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같은 것은 시로 지어진 바 없으며, 느껴진 바도 없으며, [수난으로] 치러진 바도 없을 만큼, 어느 신, 어느 디오니소스가 톡톡히 [수난을] 치르고 있다. 빛 속에서의 태양의 고립무원을 [노래한] 그러한 디튀람보스에 대한 답은, 아리아드네일 터이니 . . . 나 이외에 그 누가 아리아드네가 무엇인지 알겠는가! . . . 그러한 모든 수수께끼에 관하여 어느 누구도 이제까지 해답을 얻지 못했으니, 과연 여기에서 그 누가 수수께끼를 보기라도 했을지 의심스럽다. — 차라투스트라는, 엄격하게, 사람들이 의미에 대하여 잘못 파악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과제를 규정한 바 있으니 — 그것은 또한 나의 과제이기도 하다 —: 그는 모든 과거의 것을 의롭게 하기까지, 심지어 구원하기에 이르기까지 긍정한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미래의 파편들 사이를 거니노라: 그 미래는 내가 관조하고 있는 미래.
그리고 파편이요 수수께끼요 경악스러운 우연인 그 무엇을 하나로 시 짓고 모아들이는 것이, 나의 시작(詩作)과 노력의 모든 것이어라.
그리고 인간이 시인도 아니요 수수께끼를 푸는 자도 아니요 우연의 구원자도 아니기라도 하다면, 내 어찌 인간이기를 감당하리오?
과거의 것들을 구원하고 모든 “~였다”를 “내가 그러기를 의욕했다!”로 재창조하는 것 — 이것이 내게는 비로소 구원을 뜻하노라.
또 다른 곳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에게만큼은 “인간”이 무엇일 수 있는가를 — 사랑이나 동정의 대상일 수는 없음을, 가능한 한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 또한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에 대한 커다란 구역질을 극복했다: 그에게 인간은, 조각가가 필요한 비정형(非定型)이요, 재료, 흉한 돌이다.
더 이상 의욕하지 못함과 더 이상 평가하지 못함과 더 이상 창조하지 못함: 오, 이런 커다란 피로는 언제나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지니!
인식할 때에도 나는 오직 내 의지의 생식욕망과 생성욕망만을 느낀다; 그리고 내 인식에 무구함이 있다면, 이는 생식을 향한 의지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 의지가 신과 신들로부터 떠나도록 나를 유인했다; 도대체 무엇이 창조될 수 있으리오, 만일 신들이 — 현존하기라도 한다면!
그러나 그것은, 나의 열렬한 창조의지는, 언제나 새롭게 인간에게로 나를 휘몰아간다; 이렇듯 돌을 향하여 망치를 휘몰아친다.
아, 너희 인간들이여, 돌 속에는 나의 상(像)이 잠들어 있어라, 상 중의 상이! 아, 그 상이 더없이 단단하고 더없이 흉한 돌 속에 잠들어 있어야만 하다니!
이제 나의 망치는 그 상의 감옥에 대항하여 잔혹하게 광란한다. 돌에서 돌가루가 흩날린다: [그러나] 어찌 이것이 나의 관심이겠느냐?
나는 그것을 완성하고자 하노라: 어느 그림자가 내게 왔던 것이다 — 만물 중에서 더없이 고요하고 더없이 가벼운 것이 언젠가 내게 왔던 것이다!
초인의 아름다움이 그림자로서 내게 왔던 것이다. 아, 형제들이여! 그러니 내가 무엇을 더 하겠느냐, — 신들로! . . .
나는 마지막 관점을 강조하겠다: 밑줄 그은 행[번역문에서는 굵은 서체의 행]이 그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망치의 단단함이, 결정적인 방식으로 파멸시키려는 욕망 자체가, 디오니소스적 과제를 위한 전제조건에 해당한다. “단단해지거라!” 하는 명령은, 창조하는 자들은 모두 단단하다는 것에 대한 최저변의 확실성은, 디오니소스적인 본성 본연의 표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