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 20여명이 비장한 표정으로 ‘인문학 위기’를 선언했다. “무차별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으로 인문학의 존립근거가 위협받고 있다”고 선언한 것을 두고 우리는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교수의 위기”라는 촌평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이 선언은 학술진흥재단의 “기금”을 확보하기 위한 작품이라는 비판도 있다.
기실 “인문학의 위기”는 제도권 밖에서 인문학을 하는 이들에겐 실감이 되지 않는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다른 직업을 통하여 밥벌이를 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런 부류 중 한 사람이다. 그래서 인문학의 위기가 내게는 그토록 낯설고, 그 선언 자체가 반인문적으로 보인다. 인문학을 하는 선생들이 그토록 우중충한 표정을 띨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슬펐다. 좀더 맑을 수는 없을까? 좀더 고귀한 모습일 수는 없을까?
시대가 변하고 있다. 박사급 수준의 인문학도들이 제도권 밖으로 쏟아져나오고 있다. 각 개인의 살림을 살피자면 불행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현상은 오히려 한국사회를 윤택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때를 맞춰, 그간 제도와 권력의 길을 따라 소통되었던 것들이 웹이라는 마당을 통하여 자유롭게 소통되고 있다. 제도와 재야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있고, 프로와 아마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전공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이채훈 피디의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호미, 2006)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출현했다. 방송국 피디가 음악가와 관련한 책을 냈다는 것을 두고 많은 이들이 그 수준을 의심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이 책이 얼마나 모차르트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글인가를 알게 된다면, 그 의구심을 가졌던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할 것이다. 더불어 이런 부류의 책은 음악가에게서도 나올 수 없고 음악학자에게서도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소위 ‘프로페셔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지에서 구한 음악 책을 보니 놀랍게도 빈 필하모닉의 가장 큰 특징은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나와 있었다. 세계 최고의 악단이’아마추어’ 같은 자세로 한다니 이상하게 들릴 법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돈을 벌기 위해서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추어와 같은 순수한 음악 사랑으로 연주한다는 뜻이었다. 페터 베히터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음악을 취미로 하시는군요.” 베히터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빈 필하모닉에 처음 가입한 40년 전부터 지금까지 저는 언제나 기꺼이 취미로 연주하고 있습니다.”(178)
취미? 아마추어? 아마추어는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댓가를 바라서도 아니요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오직 자신이 하고 싶기 때문에 한다. 사실 모든 예술은 그 마음이 바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출발점에 서면, 격식도 형식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예술가가 아마추어의 그 마음을 잃으면 기계적인 연주가 되기 십상이며 예술의 본질을 잃고 격식에 갇히기 마련이다.
빈 필하모닉은 바로 그 마음을 항상 유지하려고 “마음에서 마음으로”라는 모토를 걸었던 것이고, 이채훈의 생각을 빌면, 그런 자세가 있었기에 국내에서 상암축구경기장에서 연주하는 파격을 선보였을 것이다. 모차르트 역시 듣길 원하는 자들이 있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피아노 연주를 해 주었다. 현대 예술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파격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예술가의 자세가 아닐까?
이채훈은 아마추어리즘이라는 예술의 본질 안에서 유랑하고 있다. 그는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이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과 동의어”(91)라고 여기는 한 명의 예술가-애호가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은 오직 사랑 자체를 통해서만 다른 사람의 가슴에 불꽃을 일으킬 수 있다. 굳이 말하자면, 내가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것은 틀림없다. 다른 적절한 표현은 생각나지 않는다. (15)
모차르트의 음악을 ‘해설’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 관심사도 아니다.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이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과 동의어라고 여기는 나는 그저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을 함께 나누고, 전염시키고, 전염당하는 일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 나는 다만 음악을, 사랑을 나누려고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리고 나 또한 상대방의 음악 사랑을 나눠 갖고 싶은 것이다. (91)
이 기본자세가 이 책을 관통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사랑하는 곡들을 이야기할 때(해설이 아니다!) 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이 책에서 가장 환한 빛이 나는 곳도 바로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대목일 것이다.
[K.522] 3악장 ‘메뉴엣’의 트리오 부분. 음악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세상이 밝아졌고, 몸무게가 없는 순결한 영혼들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93)
서른 해 전, 중학교 일학년 때, 클라라 하스킬이 연주하는 이 곡[K.466]을 처음 듣고 삶의 검은 심연을 바라보고 있는 모차르트의 이미지에 섬뜩했다. 그 심연의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속삭임, 그리고 피아노와의 대화는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 환상은 2악장 정다운 라르게토의 중간부에서 또다시 피어올랐고, 3악장 변주곡에서는 마녀의 늪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나락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98)
[피아노] 협주곡 25번의 3악장은 한층 더 오페라를 닮았다. 단순한 첫 주제는 때로는 익살스런 얼굴로, 때로는 응큼한 표정으로 변형되어 나오고, 관현악과 대결하고, 도망가고, 약올리고, 쫓아가면서 한껏 즐겁게 논다. 관현악의 패시지 중에는 심지어 오페라의 레시타티보를 연상시키는 대목까지 나온다. 모차르트 오페라와 협주곡의 유사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곡은 바로 이 C장조 협주곡(K.503)이다. (145)
음악은 언어나 드라마에 비하자면 가장 짧은 분량으로 가장 커다란 드라마를 구축할 수 있다. 예컨대, 모차르트 교향곡 C장조를 전부 들으려면 20분 남짓이면 족하다. 그 짧은 시간에 거대한 세계가 세워졌다 사라진다. 음악만큼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토록 커다란 세계를 희롱할 수 있는 예술은 없다. 음악과 절친한 이채훈은 그 템포가 몸에 배어 있는 듯, 글의 속도가 빠르다. 근래에 나는 이렇게 빠른 속도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는 많은 학자들마냥 두뇌와 내장이 꼬여 있지 않다. 음악적 느낌에 충실하고, 그 느낌의 변화무쌍함에 슥슥 반응한다.
그는 많는 데이타와 논리를 구축하여 모차르트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며 경험했던 섬광같은 느낌을 따라 번개처럼 움직이다. 그 날렵한 움직임을 위해서 데이타도 최소화하고 구질구질한 해설도 최소화한다. 오직 있는 것은 그 섬광 같은 느낌, 그리고 그 느낌에 움직임을 부여하고 형상을 입히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언어이다. 그래서 이채훈의 글을 읽노라면 때로 서늘한 한기를 느낀다. 모든 것들이 전광석화처럼 베어져 사라지고 오직 검의 움직임만 있는 듯한 느낌.
이러한 장점은, 반대로 말하자면, 정보와 해설의 빈약함을 낳는다. 그래서 이 책에서 모차르트에 관한 지식이나 새로운 사실을 얻으려면 이내 실망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채훈이 모차르트에 관한 정보력이나 공부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시사 다큐멘터리 피디답게 기본 ‘팩트’에 놀라울 정도로 충실하다. 그는 알고 있었으나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 아쉬운 점은, 모차르트 음악사랑으로부터 뭔가를 끌어올려 자신만의 해석을 확 펼치지 못한 점이다. 가령, 그가 오페라 ‘돈조반니’를 그토록 사랑한다면 그 사랑으로부터 뭔가를 추출하여 자신만의 해석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러지 못했고, 그 대목은 거의 키에르케고르의 인용문으로 대체되어 있다. 어쩌면 그는 ‘해석’이라는 것의 허구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키에르케고르의 글도 해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음악적 느낌과도 같다. 저자는 음악적 느낌을 가장 중시하고 그저 그 느낌에 따라 글의 스텝을 밟기를 원했던 듯하다. 이 책이 약간 헐렁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바로 이와같은 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사랑한다. 이 책은 갈피갈피마다 책읽기를 중단하고 언급 중인 모차르트 음악을 들어보라고 유혹한다. 사실 어떤 해석서도 이런 유혹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책은 지난해 모차르트 250주년을 맞아 엠비시에서 제작하여 방송한 “모차르트” 2부작 다큐멘터리 관련내용이 주를 이룬다. 첫 장 <모차르트를 찾아서>는 다큐멘터리 1부와 관련한 내용으로 모차르트의 생애를 따라 서사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내 생각으로는, 그 다큐멘터리 1부보다 이 글 한 편이 더 훌륭하다. 이 장을 읽고 나면 모차르트의 일생이 음악과 함께 무대 위에 홀연히 펼쳐졌다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모차르트의 일생에 관한 오페라와도 같다. <모차르트에 관한 대화>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인터뷰했던 저명한 음악가들, 작가의 인터뷰 내용이다. 이채훈이 대담자이다. 저명한 음악가들의 대화를 읽어볼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엠마 커크비와의 대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아베 베룸 코르푸스’를 들을 때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어요. 제가 노래 부를 때 말고 그냥 들을 때 말입니다. 저는 이 곡을 정말 좋아합니다. 심금을 울리는 음악입니다. 심장에 곧장 가서 박혀서 심장이 울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듭니다. 천상의 고통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이 곡은 우리의 운명, 죽을 수밖에 없는 피조물의 숙명을 실감하게 합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게 되죠. 우리는 세상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알고 나누며 살지만, 그런 것을 음악을 통해서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차르트는 이 점을 너무나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187)
나머지 대목들도 이런 이야기들의 연속이다. 이제, 언급된 음악을 들을 때마다 이 책을 들춰보아야 할 듯하다.
“모차르트 음악이 너를 어떻게 변화시켰냐?”한 친구가 제게 물었습니다. 그는 나의 친구가 되면서 모차르트 음악을 공유하게 됐고, 모차르트 음악을 함께 나누면서 헤어질 수 없는 친구가 된 사람입니다. 쉽지 않은 질문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세? 나 스스로 달라졌다고 얘기하는 게 쑥스러운 일이긴 한데… 죽음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의연한 태도를 모차르트 음악에서 배웠다고 말한다면 건방진 얘기일까? 현악5중주곡 G단조의 1악장을 생각해 봐. 모차르트가 말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음악은 삶에 지친 한 인간의 독백으로 시작해. ‘난 피곤해, 난 슬퍼…’ 잠시 후 탄식 소리가 되풀이 되지. ‘삶이란 건 언제나 슬펐어. 삶에서 다른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겠어?’ 모차르트는 칭얼대거나 고함치는 대신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생각에 잠긴 채 노래하지. 이어지는 독백. ‘하지만 삶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나는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도 언제나 삶을 사랑했어.’ 그리고 문득 찾아오는 깨달음! ‘그래, 나는 하느님과 화해했어, 그래서 나는 삶을 긍정할 수 있었어!’ 재현부로 돌아오면 삶을 긍정하는 대목마저 단조로 나오지. 여기서 모차르트는 침착하게 말하고 있어. ‘그래도 여전히 슬퍼. 하지만 나는 변함없이 삶을 사랑해.’”
“이런 변화는 종교적 깨달음처럼 갑자기 다가온 게 아니라 모차르트 음악이 삶의 일부가 되면서 나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찾아온 인식이야. 모차르트의 다른 곡들도 마찬가지야. 3막 백작부인의 아리아, 2막 엘비라의 아리아, 1막 밤의 여왕 아리아, 1막 세스토의 아리아 같은 것, 모두 그래.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 희망을 노래하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라고 모차르트는 말하고 있어.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을 생각해 봐. 그는 아름다웠던 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조용히 말하고 있어. 이 세상과 헤어져야 하는 기막힌 현실을 그는 그냥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거야. 그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크게 소리 지르며 몸부림친 말러 같은 사람과 달라. 말러 음악도 물론 위대하지만…”
“체념한 운명주의자처럼 노예의 삶을 살라는 건 아니야. 세상과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열심히 사랑하며 열심히 살라고, 때로는 불합리한 권력에 저항하는 것도 사랑의 한 방법이라고 모차르트는 말하지. 모차르트는 자유 없이 살 수 없었던 사람이야. 그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데에 자유의 출발점이 있다고 생각했어. 모차르트의 지혜는 솔로몬의 전도서와 비슷하게 느껴져. 그의 지혜가 신약의 기독교보다 불교에 가깝다고 한 피아니스트 시프리앙 카차리스의 말에 공감해. ‘모차르트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삶의 지혜’라고 말한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도 모차르트를 통해 깊은 내면의 변화를 겪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얘기하면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나는 슬퍼하는 사람을 위안하고 격려해 주는 방법을 모차르트에게서 배우는 중이야. 나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사랑을 주고 싶어. 내가 잠시라도 함께 앉아서 잔을 기울이는 게 그 사람에게 위안이 된다면 언제든지, 누구든지 그렇게 할 거야. 그리고 삶의 덧없음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함께 느끼고 이야기할 거야. 모차르트 음악을 사람의 언어로 번역할 수는 없지. 하지만 그 마음을 눈빛과 숨결에 담아서 얘기하면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잔소리 없이 모차르트 음악을 그냥 함께 듣는 것으로 충분할 때도 많지.”
“모차르트 음악은 예측할 수 없는 선율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조화로움은 언제나 완벽해. 음악이 제자리를 찾아가듯 사람들의 만남도 늘 제자리를 찾아간다고 생각해. 나는 누군가를 사랑했던 걸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어. 모든 만남이 다 아름다웠다고 생각해. 난 헤어질 때 엉엉 울지 않을 거야. 죽을 때도 담담할 수 있을 것 같아. 좀 더 잘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끝까지 미안하겠지만… 사필귀정, 진인사대천명, 이 신념을 모차르트 음악은 가르치고 있어.”
“모차르트 음악은 예측할 수 없는 선율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조화로움은 언제나 완벽해. 음악이 제자리를 찾아가듯 사람들의 만남도 늘 제자리를 찾아간다고 생각해 . . .”
모차르트는 ‘옛음악’이 아니라 ‘요즘 음악’으로 들리는 최초의 음악이죠. ‘클래식’과 ‘대중 음악’의 틀로 구분할 수도 없는 음악이죠. 모차르트는 신분의 차별을 몰랐던 사람이지요.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모차르트 음악은 언어보다 많은 것을 얘기하지요.
부처의 말씀과 모차르트의 음악, 통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아직 막연한 느낌이지만 글로 써 볼 날이 올 것 같습니다. 여전히 공부가 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