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이 안 좋다. 한 3주간 몸이 제 상태가 아니어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아내한테 느끼는 고마움, 그리고 허한 내 몸. 몸이 허하면서, 그리고 하던 일들을 손 놓으면서(딱히 하는 일도 없었지만), 머리를 비워본다. 불교의 가르침들을 생각해 보고 또 불교경전을 읽어본다. 불교는 왜 생노병사를 근본적인 문제의식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일까?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 이 네 가지는 인간인 이상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벗들이다. 이 벗들을 젖혀놓고서 살아가는 삶은 허위의 삶이기에 부처님은 출가를 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사람들이 사회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城, 석가족의 왕궁, 즉 하나의 허위의 순환원을 벗어남으로써 위대한 불교가 탄생하게 되었다면, 확실히 불교는 가장 현실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벗들을 언제나 근본에 깔아두고서 살아가는 삶은 어쩌면 가장 비사회적일 수도 있겠으나 진실로 가장 현실적인 것이다. 이 참된 현실에 바탕해서 인간의 만남, 사회적인 삶을 재조명하는 것, 이것이 나는 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수긍하는 것, 누구나 알고 있는 것, 생노병사의 문제. 불교만큼 생노병사의 문제를 위대하게 다룬 종교는 없다. 기독교는 병의 문제를 악의 문제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불교는 병을 존재의 필수조건으로 간주한다. 병은 인간인 이상 벗어날 수 없는 벗이다. 병과 죽음, 이 벗들이 우리와 평생토록 동행하는 이상 우리의 인생은 苦다. 苦의 빨리어 ‘둑카’(dukkha)는 단순히 ‘괴로움’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명멸자의 운명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술어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병들거나 죽기 때문에만 苦가 아니라, 태어났기 때문에도 苦다. 행복하기 때문에도 苦다. 즐겁기 때문에도 苦다. 슬프기 때문에도 苦다. 그러므로 苦는 우리 명멸자들의 흔들리고 요동하는 존재 전반의 상태에 대한 지칭이라고 할 수 있다. 흔들린다는 것, 제아무리 탄탄한 사회적 교류를 통해서 삶이 안정적이고 확정적이라할지라도 흔들린다는 것, 우리의 위대한 벗들인 병과 죽음 때문에 모든 인간은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필연적으로 흔들린다는 것, 바로 여기에서 불교는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아직 죽어본 적이 없으므로 죽음을 알지 못한다. 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의미이며, 죽음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우리는 병을 앓아본 적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을 경험해 보았으며, 병을 안다. 이때의 ‘안다’는 것은 의식적인 작용의 술어가 아니다. 우리는 앓고 있는 병의 의학적 지식은 알지 못해도, 그 병을 앓아본 적이 있는 이상 그 병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의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아는 자는 누구 혹은 무엇일까?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아는 그 주체는 누구일까? 이러한 물음은 선불교의 전통에서 참구하게 되는 바이므로, 더 이상 나는 물음과 답을 이어갈 수가 없다.
선법사 마애불. 인간의 근본조건과 위대하게 마주친 수행자의 상은 언제나 내게 존경의 대상이다.
아무튼 나는 아프다. 나는 아픈 것을 안다. 그래서 마음과 머리를 비워보기도 한다. 그리고 불교의 근본적인 출발점을 생각해 보자니, 문득 사문출유四門出遊가 불교의 일화 중 가장 아름다운 일화는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 성의 동문, 서문, 남문, 북문, 이렇게 사문四門으로 나서서 마주쳤다는 생노병사의 문제와 수행자. 이 일화는 신화적으로 채색되어 있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병을 모르는 동안 혹시 나는 성문 안 귀공자처럼 산 것은 아니었을까? 병을 모르므로 오직 병을 모르는 자들과 교류하며 지낸 것은 아닐까? 병을 몰랐던 때의 나의 웃음이 어쩐지 가볍고 허위적으로 느껴진다. 오직 사회적으로만 존재하고 오직 사회적으로만 웃고 오직 사회적으로만 슬퍼하느라 나를 망각하고 산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병을 다시 한번 알았으므로 이 벗을 망각하지 말자. 이 운명의 벗을 망각한다는 것은 곧 나를 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견해는 사회적이다. 언어가 언제나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은 내가 의학적 견해를 통해서 안 것이 아니며 사회적으로 안 것도 아니다. 내 몸, 혹은 내 몸 안의 무엇이 그 병을 알아서 나는 아는 것이다. ‘내 몸 안의 무엇’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 병은 나의 벗이고, 바로 나이다. 나는 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는 않다. 아니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병을 영원토록 껴안고서 살아가고 싶다.
苦로부터 해탈하는 것은 苦로부터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닐 것이다. 苦와 동일한 공간과 시간에 함께 머물되 苦로 인하여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것, 내가 확고부동해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苦가 내 운명의 벗임을 흔쾌히 받아들임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것, 황혼이 저녁나절의 서늘한 풍경을 흔들며 지나가는 순간처럼 아름답게 보는 것, 그것이 바로 해탈은 아닐까?
성성하고 적적한 저녁나절의 숲을 그리며 병을 생각해본다.
오랜만에 들렸더니, 편찮으셨네요. 건강하셔서 좋은 일 많이 하셔야지요. 기도하겠습니다. 그런데 안될 말이지만 형이 아프다는 소리가 왠지 반갑기도 합니다. 제 기억에 형은 늘 말없이 아프고 그래서 아프지 않았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구도자 처럼. 그런데 아프시다는 말씀을 들으니 형이 훨씬 더 가까이 느껴집니다. ‘아프다’ 그 말처럼 곁을 내주는 말도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람은 기쁨보다는 아픔과 슬픔안에서 더 깊이 하나가 되는 가요? 어쨌든 형수님이 계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오랜만입니다. 이 공간을 통해서나마 필생의 벗들과 교류한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모두들 가타부타 말없이 조용하지만 제가 본받고 싶은 길들을 잘 가고 있겠지요. 옛 사람들은 마음이 통하는 벗 두어 명만 있으면 인생은 족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옛 사람들은 높은 수준에 도달했던 것이겠지요.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