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년 전에 모차르트에 접근하던 시기의 일입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거의 바흐의 음악만을 끼고 살았는데, 막 바흐에게서 모차르트로 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절 저는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만한 상대를 얻지 못한 채 침묵의 시간만을 보내야 했으며, 일요일에는 언제나 기차를 타고 이름없는 한적한 곳에 내려 음악을 벗삼아 유폐된 저의 이야기를 풍경 속에 풀어 놓아야 했습니다. 어느 일요일, 예외없이 한적한 곳을 방문하여 들녘을 거닐었습니다. 들녘 한복판으로 들어서니 솟은 산이 없어 사방으로 지평선만이 저 멀리 보이고 시골 집들은 둥근 지평선을 타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하늘이 그렇게 넓게 보인 적이 없었지요. 꼭 화가 장욱진의 禪적인 시선이 그려낸 화폭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그 풍경 속에서 저는 가지고 다니던 바흐 음반 한 장과 모차르트 음반 한 장을 번갈아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흐의 음악을 들을 때는 시선이 언제나 맑고 깨끗한 하늘을 향하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때는 성냥갑처럼 다닥다닥 지상에 붙어 있는 집들과 들녘과 지평선을 향하더군요. 그 시선의 뒤바뀜은 신기하게도 음반을 바꿀 때마다 어김없이 되풀이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지상적이다? 아니지요. 바흐는 천상적이다? 역시 아니지요. 제가 배운 바로는, 진정으로 지상적인 것이 가장 천상적일 수 있습니다. 오직 천상적이기만 한 것은 지상적이지 못한 것이며, 그래서 사실 지상에 대하여 폭력적이며, 마치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방에 손님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깨끗함의 폭력”과도 같습니다. 그 폭력은 결코 천상적일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상은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 의미론적인 것이며, 불가에서 말하는 연꽃과도 같습니다. 모차르트는 지상적이다? 그렇습니다. 모차르트는 천상적이다? 역시 그렇습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바흐의 음악처럼 깨끗한 풍경을 묘사하지 않으며, 더러움과 깨끗함이 혼재된 풍경 속에서 자기가 노리는 언어를 끌어냅니다. 더럽든 깨끗하든 그 풍경은 그리하여 모차르트의 음악적 공간이 됩니다. 실제로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때는 시선이 지상을 향하다가도 어느덧 하늘을 향하기도 하는 반면, 바흐의 음악은 한사코 하늘에서 지상으로 시선을 내리기를 거부합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천상적이다 하는 표현은 그러므로 세상을 관통하면서 어느 찰나 피어오르는 정화된 선율을 음미하고자 하는 표현이며, 그 선율이야말로 말로나 실제로나 천상적입니다. 그 선율을 노리는 모차르트는 아스라히 꿈을 꾸는 인간이며, 흐릿한 꿈의 영상 속에서 살면서 질기도록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영웅입니다. 어두운 격정, 순간 아름다운 선율, 슬픔과 무서움, 느닷없는 날렵함과 가벼움 등이 혼재하는 것이야말로 모차르트 음악의 정수이며, 그 음악이 우리의 시선을 지속적으로 지상으로 향하도록 만들다가도 아연 하늘로 향하도록 만듭니다.
온통 마음을 장악하던 관현악의 총주가 멈추고 클라리넷이나 오보에가 외롭고도 단아한 선율을 긋는 패시지, 티파니를 대동하고서 무섭도록 휘몰아가던 관현타악의 총주를 사뿐하게 누르고서 피아노, 혹은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눈부신 선율로 비상하는 패시지, 주술적으로 저음부를 타격하는 첼로와 비올라를 전면에 깔고서도 날아오르는 바이올린 선율의 패시지 등에서 엿볼 수 있듯, 모차르트 음악처럼 지상과 하늘을 역동적으로 오가는 음악을 우리는 천상적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천상적인 것은 폭력적이지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은 것으로서 인간의 풍경 속에 있는 선율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 유폐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모차르트는 최대한의 수용자이면서 동시에 최대한의 분출자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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