태도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더욱 유익했습니다. 즉 작품의 전체적인 활력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정확성을 희생시키려는 성향이 내게 있었던 것이지요.(35-36)
바로 이것이 내가 이십대 시절부터 삼십대 전반까지 그토록 브루노 발터에 열광했으면서도 이제는 다소 거리를 두게 된 원인일 것이다. 브루노 발터의 지휘는 낭만적이고 서정적이다. 그의 해석은 인간들의 황혼처럼 아름답지만, 지금의 나는 그 온화하게 채색된 황혼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그러나 말러의 음악은, 브루노 발터가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언급하면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음악이다. 이 작품은 열정적이고 거칠고 영웅적이고 충일하고 불꽃같고, 엄숙하고 부드럽게 감정의 모든 범위를 망라하고 있지만 ‘오로지’ 음악일 뿐”(167)이다. 혹은 말러 자신의 말처럼, “이 교향곡은 열정적이고 거칠고 비극적이고 엄숙하며 인간의 모든 감정으로 가득하지만, 단지 음악일 뿐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질문의 자취도 남아 있지 않다.” (교향곡 5번에 대한 해설은 이채훈의 “말러 교향곡 5번에 나의 삶을 투영한다“를 읽어보기 바란다. 그는 교향곡 5번을 두고 “싸늘한 오후의 햇살”이라고 평했는데 참으로 탁월한 감각이다.)
위와 같은 말러 교향곡 5번에 대한 서술은 다른 거장들의 음악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거장들의 작품은 거장들의 내면에서 비롯한 것이며, 거장들의 내면은 관습적인 감정이나 도덕이나 형이상학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위대한 작품은 관습적인 감정들과 도덕적인 가르침들의 뿌리를 건드리며, 사람들이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을 피상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해석자의 정신세계에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가르침이 우위에 서면 위대한 작품은 필연적으로 서정적이고 낭만적으로 채색되고 만다. 온화한 사상이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술가들의 해석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해석 논쟁은 다름아닌 서로 상이한 정신성 간의 피할 수 없는 싸움, 명운을 건 싸움이다. 해석의 마당에서도 이러할진대, 작품의 창조는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치명적인 차원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티치아노/조르조네의 <콘체르토>
함부르크 시절 말러의 작업실에는 티치아노(혹은 조르조네)의 <콘체르토> 복제품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건반 위에 손을 얹고 고개를 돌린 수도사는 주변 인물들의 시선과는 무관하게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의 수도사는 흡사 “나는 이 공간의 사람이 아니다”, “이 음악은 이 시간, 이 시대의 음악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의 주위에는 아름다운 옷을 걸친 남자와 여자가 있다. 비올라를 든 남자(음악가? 진정한 음악가는 그가 아니다)는 마치 권력자처럼 수도사를 제어하려는 자세이다. 여자는 감상자에게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감상자를 꿰뚫어봄으로써 그 욕망에 불과한 아름다움을 소멸시킨다. 그러나 수도사는 (감상자, 여타 음악가들을 포함한) 인간들의 온갖 감정과 욕망과 권력이 난무하는 공간에서 그것들의 뿌리를 확인한 음악가이다. 이 수도사, 이 진정한 음악가는 멀리 내다보고 “나의 시대는 앞으로 올 것이다”(14)라고 누누히 말했던 말러이며, 욕망과 권력의 아우성을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이 아우성을 여실히 드러내려면 예술가는 이 아우성 위에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음악일 뿐”이라고 말하는 말러 자신이다. 이런 말러를 위해서는 고전주의의 전아한 세계와 낭만주의의 무한한 상상력이 필수적이다.
말러 작품의 근본은 그가 진정한 음악가라는 단순한 사실에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천성적으로 낭만주의자였습니다. <탄식의 노래>와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를 보십시오. 그러나 후반의 발전과정을 보면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적 요소 사이의 갈등 및 혼합이 나타납니다.
고전주의적 요소란 그에게서 솟구쳐 나온 음악에게 형식을 부여하고 그의 웅건한 힘과 상상력과 감수성을 통제하고 통달하려는 결단입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낭만적 요소란 과감하고 제약 없는 상상력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즉 그의 ‘야행적’ 성격, 표현의 과잉으로 치달아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지경에까지 이르는 경향,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적이거나 그 밖의 다른 이념들을 그의 음악적 상상력 속으로 뒤섞어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상상력은 소용돌이 같은 음악의 내면세계이며 감동 넘치는 박애주의이며, 시적인 상상력과 철학적인 사고와 종교적인 감정이었습니다.(136-137)
“감동적인 박애주의”와 “종교적인 감정”, 이 두 마디에서 브루노 발터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물론 종교적인 감정을 여타 감정들이 소멸할 때 다가오는 신비한 감정으로 보는 것은 탁월한 해석이지만, 그것을 제도적 종교의 도그마에서 비롯한 감정과 동일시하게 되면 거장의 작품은 온화한 색채를 입고 타락하게 된다. 말러는 에누리없이 첫번째 해석의 지지자였을텐데, 브루노 발터는 어느 쪽이었을까? 그는 두 해석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았을까?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 사랑에도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고 죽음에도 여러 종류의 죽음이 있다. 우리는 섣불리 우리의 사랑과 죽음을 거장들의 그것들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사랑과 죽음은 “천상과 지옥”처럼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 영역 밖에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천상과 지옥에 존경을 표해야 마땅하다. 그들에겐 천상도 아름답고 지옥도 아름답다.
말러는 1896년에 한 음악잡지의 편집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단지 꽃과 새, 숲의 향기 등을 염두에 두는 것은 제가 보기에 좀 이상합니다. 위대한 디오니소스, 판 신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203)
뜻밖의 음악을 들으면서 몇 자 댓글을 달고 있습니다. 말러의 1896년 편지 구절이 인상적이군요.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새나 꽃이나 향기만을 본다는 말. 그렇지요. 자연 속에는 노동과 비천함과 탄생과 죽음과 우정과 사랑과… 온갖 것들이 뒤엉겨 있지요. 지난 주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참 흐뭇한 영화 한 편을 보았지요. ‘1900년’ 이라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영화였어요. 5시간 15분동안 상영했는데 이탈리아 농촌을 씨줄로 당시의 역사, 봉건과 파시즘과 막스즘을 날줄로 엮어서 한 편의 대서사시, 교향곡 같은 작품이었어요. 시적인 아름다움과 완결성을 주는 장면이 많았어요. 끔찍하고 노엽고 비열하고 슬픈 것들이 , 남루하고 서럽고 장엄하고 무서운 것들이 한데 비벼지고 어우러져서 5시간 15분이 아주 빠르게 흘러 갔습니다.
영화 ‘1900년’은 저도 본 기억이 있네요. 이십대 시절에 본 것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요. 읽은 책들은 내용이 거의 기억나는데, 유독 영화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 경향이… 저는 요즘도 영화는 일년에 한두 편 겨우 볼까 말까 하는 정도여서 저같은 사람들만 있다면 아마 영화산업 망할 겁니다. 배우 이름은커녕 영화제목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고, 영화 보는 내내 여자들 얼굴 분간하지 못해 내용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의 가장 취약점이 영화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