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킬로코스와 관련한 학자들의 연구는, 그가 민요를 문학에 도입하였음을, 그 위업 때문에 그리스인들의 보편적인 평가에서 그가 호메로스와 나란히 저 전무후무한 지위를 얻었음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전적으로 아폴론적인 서사시와 대립하는 민요란 무엇인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뉘소스적인 것의 일치가 남긴 끝없는 흔적perpetuum vestigium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겠는가; 어마어마한, 모든 민족 너머로 뻗어가는, 늘 새로운 탄생을 하면서 상승하는 그 흔적의 확산은, 자연의 저 예술가적인 이중 충동이 얼마나 강한가에 대한 증언이다: 그 이중 충동은, 한 민족의 열화같은 움직임들이 음악으로 영구화되듯이, 그 흔적들을 유비적인 방식으로 민요에 잔존시킨다. 그렇다, ‘민요가 풍부했던 생산적인 시기들 역시 매번 디오뉘소스적인 물줄기, 우리가 언제나 민요의 근저요 전제라고 보아야 하는 그 물줄기로 말미암아 가장 강력하게 발흥하게 된다’는 점은 역사적으로도 입증될 것이다.
그러나 민요는 무엇보다 우선하여 음악적 세계 거울로, 한 폭의 평행하는 꿈 현상을 추구하면서 이 현상을 시문학으로 발언하고 있는 근원적 선율로 인정된다. 선율은 그러므로 최초의 것이요 보편적인 것, 때문에 상당량의 대상물까지도 상당량의 가사로 제 곁에 두고 감내할 수 있는 것이다. 선율은 또한 민족의 소박한 평가에서 훨씬 더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기도 하다. 선율은 제 스스로 시문학을 낳는다, 그것도 늘 거듭하여 새롭게; 민요의 유절형식有節形式은 이것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마침내 이 해명을 찾아내기 전까지 언제나 나는 저 현상을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했다. 어느 한 민요집, 예컨대 아이의 마법의 뿔피리1를 이 이론에 비춰보면, 지속적으로 산출되는 선율이 주위에 영상의 불꽃을 튀기는 무수한 사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선율이 다채롭고 수시로 변하는 가운데, 그렇다, 몹시 서두르는 가운데, 서사시적 가상과 그 고요한 흐름이 아예 알지 못하는 힘을 계시하는 영상의 불꽃을 주위에 튀기는 것이다. 서사시의 입장에서 보자면 서정시의 이 균일하지 않고 불규칙적인 영상세계는 그냥 거부되어야 한다: 과연 테르판드로스 시대의 장엄한 아폴론적인 서사시 낭송가인들은 그렇게 했다.
우리는 그러므로 민요의 시문학에서 음악을 모방하기 위해 가장 팽팽하게 긴장된 언어를 본다: 때문에 호메로스적인 시세계와 철두철미 모순되는 새로운 시세계가 아르킬로코스와 함께 시작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시와 음악, 말과 음 간에 유일하게 가능한 관계를 지적한 셈이다: 말, 영상, 개념이 음악과 유비적인 표현을 추구하게 되면, 이제 [그것들은] 음악 자체의 위력을 겪게 된다. 이 의미에서, ‘언어가 현상세계와 영상세계를 모방한 이후냐’, 아니면 ‘언어가 음악세계를 모방한 이후냐’를 기준으로, 그리스 민족의 언어사에서 두 가지 주요 물줄기를 구분해도 된다. 이 대립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호메로스와 핀다로스를 두고 딱 한 번만 색채∙구문론 구조∙언어재의 차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라; 그러면 틀림없이 호메로스와 핀다로스3 그 중간에서 올륌포스4의 열렬한 취주가락, 즉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도, 무한히 한결 더 발전한 음악 한가운데에서, 취기서린 열광에 휩싸여, 과연 근원적인 효과를 발하며, 동시대 인간의 모든 시적인 표현수단더러 [저를] 모방하라고 선동했던 그 가락이 울렸으리라는 점이 손에 잡힐 듯 분명해지리라. 나는 여기에서 우리의 미학이 불쾌하게 여기고 있는 익히 알려진 우리시대의 현상을 상기하게 된다. 하나의 음의 작품을 통하여 생겨나는 다양한 영상세계들의 종합이 진정 환상적으로 다채롭게, 아니 모순되게 드러난다고 할지라도, 아무튼 베토벤 교향곡이 영상언어Bilderrede5를 개개 청중에게 강요하고 있음을 우리는 되풀이하여 체험한다: 이러한 [영상세계들의] 종합에 대해서는 빈약한 기지를 발휘하면서도 진정으로 설명할 만한 가치가 있는 현상은 간과하고 마는 것이 바로 저 미학의 수법이다. 그렇다, 음의 시인이 어느 한 작곡을 두고 영상을 빌어 말할 때조차도, 가령 어느 한 교향곡을 두고 ‘전원’이라 하고, 어느 한 악장을 두고 “시냇가 정경” 혹은 “시골사람들의 흥겨운 모임”이라고 표제를 붙힐 때조차도,6 이는 다름아닌 음악으로부터 태동한 비유적인 표상들일 뿐이며, —음악이 모방한 대상같은 것이나—, 어느 특정한 측면에 의거 음악의 디오뉘소스적인 내용에 대하여 가르칠 수 있는 표상들, 즉 다른 영상들에 비해 배타적인 가치를 지닌 표상들은 아니다. 음악이 영상으로 발산되는Entladung 이 과정을 이제 우리는 젊고 신선한, 언어적으로 창조적인 무리에게 전달해 주어야 한다. 유절민요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언어능력 전반이 음악의 모방이라는 새 원리로 말미암아 어떻게 요동하게 되는가를 예감하도록.
그러므로 서정적 시문학을 영상과 개념으로 음악을 모방하는 섬광이라고 본다면, 이제 우리는 물을 수 있다: “음악은 영상과 개념의 거울 속에서 무엇으로서 나타나는가?” 음악은 의지로서 나타난다, 쇼펜하우어적인 의미의 말로 하자면, 음악은 순수하게 관망하는 무의지적인 미적 분위기의 대립으로서 나타난다. 여기에서 이제 가능한 한 아주 날카롭게 본질의 개념을 현상의 개념으로부터 구별하라: 음악은 그 본질로는 의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의지는 그 자체로는 미적인 것이 아니므로, 음악이 의지로서만 그친다면야 예술의 영역에서 전적으로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은 의지로서 나타난다. 영상들로 나타나는 음악의 현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서정시인은 애정의 속삭임에서 광기의 원한에 이르기까지 격정의 온갖 움직임이 필요하다; 그는 음악에 관하여 아폴론적인 비유들로 이야기하려는 충동이 이는 가운데, 온 자연 및 이 자연 속의 자신을 영원한 의욕자∙영원한 갈망자∙영원한 동경자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영상을 빌어 음악을 해명하는 동안은, 그는, 음악의 매개체를 통하여 관조하는 모든 것이 제 주위로 제아무리 밀치고 휘몰아치며 움직이고 있을지라도 아폴론적인 목도目睹라는 바다 위 고요한 휴식에 들어서 있다. 그렇다, 그가 바로 그 매개체를 통하여 제자신을 쳐다볼 때면, 불만족스러운 느낌의 상태에서 그 나름의 영상이 그에게 보인다: 그 나름의 의욕∙동경∙한숨∙환성은 그로서는 그가 음악을 해명하려고 써먹는 하나의 비유이다. 이게 서정시인의 현상이다: 그는 아폴론적인 천재가 되어 음악을 의지의 영상을 통하여 해석하는 한편으로, 그 자신은 의지의 열망으로부터 완전히 풀려나 티없이 맑은 태양의 눈이 된다.
이 모든 논의는, 서정시는 음악 자체나 마찬가지로 아무런 경계선도 없이 음악의 정신에 종속되어 있으며, 영상과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제 옆에 둔 채 견뎌내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 집중되어 있다. 서정시인의 시문학은, 그더러 영상언어를 강요했던 음악 안에 어마어마한 보편성과 총체적 타당성을 띠고 사전에 놓여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발언할 수 없다. 음악은 원초 일자의 심장에 있는 원초 모순, 원초 고통과 상징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모든 현상 너머에 그리고 모든 현상 이전에 있는 하나의 천구天球를 상징화하기 때문에, 언어를 가지고 음악의 세계상징술을 감당하기에는 어떤 식으로든 모자랄 수밖에 없다. 음악과는 반대로, 정작 개개 현상은 단지 비유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현상들의 기관이자 상징인 언어는 가장 깊은 내적인 것을 단 한번이라도 결코 외부로 표출시키지 못하며, 도리어 언어가 음악을 모방할라치면 언제나 그저 음악을 표면적으로만 건드리고 마는 한편으로, 우리는 서정시의 온갖 뛰어난 표현을 통해서도 음악의 가장 깊은 의미에는 그 이상 단 한 걸음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 «아이의 마법의 뿔피리»(Des Knaben Wunderhor)는 1804-7년 Achim von Arnim과 Clemens Brenntano가 공동으로 수집한 3권짜리 독일민요 가사집이다. [↩]
- 낭송가인은 (특히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직업적으로 낭송하는 신분이다. 테르판드로스는 기원전 7세기 레스보스의 음악가로서 호메로스를 낭송하지 않고 노래했다. 그는 키타라 연주자였으며 칠현의 뤼라를 도입했다고 전한다. [↩]
- 기원전 5~6세기의 그리스 서정시인이다. 고대의 분류에 의하면 그의 서정시는 종교적인 내용이 열한 권, 세속적인 내용이 여섯 권에 달한다. 이들 중에서 현존하는 것은 헬라스 전체를 아우르는 축제에서 승리한 자를 기리는 축가들을 모아놓은 네 권뿐이고, 나머지는 토막글로만 전한다. 그의 현존시는 대체로 아름다움, 용맹, 명예 등의 도덕적 이상을 고취하는 내용이다. 문체는 다의적이고 비유적이며, 의미의 전이와 은유가 풍부하다. [↩]
- 전설에 따르면 올륌포스는 프뤼기아 지방의 취주악기(아울로스) 연주자이다. 아울로스는 현대의 오보에와 비교할 만하다. 올륌포스는 초창기의 아울로스 연주법 창시자로 여겨지고 있는데, 그의 음악은 한편으로는 도취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고 전한다. [↩]
- ‘비유언어’, ‘비유의 말’ 등으로 옮겨도 무방하다. «비극의 탄생» 17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음화音畵 Tonmalerei와 연계하여 읽되 그것과는 다른 개념으로 읽어야 한다. [↩]
- 베토벤의 F장조 6번 ‘전원’교향곡, op.68을 언급하고 있다. 2악장은 “시냇가 정경”, 3악장은 “시골사람들의 흥겨운 모임”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
1.
Die Melodie ist also das Erste und Allgemeine, das deshalb auch mehrere Objectivationen, in mehreren Texten, an sich erleiden kann.
강대경 :: 선율은 최초의 것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선율은 따라서 몇몇의 상황 속에서 몇몇의 서로 다른 노래로 나타나게 된다 하더라도 그 자체는 변치 않는다.
이진우 :: 멜로디는 그러므로 최초의 것이고 일반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여러 텍스트들 속에서 다양하게 객관화되는 것 자체를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 강대경은 운동선수로 치면 기복이 심한 선수이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아주 뛰어난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부진의 늪을 헤매는 선수. 강대경의 문장은 완벽한 오역이지만, 이진우는 선방했다.
나는 이 대목을, “선율은 그러므로 최초의 것이요 보편적인 것, 때문에 상당량의 대상물까지도 상당량의 가사로 제 곁에 두고 감내할 수 있는 것이다”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