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주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번역을 시작합니다. 어느 분께서 제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번역본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독일어 원문으로 전부 읽어보지도 못했고 번역본들을 비교해 본 적도 없어서 추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Also sprach Zarathustra»를 집어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읽어보는 것인데, 참 좋더군요. 그래서, 아직 «비극의 탄생» 번역을 마무리 짓지 못한 상태이지만 여러모로 이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번역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하나는, 올 여름을 즈음하여 제 나름으로 정신적 진보가 있어 니체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안목이 섰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관한 여러 해석서들을 섭렵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니체가 어느 한 정신적 고원에 이르러 쏟아냈던 말들은 그 고원 가까이 이른 자라야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고, 저는 그 지점 가까이에나마 이르는 때를 기다렸던 셈입니다.
다음으로, 독일인들이 가장 아름다운 독일어 문장으로 꼽고 있을 만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문체가 아름답습니다. 그 문체를 살리고, 정신적 고원에 걸맞는 고차원적인 낱말로 역어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점에서는, 어디까지나 예상이긴 하지만, «벽암록» 기타 선어록의 언어와 정신세계가 많은 도움이 될 듯합니다.
또한 우리말 문체도 시험해 볼 겸 색다른 차원으로 니체를 번역해 볼 겸, 겸사겸사 저의 수련에 도움이 되기도 하겠습니다. 번역은 느린 속도로 진행될 것입니다.
다음은 역어 선택 기준입니다. 의견사항으로 제시했던 것인데, 여기에 그대로 옮깁니다:
저의 역어 선택 기준은, 첫째, 고준한 정신세계에 어울릴 것, 둘째, 문체의 속도를 살릴 것, 셋째, 니체의 정신적 맥락을 놓치지 않을 것, 넷째, 서양고전문헌학의 흔적을 놓치지 말 것, 등입니다.
셋째, 넷째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지요. 가령, 차라투스트라의 연설 중 “읽기와 쓰기에 관하여”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문제의식을 끄집어 낸 것입니다. 이것을 “독서와 저술에 관하여”로 옮기면 이러한 정신적 전거를 놓치는 동시에 어학상의 오역은 아닐지라도 내용상의 오역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의 서설 3장의 ‘die Eingeweide des Unerforschlichen’은 ‘불가사의한 것의 내장’이 아니라 ‘불가사의한 일을 점치는 내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물의 내장을 가지고 치는 내장점은 서양의 고대로부터 성행한 것으로서 워낙 잘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Eingeweide’(내장)라고 하면 ‘내장점’과 동일어로 쓰이는 것이지요.
이러한 점들은 어떤 해설서나 주석서에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은 사항들이지만, 엄연히 니체의 글에는 근본으로 깔려 있는 인식들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놓치지 않으면서 니체의 고준한 정신세계에 걸맞아야 하는 것이 번역어 선택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첨언하자면, 저는 학자들의 정신세계는 결코 고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축에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문제의 “문체의 속도”. 책세상의 번역본들 대부분이 니체의 문체의 속도를 거의 완벽하게 죽이고 있지요. 가장 커다란 문제점입니다. 그 속도감 있는 문장들이 지리멸렬한 문장으로 둔갑하여 쓰러지는 현장을 지켜보노라면, 소위 우리나라 니체 전공자들의 감각과 양식이 의심스럽습니다.
기대되네요. 잘 읽겠습니다. ^^
(아침부터 글을 쓰고 읽는 것을 니체는 ‘나쁜 일’이라고 했는데..제가 지금 그 꼴입니다. 이 사이트가 너무 좋아서..)
Zarathustra에 대한 니체 자신의 글을 제가 조악하게 번역한 것을 올려 봅니다.
운명이 인간으로 변하는 것에 대한 비밀을 알고 싶어? 내가 쓴 짜라두짜를 읽어 봐.
(선과 악)에 관한 창조자가 되려면
먼저 가치를 파괴하고 부숴야 돼.(34:41)
가치를 부순다는 최악의 악(惡)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최선의 선(善)과 함께 해.
하지만 이 선(善)은 창조를 위한 선(善)이야.(34:42)
나는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했던 인간 중에 가장 끔직한 인간이야. 가장 끔직한 사람이라고 해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되지 말란 법은 없어. 나는 *파괴*의 기쁨을 알아. 파괴할 수 있는 내 힘만큼 알지. “아니”라고 말하며 깨부수는 행위와 “네”라고 말하며 긍정하는 행위, 이 두 개의 행위는 내게 있어서 둘이 아니고 하나야. 내 성질머리가 디오니수스(Dyonysus)를 닮아서 그래. 나는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한 사람 중 최초로 *부도덕을 주장하는 사람*이지. 그래서 나는 *아주, 아주 뛰어난 파괴자*이지.
사람들이 짜라두짜라는 이름이 내게 무슨 의미냐고 물었어야 하잖아? 그런데 아무도 묻지 않았어. 지구 최초의 *부도덕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짜라두짜란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냐고 물었어야 마땅하지. 짜라두짜야 말로 부도덕과는 정반대 되는 사람이잖아? 이 고대 페르시아 사람이 유니크한 이유는 바로 그가 도덕을 주장했기 때문 아니야? 그런데 나, 지구 최초의 *부도덕을 주장하는 사람*이 하필이면 왜 짜라두짜를 빌어서 내 이야기를 했을까? 짜라두짜는 세상 만물을 움직이는 진짜 힘이 (선과 악) 사이의 투쟁이라고 생각한 최초의 사람이었어. 도덕성을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옮긴 최초의 사람이었어. 도덕성을 세상을 움직이는 힘, 원인, 궁극적 목표라고 본 것이 바로 *짜라두짜*의 가르침이었어. 사고를 친 거야. 이 사고 안에 동시에 해답이 들어 있어. 짜라두짜는 도덕성이란 걸 *만들어* 냈잖아. 가장 끔직한 오류를 만들어 낸 거지. 따라서 그는 이 안에 들어있는 오류를 *알았던* 최초의 사람이기도 했어. 짜라두짜는 다른 어떤 사상가들보다 도덕성의 문제에 대해 더 경험이 깊은 사람이었지. 인간의 역사 전체는 이른바, ‘세계가 도덕적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명제를 반박해 온 실험 과정이었던 거 아니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짜라두짜는 다른 어떤 사상가들보다 훨씬 더 진실되지. 그의 가르침 하나만이 진실성을 가장 높은 미덕으로 설정하고 있어. 진실이냐 아니냐를, 선(善)하냐 악(惡)하냐, 도덕적이냐 아니냐 보다 더 중요한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던 거야. ‘진실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설정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벗어나 도덕의 세계로 도망가 버리는 ‘관념론자’의 비겁함을 정면으로 거부한 거야. 다른 모든 사상가들이 가진 용기를 다 합쳐 봐야 짜라두짜 한 사람의 용기만 못 해. 진실을 말하는 것과, *활을 잘 쏘는 것*, 그것이 고대 페르시아의 미덕이었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진실이냐 아니냐에 비추어 도덕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것! 진실이냐 아니냐에 비추어 도덕주의자가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나 같은* (*부도덕을 주장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게 바로, 짜라두짜란 이름이 내게 가지는 의미야.
(“이 사람을 봐”의 ‘나는 왜 운명인가?’에서. 백석현 번역)
저는 과격하고 약간 속악한 문투를 사용하는 편입니다. 니체의 템포는 저에게는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용서해 주시길.
에고! 이 사이트에서 벗어날 수가 없네요.
그동안 짜라두짜의 번역에 대해 제가 가져왔던 문제의식들이 …저와 관점도 다르고 입장도 다르지만, 고싱가님의 진솔하고 정중하고 성실한 관점에서…고스란히 더 정확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제 안에는 천한 것, 비천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욕도 잘 하고 천한 말을 잘 씁니다. 짜라두짜의 번역에서 문체는 정말 중요합니다. 고싱가님의 말씀, 정말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짜라두자 안에는 고귀하고 점잖은 말로 담아낼 수 없는게 많습니다.
신랄한 것, 화내는 것, 비웃는 것, 이런 게 많이 있지요. 깨달음과 서정만 읊은 게 아니지요.
그러니…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성으로 의인화된 삶을 쫓다가, 음란한 말로 삶에게 농담을 걸지요. (아마 키스하겠다, 혹은 오랄 섹스 어떠냐는 말인것 같습니다. “내가 줄 게 좀 있기는 한데 네가 먹을려고 할지 모르겠어.”라는 뜻으로 말합니다.) 뺨을 두대 얻어 맏고, 회초리를 휘드르면서 (아마 59장. 두번째 춤 노래일겁니다. M사 번역본을 보니까, 이 대목이 뺨 얻어 맞는 대목인지도 모르고 두리뭉실 넘어갔더군요. )
말하자면 “이 썅년, 난, 아직 회초리 휘두르는 법을 안 잊어 먹었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뜻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까지는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감정 상태가 고스란히 풍부하게 있기 때문에 책 전체를 하나의 문체, 하나의 어투로 담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거의 나르시시즘으로 보이는 (그러나 니체는 나르시시트가 아니지요. 자기 내부로 함몰된 사람이 결코, 결코, 결코 아니니까요.) 표현도 나옵니다. 이걸, 하나의 문체로 옴기면 ..으…독자는 정말 삼천포로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습니다. 니체는 자기 글에서조차 다중 관점(multiple perspective)를 씁니다. 예를 들어, 밤 산책자의 노래(79장) 섹션 8에서 보면, 이렇지요.
79:45 자정에 울리는 리라.
아무도 이해하지 못 하는 음악을 꽉꽉거리는 종(鍾)처럼 울리는 리라.
귀먹은 사람들 앞에서 *울려야만 하는* 리라.
자네, 들은 귀먹었지.
내 말을 이해하지 못 하거든!
79:46 가버렸네! 가버렸네!
아! 청춘이 가버렸네!
아! 정오(正午)가 가버렸네!
아! 오후가 가버렸네!
이제 저녁이 오고 자정(子正)이 오네.
개는 처량하게 울고 바람은….
79:47 바람도 혹시 개 아니야?
개처럼 낑낑대고 개처럼 짖고 개처럼 처량히 울잖아!
아! 아! 그게 한숨 짓고 있어! 그게 웃고 있어! 그게 숨가쁘게 헐떡이고 있어!
자정(子正)이 한숨 짓고 웃고 숨가쁘게 헐떡이고 있어!
79:45에서는 멀쩡히 이야기하다가, 79:46, 79:47(초반)은 완전히 자기 의식의 흐름을 쫓은 독백입니다. 79:47 후반에서 다시 이야기의 원래 주제로 돌아 오지요. 이건 전형적인 관점 이동입니다. 물론 서양 시에서 여러겹 폭포가 흘러내리는 듯하게 전개되어 가는 형식이 널리 쓰입니다만 (60. 일곱 겹 봉인…저는 일곱 ‘개’ 봉인이 아니라 일곱 ‘겹’ 봉인으로 봅니다. 봉인 속에 든 건 하나 ..영원반복 뿐이니까요….아무튼 일곱겹 봉인에서 보면 이 ..여러 겹 폭포수 같은 전개..저는 이걸 두고 제 멋대로…cascading이라고 부릅니다.)…79:46, 79:47은 캐스케이딩이 아니지요. 이건 관점의 과격한/급작스러운 이동입니다.
하나의 챕터 안에서도 다양한 관점이 다이내믹하고 숨가쁘게 전개되니까. 하나의 어법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양한 감정, 정조, 어감을 살리는 어법이 무얼까?라고 생각하다가,
어린아이 동화 같은, 그냥 자연스러운 일상어를 베이스로 사용했습니다.
이건 결코, 결코, 니체를 모욕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아침부터 글을 쓰고 읽는 것을 니체는 ‘나쁜 일’이라고 했는데..제가 지금 그 꼴입니다. 이 사이트가 너무 좋아서..)
Zarathustra에 대한 니체 자신의 글을 제가 조악하게 번역한 것을 올려 봅니다.
운명이 인간으로 변하는 것에 대한 비밀을 알고 싶어? 내가 쓴 짜라두짜를 읽어 봐.
(선과 악)에 관한 창조자가 되려면
먼저 가치를 파괴하고 부숴야 돼.(34:41)
가치를 부순다는 최악의 악(惡)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최선의 선(善)과 함께 해.
하지만 이 선(善)은 창조를 위한 선(善)이야.(34:42)
나는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했던 인간 중에 가장 끔직한 인간이야. 가장 끔직한 사람이라고 해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되지 말란 법은 없어. 나는 *파괴*의 기쁨을 알아. 파괴할 수 있는 내 힘만큼 알지. “아니”라고 말하며 깨부수는 행위와 “네”라고 말하며 긍정하는 행위, 이 두 개의 행위는 내게 있어서 둘이 아니고 하나야. 내 성질머리가 디오니수스(Dyonysus)를 닮아서 그래. 나는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한 사람 중 최초로 *부도덕을 주장하는 사람*이지. 그래서 나는 *아주, 아주 뛰어난 파괴자*이지.
사람들이 짜라두짜라는 이름이 내게 무슨 의미냐고 물었어야 하잖아? 그런데 아무도 묻지 않았어. 지구 최초의 *부도덕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짜라두짜란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냐고 물었어야 마땅하지. 짜라두짜야 말로 부도덕과는 정반대 되는 사람이잖아? 이 고대 페르시아 사람이 유니크한 이유는 바로 그가 도덕을 주장했기 때문 아니야? 그런데 나, 지구 최초의 *부도덕을 주장하는 사람*이 하필이면 왜 짜라두짜를 빌어서 내 이야기를 했을까? 짜라두짜는 세상 만물을 움직이는 진짜 힘이 (선과 악) 사이의 투쟁이라고 생각한 최초의 사람이었어. 도덕성을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옮긴 최초의 사람이었어. 도덕성을 세상을 움직이는 힘, 원인, 궁극적 목표라고 본 것이 바로 *짜라두짜*의 가르침이었어. 사고를 친 거야. 이 사고 안에 동시에 해답이 들어 있어. 짜라두짜는 도덕성이란 걸 *만들어* 냈잖아. 가장 끔직한 오류를 만들어 낸 거지. 따라서 그는 이 안에 들어있는 오류를 *알았던* 최초의 사람이기도 했어. 짜라두짜는 다른 어떤 사상가들보다 도덕성의 문제에 대해 더 경험이 깊은 사람이었지. 인간의 역사 전체는 이른바, ‘세계가 도덕적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명제를 반박해 온 실험 과정이었던 거 아니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짜라두짜는 다른 어떤 사상가들보다 훨씬 더 진실되지. 그의 가르침 하나만이 진실성을 가장 높은 미덕으로 설정하고 있어. 진실이냐 아니냐를, 선(善)하냐 악(惡)하냐, 도덕적이냐 아니냐 보다 더 중요한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던 거야. ‘진실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설정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벗어나 도덕의 세계로 도망가 버리는 ‘관념론자’의 비겁함을 정면으로 거부한 거야. 다른 모든 사상가들이 가진 용기를 다 합쳐 봐야 짜라두짜 한 사람의 용기만 못 해. 진실을 말하는 것과, *활을 잘 쏘는 것*, 그것이 고대 페르시아의 미덕이었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진실이냐 아니냐에 비추어 도덕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것! 진실이냐 아니냐에 비추어 도덕주의자가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나 같은* (*부도덕을 주장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게 바로, 짜라두짜란 이름이 내게 가지는 의미야.
(“이 사람을 봐”의 ‘나는 왜 운명인가?’에서. 백석현 번역)
저는 과격하고 약간 속악한 문투를 사용하는 편입니다. 니체의 템포는 저에게는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용서해 주시길.
백석현 :: 2007년 01월 29일
에고! 이 사이트에서 벗어날 수가 없네요.
그동안 짜라두짜의 번역에 대해 제가 가져왔던 문제의식들이 …저와 관점도 다르고 입장도 다르지만, 고싱가님의 진솔하고 정중하고 성실한 관점에서…고스란히 더 정확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제 안에는 천한 것, 비천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욕도 잘 하고 천한 말을 잘 씁니다. 짜라두짜의 번역에서 문체는 정말 중요합니다. 고싱가님의 말씀, 정말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짜라두자 안에는 고귀하고 점잖은 말로 담아낼 수 없는게 많습니다.
신랄한 것, 화내는 것, 비웃는 것, 이런 게 많이 있지요. 깨달음과 서정만 읊은 게 아니지요.
그러니…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성으로 의인화된 삶을 쫓다가, 음란한 말로 삶에게 농담을 걸지요. (아마 키스하겠다, 혹은 오랄 섹스 어떠냐는 말인것 같습니다. “내가 줄 게 좀 있기는 한데 네가 먹을려고 할지 모르겠어.”라는 뜻으로 말합니다.) 뺨을 두대 얻어 맏고, 회초리를 휘드르면서 (아마 59장. 두번째 춤 노래일겁니다. M사 번역본을 보니까, 이 대목이 뺨 얻어 맞는 대목인지도 모르고 두리뭉실 넘어갔더군요. )
말하자면 “이 썅년, 난, 아직 회초리 휘두르는 법을 안 잊어 먹었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뜻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까지는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감정 상태가 고스란히 풍부하게 있기 때문에 책 전체를 하나의 문체, 하나의 어투로 담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거의 나르시시즘으로 보이는 (그러나 니체는 나르시시트가 아니지요. 자기 내부로 함몰된 사람이 결코, 결코, 결코 아니니까요.) 표현도 나옵니다. 이걸, 하나의 문체로 옴기면 ..으…독자는 정말 삼천포로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습니다. 니체는 자기 글에서조차 다중 관점(multiple perspective)를 씁니다. 예를 들어, 밤 산책자의 노래(79장) 섹션 8에서 보면, 이렇지요.
79:45 자정에 울리는 리라.
아무도 이해하지 못 하는 음악을 꽉꽉거리는 시계 종(鍾)처럼 울리는 리라.
귀먹은 사람들 앞에서 *울려야만 하는* 리라.
자네, ‘훌륭한 사람’들은 귀먹었지.
내 말을 이해하지 못 하거든!
79:46 가버렸네! 가버렸네!
아! 청춘이 가버렸네!
아! 정오(正午)가 가버렸네!
아! 오후가 가버렸네!
이제 저녁이 오고 자정(子正)이 오네.
개는 처량하게 울고 바람은….
79:47 바람도 혹시 개 아니야?
개처럼 낑낑대고 개처럼 짖고 개처럼 처량히 울잖아!
아! 아! 그게 한숨 짓고 있어! 그게 웃고 있어! 그게 숨가쁘게 헐떡이고 있어!
자정(子正)이 한숨 짓고 웃고 숨가쁘게 헐떡이고 있어!
혼자 하던 고민이라 어디서 말도 못 하고 있다가 이렇게 쏟아 냅니다.
너무 반가운 마음이라 그렇습니다. 용서하시길.
번역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일상어를 어디까지 쓸 수 있나?라는 문제입니다.
저는 성경 번역 중에서 message 성경을 지지하는 편입니다.
경건주의 번역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 번역입니다. 시편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2002년인가 미국에서 나온 번역 성경이 있다. message 성경이다.
메시지 성경은 영성 신학의 대부로 꼽히는 인물이 번역한 성경이다.
그리스어에서 번역한게 아니고, 히브리에서 번역했다.
성경을 일상 현대 미국어로 고스란히 번역했다. 히브리어 에서 직접.
그래서 ‘이런 씨발(fuck)’ 같은 단어도 있다고 한다.
메시지 성경 시편12장 1~4. (바로 아래는 백석현)
Quick, God, I need your helping hand!
빨리! 하나님!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The last decent person just went down,
마지막 남았던 좋은 사람마저 죽었습니다.
All the friends I depended on gone.
제가 의지했던 친구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Everyone talks in lie language;
모든 사람들이 죄다 거짓말만 합니다.
Lies slide off their oily lips.
매끄러운 입술에서 거짓말이 줄줄 나옵니다
They doubletalk with forked tongues.
뱀처럼 갈라진 혓바닥으로 한입으로 두 가지 소리를 합니다.
Slice their lips off their faces! Pull
낯짝에서 입술을 잘라 버려 주세요.
The braggart tongues from their mouths!
허풍떠는 혓바닥을 아가리에서 뽑아 버려 주세요.
I’m tired of hearing, “We can talk anyone into anything!
이따위 소리 듣는 것, 이제 진력났습니다.
Our lips manage the world.”
“우리는 누구라도 살살 꼬여서 무슨 짓이든 하게 할 수 있다.
우리의 입술이야말로 세상을 쥐락펴락한다.”
(공동번역)
야훼여! 도와 주소서.
믿음 깊은 자 한 사람도 없사옵니다.
믿을 만한 사람 하나 없사옵니다.
입만 열면 남 속이는 말이요
입술을 재게 놀려 간사란 말을 하고
속다르고 겉다른 엉큼한 생각 뿐입니다.
그래서 메시지 성경 안에는 속악한 말도 많이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저의 번역을 감히 메시지 성경과 같이 평생을 바친 사람들의 작품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바는,
“고상하고 점잖은 문체로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다”
뿐 입니다.
최고의 번역…
야그사이트는 닫았나바여?!
김상우님, 유감스럽게도 야그사이트는 금시초문입니다.
http://www.yague.com에 오시면 번역자 백석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책으로 전하지 못한 깊은 정보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백석현님 사이트인줄 알았어요..
지금은 모르겠어요..
말씀하신 사이트는 연결이 안되네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백석현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