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마을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들 중 가장 귀한 것 하나는 소리에 대한 감각일 것이다. 현대의 도시생활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다른 소리와 섞이지 않은 채 들려오는 경우는 없다. 도시에서는 모든 소리가 소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니 “댓잎에 눈이 내리는 소리”와 같은 표현도 불가능하고 그런 표현에 대한 감응도 불가능하다. 옛 시대의 고요는 천지에 가득 찬 고요였겠으나 현 시대의 고요는 그저 심리적인 고요, 하나의 비유일 뿐이다. 이것은 감각의 타락이며 인간성의 타락이다.
이미륵이 송림(松林) 마을로 내려가 지냈던 생활을 서술하는 대목을 읽노라면 ‘소리’에 대한 예민한 감각들이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장점 중 하나는 이미륵이 자신의 관념과 의도에 따라 소설을 재구성하기보다는 다만 옛 시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감각들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소리’에 대한 특별한 서술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옛 세대의 소리 감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다시 조용해지고, 온 마을이 자고 있는 것 같았다. (100)
집 안도, 온 마을도 죽은 듯이 고요했다. 다만 해안을 스쳐가고 스쳐오는 밤 물결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100)
이젠 바닷가에는 깊은 정적이 흘러넘쳤다. 물결 소리, 파도 소리가 멀리 밀려갔기 때문이다. (102)
눈이 쌓이면 쌓일수록, 밤이 조용해지면 조용할수록, 낭독은 더욱더 감동적으로 고조되어갔다. (104)
이제 나는 아무 소음도 없는 고요한 이 마을에 다시 돌아왔다. (112)
거의 모든 독자들은 위와 같은 구절들에 주목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륵이 의도적으로 이런 구절들을 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구절들은 맥락 속에 워낙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옛 세대의 소리 감각이 이미륵을 키웠기 때문이다. 이런 소리 감각은 비단 음악적 재능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완성시킨다. 그것은 인간을 위대한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위대한 영역? 그렇다. 천지가 고요하면, 그 고요에 잦아드는 인간이 위대해진다. 천지가 고요하면, 그 고요한 가운데 들리는 소리가 위대해진다. 이 고요와 이 소리 속에서 피어나는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아름답다:
이젠 바닷가에는 깊은 정적이 흘러넘쳤다. 물결 소리, 파도 소리가 멀리 밀려갔기 때문이다. 다만 어디선가 다른 사람들의 말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아마 그들도 고기잡이에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밤이 하도 아름답고 고요해서 물에 빠져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떠돌아다니면서 서로 속삭인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102)
“정적”과 “고요” 속에서 나직이 들리는 소리, 속삭이는 소리는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은 우주적이어서 이곳과 저곳, 이승과 저승을 초월한다. 이 정적과 이 고요에 수시로 잦아들 수 있는 사람은 바다에 눈이 가라앉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고요를 아는 사람은 눈보라 휘몰아치는 소리를 경이롭고 찬란하게 들을 수 있다. 이미륵이 유럽행을 처음 생각한 것도 다름아닌 눈보라를 무릅쓰고 포구를 따라 걸을 때였다:
내가 눈보라를 무릅쓰고 포구를 따라 산책하노라면 머나먼 서쪽에서 이런 건물들이 내 눈앞에 아롱거리고 키가 크고 쾌활해 보이는 사람들이 그곳에 드나드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지상의 근심 걱정을 몰랐고, 생존 경쟁과 죄악도 몰랐다. 그들은 다만 자연과 우주에 관해서 연구만 하고 지혜의 오솔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 새 문화의 참된 교양인이 되려면 그곳에서 교육을 받아야만 할 것 같았다. […] 내가 이 경이의 세계에 관해서 들었던 많은 아름다운 전설이며 일화들이 내 머리 속에서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105)
눈보라 휘몰아치는 속에 피어오른 세계는 폭풍과 격정의 세계가 아니라 도리어 경이의 세계이다. 명랑하고 근심 걱정도 없고 죄도 없고 경쟁도 없고 오직 내면의 지혜에만 빠져드는 세계가 역설적이게도 눈보라 속에 떠오른 것이다. 그는 포구를 걸으며 바다 위로 빠져드는 눈보라와 송림 위로 휘날리는 눈보라를 보고 들었으리라. 그렇지만 그 가운데 떠오르는 고요하고 침착한 세계가 있어, 그는 실제로 그 겨울을 보낸 후 단독으로 유럽행을 시도한다.
그는 어머니 앞으로 편지 한 장을 남긴 채 집을 나선다. 며칠을 걸어 만주행 열차를 탈 수 있는 고장에 도착했을 때 그의 첫 인상은 다름아닌 ‘소리’였다: “그곳은 교통이 훨씬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다. 고함을 지르며 종을 울리며 […] 그들이 신고 다니는 ‘게다’ 소리가 도처에서 시끄럽게 들렸다.”(106) 그는 그곳에서 瀋陽행 기차표까지 끊었지만 기차에는 오르지 못하고 플랫폼에 멍 하니 서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두려웠던 것일까? 역무원은 수상히 여겨 그를 붙잡고 기차표를 빼앗았다. 그리고 그의 소지품을 조사하고서 물었다:
“그래, 넌 짐도 없이, 영어도 모르고, 또 여권도 없이 몇 푼 안되는 돈을 가지고 유럽으로 가려고 했니?”
“네, 그랬습니다.”
그는 다시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런데 너는 왜 기차를 타지 않았니?”
나는 다시 잠자코 있었다. 나를 이리로 데리고 온 젊은 역원이 내가 그 물음엔 아무런 대답이 없었노라고 말했다.
“말해 봐. 왜 안 탔는가?”
나이 든 역원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모든 게 소란하고 불안스러웠어요.”
나는 대답했다.
젊은 역원이 웃으며,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노라고 이야기했다.
“기차는 이 사람들에겐 너무 시끄럽고 조급하고 점잖치가 못해.” (110)
요즘의 우리들은 십중팔구 이 변명에 대하여 젊은 역원처럼 웃을 것이다. 얼마나 어이없게 들리는가?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가? 천지간의 고요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 고요가 키운 인간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미륵은 그 고요가 키운 인간이었고 그 덕분에 그는 송림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송림은 “아무 소음도 없는” 마을이며 “고요한” 마을이다. 사람들의 고함, 점잖지 못한 걸음소리, 기차 소리 등을 잠재우는 마을이자 그 소란, 그 소음을 꿈결처럼 처리하는 마을:
이제 나는 아무 소음도 없는 고요한 이 마을에 다시 돌아왔다. 어디선가 다만 암소 한 마리가 음매 울고 있었다. 조수는 굴바위에 부딪쳐 쏴 하고 부서지고 있었다. 내가 한밤중에 창문을 열었을 때, 해안까지 전 포구가 파도에 휩싸인 것이 보였다. 모래사장은 은빛 파도에 싸여 조용히 철썩대기만 했다. 어두운 언덕 앞에 위치한 초가지붕은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잠들어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의 일이, 또한 이 마을의 모든 것이 꿈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112-113)
암소 한 마리의 울음, 물결 소리, 파도 소리. 이 모든 소리는 얼마나 위대한가. 모든 소음을 잠재우고 모든 소리를 위대하게 만드는 송림의 밤은 또 얼마나 위대한가. 창문을 열었다. 은빛 파도와 희미한 달빛과 둥근 지붕. 꿈이다. 지난 일도 꿈이고 달빛을 보는 지금도 꿈이다. 여기에서는 시간도 포개지고 공간도 포개진다.
송림에 내리는 눈
이미륵의 고요, 이미륵의 어둠은 꿈이며 영원이며 떠남이며 죽음이며 발견이다. 이미륵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공부하러 떠날 때도 달빛 비치는 밤이었고, 압록강을 향해 집을 나설 때도 안개 낀 밤이었다. 그의 결정적인 떠남의 순간에는 언제나 밤과 고요가 있다. 고요가 이미륵을 키운 것이다. 그가 압록강을 건너 망명길에 오를 때에 그에게 되돌아온 것도 바로 그 고요였다:
오로지 바다만이 달빛을 받으며 수평선에서 수평선으로 파도 치고 있었다. (123)
안개와 어둠을 무릅쓰고 어머니는 마을에서 나가는 길을 멀리까지 바래다주었다. (143)
우리들은 너무 조용히 소리 없이 이 거대한 물결을 헤쳐갔으므로 마치 영원 속으로 사라지기나 하는 것 같았다. (145)
이미륵이 망명길에 나선 이후에도 밤과 고요의 되돌아옴은 지속된다. 책으로만 읽었던 만리장성, 양자강의 발견도 “새벽의 반어둠”(148), “미지의 어둠”(151) 속에서 이루어진다. 더 나아가 아버지의 죽음과 송 왕조의 최후도 어둠과 함께 회고됨으로써 그의 고요, 그의 어둠은 죽음과도 연결된다. 아울러 이제 이 밤과 고요는 떠나온 고향, 머나먼 세계, “외로운 송림 포구”와 마침내 결부된다:
그렇게도 좋아하시며 가끔 소동파의 이야기를 하시던 아버지는 이미 잠드신 지 오래고, 지금은 대지의 품 속에 누워 있지 않은가. 모든 게 조용한데 어둠 속에서 뱃전의 물소리만이 출렁거렸다. (151)
힘없이 빗방울이 무색에 가까운 회백색 하늘에서 날려와서는 검게 포장한 도로에 깔려졌다. 저녁때에야 서쪽 하늘이 개이고 약간 붉은 노을이 스며드는 듯하더니 곧 다시 습기찬 황혼에 사라지곤 했다. 넓은 들판 위로 급히 안개가 퍼지며 나무와 숲을 마구 감싸고, 나중에는 길까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어찌 된 영문인지 들판의 조그마한 돌무더기에 있는 검게 옻칠한 관만이 안개에 묻히지 않고 마치 유령처럼 떠도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또 비가 내렸다. (154)
다만 우리 일행인 김씨만이 계속 조용히 고향 이야기를 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가 탄 여객선 ‘포올르카’ 호는 달빛 밝은 인도양의 어느 곳을 항해하고 있었다. (162)
다만 저녁 늦게 모든 것이 조용해지면, 나는 가끔 강을 따라가다가 버드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에 않았었다. 유유히 흐르는 물을 보면 내 마음은 기뻤다. 나는 이 물이 이렇게 계속 흐르고 흘러서 언젠가는 한국의 서해안에, 어쩌면 연평도에, 아니면 외로운 송림 포구에 닿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69)
갑판 위에 있는 인도 사람들은 매우 조용한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잠자코 앉아서 때때로 나지막하게 속삭이고, 움직이지도 않고 부드럽게 출렁거리는 파도의 무한한 넓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160)
«압록강은 흐른다»를 이미 읽어본 독자들은 ‘과연 이런 구절들이 있었나’ 할 정도로 이 구절들이 잘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되풀이하여 말하는 것이지만, 이미륵은 그만큼 의식적인 구도 하에 소설을 쓰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거의 항상 작가의 인문적 사고나 줄거리에 치중하여 독서를 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는 반면, “옛 시대의 아이”, 고요한 인간 이미륵은 그런 사고를 최대한 털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독자들을 그토록 조용히 이미륵의 세계에 잦아들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그의 어둠, 그의 고요는 파괴적이지 않으며 황폐하지 않으며 쓸쓸하지 않다. 그의 어둠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을지라도 스산하지 않고 어쩐지 조용하고 맑은 기운이 감돈다.
“외로운 송림 포구”는 이미륵의 그 맑은 고요가 “송림”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외로운 송림 포구”라는 표현은 “고적한 송림 포구”나 “외딴 송림 포구”로 번역하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소음을 잠재웠던 마을, 아무 소음도 없는 마을, 물결소리와 파도소리를 들려주었던 마을, 나직하고 조용한 소리가 속삭이던 마을, 밤과 달빛과 꿈을 환영처럼 보여주었던 마을, 눈보라 속에 경이를 드러내었던 포구의 마을, 소나무 숲.
그 숲에 눈이 내린다. 고요하다. 물결소리, 파도소리 들린다. 바다로 함박눈이 잦아드는 소리. 바람이 분다. 바다가 안개를 풀어내고 눈보라가 흩날린다. 경이의 세계가 펼쳐지고 세계들이 연결된다. 떠남도 돌아감도 동일하다. 고요도 소리도 동일하고 죽음도 영원도 동일하다. 그리하여 오직 있는 것은 고요일 뿐. 성벽에 흰 눈이 흩날리는 소리, 소나무 숲으로 바다 위로 흰 눈이 휘몰아치는 소리일 뿐:
그리고 곧 철이 바뀌어 눈이 내렸다. 어느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자 성벽에 흰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눈에 익은 흰 눈을 보며 행복감을 느꼈다. 그것은 나의 고향 마을과 송림만 위로 휘몰아쳐 내리던 바로 그 눈과 같았다.
이날 아침에 나는 저 먼 고향에서 온 첫 소식을 받았다. 큰누님이 쓴 편지였다. 지난 가을에 어머님이 며칠 앓으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사연이었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