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가 누구인지 아지 못하는구나”(돈 조반니)
서양문화사 최초의 문학평론서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비극을 “보통 이상의 사람을 모방”하는 것, 희극을 “보통 이하의 사람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정의를 따라 독일 고전주의에서는 비극을 머리 속에 그릴 때 언제나 고결한 인물의 파멸을 떠올렸습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그리스 고전비극과 형식 면에서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예술인 오페라에서 고결하고 기품있는 인물이 파멸하는 비극이 창출되기를 소망한 이가 바로 독일 고전주의의 쉴러입니다. 이 바람을 접한 괴테는 쉴러에게 “당신이 오페라에 대해 바랐던 희망이 최근의 돈 조반니에서 상당 정도 충족되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품 역시 그 희망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며 모차르트의 죽음으로 그 만한 것에 대한 모든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1797.12.30일의 편지)는 전갈을 보냅니다.
확실히, 돈 조반니는 쉴러가 소망한 비극이 아닙니다. 돈 조반니는 숭고하고 고귀한 인물이 아니라, <벌받은 탕아, 돈 조반니>라는 제목이 뚜렷이 표명하듯이, 여러 여자를 유혹하러 다니면서 한 번 휘어잡고 나서는 벗어나고 싶은 여자의 살결과 마음, 그 어두운 심연이자 분명한 구속 같은 존재를 향하여 끝없이 전진하였다 내빼는 점잖지 못한 인물입니다. 흔한 기준으로 평가할 때는 “보통 이하의 사람”인 돈 조반니는, 그러나 어느 삶의 공간에서나 수시로 맺어지는 인간 관계, 인간 관계의 규칙, 한 마디로 “도덕”을 유린하면서 인간 안에 숨어 있던 심연을 드러내는 창조자로서, 그리스 고전비극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인간 심연을 파고드는 주인공입니다.
도덕? 돈 조반니는 그 인간 관계의 규칙을 하나의 놀이로 취급하며, 그 놀이 안에서 울고 웃는 인간들을 희롱합니다. 돈 조반니가 보기에는, 돈나 안나와 돈나 옥타비오, 체를리나와 마제토, 돈나 엘비라, 그들의 사랑과 미움이 하나의 유희이며 희극입니다. 그 유희의 규칙을 파괴시키니, 이들 등장인물의 관계 설정이 수시로 변경되며, 부유합니다. 관계가 무너지고 부유하는 가운데 기품 있는 돈나 안나가 밤거리를 쏘다니고, 공동체에 안정되게 소속되어 있던 돈나 엘비라가 여행복을 차려 입고 거친 들녘을 밟으며, 환호성 속에서 연인과 함께 춤추던 체를리나가 속절없이 돈 조반니에게 손을 내밉니다. 귀족인 돈 옥타비오가 돈나 안나에게 성적인 접촉을 굳이 입에 올리는 것도 바로 그 유동하는 관계의 확정을 목표로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돈나 안나와 돈 옥타비오가 농투성이인 체를리나, 마제토와 결속하여 함께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과 분노를 좇아 흐드러진 관계 속에서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저음부를 강타하는 관현악과 타악,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어두운 심연을 보게 됩니다. 이게 인간의 삶인가? 우리 인간 안에 이토록 무서운 세계, 사랑과 분노와 절망의 세계, 격정의 세계가 있었던가? 격정에 휘말려 있는 이 순간에는, 인간 관계 안에서 규정되는 인간성과 인간의 존엄이 그대로 무너집니다. 듣는 이의 가슴을 숨막히듯 죄는 듯한 오케스트라를 대동하고서 등장하곤 하는 돈 조반니는, 유희와 안정된 규칙의 세계에서 사는 그들, 다름아닌 바로 우리들 모두를 아주 우습게 여기면서 그 무서움의 세계를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흐허허—, 무서워라, 당신은 누구인가? 관계 속에 안착한 여자를 유혹하여 인간 관계를 파괴시키며, 그 인간 관계의 파괴와 함께 인간 존엄을 희롱하면서 동시에 인간 심연을 드러내는 자, 돈 조반니, 그토록 투명한 모차르트의 영혼을 통하여 탄생한 존재!
서양문화사에서 2천년을 넘게 획이 그어진 비극과 희극의 경계는 그리하여 무너집니다. 오페라 부파냐 아니면 세리아냐 하는 논쟁은 모차르트의 가공할 만한 창조력을 모르는 가운데 벌일 수 있는 논쟁입니다. 그 경계를 한껏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오페라 부파라는 명패를 형식적으로 걸치고서 모차르트는 내가 당신과 맺는 관계를, 연인의 관계를, 가족의 관계를, 공동체의 규칙을 희롱하고 붕괴시킵니다. 무서운 모차르트는 그 규칙을 파멸시키는 돈 조반니를 통하여 언제라도 우리에게 엄습할 수 있는 마성을 육화시킵니다.
마성이라…, 서양정신사에서 그리스도교 신관념이 팽배하기 전까지만 해도 마성(daemon)은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힘, 인간을 능가하는 힘, 인간을 예기치 않게 돌연히 엄습하는 힘, 그래서 이름도 붙힐 수 없고 상으로 조각할 수도 없는 존재, 도무지 인간화시킬 수 없는 존재, 인격화될래야 될 수 없는 신입니다. 신에 대하여 투명하게 설정해 놓은 그리스도교 신관념이 등장함으로써 그 인격화되지 않는 힘을 악마라고 정의하였고, 그 정의가 일반화됨으로써 마성이라는 의미가 현대에서(특히, 국내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나, 서양정신사에서 마성은 원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을 초월하는 힘에 대한 고백입니다. 인간을 초월하는 힘? 사랑, 격정, 공포, 분노를 일으키는 힘, 혹은 그것들 자체는 분명 인간을 초월합니다. 그 힘들이 바로 마성입니다. (참고로, 국내 번역서에서는 보통 그 단어를 정령, 정령숭배, 악마 등으로 옮겨놓고 있지만, 그것은 대단한 오해입니다.) 사랑과 분노와 절망을 일으키는 마성의 존재, 그칠 줄 모르고 활활 타오르는 격정의 화신 돈 조반니는, …
돈 조반니는, …, 인간 삶에서 결코 몰아낼 수 없는 존재이며, 가공할 만한 파괴력과 창조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 존재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을까요? “그분이 와요. 어찌하면 그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체를리나) 작품 전체에서 거의 유일하게 평온한 음악이 울리면 기사장이 죽어가고(축복이어라, 마성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다니!), 피날레에서 돈 조반니가 나락에 떨어지면 관계된 이들을 위해서라도 단 한 줄기 평온한 혹은 우렁찬 승리의 선율이라도 있어야 하건만 쉼없이 공포스럽고 무섭게 심장을 강타하는 음악이 흐르고(심장이 조여드는구나, 우리 모두 마성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데도!), 돈 조반니의 파멸 이후 등장 인물 각자가 제 길을 가면서도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모든 죄인은 벌을 받으리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조차 격정에 사로잡혀 노래하고, 피날레의 공포를 선취하는 서곡이 작열하는 마성의 역동성을 그 극까지 밀고 가더니 마지막 단 몇 초 동안 한 줄기 쉼이 오고, …,
오호라, “많은 슬픔과 약간의 기쁨”(모차르트), 무서운 격정과 한 순간의 위로가 우리의 삶이로구나! 살아가는 동안 그 위로는 마성의 제거로부터 오지 않으며, 마성의 벗어남으로부터도 오지 않으며, 불현듯 우리도 모르게, 흡사 마성처럼 오는 것입니다. 모차르트는 그 위로를 논리적으로 한 가닥 한 가닥 풀어 제시하지 않으며, 느닷없이 제시합니다. 그리하여, 홍수의 물마루처럼 도도히 쇄도하는 그 마성을 어느 찰나 “가볍게” 전복시키고서 선명함과 투명함이 고요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맑고 투명함은 인간의 육성을 빌리지 않은 절대음악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애증에 불타오른 몸짓으로 별안간 돈 조반니에게 다가가는 돈나 엘비라, 돈 조반니에게 영혼을 휘둘린 가녀린 체를리나, 고품격의 격정으로 돈 조반니를 쫓는 돈나 안나, 즉 극도로 방탕하지만 고혹적인 돈 조반니의 마성에 휘둘려 신비로운 체험을 한 이 세 여인의 갈증과 거뭇하게 타버린 심장 속에서 인간화되어 나타납니다. 절절함, 두렵고도 숭고한 감정, 아흐- 거부하고 싶지만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 잔잔한 마음의 호흡을 뚝뚝 끊어버리는 절망 속의 사랑, 죽음을 응시하는 눈물의 위로로 모차르트의 투명함이 육화됩니다. 어두운 마음 속으로 스며드는 한 줄기 빛, 신문지처럼 구겨진 아침햇살, 돈 조반니로부터 비롯한 절망과 위로와 갈증, “아 마음아, 어찌하여 너는 두려워하느냐! 그이로 인한 두근거림을 멈추어 다오”(돈나 엘비라), “때려 주오, 때려 주오, 마제토. 순한 양되어 나 체를리나 맞으리니”(체를리나), “눈물의 위로를 내게 베풀어 주오. 무덤에서야 나의 갈망, 나의 고통이 사그러지리니”(돈나 안나).
마성의 화신을 접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인간의 심연, 마치 놀이의 규칙처럼 정해져 있던 인간 관계의 파괴, 도덕과 예절과 절도를 가볍게 전복시키는 사랑과 분노와 절망—한 마디로 말해서, 돈 조반니는 마지막 음 하나까지 격정에 젖어 있는 오페라입니다. 격정은, 즉 파토스(pathos)는, 고통이나 열정이나 비애가 아니라 “그 뭔가가 인간을 엄습하고 있는 상태의 인간 내면”입니다. 격정은 인간 스스로 지어내는 감정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하는 마성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입니다. 격정의 양날(사랑과 증오)에 가장 강렬하게 사로잡힌 돈나 엘비라는 그래서 처음부터 피날레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때로는 별안간 사랑으로 때로는 별안간 증오로 돈 조반니를 대합니다. 돈나 엘비라의 절망적인 몸짓은 오페라 <돈 조반니>의 “몸짓으로 표현되는 주요 모티브”(슈테판 쿤체)와도 같습니다. 돈나 엘비라는 상처가 벌어지기를 열망하면서, 벌어진 상처로부터 고통을 받으려고, 돈 조반니에게 포기하지 않고 다가갑니다. 돈 조반니로 인하여 영혼을 다친 그녀는 “여행복 차림으로”(대본의 지문), 모든 인간 사회의 구속에서 내쫓기듯 벗어나, 자신의 실존의 뿌리를 건드린 돈 조반니를 찾아, 인생 미답의 들녘을 배회합니다: “알료샤, 나는 지난 다섯 해 동안 나의 눈물을 사랑하였습니다 … 어쩌면 나는 내가 받은 모욕을 사랑하였을 뿐, 그 사람은 전혀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부르르 몸이 떨리는, 정말이지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는,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두운 심연밖에 없는, 마음결이 한껏 유린된 상태, “치명상을 입은 심장의 감정”(돈나 안나), 이게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 영혼의 위대한 슬픔, 돈 조반니의 격정이 선사한 선물, 모차르트의 선명함, <돈 조반니> 직후에 작곡된 마지막 교향곡 39, 40, 41번에서 드러나는 현혹적인 격정과 깊은 슬픔과 낙화하는 눈부신 꽃잎의 선율입니다. 그러므로, 모차르트의 격정은 의식적인 정열이 아니라 차라리 두렵고 무서운, 그러나 유혹적인 내면 상태이며, 모차르트의 슬픔은 결코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무한한 인간 심연의 비극을 향하여 무한히 흐르는 슬픔이며, 모차르트의 선명함은 그 위대한 슬픔의 정수에서 정녕 환상처럼 혹은 바람처럼 다가온 한 줄기 선율입니다.
이 격정과 슬픔과 선명함은 모차르트 음악을, 아니 모차르트의 영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양식으로서 천상의 음식이요, “천상의 음식을 먹는 자가 지상의 음식을 먹지 않고도”(석상) 구현하는 가벼움과 날렵함입니다. 고혹적인 격정으로부터 눈부신 꽃잎으로 화하는 혁명을 모차르트는 알고 있었고, 그 전복의 혁명, “그 빛나는 전환, 모차르트의 자유”(칼 바르트)를 음악으로 드러낼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모차르트의 자유는 거대한 암반을 향하여 나풀거리며 낙화하는 한 점 연분홍 꽃잎처럼 마성을 향하여 선뜻 부드럽게 다가섭니다. 가냘픈 체를리나가 돈 조반니에게 손을 내밀 듯이, “자 내게 손을 내밀어 다오”(돈 조반니). 이렇게 격정적인 마성과 눈부신 선율을 가볍게 가볍게 춤추듯 오가면서, 심장을 한껏 박동시키는 오케스트라와 참혹하게 아름다운 아리아를 섞바꾸면서, 모차르트는 인간 영혼의 정수와 신비를 만천하에 공포합니다: 사랑하라, 누구든 그 신비를 사랑하라.
키어케고어의 듣기
덴마크의 사상가 쇠얀 키어케고어(1813-1854)가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를 좋아했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왕립 오페라가 이 작품을 공연하면 1층 맨 뒷자리에 처박혀 앉아서 듣고 또 듣기를 되풀이했다고 하며, 약혼자 레기네 올센 – 1년 만에 파혼했지만 – 과 함께 가서 관람했다는 기록도 있다.
<돈 지오반니>에 대한 키어케고어의 ‘감상기’는 그의 첫번째 작품 (1843)의 1부에 실린 의 주된 내용을 이룬다. 그는 인생을 ‘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의 세 국면으로 나누어서 파악했는데, ‘미적 단계’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유한한 인생을 멋지게 즐기며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도로 세련된 감각과 취향으로 음악을 즐기고, 미적인 감각을 최대한 발휘해서 연애를 하는 일이다. 음악의 천재 모차르트가 창조해 낸 연애의 천재 돈 지오반니는 당연히 키어케고어의 관심을 끌었다. 키어케고어는 ‘미적인 단계’를 대표하는 가공의 젊은이 ‘A’의 입을 통해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에 대해 열광적인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키어케고어가 일종의 ‘예술 철학’을 깊이 있게 펼친 대표적 작품인 이 글에서 그는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가 ‘모든 장르의 예술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그는 거의 100페이지에 이르는 글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간략히 요점만 말하면,
1. <돈 지오반니>는 내용과 형식의 완벽한 결합이다. 연애라는 내용과 음악이라는 그릇.
2. 음악은 가장 직접적이고 추상적이므로 ‘반복’의 가능성이 없다. 쉽게 말해 모차르트가 <돈 지오반니>로 해낸 일은 호메로스가 <일리아스>로, 괴테가 <파우스트>로 문학에서 해낸 일보다 더 독보적이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3. ‘정열과 감성의 천재’ 돈 지오반니는 오직 음악을 통해서만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인격체다.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케루비노나 <마술피리>에 나오는 파파게노도 감성적, 직접적으로 에로틱한 욕구를 표현하고 있지만 돈 지오반니야말로 이 점을 ‘전면적’으로 체현한 영웅이다. 오페라 <돈 지오반니>의 음악은 이 영웅에 걸맞는 음악의 대향연이다.
4. 몰리에르의 <돈 주앙>은 희극이고, 한결 인간적, 윤리적인 텍스트에서 인물들을 묘사하지만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에서 주인공은 윤리를 넘어서는 정열과 초자연적인 감성과악마적인 면모를 통해 비로소 완전히 그려진다.
5. 이러한 요소를 바탕으로 <돈 지오반니>는 모차르트만 해낼 수 있는 완벽한 구성과 최상의 음악의 행복한 결합으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거칠게 요약된 이같은 내용은 외면적으로는 키어케고어 자신이 아니라 1부의 필자인 청년 ‘A’ – 심미적 인생관을 대변함 – 의 의견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돈 지오반니>에 담긴 생각의 대부분이 키어케고어 자신의 생각, 적어도 그 일부를 표현하고 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다음은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에 등장하는 돈나 엘비라에 관한 키어케고어의 글이다. 수녀원에 있던 엘비라는 돈 지오반니가 결혼하자고 말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의 아내라고 믿고 있는 여성으로, 돈 지오반니가 기사장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지자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오페라에서 그녀는 돈 지오반니의 파렴치한 거짓말에 분노하며 복수를 다짐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앞에 닥친 어두운 운명 때문에 그를 동정하고 구원하려고 한다.
키어케고어의 글은 돈나 엘비라의 2막 아리아 ‘은혜를 모르는 이 사람은 나를 속였지만’ (Mi tradi quel’alma ingrata)에 대한 사색의 결과이다. 분노와 연민의 상반된 두 가지 감정에 휩싸여서 부르는 이 노래는 지극히 숭고한 감정으로 승화되어 있다. 모차르트가 생각한 여성의 가장 고귀한 마음이 이 노래에서 드러나는 걸까? 아니, 모차르트 자신이 가장 고귀하다고 느낀 감정을 이 여성을 통해 노래하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키어케고어가 여성을 보는 시각은 모차르트만큼이나 그 시대의 제약 속에 있었기 때문에 다소 봉건적이고 남성 중심적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이 글은 오페라 에 대한 해설은 아니라, “음악과 사랑에 몰입하는 ‘미적 인생관’은 종교적인 견지에서는 결국 ‘절망’에 이를 뿐”이라는 키에르케고르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엘비라의 내면에 대한 치열한 통찰은 <돈 지오반니>를 이해하는 데에 하나의 훌륭한 시각을 제공한다. <돈 지오반니>의 1부에 수록되어 있는 중의 한 장을 옮겼고 장황한 대목은 줄였다.
은혜를 모르는 이 사람은 날 속였고,
날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었지만,
오, 신이여, 기만당하고 버림받은 나는
아직도 그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그가 준 고통을 생각하면
내 가슴은 복수를 다짐하지만
그의 앞에 닥친 위험을 생각하면
내 마음은 다시 흔들립니다.
– 2막 중 돈나 엘비라의 아리아
<돈 지오반니>에서 만날 수 있는 그녀는 원래 수녀였다. 수녀원의 평화 속에서 그녀를 끌어낸 것은 돈 지오반니였다. 그녀는 학교에서 사랑을 배우고 무도회장에서 노는 연습이나 하는 경박한 아가씨가 아니었다. 그런 부류의 여자가 바람을 피운다는 따위의 사건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엘비라는 수녀원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규율도 그녀의 정열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규율은 그녀에게 정열의 억제를 강요했지만 그 정열은 일단 솟구치면 더욱 더 격렬하게 될 수 있었다.
그녀는 돈 지오반니와 같은 인간에게는 확실하게 손에 들어올 수 있는 희생물이었다. 그런 사내라면 그녀의 정열을 거칠게, 걷잡을 수 없도록 불 지르고, 오직 자기의 사랑 속에서만 만족할 수 있도록 유혹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사랑 속에서 모든 것을 발견한다. 만약 그를 잃는다면 그녀는 모든 것을, 심지어 그녀 자신의 과거조차 잃게 된다. 그녀는 이미 속세를 단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녀가 단념할 수 없었던 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것이 돈 지오반니이다. 그녀는 그와의 삶을 위해 모든 것을 단념한다.
그녀가 단념한 과거의 의미가 중요할수록 그녀는 그에게 한층 더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녀가 그에게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그가 그녀를 버릴 때의 절망은 더 무서운 것이 된다. 처음부터 그녀의 사랑은 일종의 절망이다. 그녀에게는 돈 지오반니 말고는 이 세상에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없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온 세계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돈 지오반니를 찾아내려는 증오가 있고, 가장 어두운 은신처라도 비추어서 찾아낼 불길이 있고, 그래도 못 찾는다면 자기 자신 속에서 그를 찾게 될 사랑이 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돈 지오반니를 추적한다. 만일 돈 지오반니가 그녀의 손 안에 들어온다면 그녀의 증오는 그를 죽이기 위해 무장하겠지만, 그녀의 사랑은 그를 죽이는 것을 막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를 동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녀의 동정을 받기에는 너무 큰 인물이다. 따라서 그녀는 그를 언제까지나 살려 둘 것이다. 만약 그를 죽인다면, 그녀는 자기 자신도 역시 죽이게 될 것이다.
만약 오페라가 이 두 사람한테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 오페라는 언제까지나 막이 내리지 않을 것이다. 엘비라는 자기 손으로 복수하기 위하여 돈 지오반니에게 벼락이 떨어지는 것조차 막으려고 했겠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은 끝내 복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돈 지오반니는 엘비라를 유혹한 다음 버렸다. 스페인에서만 1,003명을 유혹했다면 돈 지오반니가 얼마나 재빨리 여자를 유혹했다가 버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돈 지오반니가 그녀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고 그녀를 치욕과 불명예 속에 던져 넣은 악한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녀는 절망 속에 빠진 채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정열은 번개 속에 그녀를 드러내어 한 순간 모든 것이 눈에 띄게 만들었다. 증오와 절망과 복수와 사랑… 모든 것이 한꺼번에 자신을 드러냈다. 그 순간 그녀는 회화가 됐다. 그래서 상상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이 우리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그녀의 모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고 그녀의 시선은 더할 수 없이 당당했고 그녀의 정열은 매우 고귀해 보였다.
그녀가 속한 곳은 어디일까? 수녀원일까? 그녀의 정열은 거기에 어울리는 것일까? 아니면 속세에 속해 있을까? 그렇지만 차림새가 이상하지 않은가? 무슨 이유로 그녀는 그렇게 바삐 서두르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수치와 치욕을 감추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돈 지오반니를 뒤쫓기 위해서일까?
그녀는 서둘러 숲 쪽으로 달려갔다. 숲이 그녀를 맞아 들여 숨겨 주었으므로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만 숲의 탄식 소리만 들려 왔다.
가엾은 엘비라! 나무들은 사람들보다 훌륭하다. 사람들은 수군거리지만 나무들은 홀로 탄식하고 침묵을 지킨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속세를 택했을 때 천국을 잃어버렸고 돈 지오반니를 잃어버렸을 때 속세마저 잃어버렸다.
따라서 그녀는 돈 지오반니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피난처를 찾을 수가 없다. 오직 그와 함께 있을 때에만 절망을 멀리 물리칠 수가 있다. 내면의 목소리를 증오와 비탄의 소음으로 눌러 버려야 할까? 차라리 새로운 희망을 따라 감으로써 절망을 물리치고 싶었겠지. 그녀의 영혼 속에는 벌서 ‘역설’이 자리 잡고 있다. 증오와 탄식과 저주와 기도와 맹세가 뒤섞여서 왔다 갔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영혼은 자기가 속았다고 인정하고 주저앉을 수는 없다.
우리는 엘비라가 돈 지오반니보다 더 강하다고 가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러면 그녀는 전체적으로 변함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게 된다. 비록 울부짖고 있지만 눈물도 그녀의 눈에 깃들인 불꽃을 끄지 못했고, 비록 슬퍼하긴 하지만 원망도 아름다움의 생명력을 잠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의 뺨에 핏기는 없지만 그 표정은 활기에 차 있으며, 비록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으로 경쾌하게 미끄러지듯 달려가지는 못 하지만 여자다운 정열의 힘찬 확신을 갖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렇게 돈 지오반니와 맞선다. 그녀는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심지어 자기 영혼의 구원보다도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녀는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심지어 명예까지도 버렸지만, 그는 그녀를 속이고 버렸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증오라는 오직 하나의 정열, 그리고 복수라는 오직 하나의 생각밖에 모른다. 그녀는 어떤 도덕적인 원리를 위하여 싸우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위하여, 존경받지 못한 사랑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다. 그녀는 아내의 자리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위하여 싸운다. 이 사랑은 성실한 회개로 만족되는 사랑이 아니라 복수를 요구하는 사랑이다.
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영원한 행복마저 던져 버렸지만 만일 그것이 다시 주어진다 해도 그녀는 복수를 위하여 영원한 행복을 다시 내던질 것이다.
돈 지오반니에게는 분명 이런 여자가 가장 이상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 핀 청춘의 가장 멋지고 향기로운 체취를 들이마시는 즐거움을 알고 있다. 그는 그것이 한순간 밖에는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다음에 무엇이 오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는 그것이 너무나 빨리 시드는 것을 자주 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지금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생존의 일반적인 과정을 지배하고 있는 법칙이 깨진 것이다. 그가 유혹한 대상은 단순한 젊은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의 생명은 깨지지 않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변모하여 그전보다 더 아름다워 진 것이다. 과거에 자기를 매혹시킨 어떤 여자보다도 훨씬 더, 이전의 엘비라보다도 더 강하게 자신을 매혹시키는 게 바로 엘비라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이 순결한 수녀는 뛰어난 미모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여자들과 다름이 없었고,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은 다른 모험과 마찬가지의 모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엘비라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이 여자는, 가슴에 비수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날카로운, 보이지 않는 무기를 갖고 있다. 그 무기는 바로 그녀의 증오이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고 말이나 맹세로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돈 지오반니의 정열은 되살아난다. 그는 그녀를 다시 한 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그의 모든 유혹은 소용이 없다. 그의 목소리가 본래보다 더 상냥하고 그의 태도가 그전보다 더 교묘하다고 해도 그는 그녀를 움직일 수가 없다. 천사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고 해도, 성모 마리아가 그의 들러리를 서 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디도는 자기에게 불성실했던 아에네이스를 지옥에서까지 외면했지만 엘비라는 돈 지오반니를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디도보다도 더 냉정하게 그와 맞설 것이다.
그러나 엘비라와 돈 지오반니의 이 만남은 그저 잠깐 스쳐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무대를 가로질러서 지나가고 막이 내린다. 엘비라는 돈 지오반니를 찾아내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삶의 미로를 헤쳐 나와서 자기 자신 속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새로 사귄 그녀의 주위 사람들은 그녀의 지나간 삶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한다. 사실 겉으로는 이상한 게 전혀 없고 비애의 흔적도 밖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는 명예를 잃은 대신 인생의 많은 것을 배웠으므로 자신의 표정도 조절할 수 있게 됐다.
따라서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는 동정 따위를 피해 갈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그녀는 호기심 많고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의 가벼운 호기심을 일으키지 않고서도 세상을 살아갈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비애를 합법적으로 말썽 없이 소유한다. 이제 그녀의 마음 속에서는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슬퍼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비애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나는 그것을 ‘생계를 위한 걱정’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왜? 사람이란 빵과 물만 먹고 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 또한 영양을 섭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젊지만 자신의 삶에 필요한 양식을 벌써 다 써 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죽음의 문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날마다 내일을 위하여 근심하고 있다. 그녀는 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속이고 버렸다. 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다면 그녀는 거지 같은 신세가 될 수밖에 없고, 수치와 불명예를 안고 수녀원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으로 그녀는 살아간다. 오늘은 아직 가망이 있어서 견딜 수 있다. 하지만 내일은? 그녀가 겁내는 것은 내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그녀는 모든 가능한 탈출 방법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럴 듯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합리적으로, 편안하게 슬퍼할 수도 없다. 어떻게 슬퍼해야 좋을 것인가, 언제나 그 방법만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를 잊자. 그의 모습을 내 가슴에서 몰아내자. 모든 것을 태우는 불처럼 내 영혼 구석구석을 뒤져서 그와 관계되는 모든 생각을 태워 버리자. 그것만이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야. 이건 정당방위야. 그에 대한 생각을 모조리 몰아내지 않으면 나는 무너지고 말 거야. 그래야만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어. 나 자신이라고? 나 자신이란 무엇일까? 비참과 비탄의 덩어리일 뿐이야. 나는 새로운 사랑을 찾고 그 사람을 버림으로써 보상을 받아야 하는 걸까?”
“나는 그를 증오하리라. 그래야만 내 영혼은 만족을 찾고, 내 삶은 안정을 찾고, 내 생각은 할 일을 찾을 수 있어. 그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을 주워 모아서 저주의 화환을 엮어야지. 그가 입맞춤한 횟수만큼 ‘저주가 있으라!’고 말하리라. 그가 나를 껴안은 횟수만큼 ‘그 10배의 저주가 있으라’고 말하리라. “그가 사랑의 맹세를 한 그 만큼 나는 그에 대한 증오의 맹세를 할 거야. 그것을 나의 유일한 일로 삼아서 거기에 나 자신을 모두 바치리라.”
“나는 수녀원에서 염주를 세며 기도하는 법을 배웠지. 이제 나는 밤낮으로 기도하는 수녀가 되는 거야. 아니면 그가 한때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그가 거짓말쟁이라는 걸 지금 알았으니 나도 거만하게 그를 차 버리는 영리한 여자가 되어야 하는 걸지도 몰라. 아니, 나는 가능한 한 멀리 떠나가서 알뜰한 가정주부가 되어야 하는 건지도 몰라.”
“아니, 아니, 그를 증오하자. 그래야 그의 모습을 떨쳐 버릴 수 있고 그의 존재가 나에게 불필요하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증명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받은 게 아무 것도 없을까? 나는 혹시 지금도 그가 준 무언가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나의 증오를 끝없이 북돋워 주고 있는 것이 그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었어. 그는 여자가 무슨 일로 괴로워 하는지를 몰랐을 뿐이야. 그가 만일 그것을 알았다면 나를 버리지 않았을 거야. 그는 한 사람의 남자였고 그 사실에 만족해 했지. 하지만 그게 나한테 위로가 될까? 확실히 위로가 되는 건 사실이야. 왜냐하면 나의 이 괴로움, 고통은 내가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행복했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해 주니까.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고 해서, 남자가 행복할 때 여자만큼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남자가 불행할 때 여자만큼 불행하지 않다고 해서, 그렇다고 내가 불평할 수가 있을까?”
“그는 정말 나를 속였을까? 아니야! 그가 나한테 뭔가를 약속한 적이 있었던가? 없어! 돈 지오반니는 나의 약혼자도 아니었고 불쌍한 닭도둑도 아니었어. 그런 인간 때문에 수녀가 인생을 망친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는 나의 손을 요구하지도 않았어. 그는 그냥 자기 손을 내밀었을 뿐이고, 내가 그의 손을 잡았지. 그가 나를 바라본 순간 나는 그의 것이 되었지. 그가 팔을 벌린 순간 그의 품으로 뛰어 들어간 건 나였어. 나는 머리를 그의 가슴에 대고 모든 걸 해 줄 듯한 그의 얼굴을 올려 보았지. 그는 바로 그 얼굴로 온 세상을 정복했지만 마치 내 가슴이 그의 모든 세상인 양 그는 내게 기대어 쉬었지.”
“나는 나대로 젖먹이 아기처럼 풍요와 축복을 만끽했지. 내가 그 이상의 것을 그에게 요구할 수 있을까? 신들이 지상에 내려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었을 때 그들은 충실했었나? 하지만 아무도 신들이 여자들을 속였다고 비난하지는 않아. 왜 그럴까? 여자들은 신들의 사랑을 받은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일 거야.”
“올림푸스의 모든 신들은 나의 돈 지오반니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야! 그런데 왜 나는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걸까? 왜 나는 그를 비난해야만 할까? 왜 나는 그를 경멸할 수 밖에 없는 걸까? 아니야. 나는 그가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신들보다 위대하였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거야. 나는 스스로 무로 돌아가서 그를 우러러 보리라. 그는 나에게 속하였으므로 나는 그를 사랑할 거야. 그가 나를 버린다면 나는 그가 버리고 간 것을 마음 속에 간직할 거야”
“아니, 나는 그를 생각할 수가 없어. 그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생각이 내 마음 속 깊은 곳 그의 기억이 숨어 있는 곳으로 향할 때마다 난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몹시 불안해. 이 불안은 내가 수녀원 안에 있는 내 외로운 방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며 원장 수녀님의 경멸과 무서운 처벌, 그리고 하느님을 배반했다고 스스로 몸서리칠 때 느꼈던 바로 그 불안이야.”
“하지만 이 불안 역시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사실 그는 나랑 결혼한 것도 아니었고, 교회의 축복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우리를 위해서 종이 울리거나 찬송가가 울려 퍼진 것도 아니었어. 이 불안에 비한다면 교회의 음악과 의식은 아무 것도 아니야! 그가 나타나면 나의 불안 속에 깃들였던 부조화는 가장 축복 받은 안전한 조화로 모두 녹아들었고, 오직 달콤한 전율만이 내 영혼을 흔들었지. 그런데도 왜 나는 이 불안을 두려워하는 걸까? 이 불안은 내게 그의 추억을 불러 일으켜 주는 게 아닌가?”
“이것은 그가 오고 있다는 신호 아닌가? 만약 이 불안 없이 그를 추억한다면 그를 추억하는 게 아니야. 그가 오고 있어. 그가 조용히 하라고 하네. 그는 나에게서 그를 빼앗아 가는 정령들을 쫓아낸다. 나는 그의 것이고, 그 안에서 나는 행복하다.”
엘비라의 이미지는 바다에서 조난당했을 때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누군가를 구하려 하지만 구해 낼 수 없기 때문에, 아니, 구해 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갑판 위에 남아 있는 사람과 같다. 그녀는 바다에서 조난을 당했다. 그녀의 몰락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런 일을 모르고 있다. 그녀는 자기가 구해 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서 안절부절하고 있다.
(2001년 8월 13일)
돈지오반니를 해석하고 나름의 주장을 펼치는 건 책 낼때까지도 완전히 제 능력 밖이었습니다. “돈 조반니는 마지막 음 하나까지 격정에 젖어 있는 오페라”며, 여기서 파토스(pathos)는 고통이나 열정이나 비애가 아니라 그 뭔가가 인간을 엄습하고 있는 상태의 인간 내면”이며, “격정은 인간 스스로 지어내는 감정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하는 마성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이라는 지적에 완전히 공감합니다. 실제로 몇년이 흐르도록 이 오페라의 ‘마성’을 설명할 길 없이 거기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까요.. 위 키에르케고르 장황하게 써 놓은 건 지금 보니 부끄러워서 지워버리고 싶네요, 하하. 오랫만에 인사 남깁니다.
모차르트 생일에 방문해 주셨군요. 반갑습니다. 2년 전만 하더라도 전 세계가 떠들썩하더니 이젠 좀 조용해져서 좋네요^^ 돈지오반니를 진정 좋아하시는 분이시니 더욱 그 해석이 어렵겠지요. 이채훈 님이야 워낙에 모차르트에 정통하신 데다 그 사랑도 지극하여 누구보다도 모차르트를 말할 만한 적격자이시지만, 저는 잘 알지도 못한 채 주제 넘게 단언했던 말들이 많아 이제는 적잖이 부담이 되는군요. 이상하게도 모차르트에 관한 모든 말은 항상 주제 넘는 말이 되고 마는 것이어서 . . .
얼마 전에 고장난 시디플레이어를 대체하여 새로 기기를 들여놓았더니 계속 오디오에 손이 가는군요. 줄곧 모차르트를 듣고 있는 행복한 나날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