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신이여 마음대로 비를 내리소서 — 경주남산에서

경주남산. 살아본 적도 없고 가본 적도 없는데, 뭔가가 있어 나를 부르는 듯한 곳. 경주남산의 지도를 훑으면 마음속에 그어지는 굵직한 궤적들. 그 숲길, 내가 나 아닌 분들과 함께 걸어가는 길, 그 길을 그려보자니 마음은 하늘거린다. 부디 이 산하에 비가 내리시라. 비에 씻긴 하얀 꽃잎처럼 마음 얇아지고 투명해지리이다.

남산행을 앞둔 전날 저녁부터, 비는 산하의 수풀과 바위와 흙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남산의 몸뚱이는 밤새 깊이 젖어들고, 그 몸뚱이에 기대어 있는 탑, 마애불, 석불, 보살 들도 그에 일체가 되어간다. 경주남산을 드는 날 아침, 간밤에 중부지방을 강타한 폭우소식이 들려오고, 숙소 창밖으로는 사선으로 몰아치는 빗줄기가 보인다. 모든 것이 비를 맞고 있다. 이 산하의 모든 산과 모든 강이, 중부지방도 천년고도도, 바위도 풀도 나무도 흙도, 물도 바람도 비를 맞고 있다. 내 귀도 비를 맞고 있고 내 눈도 비를 맞고 있다. 모든 것이 일체가 된 시간, 비밀로 가득 찬 경주남산 초행길에 나선다.

 

삼릉 배리삼존불, 그분들을 친견하고 싶었건만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리하여 그 미소, 내게는 더 심오한 비밀로 남아 있다. 숲으로 간 수행자들의 끝없는 흔적처럼, 그 미소, 끝없이 내 몸뚱이를 감도는 바람이 되소서, 간절히 기원해 본다. 결국 경주남산에서 첫 대면한 석불은 “목이 없는 석불좌상”이다. 언뜻 끔찍한 느낌. 목이 떨어져나가고 무릎이 깨졌는데도, 그러나 그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고 위의威儀 단정하여 옷주름과 매듭조차 단아하기 짝이 없다.

조선시대의 훼불은 어쩌면 현대의 잔인함을 능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잔인함에 의해 훼파된 석불은 몸이 훼손될지라도 구해야 할 그 무엇이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왜 하필 목이 없는 석불이 경주남산의 그 어떤 석불보다도 위의 단정한가? 하도 단정하여 목이 없는 처절한 상황조차 오히려 아무 일 없는 듯한 상황으로 비칠 정도이다.

몸뚱이를 이루는 것들은 원래 주인이 없으니
몸도 정신도 본래부터 비어 있는 것.
장차 내 머리가 흰 칼날 위에 실리겠으나
이는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으리.

四大元無主 五陰本來空
將頭臨白刀 猶似斬春風

권력자들과 같은 길을 가기를 거절했던 중국의 승조스님은 이 게송을 남기고 목숨을 잃었다. 그분의 나이 서른 한 살. 천재라고 추앙받았던 수행자가 그렇게 봄바람의 전갈을 남기고 사라졌다. 어머니가 자식을 목숨 바쳐 수호하듯 목을 떨어뜨려서라도 수호해야 할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이기에, 그렇게, 승조스님처럼, 바로 이 석불처럼 의연한 것일까. 이러한 분들의 생애 앞에 서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서성일진저, 오늘처럼 억센 빗줄기 아래, 어두운 숲속에서 서성일진저.

 

목이 없는 석불의 의연함을 지켜보았다는 듯, 근처의 마애관음보살상은 무심한 듯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다른 마애불의 상호가 반개한 눈으로 엄숙히 응시하는 듯하다면, 이 마애보살상의 상호는 마치 봄바람을 쐬고 있는 듯 홀가분하다. “미스 신라”, 참 멋진 표현이다. 모든 이름은 그 이름을 부여한 자들의 세계관과 감정을 담고 있다. 이 마애보살상에 붙힌 “미스 신라”라는 이름은, 삶의 고통을 털어버리고 다른 세계로 건너간 생들에 대한 부러움과, 그 세계는 자신들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라는 아련한 느낌과, 그 세계는 아름다울 것이라는 육감적 감정을 담고 있다. 이러한 범속한 감정들은 석불과 마애불을 조성했던 석공의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가, 이 마애불은 갸름하고 도톰하고 어렴풋하다. 이제 막 풋잠에 든 듯하다.

비가 내릴지라도 잠드소서. 타오르던 모든 불길이 꺼지고 청결하게 씻긴 거룩한 몸과 마음이 되소서. 그리하여 아름다우소서. — 이 비원을 “미스 신라”라는 이름 위에 실어본다.

 

남산 냉골을 타고 올라가는 길에는 평상의 산을 오르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자꾸만 어디선가 뭔가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다. 더구나 숲은 어둡고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그 서성이는 순간에 눈앞에 드러나는 마애불, 석불은 생기 있는 생명체와 다름이 없다. 아니, 내 마음속에 깊이 숨어 있던 그 뭔가가 벌떡 뛰쳐나가 생생한 조형, 생생한 선형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그들이 있어 남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수행자의 세계, 내면의 세계가 재편한 질서가 된다.

냉골의 선각마애불은 소나무숲의 암반에 모셔져 있다. 자못 가칠하고 둥근 선형은 주위 솔잎과 바윗골의 선형을 닮아 있어, 자연의 위대한 필치가 어디선가 나타나 암반에다 슥슥 그어놓은 듯하다. 영창에 비치는 댓잎의 그림자처럼, 선각마애불은 자연에 비친 수행자의 그림자와도 같다. 사운거리는 댓잎의 그림자, 어른거리는 정각자·수행자의 흔적. 그것은 어떤 사람들의 마음에 비치는 그림일까. 선각육존불은 보는 이들의 마음에 인간의 운명적 그림자로 비치고 있지만, 마음을 단속하지 못하고 허술하게 살아가는 나는 그 그림을 아지 못하고 있다.

 

상선암 마애불. 바윗덩이들이 켜를 이루며 한덩이 한덩이 벼랑을 향해 나아가다가 마침내 벼랑 앞에 이르러 마애불을 스르르 내세운 듯하다. 마애불은 바윗덩이들의 흐름을 탄 연장선의 끝마무리로 자리잡고 있다. 잔영을 남기고 사라지는 영상처럼, 바윗덩이들은 마애불을 남겨놓고 뒤로 물러난다. 이제 우리 앞에는 육중한 바윗덩이들이 이루어놓은 정각자 혹은 수행자가 있고, 그 수행자는 반개한 눈으로 선정에 들어 있다. 그러나 상선암 마애불도 자연의 일부이고 정각자의 선정도 자연의 일부인 듯하다. 수행자의 깨달음은 비처럼, 바람처럼, 바위처럼 천연하다. ‘내’가 사라져야 깨달음이 오듯, 자연 속으로 퍼져들면 인간의 궁극, 자연의 궁극이 완성될 것인가. 마애불은 얼굴 오른편 산아래로 인간의 들녘을 두고 선정에 들었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맞은편 산을 향하고 있다.
 

비가 내린다. 남산은 하얀 비구름에 온통 휩싸여 있다가 간혹 속살을 드러내듯 몸을 드러내고 있다. 세계가 하나로 묶여졌다가 풍경이 홀연히 새록새록 드러나는 산행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산행이기에 아름다울 뿐, 현실에서의 폭우는 또 얼마나 가혹할 것인가. 이 폭우는 누군가에게는 폭력이고 누군가에게는 자연의 혜택인 것인가. 자연의 흐름은 탈가치적이고 탈도덕적이다. 비와 햇빛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가리지 않고 내리지 않던가. 우리는 우리가 신봉하는 가치와 도덕을 유지하기 위해, 혹은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혹은 권력과 권력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연의 모든 흐름을 장악하려 하고 거기에 가치를 입히려고 한다. 자연은 근본적으로 무상(無償)인데, 인간 의식은 근본적으로 유상(有償)인 것이다. 그러나, 도덕경 구절을 빌면,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그러므로 천지는 인자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자아가 한 덩어리 욕망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그 자아의 실현이 욕망의 구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나는 거의 사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소비해야 했다. 학자들은 현세적 욕망과 지적 욕망을 엄격히 구분하려는 경향이 강하고, 성직자들은 범속함과 신성함을 구분하려는 경향이 거세지만, 그 구분하려는 경향 자체가 한 덩이 욕망에 불과하고 지극히 세속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어떤가? 나는 그동안 너무나 두터운 편견에 사로잡혀 살아오지 않았던가? 누가 지적 욕망과 종교적 형식을 성스럽다 하고 누가 어미의 새끼보호를 천하다 하는가?
 

석불좌상

경주남산 숲속의 석불좌상, 폭우의 선율을 듣고 있다.

비가 내린다. 남산의 숱한 석불들과 마애불들이 쏟아지는 폭우를 맞고 있다. 성스러운 존재라면 그들의 존재에 값하는 집, 가령 감실같은 것을 마련해 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고대인들은 그 존재들을 자연 속에 내맡겼다. 비가 오면 비에 낱낱이 드러나도록 했고 해가 나면 해에 낱낱이 드러나도록 했다. 석불과 마애불은 그래서 자연인이다. 비록 그들이 세속적인 이들에 의하여 성스러운 존재로 추앙받을지라도 그들은 자연에서 돌출된 존재가 아니라 자연 속으로 잦아드는 존재이다. 돌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비를 맞으면 마모되어야 하고 벼락을 맞으면 허물어져야 하고 인간의 폭력을 받으면 깨져야 한다. 그런 존재들야말로 고대인들이 생각한 높은 존재들일 것이다.

물론 나는 고대인들의 생각을 잘못 짚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 세계에 살면서 고대인들의 생각에 가탁해서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 현대인의 사고방식과 가치체계와 언어세계는 빈틈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며, 또 그것을 불굴의 자랑으로 삼으며, 또 동시대의 위인들을 알아보지도 알아듣지도 못한다. 거미줄과도 같은 그 촘촘한 언어와 가치의 체계들, 그러나 참으로 허약한 체계들을 사뿐히 넘어서려면 고대의 세계로 들어가면 된다. 예로부터 대부분의 철인들은 당대의 사람들과 생각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옛것을 찬탄하며 운위했다. 이는 당대인의 서사구조나 서술구조에 강제편입되는 것을 방어하는 가장 간단한 방식인 것이다.

현대인의 사고방식, 삶의 방식과 지속적인 불화를 겪고 있는 나 역시 언제나 고대로의 여행을 꿈꿀 수밖에 없고, 그 여행은 다름아닌 내면으로의 여행이 된다. 그런데 고대의 석불들과 마애불들이 폭우를 맞고 있다. 깊은 숲으로 들어간 수행자들이 자연의 흐름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놓아버렸기에 이 폭우를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대로 맞을 수 있는가.

빗물은 땅위로 쏟아져내리고 바람은 휘날리며, 번갯불은 하늘을 달린다. 그러나 나의 사념은 고요히 가라앉았고 마음은 고즈넉하다. (장로게 50)

아름다운 선율로 천신은 비를 내린다. 내 거처는 지붕도 잘 이었고 바람도 가려 쾌적하다. 그리고 내 마음은 육신을 관찰하는 일에 전념하여 잘 안정되어 있다. 자, 신이여, 마음대로 비를 내리소서. (장로게 51)

  «비구의 告白 비구니의 告白»(민족사, 1991)

안거 제도가 우기를 맞아 마련되었고, ‘피안’이라는 용어도 강물이 불어났을 때의 ‘안전한 건너편 언덕’에서 유래했으니, 인도 역시 우리나라처럼 비가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장마철이 있었던가 보다. 위의 인용게에서 보듯 초기불교의 인도 수행자들 역시 폭우에 익숙하다. «장로게경»에는 “아름다운 선율로 천신은 비를 내린다”로 시작하여 “자, 신이여 마음대로 비를 내리소서”로 끝맺는 짧은 형식의 게가 여러 편 더 있다.

그들은 폭우가 내릴지라도 전념하여 몸을 관찰한다. 몸을 관찰하는 일은 그동안 몸뚱어리가 언어와 의식에 끌려 노예처럼 살아왔음을 간파하면서 이루어진다. 나의 주인은 과연 무엇인가? 나의 생각인가? 나의 몸인가? 몸은 무엇인가? 이 몸뚱이가 무엇인가? 이런 물음들은 점점 더 ‘나’라는 존재의 허구성으로 나아간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의식과 관념들은 얼마나 허구적이며, 그 허구에 이끌려 살아왔던 나 또한 얼마나 허구적인가?

사실 감옥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맞딱뜨리게 되는 게 뭐냐 하면 한 평짜리 방에서 생활하는 건데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방안에 혼자 딱 앉아 있으면 마주치는 게 뭐냐 하면 자기 몸입니다. 자기 몸밖에 갖고 놀 게 없어요.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작고하신 김남주 시인이 쓰신 시 중에 이런 시구가 있습니다. “감옥에 가 본 사람은 안다. 감옥에, 독방 안에 할 일이 얼마나 없는지, 독방에 앉아서 자기 몸의 일부를 붙들고 흔드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다.” 조금 말을 돌려서 표현했지만 사실상 그렇습니다. 거기서 자기 몸을 관찰하게 됩니다. 딴 건 할 게 없으니까. 도대체 이 몸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생겨 먹었으며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 그걸 관찰하게 됩니다. 저는 생태주의를 여기서 출발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생태주의자는 들판에 나가서 자연을 관찰하고 새와 벗하고 이래서 생태주의자가 된다, 이게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생태주의자는 자기 몸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황대권, <뿌리내리기>(«녹색평론» 제62호)에서

자기 몸을 관찰하는 일은 다른 인간을 낳는다. 그 관찰은 혹은 생태주의자를 낳고 혹은 수행자를 낳고 혹은 정각자를 낳는다. 그들은 모두 이세계에서 저세계로 건너간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나’가 없거나 ‘나’가 매우 적다. ‘나’가 없어지는 것이 자연이 되는 것이며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폭우가 내릴지라도 마음이 고요하다. 그들은 비가 쏟아질지라도 그 소리의 아름다움을 들을 줄 아는 귀가 있다. 이세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겠으나 그들에게는 폭우가 “아름다운 선율”이다.

폭우 — 그 아름다운 선율, 그 누가 들을 줄 알았으랴! 들을 줄 아는 귀가 있는 그들에게 폭우는 시각적이기보다는 도리어 청각적이며, 더 나아가 폭우는 소리로만 존재한다. 소리가 온몸을 뚫고 들어온다는 것, 내가 폭우의 선율 아래 안개처럼 흩어진다는 것, 내가 없기에 끌려다닐 존재도 없다는 것, 흔들릴래야 흔들릴 마음이 없다는 것.
 

과연, 경주남산의 석불들과 마애불들은 폭우의 선율을 듣고 있는 것이었던가! 숲은 어둡고 바위와 길은 미끄럽고 몸은 젖었지만, 폭우 속에 좌정하는 수행자들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희유한가! 그들은 내게 말한다, 소리로 존재하시라. 그대 많은 희망과 열망을 간직하고 있을진대, 더욱 소리로 존재하시라. 너의 희망과 너의 열망에 속지 마시라. 그것은 너를 노예로 만드는 것들이며, 그것은 너를 너로 존재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몸뚱이를 이루는 것들은 원래 주인이 없으니/ 몸도 정신도 본래부터 비어 있는 것”, 네가 존재한다는 것은 너를 부릴 주인이 존재한다는 것, 그러므로 너로 존재하지 말고 폭우로 존재하시라. 네가 소리로 존재해야 폭우는 아름다운 선율이 되리니, 그 때는 “자, 신이여 마음대로 비를 내리소서”, 말할 수 있으리라.

“아름다운 선율로 천신은 비를 내린다 . . . 자, 신이여, 마음대로 비를 내리소서”의 짧은 게송은 이렇듯 큰 것을 말하고 있고, 폭우 속의 석불좌상은 이렇듯 큰 것을 살고 있다. 그리하여 남산 초행길은 크고 나는 작다. 폭우소리가 남산 숲을 흔드는 이 짧은 날은 내 생애에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 그리고 이 짧은 날을 아쉬워하며 폭우소리로 존재하지 못할 날들은 또 얼마나 길 것인가!

(※ 이 글은 2006년 7월에 쓰고 2007년 6월에 마무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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