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메로스
호메로스의 인간들은, 헤르만 프렝켈Hermann Fränkel이 표현했다시피, 철저하게 단면적인 생명체이다. 그들에게는 심리적인 깊이의 차원이 있지 않으며, 그래서 그들의 전체 본질을 해명해 주는 것은 그들의 말과 행위이다. 호메로스의 언어에 풍부한 심리학적인 어휘들이 있어서 그 어휘들을 도움삼아 인간들의 합리적인 힘들과 비합리적인 힘들을 뚜렷하게 갈라 표시하긴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힘들은 내적, 영적 삶의 어떤 자율적인 영역도, 심리의 영역과 대립할 만한 어떤 영역도 총괄하여 구성하지는 못한다. 도리어 모든 심리학적인 관념들은, 위험 앞에서 도망칠 때 두 다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의 현상에 직접 연결된다. 여러겹의 심리학적인 표현들은 물론이고, 행위로야 드러나는 인간의 거의 모든 섬세한 움직임들을 두고 인간의 앎이라고 부르곤 하는 호메로스 언어의 관례까지도, 민감함이야말로 인간적인 행위들과 실행에 대해 정당성을 입혀주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러한 반성은 심리학적인 집합개념들로 귀결되지 못하고, 그저 하나하나의 행위 자체만을 밝혀줄 뿐이다.
호메로스의 인간들은 죽음 뒤의 본질적인 삶을 재는 어떤 도덕적인 잣대도 알고 있지 않다. 그들 삶의 의미는 여기 지상에서 다한다. 죽음과 함께 인간 자신은 “개떼와 새떼”한테로 돌아가나, 꼭 영혼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그의 혼은 하계에서 무가치한 무의 실존을 영위하기에, 아킬레우스는 그러한 실존이라면 차라리 극빈한 날품팔이의 현존과 맞바꾸길 원했다. 이렇게 이승에 국한시킴에 걸맞게, 좋은 일에는 흔연히 기뻐하고 나쁜 일에는 서슴없이 슬퍼한다. 호메로스의 인간은 그것이 가능했다. 무슨 일을 당하든 무슨 일을 행하든, 저승의 현실을 고려하느라 그 어떤 일도 상대화되지는 않았다. 관습과 명예가 요구하는 일을 존엄과 위엄으로 행하거나 감수한다. 그래서 아킬레우스는 싸움터에서 자신에게 생명을 애걸하는 혈기왕성한 트로이아인에게 말한다(제21권, 104행 이하 ):
허나 벗이여, 그대 또한 죽게나. 무에그리 헛되이 애걸하는가?
자, 파트로클로스도 죽었잖는가, 그대보다 훨씬 나은 자였는데도.
그대 보고 있잖는가, 나 역시 얼마나 멋지고 위풍당당한가를,
위대한 아버지의 자식이요, 여신이 날 낳으신 어머니라네:
그러하나 나에게도 죽음과 거센 운명이 닥치기 마련이라.
어느 한 때가 올 것이네, 아침, 저녁, 아니면 한낮이,
어느 누군가가 싸움터에서 내 목숨마저도 앗아갈 때가,
어쩌면 창을 던지어, 어쩌면 시위를 떠난 살로.
호메로스 영웅은 자신이 행하거나 당하는 일을 두고 주위세계의 판단과 독립하여 따져 볼 수 있는 어느 내적인 심급도—어느 양심이나 그 비슷한 것도—알지 못하므로, 그의 도덕적인 실존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통하여 인정받느냐 못받느냐에 따라 지탱하거나 쓰러진다. 육체의 힘과 아름다움도, 성공과 부와 명예와 같이, 사람됨의 실현에 속한다. 그가 얻은 명예는, 동급 신분의 동료들이 존중하는 실질적인 관심 속에서야 압도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아킬레우스가 가져가야 하는 노획물의 몫이 줄어든 사건이야말로 일리아스의 모든 행위를 푸는 열쇠가 된다. 후대 그리스에서는 우호적이거나 애틋한 호감을 뜻하는 낱말이, 호메로스에게서는 완전히 구체적으로 손님 접대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행동할 때의 그러한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라면,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귀족사회가 모든 삶의 기반에서 유지하고 있는 규칙들은 엄격하며, 자제심과 위엄과 인격적 참여라는 면에서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 한 귀족사회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멋드러진 덕인 위풍당당함은, 벗과 적에게서 단점인 동시에 장점으로 묘사되는 불편부당에서 더없이 잘 나타난다. 영웅들 중에서 우리를 가장 사로잡는 자는 어느 그리스인이 아니라 헥토르이다.
호메로스의 그 같은 영웅들이 전설Sage의 사건에서 맡은 역할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우리는 시인의 각별한 상황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 앞에는, 인간학적으로 말해, 엄격한 결정론의 의미로 해석해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행위의 흐름이 주어져 있었다. 과연, 이것을 우리는 다른 서사시들에서도, 예컨대 자손 하나하나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깡그리 무시하고서 쏟아부은 ‘실현되고 말 저주’가 사건을 몰고가는 동력이었던 오이디포디아에서도 알고 있다. 이처럼, 전승을 통하여 ‘무엇’을 행하였고 ‘무엇’을 겪었는지가 미리 주어져 있으므로, 시인의 도덕적인 판단은 대체로 그 일을 ‘어떻게’ 행하였고 ‘어떻게’ 겪었는지에 국한된다. 하지만, 시인이 자신의 영웅들을 대개 새로 창작한 어느 행위 속에서 뭔가 예기치 못했던 일을 행하게끔 할 때마다, 그 도덕적인 판단의 시발점이 되는 지점은 어김없이 신성의 직접적인 개입, 행위자가 별다른 놀라움 없이 받아들이는 신성의 개입이다.
이제 그러한 신들, 인간들의 싸움에 직접 끼어드는 신들, 인간들마냥 울고 웃는 신들, 그렇다, 기원전 6세기 어느 시인이 노여워하며 표현했던 대로 “훔치고 오입하고 속이는” 그들, 그들은 너무나 높은 귀족사회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왕과 여왕이 측근들과 함께 사는, 아울러 다소 반항적인 귀족들도 함께 사는, 가지가지 애욕과 염증과 특권과 약점을 가지고서 사는 귀족사회 말이다. 당연히 그들 모두가 여타 인간들보다 더 위대하며, 더 강하며, 더 권위가 있으며, 그래서 그들의 행각은 도무지 종잡기가 힘들다. 그들은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업적을 이루긴 하지만, 그렇지만 그들의 돋보이는 인간성 안에는 섬뜩함이 없으며, 인간의 단란한 상황을 지켜보되 처벌강도는 물씬 약하다. 그들은 불멸이요 늙지 않으며, 서사시의 언어로 “가벼운 삶”이라고 부르는 특권을 가진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실현해야 하며, 하나하나의 인간적인 행위로부터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결말이, 행위자가 짊어질 수밖에 없는 결말이 탄생한다. 반면에 신들은 심하게 다툰 뒤에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같이 즐거워 하며 식사자리에 앉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들 때문에 화를 입지 않고 인간들만을 곤경에 빠뜨린다. 하지만 그네들 기분삼아 아주 발랄하게 흥미를 두고 있는 사건까지도 그들이 결정하는가?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인 제우스는 트로이아 면전의 전쟁터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사르페돈을 닥쳐오는 죽음 앞에서 구해내지 못했다. 이것은 일라아스 서곡의 선포, 그러니까 트로이아 면전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들에서 제우스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선포와 매끄럽게 어우러지지 않는 듯하다. 여기에서 다시, ‘사건이라는 것은 시인으로서는 그때그때 전승을 통하여 미리 주어졌던 것이며 자연스레 “제우스의 뜻”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그러한 모순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행위가 진행될 때에 오로지 시적인 창작으로 인하여 수정이 가해졌으면서도 또 그 행위가 개개 신들의 바람이나 뜻과 연결되어 있었을 경우, 미리 정해진 운명과 어느 한 신이 나중에야 내놓는 의향 사이에 엇갈림이 생기게 된다.
호메로스 신들의 모습들은 뚜렷하고도 개별적인 인상으로 각인되어 훗날 수세기 동안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헤로도토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그리스인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선사하였다고 말한다. 분명히, 서사시의 낭송을 통하여 그리스 전역에 알려졌던 호메로스 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습들의 입체성이 지역적인 제의와 전설에 연결되어 있었던, 예로부터 물려받은 상당히 눅눅한 여러 관념들을 몰아냈다. 온갖 인간적인 제한 너머에 살고 있는 신들,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 인간들에게 이롭기도 해롭기도 한 신들, 오히려 인간들의 선한 행위들을 갚아 주지도 않으며 오만함을 벌하지도 않으며 도덕적인 모범과는 판이한 온갖 일들을 저지르는 신들, 그들은 이미 일찍이 그리스에서 그 “비도덕” 때문에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호메로스 신들의 천상이 제시하고 있는 저 드높은 귀족사회는, 비범한 감각적 매력을 가지고는 있으나 탁월한 종교사적인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해도 되리라. 호메로스 신들은, 기하학 시대의 어느 한 그리스 영주가 대대로 물려받은 제의를 올릴 때에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종교적 관념들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거의 해명해 주지 못한다. 소박한 백성들의 기도 대상이 되는 신들은 단연코 호메로스에게서 전혀 등장하지 않거나, 아니면 가장자리에서만 등장할 뿐이다. 이미 수세기 동안 종교성을 넉넉하게 담아내고 있었던 신화적인 전통을 서사시적으로 주물럭거리고 난 뒤에, 신들이 맡은 역할이라는 것이 얼마나 볼품 없는지는 오뒷세이아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 뒤의 헤시오도스가 이미 감안하고 있는 터였다.
2. 아르킬로코스
상고시대 초기의 독보적인 시의 천재, 파로스의 아르킬로코스는 그의 서너편의 시에서 엘레게이아 형식을 사용하였다. 이 시인의 풍부한 다작 중에서 불충분한 몇 개의 조각글만, 그것도 대부분 후대 저자들의 인용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으며, 그 수치는 지난 수십년간 발굴된 파피루스와 비문 덕분에 좀 늘었다. 그러나 완전한 시는 단 한 편도 없으며, 6행 내지 8행에 이르는 단편들도 확실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이러한 안타까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우리는 언제라도 이 시인의 독보적인 재능을 평할 수 있다. 어느모로 보나 어느 한 순간을 위하여 창작된 것이 분명한 그의 작품은 상당히 많은 전기상의 암시를 포함하고 있어서 후대에 그 인물을 둘러싼 전설이 많이 양산되었다. 우리는 더러 그 전설에서 조각난 텍스트의 몇 가지 해석을 위한 유용한 지침을 톺아낼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은 가령 기원전 3세기나 2세기께 그의 고향땅 파로스 섬에서 시인의 명예를 기리려는 묘비와 사당에 새겨진 장문의 비문에 나타난다. 거기에는 무사 여신들과 만나 이루어진 그의 시인서품 이야기 등이 서술되어 있다. 648년에 발생한 일식을 언급하고 있어서 생존 연대가 확정될 수 있는 그는 파로스 귀족의 사생아이자 트라키아 노예였던 듯하다. 절반은 봉건적인 사회틀에서는 대개 그렇듯이, 그는 그러나 확실히 양자처럼, 물론 상속권이 없는 양자처럼 양육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모험적인 시대에 숱한 모험에, 예컨대 맞은편 연안의 트라키아인들과 격렬한 전투를 벌인 타소스 섬의 식민화 시도에 가담했던 농노가 되었다. 전쟁 동료와 전우애를 나누는 삶, 모험적인 현존의 급변, 그러면서도 또한 감각적인 사랑, 증오, 조롱, 상실에 대한 비애, 친구의 변절에 대한 분개, 그리고 끝으로, 아마도 가장 인상적일 듯한데, 스산함에 이르기까지 만끽하는 삶을 삶으로써 생기는, 인간의 본질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성찰—이것이 아르킬로코스 시의 주제들이다.
맥락을 알 수 없는 한 이행시Distichon에서 아르킬로코스는 자신을 아레스와 무사 여신들의 시종으로 등장시키며, 또 한 이행시에서는 창끝에 몸을 기대고서 맛좋은 이스마르산 포도주를 마시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호메로스의 영웅들이나 스파르타인들의 명예 코드에 붙잡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전사가 아니다.
“한 트라키아 사람이 지금 내 방패를 들고 자랑스러워 하는구나. 내 부득이 수풀 속에 놓아두었던 것이건만, 멋진 방패인데. 그러나 피부하나 상하지 않고 거기에서 벗어났지: 방패를 신경쓸 게 무어냐? 가자꾸나—그에 못지않은 다른 방패를 사야지.”
전통적인 명예 개념에 의하면 방패의 분실은 부끄럽기 짝이없는 치욕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찬가지로 멋지고 늠름한 전사에 관한 귀족적인 이상 역시 그로서는 역겹다: “고결하게 주름진 옷을 걸치고, 깔끔하게 다듬은 수염하며 예술적인 조발을 드날리며 자랑스레 지나가는 훤칠한 장교를 좋아하지 않아. 키도 작고 다리가 굽었을지라도, 내 좋아하는 사람은, 땅 위에 결연히 당당하게 설 것이야.”
아르킬로코스는 고대에 특히 대단한 증오와 독설가로 유명하거나 악평이 자자했으며, 실제로 얼마간의 단편이 험담의 잔인성을 보여준다. 힙포낙스의 이름으로 전해진 한 파피루스에 대부분의 내용이 보존된 한 시에서, 그는 의리없는 친구에겐 어떤 모욕이 어울리는가를 유쾌하게 그려낸다: “… 때리는 파도에 맞아. 그러면 살뮈뎃소스에서 머리를 땋은 트라키아 사람들이 벌거숭이로 덜덜 떠는 그를 친절하게 맞아들이겠지—그리고 노예의 빵을 동냥하면서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일을 겪겠지. 바다의 조수가 부숴지는 파도로 덮치기를, 해변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한 마리 개마냥 이빨을 딱딱거리며 빈사지경에 이르기를… 이걸 내 보고 싶구나. 그놈이 우리의 맹세를 짓밟았을 적에는 엄청난 충격이었지—하긴 한 때 친구이기도 했으니까.” 아르킬로코스가 경멸하며 쫓아다녔던 뤼캄베스의 딸들은 그 때문에 목매달았다고도 한다. 수년전에 파피루스를 통하여 알려진 사랑의 시 단편은 아마도 이 일과 연관된 듯하다.
무수한 단편들은 수시로 발생하는 상황에 대한 아르킬로코스의 직접적인 반응들, 어떤 관습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사랑, 증오, 혹은 기타 근본적인 감정에 의해 규정되는 반응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차원을 넘어서 그는 바로 그 사태를 성찰함으로써 자신의 삶과 행위를 판단하기 위한 완연히 새로운 토대, 그때까지만 해도 발견되지 못했던 토대를 획득한다. 한 유명한 단편에서 그는 인간들이 “하루살이” 존재라고 강하게 확언한다. 루돌프 파이퍼Rudolf Pfeiffer와 헤르만 프렝켈이 밝혀낸 “하루살이”는 인간의 짧은 생을 가리키지 않고, 뒤바뀌는 삶의 상황들—인간은 이 상태에 영향을 끼칠래야 끼칠 수 없다—을 가리킨다. 인간은 생소한 일, 예기치 못했던 일 앞에 되풀이하여 서게 되므로, 자신의 행위와 의도, 자신의 감정과 사고를 자립적으로 견지하지 못한다. 아르킬로코스가 지치지 않고 묘사한 이러한 실재와 더불어 인간은 생을 끝내게 된다. 모든 인간적인 것의 물줄기를 마주하고서, 행운이 있을 때에는 적당히 즐거워하고 불행할 때에는 한없이 슬퍼하지 않음이 좋다. 사실 인간은 신들과 마찬가지로 추구할 만한 것조차도 실행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짧은 생애 동안, 제풀에 포기하지 않고 닥쳐오는 모든 것을 대장부답게 감당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아르킬로코스의 이 삶의 가르침은, 치열하게 살아본 곡절의 삶으로부터, 강한 자아의식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지난 이력에 대한 성찰, 즉 그가 속한 공동체의 관습적인 척도로 한정되지 않는 성찰로부터 나온다. 그 가르침은, 처남을 포함하여 아르킬로코스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배와 함께 수장되었을 때 나온 한 편의 시에서 가장 강렬한 표현을 얻는다. 아쉽게도 단지 몇 행씩만 현존하고 있으나, 어느정도 맥락을 인식할 수는 있다.
“시민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페리클레스여, 그래 도시에서 어느 누구도 우리의 탄식을 꾸짖지 않으리라, 그들이 이제 제전의 기쁨에 몰입하게 되는 때에라도. 바다의 파도가 고귀한 남자들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갔으니. 탄식하는 우리의 폐부는 아프기만 하구나. 그러나 벗들이여, 신들은 회복할 수 없는 불행을 완화시키시려 우리에게 의연함을 선사했다네. 이런 일을 이 사람이 겪는가 하면 저 사람도 겪지; 지금은 바로 불행이 우리를 괴롭게 하고 있는 때이니, 우리는 상처를 입고 피흘리며 신음하고 있어. 그러나 곧 다시 다른 사람이 겪게 되겠지. 그러하니 마음을 추스리고 견녀내게, 그러면 여인네 슬픔 같은 슬픔이 우리에게서 사그라들 게야.”
이 대목에서 좀 지나 아르킬로코스는 처남을 관습에 따라 제대로 매장하지 못한 아픔에 관하여 말한다. 거기에서 대단히 섬세한 운율의 운문이 등장한다:
“… 헤파이스토스가 순아마포로 싸서 그의 머리와 매력적인 사지를 보살피기라도 했더라면…”(이 운문은 플루타르코스가 불 대신 헤파이스토스라는 신의 이름을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예를 실례로 인용하고자 했기 때문에 현존하고 있다.) 아름다운 운문, “…그래서 우리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고통스러운 선물들을 감추고 싶다…”도 역시 우리가 말하고 있는 시에 속하는가는 불확실하다. 어쩌면, 상고시대의 무수한 문학적 작곡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내 탄식을 치유할 수 없구나, 내가 연회와 제전의 기쁨에 참여할 때에도 그저 악화되지만 않을 뿐”이라는 한 쌍의 운문과 함께 그 사상의 궤적을 출발점[즉, 아르킬로코스]으로 소급시켰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도 가능하다. 여기에서 세 가지 모티브가 하나가 된다: 고통과 슬픔에 내맡김, 의식적인 버팀과 견딤—이것만이 삶의 뒤바뀜에 맞서는 개인을 무장시킨다—을 통한 극복, 그리고 (여기에서는 특별히 불행과 도시의 제전을 시기적으로 조우시킴으로써) 살아있는 자들의 공동체로 역시 의식적으로 복귀함.
아르킬로코스의 시들은 비단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자아의식과 삶에 대한 새로운 자세의 증거일뿐만 아니라, 그리스 시에서 형식상으로 가장 완벽한 창작품에 속하기도 한다. 아르킬로코스의 것이라고 간주되는 서정적인 노래-운문으로 이루어진 몇 편의 찬가는 중요하지도 않고 얼마 되지도 않으므로 이를 제외하자면, 현존하는 작품을 그 운문에 따라 세 패로 나눌 수 있다: 엘레게이아 운문, 이암보스-트로카이아 운문, 그리고 두 가지가 합해진 운문 유형.
3. 서정시
(제창곡Chorlied이나 개인낭송Einzelvortrag 목적의) 그리스 서정시는 두 가지 전제에서 연원한다: 먼저, 그리스 서정시는 어느 시대 어느 문화에서나 존재하는 문학 이전의 민속적 형식에 의존한다. 예컨대 인간 공동생활의 특정한 상황들에서 공통의 행사들을 촉진하기 위해 보조물로서 쓰이는 무용가, 전례가, 노동요 등이 그렇다. 그러나 다음으로는, 서사시, 특히 호메로스 서사시의 압도적인 영향이 초기그리스 서정시인들에게서 유력하게 전개되었으며, [이 영향을 받기라도 했다면] 이를 결정적인 시구에서 드러내지 않을 만한 시인은 없다; 이 때문에, 아무리 특정한 구체적인 계기에 종속된 것일지라도 서정시는 찬조시 및 목적시 수준을 넘어 성장한다.
현존하는 초기그리스 서정시의 대부분은 신들이나 인간들을 기리는 다양한 축제를 위한 제전시이다; 그것의 과제는 의미있는 현재를 ‘여기 그리고 지금’ 이상으로 들어올리는 것, 기쁜 순간에 지속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름아닌 강화의 차원에서 엄격하게 틀잡힌 형식을 제외하면) 이를 달성하기 위한 두 가지 본질적인 수단은 신화와 잠언이다: 무엇보다도 서사시를 통하여 순화된 신화는 신적인 대상이나 영웅적인 대상을 현세의 사건과 나란히 놓으며, 그리하여 명멸하는 것에 의미와 의의를 부여한다. 잠언은 자주 훈계 형식이나 교훈 형식을 빌어 개별을 보편에 연결시키며, 또 합리적인 형식을 빌어 항존하는 것, 진리에 연결시킨다. 7세기 말에서 5세기 중반까지, 알크만에서 스테시코로스, 이뷔코스, 시모니데스를 거쳐 바퀼리데스와 가장 위대한 핀다로스까지의 모든 제창서정시는 이 제전시에 속한다.
이 헌가들Loblieder과 축가들Preislieder, 그리스인들 본연의 “대”서정시는, 그리스인들과 모든 후대인들에게 고도의 시 양식을 교육시켰다: 저 비극도, 아울러 모든 탁월하고 장중한 서양의 모든 시문학이 여기에서 발전하였으며, 저 클롭슈토크, 젊은 괴테, 횔덜린, 릴케도 여기에서 찬가-시문학Hymnen-Dichtung을 이끌어내었다. 이 시문학은, 서사시와는 달리, 현재하는 것이 찬사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간주한다. 과거의 위업들은 그 자체로 매료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드높이기 위해, 온갖 다채롭고, 생생하고, 목전에 있는 것에 대한 상고적인 기쁨을 드높이기 위해 쓰인다.
신화와 현재, 타당과 실제, 요구와 성취가능성 사이에서 드러나는 긴장이 200년간의 발전 과정에서 갈수록 많이 감지되긴 하지만, 현재야말로, 비록 무시간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음미를 함께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 서정시의 시공간이다.
같은 세기에 이러한 헌가들, 축가들과 나란히, 좀더 이른 시기에 등장하였고 좀더 이른 시기에 접고 말았던, 중요성이 덜하지 않는 다른 서정적인 시문학, 시인들이 개인적인 면을 다루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서정시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에 좀더 가까운 시문학이 있다. 물론 그리스인들이 보기에 이 시문학은 통일성이 없다. 그들로서는 오직 노래되는 창작품만이 서정시였다: 앞서 방금 말했던 제창가, 그리고 삽포, 알카이오스, 아나크레온이 그랬듯이 한 명이 낭송했던 독창서정시. 이 독창서정시들 중에서도 많은 시들이, 가령 삽포의 결혼축가처럼, 신들이나 인간들에 대한 헌가들이고 축가들이긴 하지만, 이런 경축 이외에 시인들이 제 자신을 말하는 새로운 면모가 제창가에서보다 더 많이 등장하고 있다. 서정시에 관한 우리의 관념에 대략적으로 일치하지만 뤼라의 반주 없이 노래되었다고 해서 그리스인들이 서정시로 꼽지 않았던 운문도 이와 유사한 면을 간직하고 있다. 이를테면 취주악기 반주로 서창했던 운문, 고대 전통이 그 창안자로 아르킬로코스라고 명시하고 있는 이암보스 시와 이행시가 그렇다. ‘시인들 자신은 무엇을 두고 자신들의 개인적인 면이라고 느꼈는가’, ‘왜 그들은 자기 자신에 관하여 말했는가’, ‘그러므로 어디에서 그들은 개인으로 자각하게 되었는가’를 (좀 모호한 용어를 써도 된다면) “개인적인 서정시”에서 밝혀내기 위하여, 나는 세 시인을 끌어들이겠다: 7세기 전반에 살았던 “말-운문”의 시인 아르킬로코스, 그리고 두 독창 서정시인 삽포와 아나크레온(삽포는 600년 무렵에, 아나크레온은 대략 기원전 500년까지 살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세 명의 아주 상이한 개성과 기질을 향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언급되는 시들 중 가장 오래된 시들과 가장 나중의 시들 사이에는 대략 200년의 간격이 있다. 그러므로 초기그리스 서정시가 만개하였던 거의 모든 시기, 공통적인 면, 개인적인 면까지도 충분히 등장할 수 있다; 이 시인들도 (제창서정시인들과 마찬가지로) 무시간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하여 과거에서 현재로 방향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 입증될 것이다.1
- “1. 호메로스”와 “2.아르킬로코스”는 Albrecht Dihle, Griechische Literaturgeschichte에서 번역한 내용이며, “3. 서정시”는 Bruno Snell, Das Erwachen der Persönlichkeit in der frühgriechischen Lyrik in: Die Entdeckung des Geistes에서 번역한 내용이다. [↩]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