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꽃

안개꽃

연애하던 시절에 아내에게 꽃을 사 두어 번 선물했던 듯하다. 결혼한 뒤로는 결혼기념일 같은 때 선물해 준 적은 있어도 평소에는 꽃을 사본 기억이 없다. 비교적 꽃이 많은 동네에서 근무를 하는 아내가 가끔씩 꽃을 사오는 편인데, 꽃을 사 들고 오면 집에 있는 백자 항아리에 꽂아놓는다. 아내가 꽂아놓은 꽃을 보노라면 보는 맛이 상쾌하고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하다.

어느 날은 안개꽃과 다른 꽃을 같이 사오길래 흔한 꽃다발처럼 안개꽃을 섞어서 꽂으려니 했는데, 안개꽃만 풀어헤쳐 흐드러지게 꽂아놓았다. 안개꽃이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자신의 안목이 만족스러운 듯 아내는 얼마 전 구입한 DSLR 카메라를 집어들더니 몇 장을 찍었다, 오오, 이런 멋진 사진까지 남기시다니!

렌즈 초점거리 한계를 벗어나 너무 가까이서 찍은 듯한데, 조그만 디스플레이 화면으로는 사진이 흐릿하게 찍힌 것이 안 드러났나 보다. 흐릿하기에 멋진 이 사진을 찾지 않는 걸 보니 말이다. 안개꽃의 정체를 잘 드러냈다고나 할까. 그런데 일상 속의 정체를 뒤집는 이들이 있다. 예술가들이다.

 

도상봉의 정물화는 흐트러짐 없는 엄정함이 느껴진다. 사실 안개꽃만큼은 그 어떤 엄정함과도 관계가 없을 성싶은데, 도상봉의 손을 거치면 그 안개꽃조차도 엄정하게 부풀어오른다. 부풀어오르는 사물이 공간을 무겁게 장악하는 것이다. 예술가의 손은 이렇듯 고집이 있다. 단일한 질서로 세계를 재편해 내는 솜씨와 고집은 때로는 불편함을 주기도 하지만, 그런 불편함을 원하는 고급 욕망들이 있다.

꽃 그림이 나온 김에, 워홀의 꽃 그림 하나. 예술사에서의 평가와는 별도로 나는 팝 아트를 선호하는 쪽은 아닌데, 워홀의 이 그림은 감동적이다. 이런 그림들을 보노라면 워홀이라는 작가의 감각이 얼마나 천재적인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자본의 증식과정 자체를 예술화시킨 예술사적 위상과는 별도로 그의 감각은 감히 넘볼 수가 없을 듯하다. 그가 겨냥한 ‘피상성’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면 나는 그것에 대하여 경이로움을 표하고 싶다. 그나저나 아내의 사진 아래에 이런 명작들을 나란히 놓는 바람에 미안하게 됐다.

워홀꽃

안개꽃”에 대한 6개의 댓글

  • 안개꽃은 그 수채화 같은 모양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저 혼자 나서는 법도 없으면서 은은하게 흔들리는 모습도. 10년도 더 전에 안개꽃 한 다발에 장미 한 송이를 꽂아 누군가에게 선물한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장미 없이 안개꽃만 선물할 것을 그랬나봐요.
    지금 보니 오픈 아이디가 지원되어 계정에 추가했습니다. 그런데, 로그인 창 아래에 ‘선생님의 …’라고 쓰인 문장이 아름답습니다. 실은 ‘OOO 님’ 보다는 ‘OOO 선생님’이 맞다고 오래도록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사람들이 좀 어색해해서 부득이 앞엣것대로 쓰는 경우가 많지만요. 혼자 쓰는 ‘님’도 ‘아소, 님하’나 ‘님의 침묵’에서 보듯 ‘내가 사랑하는 그분’이지 요즘 2인칭 존칭(?)처럼 쓰이는 ‘님’, ‘님아’와는 다르거든요… 선생님이라는 부름말이 아름다워서 말이 길어졌네요… 하지만 오픈 아이디를 사용하면 아쉬워도 그 ‘선생님’이라고 쓰인 화면은 그냥 지나쳐야하겠군요.

    stryperz
  • 안개꽃은 다른 꽃과 엮이면 조용히 숨는 듯합니다. 그 다른 꽃이 단 한 송이 꽃이어도 말입니다. 꼭 우리나라 고가구 같아요. 무얼 얹어놓아도 얹어놓은 기물을 돋보이게 하거든요. 그런데 정말 그렇게 뒤로 숨는 것들이 전면에 나설 때는 그 어떤 것보다도 청신하고 아름답습니다.

    고싱가
  • 안개꽃은 고가구 같은 꽃이군요!! 새로 정비된 집이 깔끔한 게 북한산 아래 거주하는 집 같습니다. 산이 바라다보이는 자리 어디에 안개꽃이 고가구처럼 놓여있겠군요. 우리동네 뒷산에는 십년쯤 된 산목련이 처음으로 오직 하나 꽃을 피웠더군요. 희고 흰… 집목련보다는 작고 단단하면서 흰 빛이 맑지요. ^^

    강물
  • 산목련이 훨씬 이쁘겠네요. 산목련을 보는 눈은 참 개운하겠어요. 요즘 북한산과 정릉마을은 꽃이 막 터지는 시기입니다. 골목마다 집집마다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 목련이 피고 있고요. 북한산 숲에는 진달래가 듬성듬성 피어나면서 동산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하아-, 필름카메라를 처음 들고서 진달래를 찍던 시절이 생각나는군요.

    고싱가
  • 안개꽃이 다른 꽃의 배경이 되는것 보다 주인공으로 보는게 좋아서 다른 꽃과 섞지 않고 항상 안개꽃 자체만을 듬뿍 꽂아 왔는데 제 취향과 부인의 취향이 비슷해서 참 반갑습니다.(^-^)

    자등루
  • 안개꽃을 환하게 다루시는 분이 또 계셨군요. 반갑습니다.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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