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의 장소들(2) — “염소의 목자”

무리에서 많은 이들을 끌어내기 — 위하여 나는 왔노라. 군중과 무리는 내게 분노할 터: 차라투스트라는 목자를 강도라 부르고자 하노라.

Viele wegzulocken von der Heerde — dazu kam ich. Zürnen soll mir Volk und Heerde: Räuber will Zarathustra den Hirten heissen.

— <차라투스트라의 허두> 9절에서

“목자와 강도”, 이 두 낱말이 함께 등장하는 중요한 문헌이 있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0장이다. 개신교 성서의 개역개정판으로 읽어보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1-2) …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8) … 나는 선한 목자라(11) … 나는 선한 목자라(14) …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

이것은 예수의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선한 목자”는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들을 인도하여 “한 무리”로 만들어 “한 목자”에게 있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그와 반대로 그 무리, 그 떼거리에서 많은 이들을 끌어내려고 한다. 그러므로 군중과 무리가 차라투스트라에게 분노할 것임은 당연하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10장의 비유를 패러디하고 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약성서를 여러 번 패러디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문체 역시 루터번역 성서를 많이 모방하고 있다. “siehe”(보라), “wahrlich”(진실로), 소유격 명사의 전치, “also”의 용법 등등이 그렇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다. 그러나 국내의 그 수많은 번역자들은 이것을 모르는 듯하다. 이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다.

니체는 목사의 아들이었다. 청소년 시절에 이미 다비트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를 읽었을 정도였다. 그 책은 신약성서에서 신화적 요소를 벗겨내고 소위 “역사적 예수”를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저작이었다. 게다가 니체는 신학을 공부한 적이 있다. 그런데, 번역자들은 이 사실을 꼭 모르는 것만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다음처럼 번역할 수 있겠는가:

Bildung nennen sie’s, es zeichnet sie aus vor den Ziegenhirten.
저들은 교양이라 부른다. 그것이 저들을 염소의 목자 앞에서 돋보이게 한다.(<차라투스트라의 허두> 5절)

문수 그들은 교양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그들을 목자보다 뛰어나게 한다.

승자 그것을 그들은 교양이라 부르고, 그것이 그들을 양치기보다 우월하게 해주는 것이다.

동호 그들은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교육이란 것이 있어 그들을 염소치기와 구분해준다는 것이다.

희창 이 교양이란 게 있어서 그들은 염소치기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nun rede ich ihnen gleich den Ziegenhirten.
지금 나는 염소의 목자들에게 설교하듯 저들에게 설교하고 있다.(<차라투스트라의 허두> 5절)

문수 나는 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그들을 목자처럼 대했구나.

승자 그래서 지금 나는 저들에게 목자들에게 얘기하듯 얘기를 하는 것이다.

동호 마치 염소치기에게 말하듯 나는 그들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희창 마치 염소치기에게 말하듯 그들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위의 인용문들이 왜 오역인가를 알기 위하여, 다시 신약성서를 들여다보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요한 10,1-2)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태 25,31-33) …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태 25,41)

성서에는 “양의 목자”가 있을 뿐 “염소의 목자”는 없다. 성서에서 “염소”는 최후의 심판 때 영벌에 처해질 자들에 대한 비유이다. 그 동물은 매우 부정적이다. 예수는 “선한 목자”, “양의 목자”다. 그런데 니체는 이 “양의 목자”를 슬쩍 “염소의 목자”로 바꿔놓았다.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양의 목자”는 실제로는 “염소의 목자”이다. “양떼”야말로 영벌에 처해질 “염소떼”이다. 니체는 성서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정반대의 의미를 겨냥하거나 패러디하기를 좋아했다. “염소의 목자”는 일종의 토포스, 일종의 전고(典故)인 것이다. 이 토포스를 놓치면 “염소치기”, “양치기”, “목자”로 잘못 옮기게 된다.

 

“염소의 목자” 토포스를 이해하면, 이제 <차라투스트라의 허두>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는 “Hirt”(목자)가 어느 맥락에서 쓰이고 있는가가 분명해질 것이다:

목자는 없고 한 떼의 무리만 있음이여! 저마다 동일한 것을 원하고, 저마다 동일하다.(5절)

한 무리의 목자와 개가 되지는 말라!(9절)

목자들에게 내 말하거니와, 그들은 자칭 선하고 의로운 자들이다.(9절)

나는 목자가 되어서는 아니되오, 산역꾼이 되어서는 아니되오.(9절)

산역꾼처럼 주검과 어울리는 자들, 한 무리로 모으는 자들, 저 자신마저 한 무리가 되고 마는 자들, 자칭 선하고 의로운 자들, 바로 그들이 “목자”, “자칭 선한 목자”, “염소의 목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목자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한 무리가 되지 않는 이들, 살아 있는 동반자들이 필요하다. 그 동반자들은 누구인가?

Sondern lebendige Gefährten brauche ich, die mir folgen, weil sie sich selber folgen wollen — und dorthin, wo ich will.
그게 아니다. 살아 있는 동반자들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따르길 원하여 나를 따르는 자들 — 그것도 내가 원하는 곳, 그곳으로.(<차라투스트라의 허두> 9절)

문수 (누락됨)

승자 자기 자신이 따라가고 싶은 까닭에 나를 따라가는, 그것도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나를 따라가는 살아 있는 길동무를.

동호 그들 스스로가 원하여 내 가는 곳으로 나를 따라가려는, 살아 있는 길동무가 있어야겠다.

희창 나를 따라올 살아 있는 길동무가 필요하다. 그들 스스로 내가 가려는 곳으로 따라오고자 하는 길동무가 필요하다.

살아 있는 동반자는 “자기 자신을 따르길 원하여 차라투스트라를 따르는 자들”이다. 분명히 구분해 두지만, 이들은 “자기 스스로 원하여 차라투스트라를 따르는 자들”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커다란 분수령이 이루어지는 구절인데, 역자들은 한결같이 잘못 번역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추종하는 “한 무리의 떼”, “신자들”이 필요하지 않다. 이런 신자들은 살아 있는 동반자들이 아니라 “주검들”, “죽은 동반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별”을 낳지 못하는 인간, 창조하지 못하는 인간, 목자는 없고 한 떼의 무리로만 존재하는 인간, 마지막 형태의 인간, 가장 경멸스러운 인간, “최후의 인간들”이다.

이와 반대로 살아 있는 동반자는 “자기 자신을 따르길 원하는 자들”이다. “자기 자신을 따르길 원하기 때문에 차라투스트라를 따르는 자들”, 그리하여 “함께 창조할 자들”, “함께 수확하고 함께 축제를 벌일 자들”, “홀로의 은자들, 짝을 이룬 은자들”! 그들의 마음은 차라투스트라의 행복으로 무거워질 것이다.

홀로의 은자에게, 짝을 이룬 은자에게, 내 송을 불러주리; 그리고 전대미문의 것을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 나의 행복으로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겠노라. (<차라투스트라의 허두> 9절)

차라투스트라의 살아 있는 동반자들 반대편에는 무리, 목자, 주검이 있다. 살아 있는 동반자들은 무리, 목자, 주검과 더불어서는 그 무엇도 창조할 수 없다. 그리하여, 무리를 이룰 수 없는 그들은 홀로의 은자들이거나 짝을 이룬 은자들이다. 그들은 함께 있더라도 저마다 은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차라투스트라의 행복으로 하여, 무거워질 것이다, 뭔가 덩어리가 되어갈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허두>에서 이미 “염소의 목자” vs 차라투스트라, 무리 vs 은자, 주검 vs 산 자, 신도 vs 벗, 등등의 대결이 시작되고 있다. 이것은 흥미진진하게 작위적으로 조장한 대결이 아니라, 어떤 정신성 간의 대결이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선과 악의 대결, 선과 “극악무도한 것”의 대결이라고 칭하겠지만 …

조심하시라! 그 뭔가 극악무도한 것이 예고된다: 패러디가 시작된다.

man sei auf seiner Hut! Irgend etwas ausbündig Schlimmes und Boshaftes kündigt sich an: incipit parodia. (즐거운 학문, 2판 머리말)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 독자들은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 한글 번역본에는 패러디가 빠져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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