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게도 그가 붙잡은 것은 바람일 뿐이었다”(Ovidius, Metamorphoses)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음악을 통하여 신들을 움직이며 죽음을 물리칩니다. 그리하여, 그는 영원히 놓쳐버렸던 사랑하는 존재, 숨결과 살결이 있는 여인 에우뤼디케를 음악을 통하여 가상적으로 혹은 순간적으로 다시 얻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을 물리치고 신들의 영혼을 터치하는 그러한 음악에 도달하는 길은 확실하지 않고 오직 오르페우스라는 한 인간의 구체적인 영혼과 손길에만 비의적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더 나아가, 그 절묘한 구원의 음악을 통하여 얻은 것마저 확실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그 연주가 울렸다가 사라졌다는 것이며, 그 탄현을 통하여 사랑의 실체를 어둠 속에서 얻었다가 밝음 속에서 놓쳤다는 영혼의 기억일 뿐입니다. 오르페우스는 음악을 통하여 가장 큰 환상과 가장 큰 고뇌를 동시에 겪은 것입니다. 음악은 그렇게 오르페우스에게 결국에는 갈라진 영혼을 제공했으며, 갈라진 영혼은 갈라진 인생을 그에게 선사합니다.
음악, 그것은 결코 평화가 아니라, 평화와 불화의 영원한 대결이며, 음악가는 그 대결에서 명멸하는 한 점 불꽃으로만 존재하는 희생제물입니다. 음악은 사랑하는 대상을 유보없이 사랑한 기록이며, 첫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첫사랑의 대상을 사랑하던 순간의 자신의 신비로운 감정을 영원토록 사랑하는 여인의 사랑입니다. 물론 이 사랑은 일반적인 음악가의 사례가 아닐 것이며, 다만 오르페우스 같은 신화 속의 인물만이 구현할 수 있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 누가 그 사랑의 비밀을 열 수 있을까요?: “숭고한 지성도 상상도 아니다. 이 둘이 앙상블을 이룬다 해도 천재를 만들지는 못한다. 사랑! 사랑! 사랑! 이것이 천재의 영혼을 만든다. Le vrai génie sans coeur est un non-sens. Car ni intelligence élevée, ni imagination, ni toutes deux ensemble ne font le génie. Amour ! Amour ! Amour ! Voilà l’âme du génie.”(모차르트를 방문한 야크빈의 방명록)
그 사랑이 묘비 하나 없이 무명의 무덤 속으로 사라진 모차르트라는 희생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이 광활한 어둠 속에서 점멸하는 한 점 빛을 향한 삶 전체의 투신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랑이 모차르트를 끈질기게 오해하는 저명한 음악가들을 계속하여 양산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이 당신과 나를 갈라서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은 당신과 내가 모두 그리워하고 숭고하게 여기는, 그러나 험난한 역경의 사랑입니다. 어쩌면 나는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나의 감정을 사랑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 감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차르트의 확장, 모차르트라는 존재의 증대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존재의 증대를 낳습니다.
오르페우스의 사랑은 구원의 음악을 낳았고, 그 구원의 음악은 사랑의 환상을 선사하였고, 사랑의 환상은 다름아닌 어둠 속에서는 실체요 밝음 속에서는 가상인 것이며, 계속하여 지연되는 실체와 가상의 일치, 즉 계속하여 이루어지는 실체와 가상의 불일치가 천재의 영혼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천재의 영혼이 나를, 그를 사랑하는 나를, 그를 사랑하는 나의 감정을 사랑하는 나를, 그의 영혼의 증대를 낳았습니다. 이 영혼의 증대로 하여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네고, 어둠 속 실체를 향하여 굳건하게 시위를 당겨 살을 쏩니다,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쏘는 화살을”.
고싱가숲님, 11월 말에 제가 쓴 모차르트에 대한 책이 출판될 예정인데
책 내용 중에 고싱가숲님의 이 글 중 한 대목을 인용했으면 합니다.
” 사랑이 묘비 하나 없이 무명의 무덤 속으로 사라진 모차르트라는 희생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이 광활한 어둠 속에서 점멸하는 한 점 빛을 향한 삶 전체의 투신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랑이 모차르트를 끈질기게 오해하는 저명한 음악가들을 계속하여 양산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이 당신과 나를 갈라서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은 당신과 내가 모두 그리워하고 숭고하게 여기는, 그러나 험난한 역경의 사랑입니다. 어쩌면 나는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나의 감정을 사랑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 감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차르트의 확장, 모차르트라는 존재의 증대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존재의 증대를 낳습니다.”
출전과 필자명을 밝히고 인용하면 될까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책 출판 축하드립니다. 우리나라에서 모차르트에 관한 책을 처음 쓴 저자로 기록될 듯하군요. 이채훈 님의 책으로 하여, 우리나라 음악애호가들의 모차르트에 대한 이해도가 한층 성숙되길 기대해 봅니다.
인용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깊은 사색의 결과로 쓰신 좋은 글들 사이에 저의 미흡한 글을 실어도 좋을지 두렵지만, 인용한 맥락을 보여드리기 위해 여기 일단 관련 글을 올려 봅니다. 다큐멘터리 제작 뒷얘기 중의 하나입니다. 실제로 다큐멘터리의 방향을 잡는데 중요한 통찰을 고싱가숲님의 이 글에서 얻었기 때문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인용했다는 점, 널리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채훈 올림
사랑 – 천재를 이해하는 키워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불가사의한 천재 모차르트의 비밀은 무엇일까? 다큐멘터리를 기획할 때부터 완성할 때까지 이 물음에 답하기가 어려웠다. 모차르트의 수많은 음악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특성을 어떻게 말과 영상으로 전달할 것일까? 쉽고 단순하면서도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 음악의 비밀은 무엇일까? 모차르트는 어떤 인간이기 때문에 이러한 음악을 수없이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아침에 눈을 떠도 같은 질문, 밤에 누워서 전전반측하면서 또 같은 질문…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내 그의 음악이 다시 마음을 채우게 되면, 사랑스런 선율들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프로그램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밀려오곤 했다. 한 편 당 10여곡을 선곡해서 배치하고 구성을 해야 하는데, 어떤 곡이 모차르트의 에센스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모차르트 음악을 잘 이해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정작 말로 표현하려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낭패감이 엄습했다.
천재를 만드는 요소는?
모차르트의 서간집을 아무리 읽어도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모차르트를 알기 위한 가장 중요한 1차 자료인 편지는 아버지 레오폴트와 주고받은 것이 제일 많고, 누나 난네를(마리아 안나 모차르트의 애칭), 아내 콘스탄체, 그 밖의 친구 몇 명과 주고받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올해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6권짜리 전집으로 나온 방대한 분량의 이 편지들에도 ‘모차르트 음악의 본질’을 직접 정리해서 설명한 구절은 없다. 모차르트가 여행 중 보고 느낀 것, 만난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주된 내용이다. 음악에 대한 언급은 모두 단편적인데다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에 치밀하게 분석하며 읽어야만 모차르트 음악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고귀한 것은 원래 ‘언어’로 표현이 잘 안 된다는 점이었다. 취재를 거의 마칠 무렵, 모차르트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를 찾아서 하염없이 문헌을 뒤지다가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 만난 일이 있는 열렬한 모차르트 애호가 김OO님의 홈페이지(http://www.gosinga.net/)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가슴이 없는 천재라는 것은 넌센스다. 천재란 위대한 지성이나 탁월한 상상력, 심지어 이 두 가지를 합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천재를 만드는 것은 오직 사랑, 사랑, 사랑뿐이다.”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 글의 출전을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 모차르트의 어떤 편지에도 이 구절은 없었다. 김OO님께 전화로 문의했으나 확인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급한 김에 ‘모차르트 머슴’을 자처하는 이종윤 선생님께 전화로 문의했다. 원양어선 선장 출신인 이 선생님은 공자의 음악철학이 루소의 계몽사상을 거쳐 모차르트 음악까지 연결되는 기나긴 관계를 추적함으로써 모차르트의 휴머니즘과 진보성을 설명하려고 하는 독특한 입장을 갖고 계시다. 국내에서는 어떤 전문가 이상으로 모차르트 문헌을 깊이 있게 연구한 분이기도 하다. “한번 확인해 보겠다”고 하신 뒤 한 시간이 안 돼서 전화가 왔다. “그건 모차르트가 쓴 편지가 아니라, 1787년 4월 11일 모차르트의 집을 방문한 친구 고트프리트 야크빈*이 방명록에 써 넣은 말”이라는 것이었다.
* 고트프리트 폰 야크빈 : 빈 시절 모차르트의 가장 절친한 친구 중 한 명. 모차르트는 프라하에서 그에게 가장 많은 편지를 썼다. 그의 누이동생 프란치스카는 모차르트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피아노, 클라리넷, 비올라를 위한 트리오 K.498 ‘케겔슈타트‘와 네 손을 위한 소나타 C장조 K.521은 야크빈 남매를 위해 쓴 곡이다.
모차르트는 ‘마음’의 인간이었다
야크빈이 어떤 이유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이 모차르트의 본질을 묘사하기 위해서 한 말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모차르트와 절친했던 사람이 가까이서 본 모차르트의 본질을 한 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한 말이었다. 그는 모차르트를 ‘마음의 인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은 모차르트에 대한 다양한 편견과 오해를 씻어주는 말이기도 했다. 그 동안 보아 온 문헌들은 모차르트의 불가사의한 천재의 이미지에 집착하다 보니, 그를 외계인으로 묘사하거나 버릇없는 악동으로 간주하는 등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 결과 모차르트가 ‘마음’을 가진 인간이었다는 자명한 진실을 간과하는 오류를 되풀이해 온 것이다. 그래, 피와 살의 인간 모차르트에 주목해야 한다!
천재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내게 죽음이란 더 이상 모차르트를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차르트가 ‘마음’의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베토벤 이래 수많은 위대한 음악가들이 모차르트를 찬탄했다. 쇼팽은 죽기 직전 친구들에게 피아노를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친구들이 쇼팽 자신의 곡을 연주하려고 하자 “아니, 그보다 더 좋은 것, 모차르트…”라고 말했다. 말러도 죽기 직전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모차르트…” 를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드보르작은 뉴욕에서 강의하다가 “모차르트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학생들이 답을 하지 못하자 창문을 열며 “모차르트는 빛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이 모든 위대한 음악가들은 모차르트가 ‘마음’의 인간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연주 스타일에서도 ‘느낌’을 강조
모차르트의 연주 스타일도 그가 ‘마음’의 인간이었음을 뒷받침한다. 그는 훌륭한 연주자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기교’보다는 ‘감정’(feeling)과 ‘세련된 감성’(taste)을 중요시했다. 그가 당대의 명 피아니스트 무치오 클레멘티와 실력을 겨루 직후 내린 평가. “클레멘티의 테크닉은 탁월하다. 특히 3도와 6도 처리는 완벽하다. 하지만 그의 연주에는 ‘감정’이 없다. 그는 ‘기계처럼’ 연주한다.” 반면 이탈리아의 여류 바이올리니스트 레지나 스트리나자키를 평가하면서 “그녀의 연주는 정말 훌륭하다. 그녀의 연주에는 ‘느낌’이 풍부하고 ‘세련된 감성’이 있다.”고 했다. 모차르트 자신이 음악에서 ‘감정’을 중요시했다는 증거다.
늘 사랑에 목말랐던 모차르트
모차르트가 늘 사랑에 목말라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연주하기 전에 앞에 있는 사람에게 늘 “저를 사랑하세요?”라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있어야만 행복한 마음으로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친지 한 사람이 장난으로 “아니”라고 대답하자 어린 모차르트는 눈물을 글썽인 적도 있다. 6살 때 빈의 쇤부른궁에서 연주할 때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무릎 위에 앉아서 뽀뽀해 달라고 한 일, 궁전의 로비에서 미끄러져 넘어졌을 때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가 일으켜 세워주자 즉시 “결혼하자”고 한 일 등 유명한 일화도 어린 모차르트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런 특성은 35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모차르트는 나이가 들어도 어린이와 같은 단순명료하고 천진한 마음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는 늘 “사랑하는 아버님께 천 번의 입맞춤을 보냅니다”라고 끝맺는다. 아내 콘스탄체에게 보낸 편지는 “100만 번, 10억 번의 입맞춤”도 나온다.
그렇다면 친구 야크빈이 지적한 바 ‘천재 모차르트’의 본질인 ‘사랑’은 무엇일까? ‘탁월한 지성’과 ‘상상력’을 가진 수많은 음악가 중에서 모차르트를 단연 돋보이게 하는 ‘사랑’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또한 한 마디로 대답하기가 곤란한 물음이다. 모차르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랑’의 범위는 순진한 어린이의 사랑부터 다양한 연애 감정을 거쳐 돈 지오반니의 에로틱한 열광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다. 프리메이슨과 관련된 노래에서는 형제애나 인류애를 노래하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거룩한’ 사랑은 아니다. ‘사랑’을 얘기할 때 우리가 만나는 모차르트는 ‘소탈한 인간’일 뿐이다.
어린이의 천진한 사랑
그 ‘사랑’의 성격을 훑어보려면 가사가 드러나 있는 가곡과 오페라에서 출발하는 것이 손쉬울 것이다. 물론 가곡의 노랫말은 모차르트가 만든 게 아니지만, 모차르트가 충분히 공감했으므로 곡을 붙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 오페라 아리아의 가사 또한 모차르트가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지 않았으면 작곡을 안 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모차르트는 대본을 고를 때 매우 까다로웠을 뿐 아니라 – 1783년 5월의 편지를 보면 “대본을 100편, 아니 그 이상 보았지만 만족할 만한 것은 단 한 편도 찾을 수 없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 직접 대본 작성 에 참여했다고 한다. 우선 모차르트가 죽던 해 1월에 쓴 동요 K.596의 가사를 보자.
봄을 기다림
(1절)
아름다운 5월아,
다시 돌아와 수풀을 푸르게 해 주렴.
시냇가에 나가서 작은
제비꽃 피는 걸 보게 해 주렴.
얼마나 제비꽃을 다시 보고 싶었는지!
아름다운 5월아,
얼마나 다시 산책을 나가고 싶었는지!
(중략, 4절)
무엇보다도 로트헨이
마음 아픈 게 나는 제일 슬퍼.
불쌍한 이 소녀는 꽃이 필 날만 기다리고 있지.
나는 걔가 심심해 하지 말라고
장난감을 갖다 줬지만 소용이 없어.
걔는 알을 품은 암탉처럼
조그만 자기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지.
(5절)
아, 바깥이 조금만 더 따뜻하고 푸르렀으면!
아름다운 오월아, 우리 어린이들에게
어서 와 주길 간절히 기도할께.
누구보다도 우리들에게 먼저 와 주렴.
제비꽃이 많이많이 피게 해 주고
나이팅게일도 많이 데리고 오렴.
예쁜 뻐꾸기도 데리고 오렴.
몸이 아픈 이웃 소녀 로트헨을 위해서 봄이 빨리 와 주기를 바라는 어린이의 마음, 이것도 사랑이다. 모차르트가 35년 내내 언제나 마음 한편에 어린이와 같은 착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상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에로틱한 사랑
에로틱한 욕구에 처음 눈뜬 사춘기 소년의 들뜬 사랑은 <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시동 케루비노에서 볼 수 있다. 모든 여자에게 사랑을 느끼는 ‘꼬마 바람둥이’ 케루비노는 백작부인 주변을 맴돌다가 발각되어 한 바탕 혼이 난 뒤 결국 하녀 바르바리나와 한 쌍이 된다. 케루비노의 1막 아리아 ‘내가 누군지 나도 모르겠네’(Non so piu cosa son).
내가 누군지, 내가 뭘 하는지, 나도 모르겠네.
처음엔 불타오르고, 다음 순간엔 얼어붙고,
모든 여자들이 내 색깔을 바꾸고,
모든 여자들이 나를 떨게 하네.
‘사랑’과 ‘즐거움’, 말만 들어도
난 혼란에 빠지고 가슴이 뛰네.
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네.
난 깨어있을 때도 사랑을 말하고
꿈꿀 때도 사랑을 말하네.
냇물에게, 그림자에게, 산에게,
꽃에게, 풀에게, 샘물에게,
메아리에게, 공기에게, 바람에게…
내 목소리가 허공에 사라져 버리고,
내 말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면
난 혼자서 사랑을 얘기할 거야!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심취했던 덴마크의 사상가 쇠얀 키어케고어는 케루비노를 한 명의 개별적인 출연자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케루비노의 성격을 표현할 때 모차르트 음악은 “사랑에 취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케루비노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모차르트 음악의 본질을 이해하는 열쇠가 이 대목에 있다는 뜻이다.
< 피가로의 결혼>에서 사춘기 소년 케루비노는 장년의 귀족 돈 지오반니로 변한다. 채워질 줄 모르는 에로틱한 욕구의 화신 돈 지오반니는 사회 규범 및 윤리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오페라에서 그는 실패를 거듭한다. 돈나 안나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하는데, 소음을 듣고 나타난 그녀의 아버지 기사장을 결투 끝에 살해하게 된다. 그가 ‘냄새’를 맡고 접근한 여자는 알고 보니 얼마 전 그가 버린 돈나 엘비라였다. 황급히 자리를 피한 돈 지오반니는 시골 결혼식장에서 새 신부 체를리나를 유혹하지만 일이 꼬여서 또 실패한다. 그는 자기의 정체를 파악한 돈나 안나와 약혼자 돈 오타비오, 체를리나와 신랑 마제토, 돈나 엘비라의 추적을 받는다. 돈 지오반니의 실패의 연속, 불길한 복수의 그림자는 이 오페라에 비극적 긴장을 더해 준다. 극이 진행되면서 돈 지오반니의 ‘악행’은 점점 더 심해진다. 돈나 엘비라의 하녀를 유혹하기 위해 하인 레포렐로를 자기로 변장시켜서 돈나 엘비라를 속이는가 하면, ‘선남선녀들’에게 쫓기는 와중에 레포렐로의 아내를 건드리기도 한다. 자기 영혼을 구하려고 파티장에 찾아온 돈나 엘비라를 모욕해서 쫓아내는 대목에서 그의 악행은 절정에 이른다. 바로 그 뒤 기사장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돈 지오반니는 상식과 도덕의 벽에 부딪쳐 결국 지옥의 불 속으로 떨어지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이 오페라에 모차르트의 ‘자전적 요소‘가 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것이다. 돈 지오반니는 여자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데에는 천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체를리나를 유혹하기 위해 돈과 지위를 이용했다. 그의 유혹 앞에서 망설이던 체를리나는 ‘네 신분을 바꿔 줄께’라는 말에 결국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폭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1막 첫 장에서 돈나 안나의 아버지 기사장을 찔러 죽이는가 하면, 1막 피날레에서는 무대 뒤에서 체를리나를 강간하려고 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모차르트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1막 피날레에서 돈 지오반니의 선창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유, 만만세’ (Viva la liberta!)를 노래했다고 해서 모차르트 자신이 방종을 예찬했다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돈 지오반니의 캐릭터를 잘 이해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돈나 엘비라, 돈나 안나, 체를리나 등 상대 여성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화하는 자유분방한 음악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희대의 바람둥이를 잘 이해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프라하에서 연애의 천재 카사노바와 마음 잘 통하는 친구로 어울렸다고 한다.
여자의 마음을 고귀하게 생각했다
모차르트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직관의 천재였다. <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부인과 수잔나, < 돈 지오반니>의 돈나 엘비라와 체를리나, < 코지 판 투테>의 피오르딜리지와 도라벨라가 노래하는 대목을 들으면 언제나 모차르트가 여성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모차르트의 여성관은 오페라의 다양한 여성 등장인물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모차르트 오페라 중 가장 숭고한 느낌을 주는 노래는 언제나 여자가 부른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은 중 3막 백작부인의 아리아 ‘아름다운 날은 가고’(Dove sono), 2막 돈나 엘비라의 아리아 ‘은혜를 모르는 이 사람은 나를 속였지만(Mi tradi quel’alma ingrata), 의 2막 피오르딜리지의 아리아 ‘내 사랑, 부디 용서해 주세요'(Per pieta, ben mio, perdona) 등을 들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는 의연함이 모차르트의 특징이다. 실제로 모차르트는 17살의 소프라노 알로이지아 베버를 열렬히 사랑했다. 모차르트가 그녀에게 성악 레슨을 해 주고, 이탈리아로 데리고 가서 화려한 성공의 길을 열어 줄 궁리를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모차르트는 불행한 파리 여행을 마치고 9개월 만에 다시 그녀를 만나지만 그녀는 모차르트를 ‘전혀 모르는 사람’ 대하듯 했다. 니센*의 전기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피아노 앞에 앉아 ‘눈물이 가득한’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이 아가씨를 기꺼이 떠날 것’이라고. 이 노래는 전해지지 않지만, 사랑의 아픔에 직면한 모차르트의 태도를 보여준다. 미련 때문에 머뭇거리지 않은 것이다. 물론 마음의 상처가 컸고, 사촌누이 베슬레*의 위로가 필요했지만 말이다. 알로이지아는 모차르트가 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한 뒤에도 빈에서 오페라 에 출연했고 에서 돈나 안나 역을 맡았다. 음악 동료로서 최소한의 우정을 지속시켰던 것이다.
*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니센 : 모차르트 사후인 1793년 덴마크 공사관 서기로 빈에 부임한 뒤 1809년 콘스탄체와 결혼했고, 1828년 모차르트에 대한 최초의 전기를 썼다.
* 베슬레 : 마리아 안나 테클라의 애칭. 알로이지아와 사랑에 빠지기 직전에 모차르트는 두 살 연하의 이 사촌누이와 절친하게 지냈다. 그녀와 주고받은 편지는 진솔하고 ‘지저분한’ 농담과 말장난으로 가득하다.
통속적인 연애감정
물론 지극히 평범한 질투나 ‘뾰로퉁’한 태도를 보여주는 노래도 있다. 통속적인 연애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구애’, ‘행복’, ‘애교’, ‘투정’, ‘이별’, ‘아픔’ 등 모든 측면에 대해 노래를 만들었으니 모차르트는 모든 차원의 연애 감정을 다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별의 노래’ K.,519 하나만 보고 넘어 가자. 마음이 변한 연인에게 투정하며 떼를 쓰고 있다. 다소 유치하지만 진솔하다.
이별의 노래
(작사 클라머 에버하르트 칼 슈미트)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어질 땐 하늘의 천사들도 눈물짓네!
소녀여, 너 없이 어떻게 내가 살아갈 수 있겠니?
모든 기쁨을 빼앗긴 채 고통 속에서 살아야겠지!
너는? 루이자는 아마 나를 영원히 잊어버릴 거야!
오랜 세월 쌓아 온 사랑도 망각 앞에선 순식간에 사라지네!
마음은 손바닥 뒤집듯 한 순간에 변하고 말지!
새 사람들이 네게 구애하며 나를 밀어내고 나면
오 하느님, 루이자는 아마 나를 영원히 잊고 말 거야!
아, 어떻게 말 한 마디, 눈물 한 방울 없이 헤어질 수 있니?
내 마음은 길길이 뛰며 너를 유령처럼 쫓아다닐 거야.
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네가 만약 나를 잊어버린다면,
나는 하느님도 잊고, 너도 잊어버릴 거야!
아, 우리가 헤어진다고 생각해 봐! 너와 내 입술에 남아 있는
입맞춤의 흔적이 우리의 기념비가 되겠지!
난 유령이 돼서 이 입맞춤의 흔적을 네게 가져가서
루이자가 나를 잊었다는 걸 깨우쳐 줄 거야!
사랑으로 삶을 긍정한다
모차르트에서 삶을 긍정하게 해 주는 요소는 바로 ‘사랑’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다. < 피가로의 결혼>3막 백작부인의 아리아 ‘아름다운 날은 가고’는 슬픔에 잠긴 전반부가 끝나고 사랑에 대한 확신을 노래하는 후반부에서 비로소 힘있게 삶을 긍정한다. < 돈 지오반니> 2막 돈 오타비오의 아리아 ‘나의 안나를 위하여’도 그렇고, < 마술피리> 1막 밤의 여왕의 아리아 ‘오, 떨지 마라, 나의 아들아’도 그렇고, < 티토 왕의 자비> 1막 세스토의 아리아 ‘나는 떠나지만’도 그렇다. 모차르트의 음악 가운데 가장 열렬히 삶을 긍정하는 대목들이다.
이러한 대목에서 어떤 사람들은 잃었던 삶의 활력소를 되찾기도 한다. 브뤼셀에서 만난 작가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불어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그는 요즘도 모차르트에게 편지를 쓴다. 자살을 생각하던 사춘기의 그에게 삶을 되돌려준 것은 모차르트의 음악이었다. “15살 때였습니다. 갑자기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 친구들, 학업, 진로 등 모든 것이 덧없이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죽어갈 뿐’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저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렸고, 자살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오페라 공연을 보러 가게 됐어요.” 이었다.
“갑자기 어떤 뚱뚱하고, 우둔해 보이고, 쑥스러워 하는 여자 한명이 무대 위로 올라왔습니다. 친구들은 킥킥대며 그 여자를 비웃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전 지겨워서 웃지도 않았어요. 그냥 아무 관심이 없을 뿐이었지요. 그런데 그 분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3막에 나오는 백작부인의 아리아 ‘아름다운 날은 가고'(Dove sono)였다.
달콤했던 행복의 순간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거짓 입술로 속삭인 엄숙한 맹세들은 다 어디로 갔나?
모든 게 눈물과 아픔으로 변해 버린 지금,
왜 나는 그 축복의 순간들은 떠올리는 걸까?
이 무정한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은
모든 고통을 이겨낸 나의 사랑,
오직, 나의 변함없는 믿음에서 나올 뿐.
모차르트는 삶의 지혜를 준다
훗날 에릭은 그 날을 회상하며 모차르트에게 편지를 썼다. “문득 시간이 멈춰 버렸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여자가 부르는 노래에 매혹된 채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음악을 통해 우리는 사랑을 나눴습니다. 힘이 솟아올랐습니다. 삶의 기쁨이 되살아났습니다.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해 준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인 이상, 절대 떠날 생각이 들지 않을 테니까요. 절망이여 안녕, 우울증도 안녕!”
그 후에도 에릭의 편지는 계속 이어졌다.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졌을 때, 에이즈로 친구를 잃었을 때, 크고 작은 고비마다 모차르트에게 편지를 썼고, 그때마다 모차르트는 음악으로 답장을 보내왔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나에게 음악 이상을 줍니다. 삶의 지혜를 줍니다. 제가 모차르트라고 부르는 것은 모차르트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 즐거운 것, 아름다운 것, 삶을 소중하게 만들어 주는 그 모든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니체 철학과 모차르트 음악에 열광적으로 심취해 있는 한국의 김00씨는 자칫 잡다한 설명에 그치기 쉬운 이 ‘사랑’이 한 마디로 ‘인간 존재를 확장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 사랑이 묘비 하나 없이 무명의 무덤 속으로 사라진 모차르트라는 희생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이 광활한 어둠 속에서 점멸하는 한 점 빛을 향한 삶 전체의 투신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랑이 모차르트를 끈질기게 오해하는 저명한 음악가들을 계속하여 양산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이 당신과 나를 갈라서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은 당신과 내가 모두 그리워하고 숭고하게 여기는, 그러나 험난한 역경의 사랑입니다. 어쩌면 나는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나의 감정을 사랑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 감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차르트의 확장, 모차르트라는 존재의 증대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존재의 증대를 낳습니다.”
– 김00, < 오르페우스의 신화—천재의 영혼에 대한 기록> 중에서
http://www.gosinga.net/archives/95
< 마술피리>의 수수께끼
‘존재의 확장을 낳는’ 모차르트의 사랑, 그것은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키고 삶을 긍정하게 만드는 음악의 위대한 힘과 동의어일 터다. 이 음악의 힘에 대한 모차르트의 신념이 직접적으로 표현된 작품은 그의 마지막 오페라 < 마술피리>일 것이다. 평생 오페라 < 마술피리>에서 마르지 않는 즐거움의 샘물을 마시며 살아 온 사람이 있다. 잘츠부르크 마리오네트 극장에서 50년 동안 인형과 함께 살아온 아이혀 그레틀 여사. 극장 앞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은 기묘하게도 1막에 나오는 파파게노와 파미나의 첫 만남을 연상케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면서 처음 보자마자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예찬하는 2중창을 부르는 것이다. PD와 그레틀 여사는 한 번도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지만 서로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마치 오래 전부터 친했던 사람들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즐겁게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레틀 여사는 파파게노, 파파게나, 타미노, 파미나, 밤의 여왕, 자라스트로 등 < 마술피리>에 출연하는 인형들이 살아 있는 사람인 것처럼 일일이 인사를 했다. “파파게노, 나는 새잡이..” “파파게나, 오늘밤에 파파게노를 만날 거지?” 1년에 어림잡아 평균 100회, 50년 동안 5,000회 가량 < 마술피리>를 공연해 온 그레틀 여사. “놀라운 건, 이 음악은 하루에 3~4번 들어도 매번 새롭다는 거에요. 들을 때마다 재미있어요! 상상이 되세요? 저는 를 5,000번도 넘게 들었어요. 그런데도 저는 오늘 또 이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 기뻐요. 이건 기적입니다.”
음악과 사랑은 동의어다
결혼을 하지 않아서 자녀가 없는 그에게 인형들은 친자식과 같은 존재였다. 우문을 던져 보았다. “인형과 모차르트 중 어느 게 더 소중한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레틀 여사가 빙긋 웃으며 대답한다. “모차르트요.” “왜 그렇죠?” 다시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레틀 여사의 답변. “인형들은 모차르트가 없으면 생명을 잃지만 모차르트 음악은 인형 없어도 살아 있으니까요.”
다음은 파파게노와 파미나의 이중창 ‘사랑을 느끼는 남자에게는’(Bei Maennern welche Liebe fuehlen)의 가사.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데도 만나자 마자 자연스레 한 마음으로 사랑을 예찬한다. 모차르트가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부를 수 있는 노래다.
“사랑을 느끼는 남자는 마음이 선량하죠.
달콤한 충동을 함께 느끼는 것은 아내의 첫 번째 의무.
우리는 사랑을 원하고 오직 사랑으로만 살고 싶죠.
사랑은 우리 삶에 생기를 주죠.
사랑은 우리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
사랑의 높은 목표는 분명해요.
아내와 남편만큼 고귀한 것은 없다는 것.
남편과 아내가 하나 되면 신의 경지죠.”
< 마술피리>는 모차르트의 음악적 이상이 표면에 드러나 있는 유일한 오페라다. 파미나와 타미노가 마술피리의 힘으로 불과 물의 시련을 이겨낸다. 1막에서는 타미노가 마술피리를 불자 사나운 짐승들이 흥겨워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파파게노가 종을 울리자 악당들이 착한 사람으로 바뀐다. 이 세상에 모든 희망이 사라져도 음악만을 붙들고자 했던 모차르트의 마지막 이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오페라 역시 사랑 이야기다. ‘만나기도 전부터 서로 사랑하게 된’ 왕자 타미노와 공주 파미나는 여러 시험의 관문을 뚫고 자라스트로의 사원에 들어가서 결혼하게 된다. 이들의 사랑은 온갖 시련을 통해 단련됐다. 자연의 아들 파파게노도 좌충우돌 끝에 파파게나와 결합하여 수많은 자식들을 낳게 된다. 이 오페라에서 모차르트는 음악과 사랑이 결국 하나라는 결론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레틀 여사에게 이 음악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사랑은 기악곡에도 들어있다
가사가 드러나 있는 오페라나 가곡을 짚어보고 나서 기악곡을 들으면 ‘가사 없는’ 음악 역시 사랑을 담고 있다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클라리넷 협주곡이 사랑하는 세상과 이별하는 투명한 슬픔을 담고 있다는 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더 많은 예를 드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기악곡이든 성악곡이든 모차르트 음악에 드러난 ‘사랑’의 파노라마를 묘사하는 데만도 책 한권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결론. 모차르트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는 ‘사랑’이고, 이 점을 잘 얘기하는 게 프로그램의 요체였다.
아, 너무 멋집니다. 모차르트를 사랑하여 그에게 쉬지 않고 육박하는 호흡이 느껴집니다. 내용의 템포가 독자를 압도하는군요.
꺽쇠기호(<와 >)를 직접 쓰면 이 블로그에서는 꺽쇠기호 안의 내용이 자동 삭제되어, 제 추측으로 이채훈 님의 글에서 삭제된 부분을 되살렸습니다. 대부분 모차르트 오페라 제목이니까 복원된 꺽쇠기호 안의 내용이 틀릴 가능성은 적겠지요?
그리고, 인용한 한 대목이 “야크빈”의 방명록이었군요. 저는 그것을 «하느님은 음악이시다»(링엔바흐, 분도출판사)에서 처음 보았어요. 모차르트의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출전이 분명치 않아서 의심스럽긴 했지요. 이제 그것이 밝혀졌군요. 감사합니다. 제 글도 수정해야겠습니다.
고싱가님, 책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 출판기념회를 갖습니다.
바쁘시지만 오셔서 함께 자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책에 인용된 고싱가님의 글이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때 : 12월 29일(금) 저녁 7시
곳 : 카페 ‘키작은 자유인’
위치 : 홍대앞 산울림소극장 맞은편 골목 20미터 들어오시면 왼쪽 2층
(2호선 홍대역 5번 출구 또는 6호선 상수역 홍대방향 출구)
이채훈 님,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라는 제목이 참 좋네요.