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 유형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생리학적 전제를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그 전제는 내가 위대한 건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는 이 개념을 “즐거운 학문” 제5부 결론 절들 중 어느 한 절에서 이미 밝혔던 것보다 더 낫게, 더 개인적으로(persönlicher) 밝히지는 못하겠다. 그 대목은 이렇다: “새로운 자들, 이름 없는 자들, 이해하기 힘든 자들인 우리는, 아직 입증되지 않은 미래의 조산아들인 우리는, 새로운 목적을 위하여 새로운 수단, 즉 기존의 그 어떤 건강보다 더 강하고 더 기민하고 더 굳건하고 더 과단력이 있고 더 쾌활한 건강, 새로운 건강이 필요하다. 기존의 가치들과 소망들의 전모를 체험하고 이 이상적인 “지중해”의 모든 해안을 항해하기를 갈구하는 영혼을 가진 자, 가장 독자적인 경험의 모험들을 통해 이상(理想)의 정복자와 발견자가 어떤 기분인가를 알기 원하는 자, 그와 마찬가지로 예술가·성자·입법자·현자·학자·경건한 자·옛 풍습처럼 신성하게 제정신을 벗어난 자(Göttlich-Abseitiger)가 어떤 기분인가를 알기 원하는 자, 그가, 그것을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하나, 위대한 건강이다
—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획득하고 있는 것이며, 또 획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까닭은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거듭거듭 포기하고 있는 것이며, 또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 . 그러므로, 이상(理想)의 아르고호 선원인 우리가 오래도록 그런 경로를 거친 뒤에, 이제는 아마도 영리하기보다는 용감할 것이며, 수시로 난파 당하고 부상을 입게 되었을 것이지만, 이미 말했다시피, 사람들이 우리에게 용인하고 싶은 정도보다 더 건강하며 위험할 정도로 건강하며 거듭거듭 건강하나니 — 마치 그에 대한 보상으로서,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한 땅을, 누구 하나 경계조차 예측하지 못한 땅을 우리 앞에 소유한 듯하게 되나니, 그곳은 이상(理想)의 기존 모든 땅과 구석의 저편이요, 아름다운 것·낯선 것·의문스러운 것·두려운 것·신성한 것으로 차고넘쳐서 우리의 호기심과 우리의 소유욕이 정도를 벗어나고 마는 세계이다 — 아아, 이제 우리가 더 이상 그 무엇을 통해서도 흡족함에 이를 수 없다니! . . . 그러한 전망 이후에, 그리고 앎과 양심에서 그토록 격한 허기를 지닌 채, 어찌 우리가 현재의 인간으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진정 독하지만 불가피하게도 이제 우리는 현재 인간의 가장 존귀한 목표들과 희망들을 지독히 고집스러운 진지함을 가지고 쳐다보고는, 아예 더 이상 쳐다보지 않게 되리라 . . . 어느 다른 이상이 우리 앞으로 달려오고 있으니, 경이롭고 유혹적이고 위험천만한 이상이다. 우리는 그 어떤 자도 그 이상을 두고 설득하고 싶지 않다. 그 까닭은 우리는 그 어떤 자에게도 이것에 대한 권리를 쉽사리 승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소박하게, 그러니까 예기치 못하게 유희하며, 풍요와 권력이 흘러넘치는 가운데 이제까지 ‘성스럽다’, ‘선하다’, ‘불가침이다’, ‘신성하다’고 칭한 모든 것과 더불어 유희하는 정신의 이상[에 대한 권리를 쉽사리 승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정신에 비하자면, 군중이 당연하게도 그들 자신의 가치척도로 삼고 있는 최고의 것이 숫제 위험, 타락, 비천함 따위를 뜻하기 마련이며,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회복, 맹목, 잠정적인 자기망각 따위를 뜻하기 마련이다; [그 유희하는 정신의 이상은] 인간적인-초인적인 복된 존재와 복된 의욕의 이상으로서, 빈번하게 진정 비인간적으로 비칠 때가 있는 바, 예컨대 그 이상이 ‘몸짓·말·소리·시선·도덕·과제’를 빌어서, 그리고 ‘그것들의 가장 생생하고도 비자의적인 패러디’를 빌어서, 기존 지상의 진지함 전체와 함께 나란히, 기존의 온갖 엄숙한 것들과 함께 나란히 제시될 때 그렇다 —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위대한 진지함이 처음으로 부각되고 본연의 물음표가 처음으로 제기되리니, 영혼의 운명이 회전하고, 시계바늘이 움직이고, 비극이 시작된다 . . . ”
3.
— 19세기 말의 어느 누가, ‘강한 시대의 시인들은 무엇을 두고 영감이라 불렀을까’에 관하여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겠는가?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내가 그것을 기술하겠다. — 사람들 안에 최소한이나마 미신의 잔재가 남아 있기라도 하다면 [그것이] 위력적인 폭력들의 한낱 화신, 출구, 매개체에 불과하다는 관념을 물리치기 어려우리라. 돌발적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확실성과 섬세함을 띠고, 그 뭔가가, 즉 누군가를 가장 깊은 곳에서 뒤흔들고 뒤집어엎는 그 뭔가가 보이고 들리게 된다는 의미에서의 계시의 개념은, 단순히 실제상태(Thatbestand)를 기술할 따름이다. 듣지만 찾지 않는다; 취하지만 누가 거기에서 주는가를 묻지 않는다; 하나의 사상이 번개처럼 번쩍인다, 필연성을 띠고, 머뭇거림이 없는 형식으로, —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나의 황홀함이 있으니, 그것의 엄청난 긴장은 때로 눈물의 홍수로 녹아흐르며, 그것과 함께 발걸음은 예기치 않게 어느새 휘몰아치다가도 어느새 느려지게 된다; 하나의 완벽한 무아지경(Ausser-sich-sein)이 있으니, 발가락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미묘하게 바들거리고 찰랑찰랑 흘러넘침을 가장 뚜렷하게 의식한 채이다; 하나의 행복의 심층이 있으니, 그 안에서는 가장 고통스럽고도 암울한 것이 대립으로 작용하지 않고 도리어 바로 그 흘러넘치는 빛(Lichtüberfluss) 내부의 필연적인 색채로서 요구되며 전제된다. 리듬 상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본능이 있으니, 그 본능은 형식들의 드넓은 공간에 펼쳐져 있다 — 그 [공간의] 길이는, 드넓게 펼쳐진 리듬에 대한 욕구는, 영감의 폭력을 재는 척도에 가까우며, 그 폭력의 압력과 긴장에 맞선 일종의 대응이다 . . . 모든 일이 최고도로 비의도적으로 벌어지되, 마치 자유 감정의, 무조건적인 존재의, 권력의, 신성의 폭풍 속에서처럼 벌어진다 . . . 영상, 비유의 비의도성은 가장 희귀한 일이다; 사람들은 영상이 무엇이고 비유가 무엇인지 더 이상 개념을 얻지 못하리라. 모든 것이, 가장 가깝고 가장 바르고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주어졌다. 실제로,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회상하건대, 사물들이 스스로 다가와 비유가 되어주기라도 한 듯하다 (— “여기에서 모든 사물들이 쓰다듬으며 너의 설법을 향해 다가오고 너에게 살랑댄다: 그것들은 너의 등에 올라타고 싶은 것이다. 너는 여기에서 저마다의 진리를 위하여 저마다의 비유에 올라탄다. 여기에서 너를 위하여 모든 존재의 말이 문득 열리고 말의 상자가 문득 열린다; 모든 존재는 여기에서 말이 되고자 한다, 모든 생성은 너로부터 설하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 —”). 이것이 나의 경험이다;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 경험이기도 하다”라고 내게 말해도 되는 자, 그 누군가를 찾으려면 수천 년을 거슬러가야 한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