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바라보는 소크라테스의 커다란 퀴클롭스 눈, 즉 예술가적인 홀림Begeisterung의 탐탁한 광기라곤 전혀 타오르지 않는 그 눈을 생각해 본다면—어찌해서 그 눈은 디오뉘소스적인 심연을 호감을 가지고 관조하지 못하는가를 생각해 본다면—플라톤이 일렀다시피 “숭고하고 높이 칭송받는”1 비극 예술에서 그 눈은 도대체 무엇을 볼 수밖에 없었던가? 결과가 없는 듯한 원인이 있는, 원인이 없는 듯한 결과가 있는, 정녕 불가해한 그 뭔가를 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전모는 다채롭고 다중적인지라 차분한 부류의 정서에 거슬릴 수밖에 없겠고, 혹하기 쉽고 예민한 영혼에게는 하나의 위험한 도화선이었겠다. 우리는 알고 있거니와, 그가 유일하게 시 예술의 장르로 파악한 것은 이솝 우화였다:2 그것도, 존경받는 훌륭한 겔레르트가 꿀벌과 암탉의 우화에서 시를 칭송하며 노래할 때 띄웠던 겸허한 미소와 함께였다:
그대는 나를 보고 알리, 그것이 어디에 소용 있는가,
많지 않은 지성을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
비유를 통하여 진리를 말해주는 것.3
그러나 이제, 비극 예술을 멀리해야 하는 이중의 근거, 즉 비극 예술이 “많지 않은 지성을 소유하고 있는 자”를 향한다는 점, 그러므로 철학자를 향하지 않는다는 점은 젖혀놓더라도, 소크라테스로서는 비극 예술이 결코 “진리를 말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는 비극 예술을 알랑거리는 예술, 안이한 것만 제시할 뿐 유익한 것은 제시하지 못하는 예술로 꼽았으며,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러한 비철학적인 유혹거리를 금하고 철저히 멀리하도록 요구하였다; 그 결과 청년기에 비극시인이었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학생이 되기 위하여 가장 먼저 자신의 시들을 태워버렸다. 그러나 체질을 숨길 수 없어 소크라테스의 준칙에 싸움을 걸어 보았지만, 그럴수록 그 준칙의 힘도 저 엄청난 인물의 무게도 갈수록 거대해져, 시마저도 그 당시까지만 해도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지위로 몰아낼 정도였다.
그 사례가 방금 언급한 플라톤이다: 비극과 예술 전반을 유죄 판결할 때에 확실히 스승의 소박한 견유파 뒷편으로 물러나 있지 않았던 그는, 온전히 예술가적인 필연으로, 다름아닌 자신이 멀리했던 현존 예술 형식들에 친숙한 한 예술 형식을 창안할 수밖에 없었다. 플라톤이 옛 예술에 가했던 주요 비난—옛 예술은 가상영상의 모방이라는 둥, 그러므로 경험적 세계보다 저급한 영역에 속한다는 둥4—만큼은 적어도 새로운 예술 작품에 해당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플라톤이 현실을 넘어서려 하고, 저 가짜-현실 기저에 깔린 이데아를 제시하려는 노력을 우리는 과연 보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사상가 플라톤이 우회로를 거쳐 당도한 곳, 그곳은 시인으로서의 그가 언제나 고향으로 삼았던 곳이었으며, 소포클레스와 모든 옛 예술이 저 비난에 장엄하게 항거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이었던 곳이다. 비극이 그 이전의 모든 예술 장르를 제 안에 흡수하였다면, 의미의 핵심을 비켜서 말하건대, 같은 내용이 다시 플라톤의 대화편에도 해당될 만하다. 현존하는 모든 양식과 형식의 혼합을 통하여 창작한 그의 대화편은, 서사시와 서정시와 드라마 사이, 산문과 시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부유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언어 형식의 통일이라는 엄격한 옛 법칙까지 깨뜨린다; 그 길에서 좀더 나간 이들이 견유파의 저술가들이다. 그들은 최대한 다채로운 양식으로, 산문 형식과 운문 형식 사이에서 이리저리 부유하면서, 꾸준히 자신들의 삶으로 묘사했던 “미쳐버린 소크라테스”5의 문학적 형상까지 성취하였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말하자면 난파당한 옛 시가 자식들과 함께 구조되어 올라탄 조각배였다: 비좁은 공간에 밀집하여 불안 속에서 소크라테스라는 한 명의 항해사에게 복종한 채 그들은 이제 신세계를 향해 간다. 그 세계에서는 이러한 항진의 환상적인 영상을 보고 결코 싫증을 낼 리 없다. 실제로 플라톤은 후세 전체에 새로운 예술 형식의 전범, 소설의 전범을 제시하였다. 이는 무한히 상승한 이솝 우화라고 칭할 수 있거니와, 여기에서 시와 변증술 철학의 위계는 흡사 지난 수백년 동안 유지된 철학과 신학의 위계와도 같다: 그러니까 몸종ancilla이다. 이것이 시의 새로운 자리, 마성적인 소크라테스의 압박 하에 플라톤이 몰아낸 자리인 것이다.
여기에서 철학적 사고가 무성하게 자라나 예술을 휘덮으니, 예술은 어쩔 수 없이 변증술의 가지에 간신히 매달리게 된다. 아폴론적 경향은 논리적 도식 안에 들어가 번데기가 된다: 우리는 에우리피데스에게서 이와 상응하는 면모를 감지했던 바이며, 그 이외에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자연주의적 감상으로 전이되었음을 감지했던 바이다. 플라톤의 드라마에서 변증술의 영웅인 소크라테스는 에우리피데스의 영웅을 상기시킨다. 그의 영웅은 이유와 반대이유를 내세우면서 자신의 행위들을 방어해야만 하며, 그래서 그토록 빈번하게 우리의 비극적 연민을 얻지 못하는 위험에 빠지기 일쑤이다: 추론이 끝날 때마다 환호성을 올리고 애오라지 서늘한 빛과 의식 속에서만 숨쉴 수 있는 낙관주의적 요소가 변증술의 본질에 속함을 과연 누가 오인할 수 있겠는가: 낙관주의적 요소가 한 번 침입한 이상, 비극의 디오뉘소스적 영역에 차츰차츰 만연하게 되며, 필연적으로 비극이 자멸하도록—죽어서 시민극6으로 비약하기까지—몰아갈 수밖에 없다. 그저 “유덕함은 앎이다; 단지 무지하기에 죄를 지을 따름이다; 유덕한 자가 행복한 자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들의 귀결만 떠올려 보라: 낙관주의의 이 세 가지 근거 형식 속에 비극의 죽음이 있다. 이제 유덕한 영웅은 변증가일 수밖에 없으므로, 유덕과 앎 사이에, 신앙과 도덕 사이에, 이제 필수적인 가시적 유대가 생길 수밖에 없으며, 이제 아이스퀼로스의 초월론적인 정의에 의한 해결은 흔해빠진 기계장치 신이 등장하는 “시적 정의”7라는 얄팍하고로 파렴치한 원리로 전락하고 만다.
이 새로운 소크라테스적-낙관주의적 무대세계에 맞서, 이제 가무단, 그리고 비극의 뭇 음악적-디오뉘소스적 근저 전체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뭔가 우연적인 것으로서, 어쩌면 또한 비극의 근원이 사라지고 난 뒤의 아쉬운 여운으로서 나타나리라; 그러나, 우리는 오직 가무단만이 비극과 비극적인 것 일반의 원인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던가. 이미 소포클레스에게서 가무단과 관련한 당혹스러움—비극의 디오뉘소스적인 토대가 그에게서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중요한 징후—이 나타난다. 그는 더 이상 효과에 대한 주요 몫을 가무단에 맡기지 않고, 이제는 가무단이 거의 배우와 한통속이 된다 싶을 정도로, 가무단이 오케스트라에서 나와 무대로 올라간 것이나 다름없이, 가무단의 영역을 제한한다: 어떻게 하여 가무단의 본질이 완연히 파괴되고 말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가무단에 관한 바로 이 견해에 당연히 찬성할 것이다.8 아무튼 소포클레스가 직접 실천하여 추천한, 그리고 전승에 따르면 글을 통해서도 추천한, 가무단 지위의 후퇴는 가무단 파멸의 첫 걸음이었다. 이 파멸의 국면은 에우리피데스, 아가톤, 그리고 신희극에서 경악할 만큼 급속히 전개된다. 낙관주의적인 변증술이 삼단논법의 채찍을 휘두르며 음악을 비극에서 몰아낸다: 즉 유일무이하게 디오뉘소스적 상태의 표명과 형상화로서, 음악의 가시적 상징화로서, 디오뉘소스적 도취의 꿈의 세계로서 해석될 수 있는 비극의 본질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소크라테스 이전에 영향력을 떨친, 소크라테스에서 비로소 전대미문의 거대한 표현을 획득한 반反디오뉘소스적인 경향을 수긍한다면,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현상과 같은 현상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물음 앞에서 움추릴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플라톤 대화편을 목전에 두고, 마냥 해체시키기만 하는 부정적인 위세로 파악할 만한 처지도 아니다. 소크라테스적 충동이 디오뉘소스적 비극의 파탄에 끼친 영향이 그토록 밀접하고 분명하다면, 소크라테스의 심오한 삶의 경험 자체가, ‘과연 소크라테스주의와 예술 간에는 필연적으로 대척적인 관계만 성립하는가’, 그리고 ‘예술가적 소크라테스의 탄생은 정말 뭔가 자체적으로 모순적인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끔 만든다.
저 폭군과도 같은 논리가가 예술을 앞에 두고 여기저기에서 구멍, 공백의 느낌, 절반은 자책의 느낌, 의무를 소홀히 했다 싶은 느낌을 가진 셈이다. 그가 옥중에서 벗들에게 이야기했다시피, 한결같이 “소크라테스여, 음악을 하라!”9고 같은 말만 하는 똑같은 꿈이 그에게 자주 나타났다. 그는 마지막 며칠까지도 철학을 함이 최고의 무사 여신의 예술이라는 견해로 위안을 삼으며, 어느 신성이 저 “통속적이고도 대중적인 음악”을 자신에게 회상시켜 주는 것이겠지 하고 그릇되이 믿는다. 마침내 옥중에서 그는 양심의 부담을 완전히 덜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무시했던 음악을 하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심정에서 그는 아폴론에게 바치는 서시序詩를 쓰고 몇 가지 이솝 우화를 운문으로 옮겨본다. 그로 하여금 그러한 습작을 하도록 이끌었던 것은 마성적으로 경고하는 음성과 유사한 그 무엇이었다. 자신이 야만인의 왕처럼 고결한 신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몰이해로 인하여 자칫 어느 한 신성에 죄를 범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그의 아폴론적인 통찰이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꿈에서 나타난 저 말이 논리적 본성의 한계에 대한 의혹을 말해주는 유일무이한 징후이다: 혹시—그래서 그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내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곧 불가해한 것이 아닐까? 혹시 논리가를 추방시킨 지혜의 나라가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예술은 학문의 필수적인 상관물이자 보완물이지는 않을까?
- 플라톤, <고르기아스> 502b [↩]
- 플라톤, <파이돈> 60e1 이하 참고 [↩]
- 18세기 시인 Christian Fürchtegott Gellert의 교훈시 [↩]
- 플라톤, <국가> 596a5 이하 참조 [↩]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기록에 의하면, 플라톤은 “견유파 디오게네스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질문을 받고서 “한 명의 소크라테스가 미쳐버렸다”고 답했다고 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 철학자들의 삶과 가르침» 6권 54장 참고. [↩]
- 18세기에 등장한 문학장르. 비극적 충돌이 시민층의 세계에서 전개되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시민층에서 벌어지는 귀족과의 충돌, 혹은 규범들이나 가치들 간의 충돌이 주내용을 이룬다. 레싱의 «에밀리아 갈롯티», 실러의 «간계와 사랑»이 대표적이다. [↩]
- 신의 개입을 통해 실현되는 문학상의 인과응보 [↩]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45a25 [↩]
- 플라톤, <파이돈> 60e5 이하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