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혜능은 일자무식이었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는 선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과 결부되어 신화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스님의 출가동기와 과정 역시 신화적이다:
부친은 내가 어렸을 적에 일찍 돌아가셨고, 노모와 외로운 나는 남해로 이사와서 간신히 가난 속에 나무를 시중에 내다 팔면서 궁핍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어떤 손님이 나의 땔나무를 사 주었습니다. 그 손님은 나를 관청에서 경영하는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손님은 땔나무를 가지고, 나는 돈을 받고 문을 향해서 막 돌아 나오려고 하는데, 그때 갑자기 어떤 객스님이 «금강경»을 독송하는 인연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처음 듣는데도 마음이 맑아지고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객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디서 오셨기에 이 경전을 독송하십니까?’
[중간 생략]
나는 그 객스님의 말을 듣고, 지난 숙세에 불법과의 인연이 있었음을 알게 되어 곧바로 모친을 하직하고 황매의 빙모산으로 달려가 오조홍인 화상을 찾아뵙고 예배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 육조혜능, 정성본 역주, «돈황본 육조단경» 33-34면
글을 읽거나 쓸 줄 몰랐던 나뭇꾼이 우연히 «금강경» 독송을 듣고 “마음이 맑아지고 곧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모친을 하직하고 출가를 하게 된다. 도대체 혜능은 어떤 사람이었길래, 그렇게 깨닫고 곧장 출가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풀 만한 유일한 단서는 그가 나무를 해다가 시중에 팔아 그 댓가로 노모를 모시고 살았다는 이야기뿐이다. 가난한 나뭇꾼과 노모—혹시 이 단서에 많은 것이 숨어 있지 않을까?
그는 물려받은 전답이 없었기에 나뭇꾼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부친이 일찍 돌아가셨으므로 어린 시절부터 나뭇꾼 노릇을 했을 일이다. 그는 장성하기까지 이 생활을 십수 년 이상 했을 테고, 마침내 어엿한 나뭇꾼으로 성장했을 때는 모친이 나이들었을 게다.
나뭇꾼의 생활은 단순하다. 이른 아침 지게를 지고서 산으로 가야 한다. 땔감을 마련하려면 비교적 깊은 숲으로 가야 한다. 숲에서 나무 한 짐 마련하고 지게에 지고 내려오면 하루 해가 다 저문다. 나무 한 짐 하는 일은 이렇게 하루 전부를 들이는 일이다. 내 어린 시절, 늦가을이면 아버지께서 겨울 땔감을 위해 매일같이 되풀이하셨던 이 일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형도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이 일을 했으며,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로는 초등학생이었던 형 혼자 학교마저 수시로 빠지며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갔다. 늦가을 날, 어린 형은 새벽에 깊은 숲을 향해 떠나는 나뭇꾼이었다. 이 기억 때문인지 나는 혜능의 나뭇꾼 시절이 항상 마음 깊숙이 들어온다.
거의 매일 이른 아침 홀로 산으로 가서 나무를 해다가 저물녘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 이렇게 마련한 땔나무를 시중에 내다파는 생활, 그리고 그 댓가로 노모를 모시는 생활—이것이 “외로운” 혜능이 어린시절부터 십수 년 간 되풀이했던 삶이었을 게다. 게다가 그는 글을 배우지도 못했을 정도로 오직 나무 하는 일밖에 몰랐던 나뭇꾼이었다. 그처럼 온전한 나뭇꾼이었던 그가, 땔나무를 부려놓고 돌아서던 어느 날, «금강경» 독송을 듣고 “마음이 맑아지고 곧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모친을 하직하고” 출가했다.
이 출가과정이 너무 극적이어서 충격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출가과정 중간에 자꾸만 뭔가의 이야기를 끼워넣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 충격 때문에 후대의 문헌도 혜능이 모친의 생활방편을 마련한 뒤 출가했다는 이야기를 삽입했을 것이다. 또 어떤 문헌은 노모 봉양보다 불법을 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였다는 그럴싸한 해석을 덧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혜능의 노모 봉양과 나뭇꾼 생활이라는 가난하지만 깨끗하고 담박한 삶이 그런 깨달음의 혜능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보는 한편으로, 혜능의 노모가 위대한 어머니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자식의 출가에 대하여 만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옷깃을 여미는 부류의 어머니. 그래서 곧바로 노모를 하직하는 일이 가능하지는 않았을까? 혹시 혜능의 노모가 혜능더러 노모 봉양보다 불법을 구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하지는 않았을까?
우리는 그런 어머니를 알고 있다. 가령, 감산스님의 어머니가 그렇다. 감산스님이 모함을 받아 겨우 죽음을 면하고 유배지로 향하다가 고향을 지나게 되었는데, 강가에 마중 나온 어머니와 만났다:
내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죽고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많이 걱정하셨지요?”어머니가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이야 정해져 있지. 나 자신도 걱정하지 않는데, 자네를 왜 걱정하겠나. 다만 사람들의 말이 갖가지라, 진상을 알지 못해서 의문은 있었네.”우리는 마주 앉아 밤을 새고 나서, 마지막 작별을 했다.
노모는 이러한 당부 말씀을 했다.
“자네는 도道로써 몸을 잘 가누시고, 내 걱정은 하지 마시게. 이번도 자네와 오래 헤어지게 되었네. 기쁜 마음으로 가시고, 뒤를 돌아다보지 마시게.”— 감산 지음, 대성 옮김, «감산자전» 115면
유배지로 길을 떠나는 아들에게, “도道로써 몸을 잘 가누시고, …, 기쁜 마음으로 가시고, 뒤를 돌아다보지 마시게” 하고 말할 수 있는 어머니. 이런 부류의 어머니에 대하여 잘 알고 있기에 역자 스님은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발언을 반존대로 번역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어느 글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어느 출가한 스님이 부모님을 회상하는 대목이었다. 그 스님의 부모님께서, 아들이 출가하게 되었을 때 자식인데도 불구하고 더 이상 하대하지 않고 존대를 하더라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나는 이 세상에 있을 성싶지 않은 부류의 어머니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마 출가사문들 중에서 이런 어머니를 하직하고 출가한 분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화엄사 효대에 오를 때마다 바로 그런 위대한 어머니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들을 회상하는 수행자들의 마음을 더듬어본다.
백팔계단을 딛고 효대에 오를 때 보이는 첫 장면이다. 공양상과 석탑이 어슷 배치되어 있다.
화엄사 효대를 둘러싼 이야기 중 가장 분분한 이견 중의 하나는 공양상이 연기조사인가 아니면 연기조사의 어머니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공양상이 연기조사 승상이고 석탑의 합장한 상이 연기조사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이는 조선시대 남효온(1454~1492)이 화엄사에 들렀을 때 화엄사를 소개하는 어느 스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성립된 판단인 듯하다. 따라서 별도의 문헌으로 확인되지 않는 이상, 남효온의 전언에 굳이 얽매일 필요가 없겠다. 그 모든 내용은 결국 석탑과 공양상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감흥에서 유래하여 마침내 설화적 구조로 완성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완성된 설화보다 감흥이 더 근원적이라면, 우리 각자가 효대를 서성일 때 일어나는 감흥과 감격을 소중하게 여길 필요가 있겠다. 많은 이들처럼 나 역시 공양상을 보면 여인의 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공양상이 연기조사의 위대한 어머니라는 생각을 하며 매번 효대를 오른다.
각황전 측면에서 효대로 오르는 계단은 백팔계단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막상 계단의 수효를 헤아려보면 백팔계단이 아니다. 왜 그럴까? 길을 달리 들었기 때문이다. 계단을 타고 무심코 오르는 길을 버리고, 중간 참에 오른편으로 급하게 꺾어드는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이 길의 들머리에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서서 천왕인 듯 천신인 듯 아득하게 호위하고 있다. 끝자락에서는 한 그루의 반송이 서서 그 길을 매듭지음과 동시에 효대로 오르는 이의 시선을 공양상과 삼층석탑 쪽으로 자연스럽게 안내한다. 이 길은 몹시 급하고 짧으며 허투로 돌계단을 놓은 듯하다. 그러나 이 길이 백팔계단의 길이다. 게다가 유구한 세 그루의 소나무가 산문처럼 서 있으므로, 이 길이 원래의 길이고 다른 길은 나중에 조성된 길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효대로 오르는 백팔계단의 마무리 돌계단들을 한단 한단 딛고 오르자면, 공양상과 삼층석탑이 함께 눈앞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오늘날의 현대건축에 익숙한 눈에는 사뭇 당혹스럽게도, 공양상과 삼층석탑이 일직선상에 있지 않고 어슷 비켜 있다. 공양상의 오른 어깨 너머로 삼층석탑과 석탑상이 보이는 것이다. 옛 사람들의 이러한 어슷한 배치 때문에, 마치 가슴속 영상처럼 한 장면이 물러서고 다른 장면이 들어서는 기분이 든다. 공양상이 그림자처럼 비켜서고 석탑이 양명하게 드러나는 구조. (지금은 복전함이 공양상 바로 뒤에 놓여 있어 이 결정적 장면을 상당부분 가리고 있다.)
공양상 뒤에 바짝 서면 가까운 것은 크게 보이고 먼 것은 작게 보이는 원근법의 원리에 의하여 공양상이 석탑을 능히 덮고도 남을 듯하다. 이 순간에는, 마치 공양상의 가슴속에서 석탑과 석탑상이 출현했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리하여 공양상이 연기조사의 어머니이고, 이 어머니의 품에서 연기조사-수행자-부처의 석탑상이 탄생한 듯하다. 더구나 공양상은 석등의 역할을 하고 있어 밤이면 공양상의 빛에 의하여 석탑이 드러나는 구조가 된다. 이렇게 하여, 내 마음속에서 공양상의 뒷모습은 곧 출가수행자를 자식으로 둔 어머니들의 뒷모습이 된다.
어머니! 정각자 부처가 되려고 출가한 자식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계시는 어머니! 아니 그 자식을 비추시는 어머니! 어머니가 마음에 품고 있는 신비는 아득하여 보통의 생각으로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부처도 조사도 어머니의 품속에서 나온 분들이거늘, 그래도 어머니들은 말씀이 없으시고,…
나는 백팔계단을 딛고 오르는 순간마다 출가수행자를 자식으로 둔 어머니들의 뒷모습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강렬한 느낌이 든다. 출가하던 날 자식에게 존대하시던 어머니. 자식에게 정각자가 되라고 무릎을 꿇을 수 있을 정도의 신심을 가지신 어머니. 그 어머니는 자식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식 안에 있는 부처에게, 더 나아가 당신 안의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효대의 첫 풍경은 위대한 어머니의 뒷모습이 된다. 어머니의 뒷모습이 가슴을 쓸 때 때마침 한 줄기 바람이라도 불면, 그 바람은 한 치도 틀림없는 가슴속 바람이요 애달픈 바람이 된다. 그래서 대각국사 의천도 “애달픈 바람 효대에서 이는가” 하는 싯구를 남기지 않았겠는가.
효대의 공양상. 공양상 뒤로 반송과 “길상봉”(추정)이 보인다.
대각국사 의천(1055~1101). 고려황실의 왕자였으나 왕자들 중에서 출가수행자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부모의 원에 따라 자발적으로 출가자가 된 스님이다. 대각국사는 구백 여년 전에 지리산화엄사를 방문하여 우리가 현재 딛고 있는 이 백팔계단의 길을 따라 효대에 올랐다. 그분도 공양상을 어머니의 모습으로 보았던 것일까. <효대시비>를 통하여 잘 알려진 <유제지리산화엄사>(留題智異山華嚴寺)의 시는 이 공양상을 바라보면서 얻은 감흥을 읊고 있다:
寂滅堂前多勝景 吉祥峰上絶纖埃
彷徨盡日思前事 簿暮悲風起孝臺적멸당 앞으로는 빼어난 경치 여럿이로되
길상봉 위로는 띠끌마저 끊어졌어라
진종일 서성이며 지난 일 생각하니
저물녘 애달픈 바람 효대에서 이는가
“적멸당”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탑이 있다 하여 예로부터 효대 일곽을 이를 때 쓰는 명칭이기도 하다. (사사자삼층석탑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면, 남효온의 전언처럼 석탑상을 연기조사의 어머니로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이미 그 당시에 “효대”라고 불렸던 만큼 의천스님은 장육전(각황전) 뒤의 소로를 오르며 감회에 젖었을 일이다.
그러면, 왜 의천스님의 시가 공양상을 바라보면서 쓴 시인지 알기 위하여 “적멸당 앞 빼어난 경치”와 “길상봉”을 살펴보자.
“빼어난 경치”는 석탑 쪽에서 화엄사 금당 쪽을 바라보노라면 그 위로 그 아래로 펼쳐지는 풍광, 즉 노고단에서 화엄사 앞산에 이르기까지 흐르는 산봉우리들의 경치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효대 앞 나무들이 오늘날처럼 무성하지는 않았으므로 시야마저 탁 트였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치수를 위한 호안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계곡물의 맑은 흐름도 보았을 일이다. 그러나 그 많은 승경들 중에서 시인에게는 유독 “길상봉”이 눈에 띄었다. 그러자 “지난 일”이 생각났고, “효대”에 이는 “애달픈 바람”을 만났다.
우리는 이 시의 첫 두 행과 마지막 두 행 사이, 즉 “길상봉”과 “효대” 사이에 공간적으로 그 뭔가가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다름아닌 공양상이다. “적멸당 앞 빼어난 경치” – “길상봉” – [공양상] – “효대”로 이어지는 시선의 흐름은, 석탑 편에 서서 공양상을 바라볼 때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다.
공양상 뒤로 보이는 “길하고 상서로운” 봉우리. 이것이 길상봉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길상봉”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또 하나, “길상봉”. 지리산 봉우리 중에 “길상봉”이라는 이름의 봉우리가 있긴 하지만 화엄사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그 봉우리를 지칭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노고단”을 길상봉이라고 부른다는 견해도 있는데, 사실 이 견해의 근거가 되는 관련 문헌을 찾기는 힘들다. 내 생각에는 이 견해가 바로 의천스님의 시에서 비롯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추정을 해본다. 이 추정이 사실이라면, “길상봉”을 꼭 노고단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노고단을 타고 화엄사로 내려오는 지봉들 중에서 대각국사가 “길상봉”이라고 칭할 만한, 매우 길하고 상서롭게 솟아오른 봉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봉우리는 각황전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 대웅전 바로 위로 솟은 봉우리로서 화엄사 경내 어디에서나 목격된다. 광학장에서도 보이며 범음료에서도 보인다. 구층암에서도 보이며, 그 옆의 “길상암” 앞마당에서도 보인다. 그러나 이 봉우리가 가장 장쾌하게 보이는 지점은 다름아닌 효대이다. 게다가 이 길상봉은 공양상 바로 위로 펼쳐져 있고, 효대 앞 산봉우리들 중에서 가장 높아 보인다.
이처럼 시적 풍경을 재구성하고 나면, 시에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시를 읽어내려갈 때마다 공양상이 망연히 눈앞에 그려진다. 첫 두 행에서는 노고단에서 화엄사 앞산까지 이르는 산봉우리들이 펼쳐지고, 그중에서도 길하고도 상서롭게 솟아오른 길상봉이 눈에 걸린다. 티끌마저 끊어진 맑은 날인데, 혹은 그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티없이 맑은 마음인데, 길상봉 아래 공양상이 문득 보이고, 지난 날의 어머니가 떠오른다. 의천스님도 필시 공양상을 어머니 상으로 보았던 게다. 그래서 하루가 다하도록 서성인다. 시인은 아침나절에 이 효대에 올랐건만 종일토록 이 효대를 서성인 듯하다.
마침내 날이 저물 때 밤그늘이 어머니의 뒷모습처럼 나리고, “비풍”悲風이 분다. 그리하여 이 바람은 감정을 탈속한 “가을바람”이 아니라 감정이 묻어 있는 “애달픈 바람”이 된다. 이 애달픈 바람이 효대에서 일어나 석탑을 쓸고 공양상을 쓸고 띠끌조차 끊어진 길상봉 위도 쓴다. 이제 이 애달픈 바람을 맞으며 맑은 달이 떠오를런가. 혹여 의천스님은 공양상 위의 석등에 손수 불을 놓지는 않았으려나, …
화엄사에 들러 의천스님의 시를 읽을 때마다 마지막까지 해석하기 어려웠던 것은 다름아닌 “비풍”이었다. 그러나 올 여름 화엄사에서 진행하는 간화선수련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간화선 수행을 지도하셨던 포교국장 스님의 “효대시가”라고 할 만한 노래를 듣고서, 이 “비풍”이 탈속의 바람이 아니라 대단히 인간적인 바람임을 확신했다. 스님의 “효대시가”는 이러했다:
콩밭 메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홀어머니 두고 출가하던 날
지리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소리만
어린 가슴속을 태웠소
한담 중에 들려주신 스님의 말씀도 생각난다: “이 지구가 멸망한다면, 그래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이 두 가지일 것이다. 불교사상과 효사상!”
효대의 사사자삼층석탑. 석등에 불을 놓으면 드러나는 풍경이 아닐런가.
효! 그 어느 사찰에서 이토록 효를 지극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느 사찰에 이처럼 선승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공간이 있겠는가. 효대는 화엄사 경내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 효사상으로 불교사상을 물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더 나아가, 사사자삼층석탑은 틀림없는 어머니의 마음속 풍경처럼 보인다.
하오니, 어머니를 하직하고 출가한 모든 수행자들이여, 부디 성불하소서. 효대의 백팔계단을 오르는 이들이여, 이세상에는 위대한 어머니들이 있음을 잊지 마소서. 보소서, 공양상 석등에 불을 놓으면 그 빛 가운데 석탑이 서리니!
처음으로 ‘금강경’을 읽어 보았습니다. 특별히 새로운 구절은 없었는데도 마음이 평온해지더니 밤까지 그 이튿날까지… 평온하더군요. 반복 반복되는 구절들이 가만가만 아픈 배를 쓸어주던 어머니 손길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오늘 화엄사 효대에 관한 명상의 글 보배롭게 읽었습니다.
새로 올린 사진은 산의 능선과 댓잎과 소나무가 수묵으로 그린 옛 그림 같군요. 운림산방을 생각나게 합니다.
저는 아직 ‘금강경’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새로운 구절이 없었다니, 선생님의 마음에 딱 맞아들었나 봅니다. 저도 곧 금강경을 읽을 예정인데, 저에게도 특별히 새로운 구절이 없어야 할 텐데…^^
화엄사홈페이지 내 산사체험 게시판과 다음 화엄사수련동문회 까페로 퍼갑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