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 붓다의 일생은 인류 전체의 정신적 높이를 높였던 만큼 열반 이후 그분의 일생을 신격화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음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생애 전체에 걸쳐 신화가 가미되고 전생까지 거슬러올라 «본생담»(Jataka)이 수집되었을 것이다. 고대세계에서는 신화적 표현들이 낯설지 않았다. 고대인들이 미개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화적 표현이 가진 원형적 진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하기 직전 바리때를 강물에 던지니 바리때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한다. 이런 초자연적인 서술은 현대인의 사고에 거슬리겠지만 “깨달음을 얻은 날 나는 강물이 거꾸로 흐르는 것을 보았다”는 15세기 인도의 시인 까비르의 말을 접하고 보면, 이런 초자연적인 서술이 현대인의 사고가 미칠 수 없는 그 뭔가를 드러내고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것은 신화적인 표현이 아니라 경험적 진리 내지 종교적 진리인 것이다.
전기작가는 이 지점에서 자신의 관점을 노출해야 한다. 미개하게 여겨지는 신화를 제거하고 역사적 붓다를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비합리적으로 보일지언정 신화적인 표현이 가진 종교적 진리를 인정하고 신화적인 빛깔로 붓다의 일생을 장엄할 것인가. 19세기 말 역사주의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에는 일체의 초자연적인 서술들을 제거하고 “인간 석가”를 드러내려는 시도가 유행했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의 “역사적 예수”와 동일한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현대의 종교학자들은 신화적 표현들이 지닌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그 표현들은 학문적 논리나 서술로 드러낼 수 없는 차원의 진리를 풍요롭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제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희극일 뿐이다.
와타나베 쇼코의 «불타 석가모니»는 현대 학자의 전형이 내놓은 전기이다. 그는 신화적인 내용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신화적인 내용들을 양껏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역시 학자이다. 설화 내지 신화의 줄거리를 소개하되 시적인 표현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그 설화 내지 신화가 내포하는 의미를 학자적인 시각에서 세세하게 분석하고 토를 단다. 그가 소개하는 신화는 학자적인 고민이 투영된 결과물로서 신화로서의 맛이 모자라다. 그래서 그의 전기는 논문을 읽는 것마냥 건조하게 읽히는 편이다. 학문적인 공부를 위해서는 추천할 만하나 붓다의 감동적인 일생을 맛보기에는 뭔가가 모자라다.
반면에, “거룩한 이, 붓다의 생애”라는 부제가 붙은 퍼디난드 해롤드(Ferdinand A. Harold)의 «카필라의 아침»(일지사, 1981)은 시적이고 감동적이다. 그는 학자적인 고민을 투영하지 않고 소설체로 붓다의 생애를 엮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전기가 소설인 것은 아니며 주관이 깊게 투영된 전기는 더더욱 아니다. 고대 인도 문헌에 바탕한 “시적인 전기”라고나 할까.
“바다 중의 바다이시어, 당신은 한 방울의 물방울 앞에 절하실 순 없습니다.”(23)
“이 분은, 사악한 불길에 싸여 타고 있는 이세상 앞에 호수가 되어 나오리라. 이분의 진리는 세상을 잔잔하고 시원하게 하리라.”(25)
“아름답다, 나의 아들아, 산꼭대기에서 솟아오르는 불기둥처럼 아름답다.”(27)
“주검은 한 토막 나무이며 한 줄기 마른 풀입니다.”(44)
“새들은 무심히 나뭇가지 사이를 퍼덕거리며 날았다. 싯다르타는 가슴속으로 평온이 흘러드는 것을 느꼈다.”(56)
“네 번째 꿈은 아름다왔다. 땅 끝에서 새들이 날아와 그의 머리 위로 날았다. 새들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75)
“나는 모두에게 연민을 느낄 것이다. 물 속에 잠긴 연꽃에나 물 위에서 아름답게 나부끼는 연꽃에나 . . . 나는 모든 종류의 연꽃을 가엽게 여긴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서러운 것이므로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서러운 것이므로.”(100)
“저이의 걸음걸이를 보라. 금빛으로 쏟아지는 햇살 속을 숲속의 장한 사자처럼 걷는구나.”(150)
“진리라는 이름의 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은 법. 그 꽃을 보려면 맑고 진실한 눈을 가져야 하오.”(152)
“아마 나의 사랑은 그의 청정한 인생을 더럽힐 것입니다.”(215)
“그대들은 이제부터 나의 등불을 빌어 쓰지 말라. 그대들의 등불을 켜라.”(224)
아름답다. 위 표현들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다면 이 책에 대해서도 감동할 것이다. 과연 이 표현들이 경전의 표현인지 아니면 저자의 표현인지 과문한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으나, 이 책의 원제가 «고대 인도의 텍스트에 따른, 붓다의 생애»( La Vie Du Bouddha D’Apres Les Textes De L’Inde Ancienne(Paris, H. Piazza, 1922))인 것으로 미루어 경전에 등장하는 표현으로 짐작된다. 아울러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저자는 인도의 신화와 역사와 문학작품을 두루 조사하고 «Lalitavistara»(방광대장엄경), «Buddhacarita»(불소행찬), «Avadanasataka»(찬집백연경)을 많이 의지했다고 하니 더욱 그럴 만하다. 비록 경전의 표현들이라하더라도 이를 놓치지 않고 짧은 분량의 전기에 고스란히 살려낸 저자의 탁월한 안목이 경이롭다. 나는 이제까지 이런 유의 시적인 표현들이 살아 있는 전기를 접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말 번역본이 비록 영어번역본을 토대로 한 것이긴 하지만 시적인 전기에 맞갖은 번역문 또한 놀랍다. 실로 오랜만에 아름다운 우리말 호흡을 만났다. 우계숙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둔다.
인도 아잔타 석굴사원의 벽화. 왕비와 시녀. «카필라의 아침»에는 여인들의 일화가 비교적 많이 등장한다.
이 시적인 전기는 분량이 짧은 만큼 많은 일화들을 담고 있지 않다. 붓다의 설법도 많이 실려 있지 않다. 그렇지만 표현들뿐만 아니라 일화의 서술 방식 역시 시적이고 압축적이어서 감동이 크다. 두 여인의 일화를 소개해 본다:
그는 다시 길을 떠났다.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붓다는 여인에게 가까이 갔다.
“여인아, 나는 목이 마르다. 물을 마시게 해 다오.”
여인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낯선 사람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깊이 흔들렸다. 왜 그런지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흐느껴 울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붓다를 안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감히 그럴 용기가 서지 않았다. 붓다는 미소를 지었다.
“여인아, 그대 하고 싶은 대로 나를 안으라.”
여인은 그의 팔안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너무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아요! 붓다를 만나다니… 그리고 이렇게 안을 수 있다니…”(192)
이 일화는 신약성서에 소개된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 대비되어 나에게 여러가지 상념을 일으킨다. 더불어 선승들의 화두 중의 하나인 “노파소암”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다른 한 여인이 있다. 매력과 아름다움으로 순식간에 군중을 휘어잡고는 뜨겁게 타는 눈을 번쩍이던 여인 쿠발라야. 그녀가 붓다를 위해 아름답게 아름답게 춤을 춘다:
“당신은 아름답군요. 당신을 위해서 춤을 추겠어요.”
쿠발라야는 춤을 시작했다. 춤은 천천히 시작되었다. 그녀는 온몸을 푸른 베일로 덮었다. 얼굴까지 감쌌다. 마치 달과 같았다. 부드러운 구름에 싸인 달과 같았다. 구름 한 조각이 비껴갔다. 구름의 터진 틈으로 달의 푸른 빛이 새어나왔다. 춤은 차츰 빨라졌다. 베일이 조금씩 조금씩 떨어졌다. 그녀는 빠르게 돌았다. 점점 빠르게… 그녀는 눈이 어지러울 만큼 격렬하게 돌았다. 그러다 마침내 기둥처럼 우뚝 멈추어 섰다. 그녀의 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구경군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눈은 이글이글 타며 대담하게 빛났다. 붓다가 입을 열었다.
“불쌍한 여인이다!”(198)
우리에게, 그녀는 욕망의 폭풍 속에서 흰 기둥으로 빛나는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다. 붓다는 그 욕망의 아름다움을 단 한 마디로 쓰러뜨린다. 붓다의 존재는 높은산 호수처럼 투명하고 전기작가의 시적인 터치는 파도처럼 아름답다. «카필라의 아침»에는 비교적 여인들의 일화가 많이 등장한다. 저자는 신화적인 일화들을 소개하는 것 못지않게 붓다의 인간적인 면모도 많이 드러내고 있다. 여인의 자궁 속에서 태어난 붓다의 이야기는 처음 접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서양인이어서 기독교의 처녀 마리아와 대비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것같다.
붓다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이런 날이 있으리라. 붓다가 왜 여인의 자궁에서 태어났을까?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완벽하게 청정한 가운데 탄생하지 않고, 여인의 자궁에서 태어난 것을 문제로 삼을 것이다. 그들은 과연 붓다는 초인의 힘을 가졌을까 의심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아난다! 최고의 지혜를 구하는 이는 여인의 자궁 속에서 나와야 한다. 세상에 대해 가엾은 마음을 일으키며 세상 속으로 태어나야 한다. 만일 그가 하늘의 신이라면 이세상에서 어떻게 진리의 바퀴를 굴려갈 수 있겠느냐?”(221)
«카필라의 아침», 이 시적인 전기는 이렇듯 짧은 서술로 깊고 넓게 이야기하고 있다. 퍼디난드 해롤드는 이 책 이외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이런 책이 숨어 있다는 것도 이렇듯 훌륭한 저자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것도 서럽다.
비구들이여, 결코 낮은 땅에서 머물지 말라. 낮은 땅은 평범한 이의 땅이다. 낮은 땅은 불행한 이의 땅이다. 지혜의 높은 산으로 오르라. 진리의 높은 산으로 오르라. 산의 높은 이마 위에 서라! 산의 높은 이마 위에 서라!
비구들이여, 모든 목숨을 사랑하라. 나서 죽는 목숨을 가엾게 여기라! 나서 죽는 모든 것을 서럽게 여기라!(220)
선생님 글을 읽으니 인간은 ‘예술하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예술이 없는 종교가 가능할까..하는 뜬금없는? 생각들이 떠오릅니다…인용하신 표현과 아잔타 석굴 벽화가 너무 아름다와서요^^
아잔타 석굴 벽화 아름답지요? 내면의 상태는 외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인데, 첫째는 얼굴이요 둘째는 예술이요 셋째는 글인 듯합니다. 저런 시적인 표현들로 풍요로웠던 정신들만이 내놓을 수 있는 그 뭔가가 바로 저런 벽화가 아닐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