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의 번역에서 제일 중요한 원칙은, 최대한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들”은 “당신들”로, “염소의 목자”는 “염소의 목자”로, “불”은 “불”로, “숯”은 “숯”으로, “오전”은 “오전”으로, “정오”는 “정오”로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국내 번역본에서는 그 중요한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차라투스라의 말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가 안되니까 어떻게든 이해가 되는 방향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고, 그래서 원문을 훼손한다. 원문을 훼손했던 역자들은 분명코 독자들의 독해에 도움을 주기 위한 의도를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역자들의 그 친절이 곧 원문의 심각한 훼손을 낳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듯하다.
그런 친절이 습관화되다 보면, 니체의 간결한 문장에 불필요한 말들을 덕지덕지 덧붙히게 된다. 이것은 정동호 역본이 가장 심한데, 이로 인해 «차라투스트라»의 음악성이 정동호 역본에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왠지 모르게 내가 정동호 역본에 대해서 본능적인 반감을 가졌던 것도 바로 그 음악성의 전면적인 상실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런 문체상의 훼손은 다음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겠지만, 역자의 친절이 음악성의 상실에 그치지 않고, 심오한 원문의 내용을 매우 잡스런 것으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그 예를 들어보겠다:
und nicht nur die Morgenröthe gieng über sein Antlitz, sondern auch der Vormittag.
여명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가고, 오전도 [지나갔다]. (9절)1문수 아침놀만이 아니라 오전의 햇살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갔다.
승자 아침놀이 그의 얼굴 위로 스쳐지나갔다.
동호 아침놀뿐만 아니라 오전 한나절의 햇살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희창 아침놀뿐만 아니라 오전 한나절의 햇살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갔다.
위 인용문의 원문은 아주 깔끔한 문장이다. “여명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가고, 오전도 지나갔다”라고 번역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번역하면 흔한 수준으로는 ‘이해’가 안된다. 그래서 역자들은 “오전” 대신에 “오전의 햇살”로 번역한다. “오전의 햇살”로도 뭔가 모자란 듯싶으니까 “오전 한나절의 햇살”로 번역하여 친절의 수준을 점점 더 높힌다. 그래서 위와 같은 원문의 훼손이 발생했다. 이런 정도는 원문의 훼손이 아니라고? 원문의 훼손이 아니라면, 니체는 그토록 평범한 서술만 일삼았단 말인가? 아니다. 니체는 누구에게나 이해되는 그런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여명”은 지상 전체를 휩쓸면서 다가오는 것이다. 여명이 지나간다는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얼굴 위로 광활한 것이 휩쓸고 지나간다는 인상을 준다. “오전” 역시 마찬가지다. “오전”도 지상 전체를 장악하고서 휩쓸며 지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다. 시간이 지상을 전면적으로 휩쓸어가면서, 차라투스트라의 얼굴 위로 지나가는 것—바로 이것이 “그의 얼굴 위로 오전이 지나간다”는 문장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너무 억지 해석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보르헤스의 말을 한번 인용해 보겠다:
시간은 나를 휩쓸어가는 강물이지만, 그러나 나는 강물이다; 시간은 나를 짓찢는 호랑이이지만, 그러나 나는 호랑이다; 시간은 나를 소멸시키는 불이지만, 그러나 나는 불이다. 불행히도, 세계는 현실적이다; 불행히도, 나는 보르헤스다.
Time is a river which sweeps me along, but I am the river; it is a tiger which destroys me, but I am the tiger; it is a fire which consumes me, but I am the fire. The world, unfortunately, is real; I, unfortunately, am Borges.
— Borges, “A New Refutation of Time,”[“Nueva refutación del tiempo”]
불행히도, 역자들은 현실적이다. 불행히도, 그는 니체다. 불행히도 다수의 독자들은 현실적이고, 불행히도 소수의 독자들만이 니체스럽다. 이들 양자 간에는, “그의 얼굴 위로 오전 한나절의 햇살이 지나가다”는 문장과 “그의 얼굴 위로 오전이 지나가다”는 문장만큼이나 서로 동떨어져 있다.
“그의 얼굴 위로 오전이 지나가다”와 같은 구절은, 니체의 표현을 빌면, “나의 평범한 경험”, “경험의 진정성”(die Orginalität der Erfahrung)에서 직접 나오는 문장이다. 사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온통 이런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니체로서는 평범했던 경험”은 그러나 다른 사람들로서는 비범한 경험인 것이고, 이는 흔히 말하는 “시적 영감”이나 “천부적 재능”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역자들은 그런 “경험”이 없어서, 혹은 그런 경험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서 그토록 오역을 저지르는 것이 아닐까?
denn er war ein gewohnter Nachtgänger und liebte es, allem Schlafenden in’s Gesicht zu sehn.
그는 야행에 익숙한 자였으며, 잠든 만물의 얼굴을 들여다보기 좋아했던 것이다. (8절)문수 그는 밤길에는 익숙한 사람이었고 잠자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기 좋아했다.
승자 그는 밤길을 걷는 것이 익숙했고, 또 잠든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길 좋아했던 것이다.
동호 그는 밤길에 익숙해 있었고 잠든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를 좋아하던 터였다.
희창 그는 밤길에 익숙했고 잠든 사람들의 얼굴을 보기 좋아하던 터였다.
“allem Schlafenden in’s Gesicht”는 “잠든 만물의 얼굴”인가, 아니면 “잠든 모든 사람들의 얼굴”인가? 둘 다 가능한 번역이다. 그러나 보통은 “모든 것”을 가리킬 때는 “allem”을 주로 쓰는 편이고 “모든 사람”을 가리킬 때는 “allen”을 주로 쓰는 편이니, 아무래도 “만물”로 번역하는 편이 조금 자연스럽긴 하다. 또한, “allem Schlafenden”이 소유격이 아니라 여격으로 쓰임으로써 익숙한 어법을 벗어나 있는 만큼, 역자들은 좀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아무튼 어떻게 번역하든 문법상 오역이라고는 할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왜 역자들이 한결같이 “모든 사람들”로 번역했느냐 하는 것이다. “얼굴”이라는 단어 때문일 것이다. “얼굴”은 익숙한 어법상 사람의 얼굴이니까. 은유에는 낯설고 현실에는 익숙한 역자들의 면모가 이런 데서 드러난다.
사실, 정황상 이 대목에서는 “잠든 만물의 얼굴”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모든 사람들의 얼굴”은 이상하잖은가, 야행을 즐겼던 차라투스트라가 그 야행 중에 잠든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즐겨 보았다니! 그는 십년 동안 인적없는 곳에서 입산수행을 했고, 인용문이 등장하는 대목도 인적없는 깊은 숲속을 걷고 있는 장면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요소들을 모두 무시할 만큼 역자들은 니체의 은유가 생소했던 것이다, “니체로서는 평범했던 경험”이 그들로서는 너무 비범했으므로:
Ich liebe Den, dessen Seele übervoll ist, so dass er sich selber vergisst, und alle Dinge in ihm sind: so werden alle Dinge sein Untergang.
사랑하노라, 영혼이 차고넘치는 자를, 그리하여 제 자신을 망각하는 자, 제 안에 만물이 있는 자를: 그리하여 만물은 그의 하강이 되리라. (4절)문수 나는 사랑한다. 자기 자신을 잊을 만큼, 또 만물을 자기 안에 간직할 만큼 넘쳐흐르는 영혼을 가진 자를. 이렇게 해서 만물은 그의 몰락의 계기가 된다.
승자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서 모든 것들이 자기 내부에 들어올 수 있도록 영혼이 넘쳐흐르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것이 그의 몰락이 되는 것이다.
동호 나는 사랑하노라. 자신을 잊고 자신 속에 만물을 간직할 만큼 넘쳐 흐르는 영혼을 지닌 자를. 이렇게 하여 만물은 그의 멸망이 된다.
희창 나는 사랑한다. 자기 자신을 잊은 채 만물을 자신 안에 간직할 만큼 그 영혼이 넘쳐흐르는 자를. 그리하여 만물이 그의 몰락의 계기가 된다.
이 인용문 이전의 문장들에서 역자들은 모두 “Untergang”을 “몰락”으로 옮기고 있다. 나는 이것을 “하강”이라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몰락”이라고 옮겼다해서 오역이라고 트집잡을 생각은 없다. 이런 이견 차이라면 언제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앞 문장들에서 모두 “몰락”으로 옮겼으면서도 위 인용문에서는 다르게 옮긴 경우이다. 물론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맞게 바꾸면서 번역해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위 인용문은 그런 경우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동호가 “멸망”이라고 바꿔 번역한 것은 대단히 유감이다. 아마 “만물은 그의 몰락이 된다”는 말이 이해가 안되니까 그렇게 바꿨을 것이다.
문수도 희창도 “만물은 그의 몰락이 된다”는 말을 생경하게 여긴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굳이 “만물은 그의 몰락의 계기가 된다”고 한 마디 첨언해서 번역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니체 번역에서 “첨언”은 금물 중의 금물이다. 그런 점에서 승자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아마도 시인이어서 그나마 사고의 폭이 넓었기 때문이리라.
위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제 안에 만물이 있는 자는, 그 만물이 그의 하강이 된다”는 의미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만물이 그의 안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그는 하강하게 된다. 그의 영혼은 흘러넘친다. 그는 제 자신을 망각한 자다. 그는 곧 만물이며, 그는 곧 하강하는 존재다. 만물의 상승과 그의 하강, 이것은 동일한 것이며 동일한 순간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묘사할까?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이야말로 이 사태를 제대로 일갈한 명구가 아닐까?
상승하는 길과 하강하는 길은 하나이며 동일하다. (헤라클레이토스, Diels-Kranz 22B60)
위와 평행구절로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나란히 놓고 읽어보자:
사랑하노라, 영혼이 차고넘치는 자를, 그리하여 제 자신을 망각하는 자, 제 안에 만물이 있는 자를: 그리하여 만물은 그의 하강이 되리라.
소수의 독자들은 위 두 구절이 명백히 동일하다는 것을 즉각 간파할 것이다. 혹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소수의 독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닐까? 내가 너무 과도하게 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원문은 이런 평행구절의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만, 국내의 번역본은 그런 가능성을 쓸어버렸다는 사실이 비통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니체를 이해하는 지름길이고,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오역을 줄이는 길인가? 한 마디로 말하건대,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자가 되는 것, “고귀한 영혼”이 되는 것이다:
— 무엇이 고귀한가? 오늘날 우리에게서 “고귀함”이라는 말이 아직 뭔가를 의미하긴 하는가? 이제 시작된 천민통치의 하늘, 그 무겁게 드리워진 하늘 아래, 모든 것이 그 하늘 때문에 불투명해지고 납빛이 되었는데, 고귀한 인간을 무엇을 가지고 간파할 것이며 무엇을 가지고 인식할 것인가? 고귀한 인간을 증명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다 — 행위는 언제나 다의적이고 언제나 해명이 불가능하다 — “작품”도 아니다. 오늘날,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발설하는 자들 중 예술가들과 학자들 가운데에서, 고귀함을 얻으려고 심한 욕심을 부리는 일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고귀함을 얻으려는 그 욕구야말로 고귀한 영혼 스스로의 욕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것은 곧 저들의 결핍에 대하여 제대로 말해 주는 위험스러운 표지이다. 여기에서 결정하는 것, 여기에서 순위를 확정하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옛 종교적 문구를 새롭고도 좀더 심오한 이해로 재수용하여 말하자면, 신앙이다: 한 고귀한 영혼이 자기 자신, [구하려한들] 구해질 수도 없고 [찾으려한들] 찾아질 수도 없고 아마도 [놓아버린다한들] 상실될 수도 없을 그 무엇에 대하여 가지는 그 뭔가 근본적인 확실성. — 고귀한 영혼은 제 자신을 경외한다. (KSA 5, 232-233)
나는 내 자신을 탐구했다. (헤라클레이토스, Diels-Kranz 22B101)
수천 년의 거리를 두고 있는 두 철학자의 말을 흡사 평행구절처럼 나란히 놓은 것에 대하여 너무 자의적인 발상이라고 치부하지는 말기 바란다. 니체는 알고 있었다, 그가 경험한 것을 동일하게 경험했던 자가 과연 누구였던가를:
[…] 이것이 영감에 관한 나의 경험이다.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 경험이기도 하다”라고 내게 말해도 되는 자, 그 누군가를 찾으려면 수천 년을 거슬러가야 한다는 것을. (KSA 6, 340)
혹시 우리시대의 사람들은 위와 같은 니체의 말들을 과대망상쯤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름아닌 우리시대의 니체전공자들이 그렇게 간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니체전공자들이야말로 니체가 그토록 경원시했던 부류의 학자들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오역들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Wie müde bin ich meines Guten und meines Bösen!
나는 나의 선과 나의 악에 얼마나 지쳐 있는가! (3절)문수 나는 나의 선, 나의 악에 지쳤다.
승자 나는 나의 선과 나의 악에 얼마나 지쳐 있는지!
동호 나는 나의 선과 악 사이에서 얼마나 지쳐 있는가!
희창 나는 나의 선과 악 사이에서 얼마나 시달렸던가!
An der Erde zu freveln ist jetzt das Furchtbarste und die Eingeweide des Unerforschlichen höher zu achten, als der Sinn der Erde!
대지를 모독함이란, 이제, 대단히 공포스러운 것을, 불가사의에 관한 내장점(內臟占)을, 대지의 의미보다 더 높이 존중하는 것이어라! (3절)문수 지금은 대지에 대한 모독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탐구할 수 없는 것의 내장을 대지의 의미보다 더 존중하는 것도!
승자 대지를 모독하는 것이 지금은 가장 가공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불가사의한 것의 내장을 대지의 의미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이!
동호 이 대지에 불경을 저지르고 저 알 길이 없는 것의 뱃속을 이 대지의 뜻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 이제는 그것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희창 이제 가장 무서운 것은 이 대지에 불경을 저지르고, 탐구할 수도 없는 것의 뱃속을 대지의 뜻보다 더 높이 존중하는 것이다!
“선악 너머”를 모르는 이들, “선과 악 사이에서”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 이들, “공포스러운 것”에서 헤어나지 못한 이들, 그래서 빈번하게 니체의 원문도 훼손하고 그래서 빈번하게 문장구조도 무시하는 이들, 불행히도, 그들이 바로 «차라투스트라»의 번역자들이다.
그들은 지식의 정원에서 “한적하게 글 읽는 자들”(<읽기와 쓰기에 관하여>)일 뿐, 자기 자신을 탐구하지는 않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 이하 별도의 표기 없이 절만 표기해 놓은 대목은 <차라투스트라의 허두>에서 인용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